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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주셔요

누가복음 24:24~35

김운용 목사

2025.05.18

<믿음이 없으면 죽음은 끝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밋빛 미래도, 인생의 비전도 모두 끝났다….’ 그런데 허망하게 끝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왔지만, 도시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이 다음 차례로 자기들을 잡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피해 고향으로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누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3~14)

여기에서 ‘그날’은 ‘부활의 아침’을 지칭합니다. ‘예루살렘’은 지난 며칠 동안 예수님과 십자가 이야기로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이 모든 된 일’은 십자가 사건과 그날 아침에 들려온 부활의 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주님께서 천사를 동원하고, 증인들을 동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셨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 엄청난 사건을 이렇게 전합니다.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 24:4~6)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이 새벽에 그들에게 전해집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죽음은 끝이었지만, 부활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은 부활 사건을 통해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춤추게 하셨습니다. 초기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매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켰으며, 그 이후 연주기로 바뀌면서 부활주일 후 50일을 ‘Great Fifty Days’(기쁨의 50일) 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300년 가까이 이어진 박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끝이지만 부활은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 오후, 앞서 말씀드린 분의 입관예식을 진행했습니다. 입관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장례지도사에게 미리 연락했습니다. “염을 미리 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기도하고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염을 할 때 이것을 당부했습니다. “고인의 얼굴은 가리지 마세요. 대신 가볍게 메이크업만 해 주세요.” 입관할 때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관 뚜껑은 닫지 마세요.” 장례지도사가 도대체 무슨 부탁이 이렇게 많은지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미국 장례식에서 ‘Viewing’이라 불리는 것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면서 설교 중에 눈물짓고 있는 고인의 아내, 자녀들, 형제들,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이제 관 뚜껑이 닫히면 이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만약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오늘(성금요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모르고,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 못했고, 아직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이게 마지막입니다. 이제 나오셔서 고인에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하십시오. 정말 고마웠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적셔진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고인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인사를 전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갈라놓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심령, 내 삶 속에 없으면 죽음이 끝입니다. 이 세상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보다 그 믿음을 우선에 두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가운데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비참하게 달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막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이 한 마디 반항도 없이 비참하게 생을 끝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사로잡혀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깊은 낙심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길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인생길에 일어나고 있는 한 광경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5~16)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다시 사신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성경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눅 24:16a)

그들의 육신의 눈은 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고향길도 잘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워진 것은 믿음의 눈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 24:21)

당시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들의 믿음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하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구원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만을 위한 구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인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 확신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주신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은 중요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신앙관, 철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고, 주님보다 우선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인생길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1856년,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16년 아프리카 선교 여정 가운데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선교 단원들과 함께 호숫가에 야영 준비를 하는데, 악명 높기로 유명한 블루마 부족이 창과 활을 겨누며 그들을 일순간에 포위하고 들어왔습니다. 블루마 부족은 그들과 마주쳤다가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할 정도로 악명 높은 부족이었습니다. 모두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을 때 리빙스턴도 자기 텐트로 들어가 말씀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영국을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손을 얹고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 리빙스턴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나는 이 밤 마음이 아주 안타깝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볼 때 이상한 비통함을 느낀다. 우리 모든 일행은 이 밤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다. 만약 저 원주민들이 이 밤 공격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절대적으로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 내가 영국을 떠나올 때 주셨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가장 위대하신 신사의 약속이다. 나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 내 삶의 가장 어려운 이 문제 상황 가운데서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 나와 함께하실 줄을 확실히 믿는다. 우리는 가장 위대하신 신사의 약속을 믿으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일 강을 건널 것이다. 아, 이제야 내 마음이 아주 평안하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블루마 부족들은 불을 피워 놓고 축제처럼 춤을 추며 괴성을 질러대었습니다. 그러나 공격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강을 건널 준비를 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원주민 짐꾼들은 먼저 건너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뗏목에 태워 먼저 보내고, 그다음으로 선교단원들을 건너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블루마 부족들은 활을 겨누고서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단원들이 화살이 닿지 않는 지점에 갔을 때, 리빙스턴은 블루마 부족에게 다가가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길 빕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남은 뗏목에 천천히 몸을 싣고 호수를 건너갔습니다. 블루마 부족은 호수에 뛰어 들어와 코밑까지 창과 칼을 겨누었지만 찌르지는 않았습니다. 리빙스턴은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유유히 노를 저어 갔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진종일 함께 걸어가면서, 그들의 아픔의 이야기, 눈물 젖은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믿음 위에도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날 엠마오로는 가는 제자들은 믿음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믿음이 회복됩니다. 그 밤에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하였다는 말씀이지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보게 하고 직접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성경을 펴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고향에 도착하였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일상의 식사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광경을 독특한 네 가지 동사로 그림 그리듯 전합니다.

“떡을 드시고(take the bread), 떡을 축사하시고(bless the bread), 떡을 떼시고(break the bread), 떡을 나누어 주셨다(give the bread).” (눅 24:30)

예배학자인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는 이것을 “성찬의 4중 행동”(actions of the Eucharist)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일상의 식사를 거룩한 성찬으로 바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시는 말씀 예전,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 주시는 성찬 예전, 주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예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예배 가운데서 제자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영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배는 이런 자리입니다. 예배 가운데 그들은 회복되었습니다. 예배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아픈 가슴, 멍든 삶을 어루만지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붙잡혀서 순교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의 자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20세기 최고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인 칼 바르트는 예배를 이렇게 압권적인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소리쳐 주장하는 것이고, 성도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기쁨에 들뜬 심정으로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Karl Barth)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수동적으로 앉아서 드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에서 설교와 기도, 찬양이 선포되는 가운데 “그게 정말입니까?” 하며 화답하는 자리입니다. 제자들은 예배 가운데 참석했다가 영의 눈이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 계시며 나와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의 삶에 염려할 것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붙잡으며 인생의 어려운 길을 힘껏 달려갔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피곤하고 지쳤느냐? 종교 생활에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너라.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 삶은 회복될 것이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자연스러운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마 11:28~29, The Message)

제자들은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어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또한 삶의 염려와 모든 아픔을 넉넉히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왜 그렇게 아픔과 어려움이 많이 있는지요?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염려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한숨과 눈물, 걱정과 염려, 답답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의 눈이 활짝 열렸을 때, 그리고 주님과 손잡고 믿음으로 동행하였을 때 모든 것이 전복됩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한숨은 찬송으로, 눈물은 소망으로 전복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 가운데 떨고 있던 엠마오의 두 제자를 전복시키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도 전복시키십니다.
인생길에는 염려가 끝없이 몰려옵니다. 앞날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생업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노년에 대한 염려가 파도처럼 몰려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살짝 다가오십니다. 말없이 함께 걸으십니다. 봇물 터지듯 염려가 몰려오던 새벽, 주님 향해 두 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용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네가 했더냐

내가 네 인생길에서 어찌했더냐
다시 흐르는 감격의 눈물

내 눈 열어 주소서
그 도상에서처럼
내 눈도 열어 주소서

엠마오는 염려로 가득한 자리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곳은 다시 일어섬의 자리, 새 출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길목에서 우리가 드릴 기도는 한가지입니다.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 주십시오.”
말씀을 준비하는데 미국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오래전 일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때 당시에는 마음이 참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건너던 차가 아내 차를 들이받은 사고였습니다. 머리를 다쳐 계속 피가 나는 아이 이마를 아내가 손수건으로 막고, 아이를 안고 달래며 구급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경찰은 아이가 너무 우니까 상대편 운전자와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구급차가 도착해서 서둘러 응급실로 가려는데, 경찰이 아내에게 사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잘못한 게 없으니, 경찰이 어련히 잘했을 거라는 마음에 사인을 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중에 제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가 받은 경찰 리포트 카피를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Violation of Red Light(빨간 신호 위반)”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가 머리를 다쳐서 피가 계속 나는데, 엄마 눈에 그 글씨가 보일 리 없었습니다. 결국 변호사와 함께 나름 준비해서 법정에 갔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모든 혐의를 다 뒤집어쓰고 벌금까지 물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비가 엄청났습니다. 돈을 아낀다고 상대편 차만 커버 되는 반쪽짜리 자동차 보험을 들어 놓았더니 차 수리비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것들을 모아 보니 1만 불이 넘게 나왔습니다. 당시 세 식구가 1년 버틸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법원에서 돌아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학교 채플에 엎드렸습니다. “그 돈 헌금이나 하게 하시지, 이렇게 억울하게 손해를 보게 하십니까?”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울며 기도하는 저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은 분노에 찬 저의 가슴을 만지시며 입술에 찬양을 담아 주셨습니다. 주신 찬양 부르며 울고 있는데, 30cm만 앞으로 부딪혔으면 아내가 죽었고, 30cm만 뒤로 부딪혔으면 아이가 죽었을 상황이 보였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중형트럭이 아내와 아이를 덮쳤을 때, 아내와 아이를 온몸으로 막고 계시는 주님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따라 부름받은 자에겐
모든 것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염려 말라 두려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염려 말라 두려 말라 모든 것 다 맡기어라
능력의 오른팔로 내가 너를 도우리라

홍해를 가르신 주 하늘 만나 먹이신 주
반석에서 물을 내신 여호와
너를 향한 뜻 가지고 인도하고 계시니라
도우시리 도우시리 주가 너를 도우시리
도우시리 도우시리 주가 널 도우시리
능력의 오른팔로 주가 너를 도우시리

아무것 염려 말고 믿음으로 의지하라
네 구할 것 주님 다 아시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라
입히시리 먹이시리 주가 너를 돌보시리
공중 새도 먹이셨다 하물며 너희일까
능력의 오른팔로 주가 너를 돌보시리

너는 내게 존귀한 자 너는 나의 어여쁜 자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마
너의 걱정 떨쳐 내고 주님만 의지하라
너는 내게 존귀한 자 너는 나의 어여쁜 자
버리지 아니하며 내가 널 사랑하리
능력의 오른팔로 내가 너를 사랑하리

그렇습니다.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돌보실 것입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기쁨의 50일 절기에 우리도 다시 믿음으로 일어섭시다.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일어난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우리가 드릴 기도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 주셔요.”

Lord, Open Our Eyes Too

Luke 24:24-35

That is the end, the end of everything.
A few years ago, during Passion Week, I presided over the funeral of a close acquaintance. Considering me his spiritual mentor, he discussed various family matters, big and small, with me, asked me to officiate his children’s weddings, and finally asked me to lead his funeral service. Since he died on Holy Thursday during Passion Week, his funeral took place on Holy Saturday, the day we await the Lord’s resurrection. Although I was very busy that week, I presided over the entire funeral process, including the casketing, the departure from the funeral home, and the lowering of the coffin. The deceased had started a business at a young age with his jeonse deposit, labored day and night, and diligently built an enterprise. It became a medium-sized company listed on the KOSDAQ with a large company building.
But after being diagnosed with cancer and fighting against it, he finally succumbed to the disease. Hearing that he was on his death bed, I rushed to the Yeouido St. Mary’s Hospital. He lay unconscious, breathing raggedly. I said to him, “Dear friend, entrust everything to God. Confess this to the very end: ‘I will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Tears fell from his unfocused eyes. He was listening. I continued to wait in the hospital even after concluding the service because he seemed to be nearing his end. His wife, who seemed apologetic about keeping me waiting, spoke held her husband’s hand and whispered, “Dear, if you’re holding on to your life now because you’re worried about leaving me behind, don’t be. I’ll be okay. Just rest in the Lord’s Kingdom. I’ll catch up with you soon. You’ve lived a good life.” A tear rolled down his cheek, and he went to the Lord. In accordance with his wishes, the funeral was small and humble. Only a handful of family members and close friends came because he did not want his passing to be known. In the face of death, everything—his success, his principled life, and even the big country house he had built to live with his aged mother—was useless. Yes. Death is the end of everything.

Everything has ended.
This was what the disciples also thought when Jesus died on the Cross. They thought, ‘Our rosy future, our life’s vision, and everything… have ended.’ Although it pained them to think that everything had become so futile, the situation in Jerusalem was dangerous. So they were fleeing to their hometowns. Luke describes this scene as follows: “Now that same day two of them were going to a village called Emmaus, about seven miles from Jerusalem. They were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Here “that same day” refers to the day of Jesus’ resurrection, “Jerusalem” to the city brimming with talk about Jesus and His crucifixion, and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to His crucifixion and the news of resurrection that had been heard that morning. They thought it was over, but it was not. An incredible, great event had occurred. News of Jesus’ resurrection was spreading by the appearance of Jesus, the appearance of angels, and witness testimonies. This is how Luke describes this incredible event: “While they were wondering about this, suddenly two men in clothes that gleamed like lightning stood beside them. In their fright the women bowed down with their faces to the ground, but the men said to them, ‘Why do you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He is not here; he has risen! Remember how he told you, while he was still with you in Galilee:’” (Luke 24:4-6).
This was how the news of our Lord’s resurrection spread in the early morning of His resurrection. How shocked and happy they would have been! The event of Jesus’ resurrection restored the people and made them dance. In the first 300 years of the Early Church, every Sunday was a joyful celebration of our Lord’s resurrection; only after 300 years did this celebration become a yearly event with the observance of Easter Sunday and the Great Fifty Days. Early Christians were even able to endure extreme persecution for over three centuries because while death is the end, resurrection is the beginning.
I held the casketing service on the afternoon of Good Friday. I told the funeral director in advance not to shroud the corpse before the guests’ arrival and prayer. Furthermore, I asked him to keep the coffin lid open and not to cover the deceased’s face, telling him just to apply some light makeup. I wanted to have a viewing like American funerals, a time for loved ones to see the deceased and express their final farewells. As we held the casketing service, I preached to the wife, children, siblings, and friends of the deceased:
“This is the end. When the coffin closes, you will never see your husband’s, father’s, friend’s face again. This is the end. If you don’t know Christ yet, if you have yet to know Jesus who died on the Cross to save you, if you have yet to receive the Gospel covered with the precious blood of the Cross, if you have not been saved by God’s grace yet, if you do not yet have the hope of heaven, then this is the end. Now come forward and say your last farewells to the deceased. Tell him thank you.”
“But to those who have been washed in the precious blood of Jesus, to those who believe in His resurrection, this is not the end. You will meet again in Heaven. So bid farewell like this, ‘Let’s meet again in Heaven. You have led a good life!’” Yes, our Lord’s resurrection makes all this difference. If we do not have Jesus in our hearts and our lives, death is the end. This world is all there is. But His resurrection has completely transformed this.

Faith was the problem.
But the two disciples in today’s Scripture were unable to escape the shock of death. They were trapped in deep despair and anguish. They were living their lives in deep despair, worry, anxiety, and fear—much like us.
Yet today’s text vividly describes a scene occurring in this life of despair: “As they talked and discussed these things with each other, Jesus himself came up and walked along with them; but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 (Luke 24:15-16) While the two disciples were trudging along the road, the risen Lord came near and walked with them. Jesus walking with us! What a blessing! Yet the two didn’t recognize Him. How is it possible that they could not recognize their own teacher whom they had followed for three years? Rather than give a long, convincing explanation, the Bible simply states,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Their eyes of faith had been darkened because of their life’s heavy problems and deep desperation. “We believed He would deliver Israel!” What precious faith! But did Jesus fail to deliver Israel? No! He saved them. He delivered not only the people of that age but also all who would come in the following ages. But the two disciples were trapped in their own thoughts and beliefs.
In 1856, David Livingstone, the great English missionary, faced the greatest crisis of his life as a missionary to Africa. As he and his team were getting ready to camp near a lake in the evening, the warriors of a notoriously fierce African tribe surrounded them with raised spears and bows. Everyone trembled. But at this moment Dr. Livingstone went into his tent and started reading his Bible. He started to pray over the Word that God gave him when he left England. This is his journal entry for that day:
“January 14, 1856. Evening. Felt much turmoil of spirit in prospect of having all my plans for the welfare of this great region and this teeming population knocked on the head by savages tomorrow. But I read that Jesus said: ‘All power is given unto Me in heaven and in earth. Go ye therefore, and teach all nations,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It is the word of a gentleman of the most strict and sacred honour, so there’s an end of it! I will not cross furtively tonight as I intended. I feel quiet and calm now. Thank you, Lord.”
Surprisingly, the warriors did not attack them that night. The next morning, the team got ready to cross the lake. The natives in the team begged to cross first. After they had crossed, the rest crossed as the African warriors watched with their weapons raised. Dr. Livingstone walked up to the warriors, thanked them, and raised his hand to bless them: “May the risen Lord who blessed me with life also give you life. I will one day return to you. Until then, goodbye.” Then he crossed the lake on a raft. The warriors jumped into the river and aimed their swords and spears, inches from his face.
Faith prevails. Our faith in the living God, our faith in the Lord who walks with us prevails. But the disciples did not have this faith. Yet our Lord walked with them. Walking alongside them the whole day, He listened to their story of pain and tears.

The grace of recovery
Although the two disciples going to Emmaus had completely lost their faith, we see at the end the story that they recover their faith. They race to Jerusalem to spread the Gospel of Jesus’ resurrection. They had regained the faith of resurrection. What made them so? The surest proof would have been the risen Lord’s own confirm of His resurrection. But our Lord didn’t do that. Instead, He opened the Bible to them. And as the two listened to the Word, they felt their hearts stir. Using four unique verbs, Luke depicts like a painter the scene where the disciples have dinner after arriving home. “As they sat down to eat, he took the bread and blessed it. Then he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Luke 24:30 NLT, emphasis added) Gregory Dix, a noted liturgical scholar, called this “the four actions of the Eucharist.” What does this mean? Our Lord changed the everyday meal into a communion.
The Lord invited the disciples to a place of worship. During this worship led by the Lord Himself—in which He explained the meaning of the Word and performed communion by taking the bread, blessing it, and giving it to them—the hearts of the disciples were moved and their spiritual eyes were opened. This is worship. If such things do not happen in worship, we will find it nowhere on earth. Worship is where the Lord is with us and touches our pained, bruised hearts. Accordingly, Karl Barth, one of the greatest theologians of the 20C, described worship splendidly. He stated that worship is a shout, claiming, “God is alive, God is with us!” He also said that worship is the saints’ response to God, exclaiming, “Really? Is God really with us?”, in a quiet but joyful and excited way. This is why the Early Church risked its life on worship. Nothing more was more precious than worship in their lives. Worship was the time and place in which they were restored and stood strong before the Lord as they held His hand. Through worship, they were blessed with the grace of recovery. After encountering the risen Lord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despair turned into joy. Sighs changed to praise. Fear was transformed into hope. Tom Wright, the English theologian, called this the “subversiveness of the Gospel.” The Cross and the resurrection of Christ subvert everything. They change lives. After those incidents, the disciples walked in faith with the Word of the Lord in their hearts. “Are you tired? Worn out? Burned out on religion? Come to me. Get away with me and you’ll recover your life. I’ll show you how to take a real rest. Walk with me and work with me – watch how I do it. Learn the unforced rhythms of grace. I won’t lay anything heavy or ill-fitting on you.” (Matthew 11:28-29 The Message).

Open our eyes too.
Why do we see so much pain and strife in our lives? Our lives are full of tears, sighs, worries, and frustrations. This was what the disciples going to Emmaus experienced as well. But when they met the risen Lord and their eyes were opened, and when they walked with the Lord in faith, holding His hand, everything was subverted. Grief turned to joy, sighs to praise, tears to hope. The risen Lord subverted the lives of the two disciples who had been trembling on the road to Emmaus. That Lord subverts our lives too.
Endless worry fills our lives. Anxiety for the future, concern for our children, worrying about making ends meet, and anxiety about health and old age overwhelm us like great big waves. This is why our Lord, who knows all our weaknesses, quietly draws near to us. He walks with us silently. One night, when worries flooded me like a tsunami, I lifted my hand to God. And He spoke to me quietly:

“Worries come like waves
Lord, what should I do?
Tears fall unknowingly
‘Was it ever you?’ He asks
‘Remember what I did in your life?’
Now, tears of gratitude
Open my eyes, Lord
Like the two on their way to Emmaus—
Open my eyes, too.

The road to Emmaus was first filled with worry, but when the two disciples encountered the risen Lord, it became the path of recovery and a new start. This is how it is with our lives too. On our life journey, too, all we can pray is this: “Lord, open our eyes too.”
Preparing for today’s sermon, I recalled an incident that happened long ago when I was studying in the United States. Looking back on it now, it seems quite trivial, but at the time I was anguished. While driving our son back from school, my wife had an accident. A truck racing on a light turning from yellow to red crashed into my wife’s car. In the aftermath of the crash, my wife was trying to stop the bleeding on my son’s forehead, desperately waiting for the ambulance. The police arrived first and started talking to the other driver as my son was wailing. Then the ambulance came to rush my wife and son to the hospital, but at that moment the policeman asked her to sign a piece of paper. Not in her right mind, she signed it and raced to the hospital, thinking the policeman was just doing his job since she had done nothing wrong.
Later, in the hospital when she checked the copy of the paper she had signed, it was a Violation of Red Light. How can a mother holding her son’s bleeding head possibly comprehend such a document? Later, we appeared at court after much preparation and even consulting with a lawyer. But we were only racially discriminated, made to take all legal responsibility for the accident, and were even fined. Fortunately, my son was not injured severely and was able to leave the hospital in a day, but without medical insurance, the hospital fees were massive. And with a car insurance that only covered the other driver’s car, we had to pay for our own repairs which amounted to over 10,000 dollars. This was the equivalent of our family’s yearly living expenses.
After returning from court, I felt so resentful that I knelt to pray in the school chapel. “Lord, why didn’t You just take that money as an offering? Why make us pay so unfairly for losses?”, I protested. But as I prayed with tears, God drew near with these words: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Romans 8:28 NIV) The Lord touched my angry heart and put praise on my lips. As I sang that praise in tears, I saw how my wife could have died if the other car had come just 30 centimeters closer to her, or how my son could have died if it had come 30 centimeters closer to him. I saw the Lord protecting my wife and son, blocking with His whole body the truck racing at full speed on a yellow light.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Do not be anxious; do not be afraid—
For I will help you
Do not worry or fear
Entrust everything to me
For I will help you with My powerful right hand
God, who parted the Red Sea and gave us manna from heaven,
God, who made water flow from the rock,
He guides you with His will
He will help you, He will.
The Lord will help you, He will.
With His powerful right hand He will help you.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trust in faith.
He knows what you need.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pray.
He will feed and clothe you.
He will take care of you.
Won’t the One who feeds the birds in the air feed you?
His powerful right hand will protect you
You are my precious beloved
I will be your strength
Cast out your worries and trust only in the Lord
You are my precious beloved
I will never leave you
I will love you
I will love you with my powerful right hand

Indeed. He will not leave us. He will take care of us. He will help us. He will guide us. In this joyous season of the Great Fifty Days, let us, too, rise again in faith. The Lord promised this to the disciples who rose again to become the witnesses of His resurrection: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This should be our one prayer: “Lord, open our eyes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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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24~35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믿음이 없으면 죽음은 끝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밋빛 미래도, 인생의 비전도 모두 끝났다….’ 그런데 허망하게 끝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왔지만, 도시의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인 종교 지도자들이 다음 차례로 자기들을 잡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피해 고향으로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누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눅 24:13~14)

여기에서 ‘그날’은 ‘부활의 아침’을 지칭합니다. ‘예루살렘’은 지난 며칠 동안 예수님과 십자가 이야기로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이 모든 된 일’은 십자가 사건과 그날 아침에 들려온 부활의 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주님께서 천사를 동원하고, 증인들을 동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셨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 엄청난 사건을 이렇게 전합니다.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눅 24:4~6)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이 새벽에 그들에게 전해집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죽음은 끝이었지만, 부활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주님은 부활 사건을 통해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춤추게 하셨습니다. 초기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매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켰으며, 그 이후 연주기로 바뀌면서 부활주일 후 50일을 ‘Great Fifty Days’(기쁨의 50일) 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들은 300년 가까이 이어진 박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죽음은 끝이지만 부활은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성금요일 오후, 앞서 말씀드린 분의 입관예식을 진행했습니다. 입관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장례지도사에게 미리 연락했습니다. “염을 미리 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기도하고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염을 할 때 이것을 당부했습니다. “고인의 얼굴은 가리지 마세요. 대신 가볍게 메이크업만 해 주세요.” 입관할 때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관 뚜껑은 닫지 마세요.” 장례지도사가 도대체 무슨 부탁이 이렇게 많은지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미국 장례식에서 ‘Viewing’이라 불리는 것으로, 고인의 얼굴을 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면서 설교 중에 눈물짓고 있는 고인의 아내, 자녀들, 형제들,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이제 관 뚜껑이 닫히면 이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는 친구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만약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오늘(성금요일)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모르고,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 못했고, 아직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이게 마지막입니다. 이제 나오셔서 고인에게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하십시오. 정말 고마웠다고….
하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적셔진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고인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인사를 전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갈라놓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심령, 내 삶 속에 없으면 죽음이 끝입니다. 이 세상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보다 그 믿음을 우선에 두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가운데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비참하게 달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막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이 한 마디 반항도 없이 비참하게 생을 끝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사로잡혀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깊은 낙심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길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인생길에 일어나고 있는 한 광경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5~16)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다시 사신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이 같은 모습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성경은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눅 24:16a)

그들의 육신의 눈은 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고향길도 잘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두워진 것은 믿음의 눈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 24:21)

당시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수백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들의 믿음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못하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구원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만을 위한 구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인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 확신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주신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은 중요합니다. 자신의 신념과 신앙관, 철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고, 주님보다 우선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인생길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1856년,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16년 아프리카 선교 여정 가운데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선교 단원들과 함께 호숫가에 야영 준비를 하는데, 악명 높기로 유명한 블루마 부족이 창과 활을 겨누며 그들을 일순간에 포위하고 들어왔습니다. 블루마 부족은 그들과 마주쳤다가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할 정도로 악명 높은 부족이었습니다. 모두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을 때 리빙스턴도 자기 텐트로 들어가 말씀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영국을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손을 얹고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 리빙스턴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나는 이 밤 마음이 아주 안타깝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볼 때 이상한 비통함을 느낀다. 우리 모든 일행은 이 밤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다. 만약 저 원주민들이 이 밤 공격해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절대적으로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 내가 영국을 떠나올 때 주셨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가장 위대하신 신사의 약속이다. 나는 그분의 약속을 믿는다. 내 삶의 가장 어려운 이 문제 상황 가운데서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 나와 함께하실 줄을 확실히 믿는다. 우리는 가장 위대하신 신사의 약속을 믿으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일 강을 건널 것이다. 아, 이제야 내 마음이 아주 평안하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블루마 부족들은 불을 피워 놓고 축제처럼 춤을 추며 괴성을 질러대었습니다. 그러나 공격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강을 건널 준비를 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원주민 짐꾼들은 먼저 건너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뗏목에 태워 먼저 보내고, 그다음으로 선교단원들을 건너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블루마 부족들은 활을 겨누고서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단원들이 화살이 닿지 않는 지점에 갔을 때, 리빙스턴은 블루마 부족에게 다가가 감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길 빕니다. 언젠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남은 뗏목에 천천히 몸을 싣고 호수를 건너갔습니다. 블루마 부족은 호수에 뛰어 들어와 코밑까지 창과 칼을 겨누었지만 찌르지는 않았습니다. 리빙스턴은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유유히 노를 저어 갔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진종일 함께 걸어가면서, 그들의 아픔의 이야기, 눈물 젖은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믿음 위에도 회복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날 엠마오로는 가는 제자들은 믿음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믿음이 회복됩니다. 그 밤에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부활신앙을 회복하였다는 말씀이지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보게 하고 직접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성경을 펴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고향에 도착하였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일상의 식사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광경을 독특한 네 가지 동사로 그림 그리듯 전합니다.

“떡을 드시고(take the bread), 떡을 축사하시고(bless the bread), 떡을 떼시고(break the bread), 떡을 나누어 주셨다(give the bread).” (눅 24:30)

예배학자인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는 이것을 “성찬의 4중 행동”(actions of the Eucharist)이라고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일상의 식사를 거룩한 성찬으로 바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시는 말씀 예전,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 주시는 성찬 예전, 주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예배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예배 가운데서 제자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영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배는 이런 자리입니다. 예배 가운데 그들은 회복되었습니다. 예배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아픈 가슴, 멍든 삶을 어루만지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예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붙잡혀서 순교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의 자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20세기 최고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인 칼 바르트는 예배를 이렇게 압권적인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소리쳐 주장하는 것이고, 성도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기쁨에 들뜬 심정으로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Karl Barth)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수동적으로 앉아서 드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예배에서 설교와 기도, 찬양이 선포되는 가운데 “그게 정말입니까?” 하며 화답하는 자리입니다. 제자들은 예배 가운데 참석했다가 영의 눈이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 계시며 나와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의 삶에 염려할 것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붙잡으며 인생의 어려운 길을 힘껏 달려갔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피곤하고 지쳤느냐? 종교 생활에 탈진했느냐? 나에게 오너라. 나와 함께 길을 나서면 너희 삶은 회복될 것이다…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일하여라… 자연스러운 은혜의 리듬을 배워라. (마 11:28~29, The Message)

제자들은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어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또한 삶의 염려와 모든 아픔을 넉넉히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길에는 왜 그렇게 아픔과 어려움이 많이 있는지요?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이 염려가 끝없이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한숨과 눈물, 걱정과 염려, 답답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의 눈이 활짝 열렸을 때, 그리고 주님과 손잡고 믿음으로 동행하였을 때 모든 것이 전복됩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한숨은 찬송으로, 눈물은 소망으로 전복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절망 가운데 떨고 있던 엠마오의 두 제자를 전복시키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도 전복시키십니다.
인생길에는 염려가 끝없이 몰려옵니다. 앞날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생업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노년에 대한 염려가 파도처럼 몰려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살짝 다가오십니다. 말없이 함께 걸으십니다. 봇물 터지듯 염려가 몰려오던 새벽, 주님 향해 두 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용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네가 했더냐

내가 네 인생길에서 어찌했더냐
다시 흐르는 감격의 눈물

내 눈 열어 주소서
그 도상에서처럼
내 눈도 열어 주소서

엠마오는 염려로 가득한 자리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곳은 다시 일어섬의 자리, 새 출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길목에서 우리가 드릴 기도는 한가지입니다.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 주십시오.”
말씀을 준비하는데 미국에서 공부할 때 겪었던 오래전 일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때 당시에는 마음이 참 힘들었습니다. 아내가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건너던 차가 아내 차를 들이받은 사고였습니다. 머리를 다쳐 계속 피가 나는 아이 이마를 아내가 손수건으로 막고, 아이를 안고 달래며 구급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경찰은 아이가 너무 우니까 상대편 운전자와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구급차가 도착해서 서둘러 응급실로 가려는데, 경찰이 아내에게 사인을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잘못한 게 없으니, 경찰이 어련히 잘했을 거라는 마음에 사인을 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나중에 제가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가 받은 경찰 리포트 카피를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Violation of Red Light(빨간 신호 위반)”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가 머리를 다쳐서 피가 계속 나는데, 엄마 눈에 그 글씨가 보일 리 없었습니다. 결국 변호사와 함께 나름 준비해서 법정에 갔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모든 혐의를 다 뒤집어쓰고 벌금까지 물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비가 엄청났습니다. 돈을 아낀다고 상대편 차만 커버 되는 반쪽짜리 자동차 보험을 들어 놓았더니 차 수리비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것들을 모아 보니 1만 불이 넘게 나왔습니다. 당시 세 식구가 1년 버틸 수 있는 큰돈이었습니다. 법원에서 돌아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학교 채플에 엎드렸습니다. “그 돈 헌금이나 하게 하시지, 이렇게 억울하게 손해를 보게 하십니까?”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울며 기도하는 저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은 분노에 찬 저의 가슴을 만지시며 입술에 찬양을 담아 주셨습니다. 주신 찬양 부르며 울고 있는데, 30cm만 앞으로 부딪혔으면 아내가 죽었고, 30cm만 뒤로 부딪혔으면 아이가 죽었을 상황이 보였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중형트럭이 아내와 아이를 덮쳤을 때, 아내와 아이를 온몸으로 막고 계시는 주님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따라 부름받은 자에겐
모든 것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염려 말라 두려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염려 말라 두려 말라 모든 것 다 맡기어라
능력의 오른팔로 내가 너를 도우리라

홍해를 가르신 주 하늘 만나 먹이신 주
반석에서 물을 내신 여호와
너를 향한 뜻 가지고 인도하고 계시니라
도우시리 도우시리 주가 너를 도우시리
도우시리 도우시리 주가 널 도우시리
능력의 오른팔로 주가 너를 도우시리

아무것 염려 말고 믿음으로 의지하라
네 구할 것 주님 다 아시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라
입히시리 먹이시리 주가 너를 돌보시리
공중 새도 먹이셨다 하물며 너희일까
능력의 오른팔로 주가 너를 돌보시리

너는 내게 존귀한 자 너는 나의 어여쁜 자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마
너의 걱정 떨쳐 내고 주님만 의지하라
너는 내게 존귀한 자 너는 나의 어여쁜 자
버리지 아니하며 내가 널 사랑하리
능력의 오른팔로 내가 너를 사랑하리

그렇습니다.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돌보실 것입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기쁨의 50일 절기에 우리도 다시 믿음으로 일어섭시다.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일어난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우리가 드릴 기도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 주셔요.”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주셔요” (눅24:24~35)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28, 43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설교의 요약>

  죽음은 모든 것이 끝입니다. 이룬 성공도, 소신을 따라 잘 달린 삶도, 큰 전원주택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도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교회는 초기 300년 동안 기쁨과 감격으로 내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켰으며 그 이후는 부활주일 후 50일은 기쁨의 절기로 지켰습니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박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은 끝이지만 부활은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보혈로 적셔진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성경은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라고 말씀합니다. 삶의 문제가 너무 크고 막막하면 믿음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1856년 영국의 리빙스톤 선교사님이 아프리카 선교 여정 가운데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악명 높은 블루마 부족이 공격해왔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다음 날, 블루마 부족은 공격을 하지 않았고, 선교사님은 그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 나와 함께 가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믿음을 잃었지만, 그 밤에 부활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거룩한 성찬을 집례하셨습니다. 말씀예전, 성찬예전, 주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예배 가운데,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현존하신다’ 라는 주장 앞에 ‘그게 정말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칼 바르트) 예배의 자리에서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길에는 아픔과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그럴 때 우리가 드릴 기도는 한가지입니다. “주님, 우리 눈도 좀 열어주십시오.” 

<나누기>

  1. 고난과 같은 일로 시험에 들어 믿음이 약해졌던 경험이 있으셨습니까?
  2. 약해진 믿음을 어떻게 회복했습니까? 예배의 자리에서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여 믿음을 회복한 적이 있으십니까?

<마무리 기도>

  주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주여, 우리가 믿음의 부자 되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벌떡 일어나, 감격하며 인생길 달려갈 수 있도록, 주님, 우리 좀 붙잡아 주옵소서. 주님, 우리 눈 좀 열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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