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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비밀

요한복음 12: 20 ~ 28

박경수 목사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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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 20 ~ 28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은 주님의 ‘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단어가 무엇일지 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한 단어라고 하면 혹시라도 어려울까 봐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한 글자로 된 단어입니다. 답을 찾으셨습니까? 제가 염두에 둔 단어는 바로 “때”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23,27절을 보면 “때”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합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3 중)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요 12:27 중)

영어 성경은 31절에도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때”의 중요성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는 무엇을 위한 ‘때’일까요? 전도서 3:1~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많은 “때”가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골라보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 3:1~8)

이 중에서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때’는 바로 “죽을 때”입니다. 본문 바로 앞 문단인 요한복음 12장 12~19절을 보면 종려주일,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어서 오늘 이야기가 곧바로 소개되죠. 본문 뒤에는 목요일 밤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13:1~20). 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요한은 종려주일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목요일 최후의 만찬이 있기까지, 다시 말하면 월, 화, 수, 목 나흘 동안 벌어졌던 많은 사건이나 논쟁들에 대해서는 일절 기록하지 않고 죽을 “때”에 대한 이야기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이 사건을 주님의 고난주간 활동 중에서 가장 인상 깊고 중요한 것으로 여겼음을 말해 줍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한 알의 밀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요한만이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요한이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서 주님의 “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사건 이전에는 항상 자신의 “때”가 아님을 강조하였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중)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 초막절에 사람들이 주님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적을 나타내소서.”라고 간청했을 때, 요한복음 7장 6절과 8절에서 두 번이나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바리새인과 관원들이 예수를 잡고자 했으나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주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 7:30)”,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 8:20 중)”)
그러나 오늘 본문부터 요한은 주님의 “때”가 이르렀다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3,27,3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13장 1절에서도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했고, 17장 1절에서도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때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희생하여 온 인류를, 유대인만이 아니라 지금 예수를 찾아온 헬라인들까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신 빛이심을 밝힌 것입니다.
본문 20절에는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라인들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었을 겁니다. 이들이 빌립에게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를 뵙고자 청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 장인 11장에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종려주일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호산나 환호하며 헬라인들도 예수를 뵙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안드레와 의논한 후에 예수님께 이 일을 알렸습니다. 그때 주님이 느닷없이 23절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로 “인자가 죽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입니다. 마침내 당신이 죽을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고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굉장히 좋아하시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분명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과 성정을 가진 분이었는데 죽는 것이 반가운 일일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을 보면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2장은 자기를 부인하시는 예수님의 고백과 함께 ‘때’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뒤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 중)”라는 기도가 연달아 나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단어입니까? 위대한 역접 접속사가 아닙니까? 바로 주님의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나도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니 나로 당당히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있도록 하옵소서.”라는 자기 부인의 기도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마침내 죽을 때가 무르익었으니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러나’의 반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상의 시류를 따라 넓은 길, 편한 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을 거슬러 좁은 길, 험한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옵소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라면 이런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고 훈련하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주님은 자신이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 12장 2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정말 중요한 구절은 “진실로 진실로” 두 번 강조되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이 요한복음에만 25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4절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제 수많은 생명으로 잉태될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참으로 땅에 떨어져 죽은 하나의 밀알이었습니다. 로마의 권력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이제는 세상이 조용해지겠지’ 기대했습니다. 예수를 그냥 한 차례 지나가는 비라고 생각했던 셈이죠. 그러나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처럼 비 온 뒤에 죽순이 사방에서 자라나듯이 수없는 예수쟁이가 살아나서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뒤엎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죽음으로써 사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 죽어야 사는 비밀이 고난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이 세상의 본질은 ‘너 죽고 나 살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나 죽고 너 살자’입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산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 장인 요한복음 11장 50절을 보면 당시 유대의 대제사장이던 가야바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유대 나라가 더 술렁일 테고 그러면 로마가 이를 반역의 조짐으로 보고 유대 민족 전체를 멸절시킬 것이니, 차라리 예수를 죽이는 일이 전체에게 이익이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나라와 민족,’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대의명분(大義名分)입니까?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이 얼마나 그럴듯한 논리입니까? 하지만 실상 가야바가 두려워한 것은 나라와 민족과 백성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 기반이 흔들릴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오늘 가야바는 죽을 한 사람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즉 예수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죽을 “하나의 밀알”로 삼으십니다. 가야바가 ‘너 죽고 나 살자’고 했다면 주님은 ‘나 죽고 너 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차이는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이나 큽니다. 자기를 위해 남을 죽이고자 했던 가야바는 결국 망하고 말았고 명분으로 내세우던 나라도 얼마 못 가서 로마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꺼이 죽는 한 알의 밀이 되고자 했던 주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셨고 내 마음속에, 여러분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계신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가야바와 같이 다른 사람이 죽기를 원하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까? 아내가 먼저 꼬리를 내리고 죽어 주기를 명령하던 남편은 아니었습니까? 남편더러 먼저 죽기를 요구했던 아내는 아니었던가요? 자식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죽어 주기를 강요했던 부모는 아니었습니까? 부모가 먼저 죽어 주기를 고대했던 자녀는 아니었습니까? 목사가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성도는 아니었습니까? 양은 그저 아무 소리 말고 조용히 죽어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목사는 아니었습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가야바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주님처럼 죽어 썩어지는 하나의 밀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어제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72년이 지났지만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여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밀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예전 교과서에서 강재구 소령 이야기를 배운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1965년 베트남 파병 훈련 중 부하가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리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100여명 부대원의 목숨을 구했다는 내용입니다. 28살 젊은 청춘이었습니다. 당시 군복 상의에 작은 성경책이 있었는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요한복음 15장 13절 말씀에 빨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었기에 수많은 생명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며 내어 드리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당장의 이익보다 영원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기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기꺼이 한 알의 밀이 될 수 있고, 낮아지고 죽는 자리에까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고 십자가에 죽는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그분을 높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알의 밀로 죽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수많은 열매를 맺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높여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서 나의 가족이, 교회가, 사회가, 세상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되기를 소원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야 한다고(24절), 자기의 생명까지 미워해야 한다고(25절),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섬겨야 한다고(26절) 말합니다. 제자가 되는 길은 그냥 저냥 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전심을 드려야 할 길입니다. 그럼에도 “나로 주님을 닮은 하나의 밀알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진심어린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자신을 내어 드리자 28절에 보면 하늘에서부터 음성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아버지의 뜻임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0절에서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음성이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곧 우리를 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2절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들릴 때, 부활로 다시 일어날 때, 그때에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오늘 예수를 뵙고자 찾아왔던 헬라인까지라도 이끌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모래시계에 비유했습니다. 참 일리 있는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모래시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한없이 돌고 도는 손목시계가 아니라 처음과 끝이 있는 모래시계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양의 모래가 밑으로 흘러갔습니까? 이제 얼마나 많은 양이 남아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반쯤 남았을 테고, 어떤 분들은 삼분의 일밖에 안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아래로 내려가 버린 세월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위에 남아 있는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2장 36절에서 주님은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고 참된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호흡이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아직 생명이 있는 동안에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의 밀알로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예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을 한 번 더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다면 영광도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기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가정을 살리고, 직장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결국 자신도 살리는 하나의 밀알, 소망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2년 6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죽어야 사는 비밀” (요 12:20-2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375, 45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요 12:20-2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1965년 베트남 파병 훈련 중 부하가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리자강재구 소령은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100여명의 부대원을 구하고 대신 죽었습니다그는 당시 28살의 젊은 청춘이었습니다당시 그의 군복 상의에는 작은 성경책이 있었는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요한복음 15:13 말씀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의 요약

요한복음에서 무척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는 바로 입니다요한복음에서는 늘 주님께서 자신의 를 염두하고 계시며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 7:6, 요 7:8 그러나 오늘 본문부터 (12:23, 13:1, 17:1 주님은 이제 자신의 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여기에서 그 때는 무엇일까요바로 주님이 죽으실 때입니다.

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주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7:27) 그런데 그 다음 주님은 곧바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7:28) 여기에서 그러나는 위대한 역접 접속사입니다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기 부인이었습니다우리에게도 그러나의 반전이 필요합니다세상의 시류를 따라 넓은 길편한 길로 가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좁은 길허한 길로 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새생명을 얻게 되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정말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렇게 두 번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주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시며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죽음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죽어야 사는 비밀이 고난과 부활의 사건입니다이 세상의 본질은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입니다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나 죽고 너 살라는 것입니다그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나의 가족이교회가사회가세상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의 삶입니다영어에는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뜻입니다십자가의 고난이 있기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우리 모두가 하나의 밀알이 될 때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리는 소망의 한 사람이 될줄로 믿습니다.

 

나누기

1. 어느 때에 나는 나의 못난 자아를 고집하며 희생하거나 포기하지 못하나요?

2. 가족이나 직장동료이웃친구 등과의 관계에서나는 어떻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서로를 살릴 수 있을까요?

마무리기도

주님우리도 주님을 닮아 더 낮아지고더 내려놓게 하옵소서우리의 낮아짐으로 결국 모두를 살리고 세우는 주님의 역사에 참여케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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