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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다 보면 유익이 따릅니다. >
“죽었다고 생각해”, 선친께서 주신 주옥같은 조언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잠시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기는 했지만 큰 교회도 아니었고, 동네에 계시는 분들이다 보니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면 가야할지, 때로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떠나온 교회와 지혜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죽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적용하다 보니 고민이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가야지’ 혹은 ‘이 사람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이때는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 때마다 ‘너 죽었잖아. 죽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니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지만 당시에는 섭섭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혹 오해를 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설교를 통해 그 마음을 푸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과 상담을 나눈 내용이 기억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 보니 싸움이 끊이질 않던 부부였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와 분노가 올라왔답니다. 그래도 아내를 죽일 수는 없고, 살맛은 나지 않으니 자신이 죽어야겠다며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산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죽을 준비를 하던 중에 자신이 죽게 되면 더 이상 용서할 일도, 사과를 받을 일도, 싸움을 일으킬 일도 없겠구나 싶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꼭 듣고 싶었고 아내에게 이 부분은 사과를 받고 싶었는데 죽으면 다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왔답니다. 이후에 아내가 이런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죽었지’ 생각하니 싸움을 일으킬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한 글입니다.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며느리의 이런 점, 저런 점이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안부를 묻는 전화도 뜸한데, 한 번 찾아와서는 금방 떠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지인에게 불평을 늘어놓자 그분이 이렇게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며느리,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지실 겁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는데 며느리 죽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마음이 많이 편해지실 겁니다. 그렇다고 며느님들은 시어머니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찾아뵙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처럼 ‘죽었다’ 생각하면 문제가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
그렇다면 ‘죽었다’고 생각할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먼저는 밖에서부터 오는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해 의식을 갖지 않고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든지 혹은 악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때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대응할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죽었으니 자연히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 일을 경험할 뿐이죠.
‘죽음’은 생물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생명, 호흡, 심장이 멈추는 자체를 본질적인 죽음으로 이해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겪는 죽음의 의미도 상당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잊는 것,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상태 역시 죽음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못하는 단계로 들어서는 순간을 죽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잊혀지고, 빼앗기고, 사라지고, 잃게 되는 경험이 너무도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음을 늘 생각하고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죽음이 주는 그림자들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삶이 복된 삶입니다. 죽은 자신이 내일을 맞이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그리고는 매일 지나가던 버스를 본다면 감회가 새롭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은 이후에도 버스는 매일 움직이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교회와 직장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밀한 부분까지 느끼고 실감하게 됩니다.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죽음이 실제 찾아온 순간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견딜 만한 힘을 배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악한 마음에서 스스로를 지킵니다. >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면 내면에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이나 죄악 된 마음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한 이성을 보더니 정욕적인 마음이 올라온다거나, 탐나는 물건을 보아서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시다. 올라오는 마음을 막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욕심을 내는 일이 불가능해집니다. 분노나 폭력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한 충동이나 사악한 생각을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정욕이나 감정이 나의 삶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
세 번째로 ‘죽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거나, 어떤 일을 해내고 싶을 때에 ‘너는 죽었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끝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삶, 이것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얻는 또 다른 유익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이뤄 갑니다. >
마지막으로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루를 ‘큰 선물’로 받게 됩니다. 죽은 자신에게 없어야 될 하루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격이 되겠습니까? 어제 죽었으니 오늘 먹는 한 끼 식사는 덤이 됩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어제 죽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하루 더 본다는 일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값진 유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며느리와 사위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실까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왔다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여러분에게 그날은 어떤 날이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기적의 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왜 지금까지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 살아 돌아왔구나! 살아 있었어!’ 하는 감격이 솟구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과 타인에게 ‘작은 죽음’을 선포하며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한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 중)
자신이 죽었다는 의식을 가진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신 권면의 말씀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은 전반부에 서신을 쓴 이유를 설명해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6~7)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고 있다며 이야기합니다. 헐었던 것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헐리고, 그분의 보혈로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바울이 안타깝게 여기며, 권면하기에 이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이것을 다시 살린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여긴 셈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말씀이 등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막혔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수의 형벌의 장을 뜻하는 표현이지요. 한마디로 죽음의 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판결합니까? 유대인들이 가지던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고소하며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는데 너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 너는 죄인이다.” 인간을 정죄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야만 했어”라는 말로 율법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너는 이것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이고, 저것은 악이야. 그러니 저렇게 살면 죄를 짓는 거야. 그 결과는 죽음이야.”와 같은 형식이 율법이 가진 틀입니다. 결국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이어서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두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에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연결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죽었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 말은 “구원을 얻으려면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라는 율법의 틀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이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틀이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타인을 향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잣대로 “적어도 너는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이야기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도 죽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 ‘작은 죽음’은 참된 삶, 참된 부활로의 출구입니다. >
바울의 고백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며느리는 이렇게 살아야지’, ‘목사는 당연히 이래야지’, ‘누구는 저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기준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삶의 태도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못할까?’라는 자신 안의 자괴감이나 고통에서의 해방을 뜻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거나, 후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충분히 우리를 덮고 있고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며, 용기를 얻고 일어서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입니다.
죽음은 결국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말한 죽음은 자포자기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생각하며 말한 게 아닙니다. 그저 포기한다는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린도전서 15:31~32)
바울은 살기 위해 죽는다고 말합니다. 부활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었다고 생각하십시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나에게 올라오는 욕망과 죄악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일 때에 이 일은 가능하며, 진정 모두가 살 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죽었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Let’s Think We’re Dead
Galatians 2:20
After doing ministry in the United States for a while, I went back to school to finish my thesis. It was really hard to say goodbye to my church family whom I had come to love deeply. Many wanted to meet me after I left. Whom should I meet and whom should I not? When I asked my father for advice he said, “Just think you’re dead.”
This became a good guiding light in my relationships. ‘Shouldn’t I meet this person at least?’ I would ask myself. But when I applied my father’s advice, there was peace for everyone, including myself and my former church members. If I seemed uncaring at that time, I hope any misunderstandings may be cleared up. After returning to Korea, I found thatmy father’s advice actually helped me build a stronger relationship with my former church members.
Ialso hearda man’s story about his struggling marriage. He and his wife quarreled so such that he felt an uncontrollable anger, betrayal, frustration, and even had suicidal thoughts. One day he decided to hang himself on a tree and walked up a hill. At that very moment, however, it dawned on him that all chances would be lost after death. He would not even be able to fight, reconcile, or forgive. So he came back home, deciding to live life as if he were dead. Since then, everything was bearablebecause he considered himself dead—even when his wife said the most hurtful things. Considering himself dead actually helped him overcome his crisis and build a happy family.
There was a woman who greatly disapproved of her daughter-in-law. Since I heard this story quite a few years back, young people may not be able to relate to it so well. The daughter-in-law neither cooked for her husband, called her parents-in-law, nor visited them. Even when she came, she left abruptly saying she had to care for the kids. The mother-in-law was deeply distressed. When she confided in someone, that person said, “Just consider her dead. Then you will be at peace.”
How does it help to think you are dead?
First, we can facewhatever comes our way—lies, evil actions, slander, and rudeness. We can bear almost anything if we think and live as if we were dead. There is no room for words like “This I can’t take!”
Death is more than just a biological death. Being forgotten and losing presence are a form of dying, too. Losing influence or freedom to act/speak are deaths, too. Losing all opportunity is death. A biological death entails all of these deaths. However, one who is conscious of his end is also cognizant of all the shadows cast by a biological death. He experiences death even as he lives.
Experiencing death while living is a way of life. True wisdom lies in it. One who experiences “small deaths” while he lives takes on death bravely when it comes. He is not shaken by deathbecause he knows its nature. He has built up enough strength to endure it.
Second, a person who considers himself dead can control evil temptations that rise from within.
Let’s say you find yourself having indecent thoughts about a woman/man. Or maybe you suddenly feel an urge to steal. We cannot stop thoughts all together. As Martin Luther said, “You cannot keep birds from flying over your head, but you can keep them from building a nest in your hair.”
When evil thoughts, desires, lust, anger, or violent impulses arise, say to yourself, “I’m dead.” Say to yourself, “Your dead, which means you cannot carry out your thoughts and impulses.” If you consider yourself dead, you will carry out evil impulses less.
Third, thinking you’re dead helps you trust in God alone. If you consider yourself dead, you will feel powerless before problem. This will make you depend on the Lord more and pray more. If you think you are dead, all you can do is pray and make supplications to God.
Fourth, to a person who is always cognizant of death today is a gift. To such a person every new day is a gift because, as a dead man, he did not expect it to come. So he is grateful and happy.If I died yesterday, today’s meals would be a gift. If I died yesterday, seeing the faces of friends and family would a pure blessing. You would always be happy.
A man who thinks he is dead is always grateful. It is a blessing that he has strength today, that he can talk with friends today. He is grateful for every small thing—however insignificant. If you thought that your son-in-law/daughter-in-law were dead, it would be a joyous miracle if they came to visit.
Dear church, why don’t we consider ourselves dead this year? If you think “I’m dead,” you will be able to forgive and withstand whatever difficulty that comes your way. You will have no choice but to pray and will always be full of thanksgiving.
Paul lived like this. He said he died every day: “I face death every day—yes, just as surely as I boast about you in Christ Jesus our Lord.”(1 Corinthians 15:31)
Today’s passage from Galatians says something similar, although expressed in different terms: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Galatians 2: 20)
Paul lived with a consciousness that he was already dead. What did he die to? What did he mean by “I face death every day”? What does it mean to be crucified on the cross? I want us to hear God’s voice in today’s Scripture with these questions in mind.
Today’s passage is well-known and dear to many. Galatians was written by Paul for the Christians in Galatia who returned to the Law after receiving true salvation through Christ Jesus. In the introduction Paul mentions the purpose the letter: “I am astonished that you are so quickly deserting the one who called you to live in the grace of Christ and are turning to a different gospel— which is really no gospel at all. Evidently some people are throwing you into confusion and are trying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Galatians 1:6-7)
Then what is a different gospel or perverting the gospel?Paul says the Galatians are rebuilding what has beendemolished, the Law. The Lord abolished the Law, saving us with His blood and reconciling us to God. Yet, the Galatians are returning to it.
That is why Paul says, “I do not set aside the grace of God, for if righteousness could be gained through the law, Christ died for nothing!”(Galatians 2:21)
This is the context of today’s verse,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Galatians 2: 20)
Here Paul talks about being “crucified with Christ.”What does this mean? What is the meaning of Christ’s cross?
It is the very scene of execution. In a word,the crossis death.How does someone get sentenced to death on a cross? By the Law.
The Law is something that humans simply must abide by. Yet, they cannot follow it perfectly. Therefore, it continuously condemns and accuses us. It charges and judges us, always finding fault. I would explain the Law in easy, contemporary terms as such: “You should have lived this way. This is how you should live. You, of all people!”
Furthermore, the Law forces itself on us as a“divine rule.”The Law is absolutely right and good. It is what God wants. That is evil, and you must not choose it. If you don’t live this way, you’re sinning. You’ll die.
This is the basic framework of the Law. And what happened when it was applied to humans? The Bible clearly says,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and all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Romans 3:23-24)
Yes. The cross is redemption. Through the cross Jesus redeemed us, bearing all our sins, shame, and weaknesses.
Paul compares his death to Jesus’ death on the cross. This means that Paul is now free from the Law which constantly dictates us to live like this or like that.
The Law’s forceful demands can no longer torment man because Jesus solved this problem on the cross once and for all. Christ’s cross abolished the Law’s framework which orders man to live in a certain way to be redeemed.
Therefore, Paul also proclaims that he has died to such a framework. This is what he means when he says that he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He means that he has already died on the cross. This is the gospel.
The demands of the Law—“You of all people should live this way. You should have done this!”—may be what we are saying to other people and to ourselves. But Paul says that he has died to all this.
First of all, this means that one does not apply the Law to other people or judge them. In today’s terms, this is freedom from a pressure to live in a certain way. Crucifying oneself on the cross means to do away with a life attitude that judges others with certain standards and drags them to court for not meeting them. It is to escape our standards on how a daughter-in-law must act or how a pastor must behave and so forth.
Internally, it means to be free from a sense of shame that makes us think, ‘I’m so pathetic.’This means not being trapped in sadness, despair, or regret after viewing yourself from the Law’s standards. Even when you are condemned and criticized, you can stand again with a new courage by accepting the grace of the cross.
Eventually, our death leads to a new life. The death that Paul talks about does not end in despair. Paul says, “I face death every day—yes, just as surely as I boast about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If I fought wild beasts in Ephesus with no more than human hopes, what have I gained? If the dead are not raised, ‘Let us eat and drink,for tomorrow we die.’” (1 Corinthians 15: 31-32)
Paul confesses that he dies in order to live. The reason why he dies daily and experiences death is to live each day anew.
Paul confesses,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Galatians 2: 20)
Dear Church, let’s think we’re dead. If we do, we will be able to face anything. We will be able to control oursurging sins and desires. We will stop judging people. We will be able to pray, trusting in God alone. Each day will be full of thanksgiving and miracles. We will be happy.
Our Lord works for us. Therefore, we must try harder to do the things that please Him.
Dying is the true way to life and happiness.
갈라디아서 2: 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다 보면 유익이 따릅니다. >
“죽었다고 생각해”, 선친께서 주신 주옥같은 조언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잠시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기는 했지만 큰 교회도 아니었고, 동네에 계시는 분들이다 보니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면 가야할지, 때로는 이 사람 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떠나온 교회와 지혜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이 “죽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적용하다 보니 고민이 해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가야지’ 혹은 ‘이 사람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 ‘이때는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들 때마다 ‘너 죽었잖아. 죽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하니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지만 당시에는 섭섭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혹 오해를 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설교를 통해 그 마음을 푸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분과 상담을 나눈 내용이 기억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다 보니 싸움이 끊이질 않던 부부였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와 분노가 올라왔답니다. 그래도 아내를 죽일 수는 없고, 살맛은 나지 않으니 자신이 죽어야겠다며 산으로 올라갔답니다. 산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죽을 준비를 하던 중에 자신이 죽게 되면 더 이상 용서할 일도, 사과를 받을 일도, 싸움을 일으킬 일도 없겠구나 싶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꼭 듣고 싶었고 아내에게 이 부분은 사과를 받고 싶었는데 죽으면 다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왔답니다. 이후에 아내가 이런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내가 죽었지’ 생각하니 싸움을 일으킬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한 글입니다.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며느리의 이런 점, 저런 점이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안부를 묻는 전화도 뜸한데, 한 번 찾아와서는 금방 떠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지인에게 불평을 늘어놓자 그분이 이렇게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며느리,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지실 겁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는데 며느리 죽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마음이 많이 편해지실 겁니다. 그렇다고 며느님들은 시어머니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찾아뵙지 않으면 안 되겠죠. 이처럼 ‘죽었다’ 생각하면 문제가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
그렇다면 ‘죽었다’고 생각할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먼저는 밖에서부터 오는 문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해 의식을 갖지 않고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든지 혹은 악하거나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때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대응할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죽었으니 자연히 지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그 일을 경험할 뿐이죠.
‘죽음’은 생물학적 용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생명, 호흡, 심장이 멈추는 자체를 본질적인 죽음으로 이해하기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겪는 죽음의 의미도 상당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잊는 것,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상태 역시 죽음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살지 못하는 단계로 들어서는 순간을 죽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잊혀지고, 빼앗기고, 사라지고, 잃게 되는 경험이 너무도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음을 늘 생각하고 산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죽음이 주는 그림자들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삶이 복된 삶입니다. 죽은 자신이 내일을 맞이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그리고는 매일 지나가던 버스를 본다면 감회가 새롭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은 이후에도 버스는 매일 움직이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 교회와 직장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세밀한 부분까지 느끼고 실감하게 됩니다.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죽음이 실제 찾아온 순간에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견딜 만한 힘을 배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악한 마음에서 스스로를 지킵니다. >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면 내면에서 올라오는 악한 생각이나 죄악 된 마음도 제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실까요? 한 이성을 보더니 정욕적인 마음이 올라온다거나, 탐나는 물건을 보아서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시다. 올라오는 마음을 막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욕심을 내는 일이 불가능해집니다. 분노나 폭력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한 충동이나 사악한 생각을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정욕이나 감정이 나의 삶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
세 번째로 ‘죽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게 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일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거나, 어떤 일을 해내고 싶을 때에 ‘너는 죽었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끝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삶, 이것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얻는 또 다른 유익입니다.
<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이뤄 갑니다. >
마지막으로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은 하루를 ‘큰 선물’로 받게 됩니다. 죽은 자신에게 없어야 될 하루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격이 되겠습니까? 어제 죽었으니 오늘 먹는 한 끼 식사는 덤이 됩니다. 신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어제 죽었는데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하루 더 본다는 일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감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값진 유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며느리와 사위가 죽었다고 생각해 보실까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서 오랜만에 안부 전화가 왔다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여러분에게 그날은 어떤 날이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기적의 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왜 지금까지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 살아 돌아왔구나! 살아 있었어!’ 하는 감격이 솟구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놀라운 반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과 타인에게 ‘작은 죽음’을 선포하며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
여러분, 바울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매일같이 죽음을 경험한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 중)
자신이 죽었다는 의식을 가진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신 권면의 말씀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은 전반부에 서신을 쓴 이유를 설명해 두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6~7)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고 있다며 이야기합니다. 헐었던 것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헐리고, 그분의 보혈로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바울이 안타깝게 여기며, 권면하기에 이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1)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이것을 다시 살린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여긴 셈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본문 말씀이 등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막혔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형수의 형벌의 장을 뜻하는 표현이지요. 한마디로 죽음의 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판결합니까? 유대인들이 가지던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고소하며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는데 너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있다. 너는 죄인이다.” 인간을 정죄하고 고소하고 고발하는 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야만 했어”라는 말로 율법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적용한다면 ‘너는 이것을 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이고, 저것은 악이야. 그러니 저렇게 살면 죄를 짓는 거야. 그 결과는 죽음이야.”와 같은 형식이 율법이 가진 틀입니다. 결국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이어서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두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에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연결합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죽었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 말은 “구원을 얻으려면 적어도 이렇게는 살아야지”라는 율법의 틀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이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틀이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율법은 타인을 향한 요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잣대로 “적어도 너는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이야기하며 정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도 죽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 ‘작은 죽음’은 참된 삶, 참된 부활로의 출구입니다. >
바울의 고백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며느리는 이렇게 살아야지’, ‘목사는 당연히 이래야지’, ‘누구는 저렇게 살면 안 되지’라는 기준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삶의 태도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못할까?’라는 자신 안의 자괴감이나 고통에서의 해방을 뜻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잣대로 자신을 돌아보며 슬픔에 잠기거나, 후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충분히 우리를 덮고 있고 그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며, 용기를 얻고 일어서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고백입니다.
죽음은 결국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말한 죽음은 자포자기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생각하며 말한 게 아닙니다. 그저 포기한다는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린도전서 15:31~32)
바울은 살기 위해 죽는다고 말합니다. 부활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었다고 생각하십시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용서할 힘이 생깁니다. 나에게 올라오는 욕망과 죄악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일 때에 이 일은 가능하며, 진정 모두가 살 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죽었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갈 2:2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7장, 40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갈 2:2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월 1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어떻습니까? 혹시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존재감이 없어지며, 더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한순간 남의 것이 되기도 하며,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주는 그림자들은 그래서 두렵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설교의 요약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면 밖으로부터 내게로 향하여 드는 상처를 견딜 수 있습니다. 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겐 “이것만큼은 못 참아”라는 말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악한 생각이나 욕심, 분노가 치밀 때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억제할 것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늘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합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님을 향한 탄원뿐입니다. 만약 어제 죽었다면 어떻습니까? 오늘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매일 같은 오늘이 감사와 축복이 됩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의 지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죽었다는 의식을 갖고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부족함,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허물과 죄를 정죄하고 고발합니다. 이런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고 율법의 틀에서 해방함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외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대와 요구, 내적으로는 왜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지에 대한 자괴감에서 해방이 십자가의 은혜이고 속량의 기쁨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결코 자포자기의 결말이 아닙니다. 그가 매일 죽는 이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경험하는 이유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함의 결단이고 다짐이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 받아낼 수 있고, 솟아 올라오는 욕망과 죄악을 다스리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를 죽이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진정한 살 길입니다.
나누기
1.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떤 마음이 올라오십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날마다 내가 죽노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매일의 죽음의 경험이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살리게 할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참 자유와 사랑을 되새깁니다.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정죄하고 상처를 주며, 낙심하고 절망하는 그 자리에서 “날마다 내가 죽노라” 외치며 은혜의 자리로 나오게 하옵소서. 내가 죽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참된 부활과 생명을 경험하는 것임을 알며 올 한해를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