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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사랑하시니

신명기 10: 12~22

김경래 목사

2023.07.23

<약속의 땅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요구’, 요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조금 더 나아가 ‘요구당함’이라는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경우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당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만약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요구당한다면, 그것은 매우 싫은 일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결국은 유익한 일이라고 해도 요구당한다면 하기가 싫어집니다. 아니,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결국 나에게 유익한 일이기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조차 요구당한다면 짜증이 나고, 하기가 싫어집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학교 숙제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재미없는 숙제를 하는 것은 매우 싫은 일이었습니다. 숙제가 저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때에도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귀찮음을 겨우 극복하고 미뤄 둔 숙제를 막 시작할 때, 어머니가 숙제 안 하냐고 채근하시면 짜증이 나서 하려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공감하시는 분들이 없는 표정입니다. 아마도 1부 예배는 저와는 달리 학창 시절부터 모범생인 분들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요구당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시작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신다고 합니다. 주일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그리고 이 한 주를 예배로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나왔는데 참으로 부담스러운 시작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보면 사실 은혜가 가득한 본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는 본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본문 말씀 12~1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도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줄이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요구를 하실까요? 13절을 보니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요구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토브’는 ‘좋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쓰인 단어가 토브입니다. 어쩌면 그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일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작은 이익과 순간의 쾌락을 쫓아봐야 헛될 뿐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헛된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 즉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15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민 중에서 택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선택하시고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삶을 살라는 것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분명 영광스런 일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특별한 임무를 주시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기대를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면, 특별하게 불러 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맡겨 주신 특별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요약하자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며 그것을 지키면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반대로 계명에 불순종하면 즉 범죄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혹시나 율법의 실천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명은 출애굽 즉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후에 주신 것임을 생각하면, 공로와 상관없는 구원의 은혜가 선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세에는 가톨릭교회가 재정을 쌓기 위해 공로 개념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선한 행위나 율법의 실천보다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더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이웃 사랑보다는 하나님 사랑을 조금 더 강조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예배드리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예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은 13장 34절에서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의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웃 사랑입니다. 18~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8~19)

 

어려운 이웃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그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부담스럽고 구원의 조건이 아닐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사는 일이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내 시간을 쓰고, 내 에너지를 쓰고, 내 물질을 쓰고,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정말로 자기희생적인 자세가 필요하죠. 그것은 내가 손해만 보고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이웃 사랑을 통해 우리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을 믿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잠언 19장 17절에서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웃 사랑의 실천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 주시는,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는, low risk high return의 투자입니다. 사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low risk도 아니지요, risk free입니다.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투자입니다. 사랑의 나눔을 통해 얻는 기쁨은 덤으로 주어지는 큰 보상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처음에는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랑을 서로 나눌 때 결국은 공동체 전체가 더 풍요로워집니다. 그 안에 사는 우리도 이전보다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큰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누리다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좋아는 하지만 경외하지는 않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면 참 좋은데, “손자를 예뻐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당긴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큰 사랑을 받고 교만해져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나님, 나에게 잘해 주시는 하나님을 좋아는 하지만 경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유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유아들은 부모를 좋아하지만 그 좋은 이유가 자기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작 부모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가 생길 때마다 받아내고자 떼를 쓰기만 합니다. 사랑은 사랑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이 유아적인 사랑으로부터 연결되는 한 가지 이유를 더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미성숙하고 온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이미 다 경험해 보셨지요?

또 사랑이 너무 커서 숭배에 이르면 그 대상이 나를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그 대상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이 큰 기쁨이 됩니다. 연예인을 지극히 사랑하다 못해 숭배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서 이러한 영광스러움과 기쁨을 경험해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 사랑을 할 때에는 율법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불순종으로 받을 저주를 두려워하거나 순종으로 얻을 보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는 헌신과 희생이 곧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 됩니다. 나의 욕망과 의무가 전에는 충돌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의 거룩한 열망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내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너머에 예비된 그분의 크신 사랑을 볼 수 있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 후에도 다시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며 기쁨도 맛보지만, 또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며 말씀하신 바를 다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지만, 어느새 지쳐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 실천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고서도 계명과 충돌하는 욕망에 다시 무너지기도 합니다. 끝없는 열정으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생존 본능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에 빠지고 자책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율법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낙심하고 자기 비하에 빠집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셔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계명을 주신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우리의 실패를 이미 전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신명기 가운데 3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신 30:1)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쫓겨갈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후 속구절에서는 그때 회개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30장 6절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6)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0장 16절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분명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셨는데, 30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할례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용어로 쉽게 말하면 포경 수술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마음에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할례라는 상징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할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아집과 욕망을 꺾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 여호수아 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앞두고 길갈에서 할례를 받을 때에 이런 각오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마취제도 항생제도 제대로 없었기에 할례로 인한 고통은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4장은 디나를 강간했던 세겜과 그 성읍 사람들이 할례를 통해 전투력이 떨어졌을 때, 시므온과 레위 두 사람이 성읍 전체를 진멸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철옹성 여리고 정벌을 앞두고 할례를 받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할례를 마음에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연약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로서는 계명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복된 일인지 알면서도 온전하게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이유는 그 계명대로 살아내지 못한다고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이미 아시는데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음의 할례를 직접 해 주시기로 처음부터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실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아셨지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연약함까지 품으시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집도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힘입어, 예수님의 도를 따라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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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0: 12~22

12~22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21 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 눈으로 본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 애굽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약속의 땅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집니다.>

 

‘요구’, 요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조금 더 나아가 ‘요구당함’이라는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경우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당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만약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요구당한다면, 그것은 매우 싫은 일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결국은 유익한 일이라고 해도 요구당한다면 하기가 싫어집니다. 아니,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결국 나에게 유익한 일이기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조차 요구당한다면 짜증이 나고, 하기가 싫어집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때, 학교 숙제를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재미없는 숙제를 하는 것은 매우 싫은 일이었습니다. 숙제가 저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이해한 때에도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귀찮음을 겨우 극복하고 미뤄 둔 숙제를 막 시작할 때, 어머니가 숙제 안 하냐고 채근하시면 짜증이 나서 하려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공감하시는 분들이 없는 표정입니다. 아마도 1부 예배는 저와는 달리 학창 시절부터 모범생인 분들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요구당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시작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신다고 합니다. 주일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그리고 이 한 주를 예배로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나왔는데 참으로 부담스러운 시작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보면 사실 은혜가 가득한 본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는 본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본문 말씀 12~1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도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줄이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요구를 하실까요? 13절을 보니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요구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토브’는 ‘좋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쓰인 단어가 토브입니다. 어쩌면 그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일 수 있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작은 이익과 순간의 쾌락을 쫓아봐야 헛될 뿐임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헛된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 즉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또한 15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민 중에서 택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을 선택하시고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삶을 살라는 것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분명 영광스런 일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특별한 임무를 주시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기대를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면, 특별하게 불러 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맡겨 주신 특별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요약하자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며 그것을 지키면 복을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반대로 계명에 불순종하면 즉 범죄하면 저주를 받게 될 것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혹시나 율법의 실천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계명은 출애굽 즉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후에 주신 것임을 생각하면, 공로와 상관없는 구원의 은혜가 선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중세에는 가톨릭교회가 재정을 쌓기 위해 공로 개념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선한 행위나 율법의 실천보다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더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이웃 사랑보다는 하나님 사랑을 조금 더 강조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예배드리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예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이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은 13장 34절에서 주신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의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웃 사랑입니다. 18~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8~19)

 

어려운 이웃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그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부담스럽고 구원의 조건이 아닐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사는 일이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내 시간을 쓰고, 내 에너지를 쓰고, 내 물질을 쓰고,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정말로 자기희생적인 자세가 필요하죠. 그것은 내가 손해만 보고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이웃 사랑을 통해 우리는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을 것을 믿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잠언 19장 17절에서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꾸어 주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웃 사랑의 실천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몇 배로 갚아 주시는,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는, low risk high return의 투자입니다. 사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low risk도 아니지요, risk free입니다. 위험 부담이 전혀 없는 투자입니다. 사랑의 나눔을 통해 얻는 기쁨은 덤으로 주어지는 큰 보상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처음에는 그 명령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랑을 서로 나눌 때 결국은 공동체 전체가 더 풍요로워집니다. 그 안에 사는 우리도 이전보다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큰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누리다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좋아는 하지만 경외하지는 않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면 참 좋은데, “손자를 예뻐하면 할아버지 수염을 당긴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큰 사랑을 받고 교만해져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나님, 나에게 잘해 주시는 하나님을 좋아는 하지만 경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유아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유아들은 부모를 좋아하지만 그 좋은 이유가 자기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작 부모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가 생길 때마다 받아내고자 떼를 쓰기만 합니다. 사랑은 사랑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이 유아적인 사랑으로부터 연결되는 한 가지 이유를 더 생각해 보자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미성숙하고 온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이미 다 경험해 보셨지요?

또 사랑이 너무 커서 숭배에 이르면 그 대상이 나를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그 대상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이 큰 기쁨이 됩니다. 연예인을 지극히 사랑하다 못해 숭배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서 이러한 영광스러움과 기쁨을 경험해 보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정 사랑을 할 때에는 율법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불순종으로 받을 저주를 두려워하거나 순종으로 얻을 보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는 헌신과 희생이 곧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 됩니다. 나의 욕망과 의무가 전에는 충돌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의 거룩한 열망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내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너머에 예비된 그분의 크신 사랑을 볼 수 있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 후에도 다시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며 기쁨도 맛보지만, 또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며 말씀하신 바를 다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지만, 어느새 지쳐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그 실천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고서도 계명과 충돌하는 욕망에 다시 무너지기도 합니다. 끝없는 열정으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생존 본능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에 빠지고 자책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율법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낙심하고 자기 비하에 빠집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셔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 계명을 주신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우리의 실패를 이미 전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신명기 가운데 3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신 30:1)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쫓겨갈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후 속구절에서는 그때 회개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30장 6절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6)

 

참으로 놀라운 사랑입니다. 놀라운 은혜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0장 16절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분명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셨는데, 30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할례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용어로 쉽게 말하면 포경 수술입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마음에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할례라는 상징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할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아집과 욕망을 꺾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 여호수아 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앞두고 길갈에서 할례를 받을 때에 이런 각오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마취제도 항생제도 제대로 없었기에 할례로 인한 고통은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4장은 디나를 강간했던 세겜과 그 성읍 사람들이 할례를 통해 전투력이 떨어졌을 때, 시므온과 레위 두 사람이 성읍 전체를 진멸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철옹성 여리고 정벌을 앞두고 할례를 받는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버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할례를 마음에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연약한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연약한 우리로서는 계명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복된 일인지 알면서도 온전하게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이유는 그 계명대로 살아내지 못한다고 책망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를 이미 아시는데도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음의 할례를 직접 해 주시기로 처음부터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실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아셨지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연약함까지 품으시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집도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성령님의 능력으로 힘입어, 예수님의 도를 따라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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