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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영원이 아니다

누가복음 6:20~23

김경진 목사

2024.11.24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상치 못한 고난을 당할 때 신앙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종종 예수님을 믿다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연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마는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는가?”,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필요할 때, 왜 나의 아버지를 데리고 가셨는가?”, “예수님을 그렇게도 잘 믿고 헌신적이었던 아내를 왜 그렇게 데려가셨는가?”, “내가 가장 힘들 때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에게 거부당한 것 같은 경험이 상처가 되어서 하나님을 떠난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목회자도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힘든 일을 직접 당할 때 당사자들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적어도 이런 생각과 기대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언가 복을 받을 수 있겠지’,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셔서 나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겠지’, 또 ‘내가 예수를 잘 믿으면 그래도 이 땅에서 불이익은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큰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죠. “하나님은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나에게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배신했으니, 내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안 믿는 것과는 차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비추어 주시는 한 줄기의 빛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뒤 따를 제자들에게 우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첫 번째 설교를 하신 후, 두 번째의 본격적인 강해가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평지 설교로 알려져 있는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느 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데리고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십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실 때 옆을 따라가던 일부의 무리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마치시고 그들 중에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신 듯 보입니다. 그리고 평지로 내려오시죠.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오셨을 때 12명의 제자들과 무리 및 많은 백성이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의 능력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눅 6:20a)

 

성경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눈을 맞추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일차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막 12명의 제자를 선출하신 다음에 그들 앞에 첫 번째 강론을 시작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첫 번째로 12명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뒤에 다른 제자들과 많은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차적인 말씀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b)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가난한 자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첫 설교를 하실 때에도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눅 4:18a)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죠. 그리고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하시며 역시 가장 먼저 가난한 자를 언급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 6:20b)

 

여기서 ‘너희’는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앞선 6장 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걸어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을 가다가 밭에서 이삭을 주워 먹는 것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던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들이 배고프고 가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너희 가난한 자는”이라는 말씀 속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금주리고 배고파하는 자들을 향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12명의 제자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 앞으로 나왔겠습니까? 부자들, 잘 사는 사람들, 여유로운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었겠죠. 그들은 좋은 집에서 잘 자고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야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지로 나왔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어서 예수님께 나왔겠죠. 살 소망이 없고 배가 고파서, 병이나 귀신이 드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난한 자’라고 시작하는 이 말씀은 이런 모든 상황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병 들어서 가난하고, 그리고 귀신 들려서 가난합니다. 무언가 핍절된 상태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너희 가난한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의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풀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

‘주리다’라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굶주림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상존합니다. 영적으로 주릴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주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관계나 여러 가지 관점에서 주린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매우 흥미로운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단어는 ‘지금’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눈’(νῦν[nun], now, at present, at this time, 지금, 현재)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이 단어를 이곳에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라는 뜻인데,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당시의 현재를 의미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던 2천여 년 전 어느 마을 평지에 있었던 수많은 군중들, 그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들, 지금 우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난한 이들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2천 년이 지났으니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겠지만, 그러나 그때 그 지점에 그들은 울고 있었고, 배고파하고 있었고, 핍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지금’이라는 말은 당시의 ‘지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금’입니다. 2024년 11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지금을 말합니다.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주리고 있는 자, 지금 배고파하고 있는 자, 지금 울고 있는 자,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인 바로 나, 바로 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배고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영원이 아니기에, 지금 배고픈 이들은 달라질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먼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의 배고픔과 슬픔, 부족한 현실들이 결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표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우는 자, 지금 배고파하는 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울고 있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시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는 이 단어는 현재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의미로 ‘영원하다’는 말의 반대 개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영원’이 아니죠. 다시 말하면 이 ‘지금’은 지나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수없이 상황은 바뀌고 뒤바뀌어 변화합니다.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고픈 지금은 또 다른 미래를 꿈꾸게 합니다. 언젠가는 배가 부를 것입니다.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배고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주는 혜택이고,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지금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배부른 자는 배고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겪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배고프고 슬플 때, 지금 이것이 와 있으니 이제 다른 것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를 말씀하십니다. 배고픔이 왔을 때 이 배고픔이 잠시만 나에게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두려움은 배고프고 슬플 때, 이것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영원히 아닙니다. 지금은 지나가는 현재입니다. 상황은 바뀔 것이고,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배부른 자는 배고플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의 찬송이 있습니다.

1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2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

3 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함 후에 친구 있네

4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새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둠 속에 있습니까? 지금 곧 빛이 이를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지금 잔잔하게 될 것입니다. 소나기를 맞고 있습니까? 지금 햇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지금이라는 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의 상이 주어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지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말씀드렸는데, ‘지금’의 나머지 한 가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은 2천 년 전 당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시간의 현재일 수도 있지만, 2천 년 후의 지금인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우는 ‘지금’일 수도 있죠. 그런데 ‘지금’은 또 한편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전체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생 가난할 수도 있고, 배고픔을 가지고 살 수도 있으며, 또 평생 울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삶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이미 예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2)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핍박받고 욕을 들으며, 버림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세상의 관점으로 이 땅에서의 삶 그 자체로 본다면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지금 현실 속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3)

 

물론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다가 받는 핍박과 고난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과 핍박을 받고 순교의 자리에 설 때 도리어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현실에서 고난과 어려움, 가난, 배고픔, 울음,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 사람은 하늘에서 걸맞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상’이라는 단어는 ‘미스도스(μισθός[misthos], reward, recompense, punishment)’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보상’과 ‘심판’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시는 보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며, 동시에 그 뒤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평생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되고 울고 아파하며 지내게 된다고 하여도 실망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 너희는 훗날 보상을 하늘에서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지금 우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배고픈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유 없이 매를 맞고 힘든 일을 겪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늘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과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결코 영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결코 영원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틀어 모든 지금도 결코 영원이 아닙니다.

 

<지금을 뛰어넘는 기쁨은 주어지는 기쁨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간에 도리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기뻐하라’라는 명령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헬라어의 단어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카이로’(χαίρω[chairó], rejoice, be glad, be joyful, 기쁘다)의 수동형으로 ‘카레테’(χάρητε)입니다. 극심한 역경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은 사실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어디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야만 합니다. 수동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 슬픔,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어떻게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내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좋은 일이 오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평생 어려움을 당해도 받을 것이 있으니까 기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누리는 기쁨은 수동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앞으로 받을 보상이 아니라 그 보상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바르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말씀을 주제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결국은 보상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슬픔에 대한 보상, 어려움에 대한 보상, 억울함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차원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성령을 통하여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울고 있습니까? 지금 배가 고프십니까? 지금 억울하십니까? 지금은 영원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지나가는 날입니다. 지금은 현실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새날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삶에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늘을 바라봅시다.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응원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며, 그분이 준비하고 있는 상급을 바라보며 힘차게 삶을 달려갑시다. 그럴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Now is Not Forever

 

Luke 6:20-23

 

Oftentimes I hear about people who cameto believe in Christ but for some reason stop coming to church. There may be several reasons for this, but the one that gets mentioned often is disappointment in God.

 

Why did God take away my mother when I was so young? Why did He take away my father when I needed him so? Why didn’t God heal my sick wife when I believed Him so well and served the church with a deep commitment? Why didn’t He answer my prayers when I prayed to Him so earnestly?

 

The experience of feeling as if God rejected us becomes a great wound, leading many people to leave God.

 

As a pastor I have seen many such people. Whenever such a thing happens to a member of a church, the ministers also get dispirited. When people go throughextreme hardships, they feel as though God is not on their side.

 

When we come to believe in Christ, we, as baby Christians, tend to think and expect thefollowing: ‘If I believe in Jesus, He will help me when I faceadversities in this world! If I believe in God, He will be on my side and listen to my prayers!God may not give me special treatment, but if I believe in Jesus, I will at least avoid disadvantageous or unfair situations in this world!’

 

But as we go through life we sometimesexperience things that destroy these expectations. We come to conclude, ‘God either does not exist, or is incapable, or is not interested in me. God does not love me. And since He betrayed me, there is nothing wrong in me rejecting Him.’Many Christians abandon their faith after coming to such conclusions.

 

Yes, of course, good things ought to happen if we believe in God. Shouldn’t there be a difference between believing in God and not believing in Him? Wouldn’t the believer be comforted by the fact that the life of the believer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unbeliever? But when life does not appear to be so, we get confused. Our faith falters.

 

Today’s Scripture may be a beacon of light to Christians who have felt this way. In today’s text from Luke, Jesus gives a second, longer teaching after His first, short sermon in Nazareth: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Luke 4:18-19)

 

The context of what is known as Jesus’“Sermon on the Plain” is as follows: According to Luke, one dayJesus goes upa mountain and prays all night. Then He chooses the twelve disciples.

 

After that, He descends the mountain with them and enters the plains. If we picture Luke’s story in our minds, it appears that a crowd followed Jesus up to the mountain when He went to pray, but He chose the Twelve out of them.

 

“He went down with them and stood on a level place. A large crowd of his disciples was there and a great number of people from all over Judea, from Jerusalem, and from the coast of Tyre and Sidon,”(Luke 6:17)

 

When Jesus came down to a level placewith His disciples, manypeople who wanted to hear Him speak and see His power flocked to Him. There, in front of all those people, Jesus starts a sermon:

 

“Looking at his disciples, he said…”(Luke 6:20a)

 

The Bible says that when He started to speak He looked at His disciples.

 

This means that the primary target of His sermon was the Twelve. Of course, all the other people were also His audience.

 

Jesus started His sermon with these words: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Luke 6:20b)

 

These words show that Jesus’whole interest was in the poor. When He gave His sermon in Nazareth, He also talked about the poor.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Luke 4:18a)

 

Again, in His second sermon, the first group of people He mentions is none other than the poor.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Here Jesus would primarily be addressing His disciples. Luke 6:1 mentions that when Jesus was walking through the grainfields, His disciples pickedsome heads of grain, rubbed them in their hands, and ate the kernels. This indicates that the disciples were poor.

 

Furthermore, why would such a crowd flock to Jesus in the plain? They would have come because they lacked something. They wouldhave come to Jesus because they had lost hope, were hungry and sick, were possessed by evil spirits, and so on.

 

The phrase “you who are poor” refers to all such people going through diverse difficulties. They would have been “poor”because they were economically strapped, because they lacked something, orbecause they were sick or demon-possessed. They were all deficient in some way or another.

 

Jesus describes their state of poverty as follows: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will be satisfied.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Luke 6:21)

 

Here an interesting word appears: “now.” This word in Greek is “νῦν (nun),” which means“now, at present, or at this time.”

 

Unlike the other Gospels, Luke uses this word in this place specially:

 

“You who hunger now,”“you who weep now…”

 

What does “now” mean in these verses?

 

First, it could mean the time during which the people were listening to Jesus’sermon, that is, “the present” for those living in Jesus’ time. When Jesus spoke, there would have been hungry people, weeping people, and poor people among the crowd. So we may interpret His words to be aimed at them.

 

However, this phrase Jesus used, “now,” may also target anyone reading and hearing His words today. It may refer to those who are poor now, that is, on the 24th of November 2024. It may be aimed at those who are hungry and weeping now today.

 

Jesus’ primary concern is for the poor, those who hunger now, and those who are weeping now.

 

Why did Jesus speak about these things in His first sermon?

 

It is because He wants to make clearthat our current reality such as hunger, sadness, and lack, which we consider as “God’s curse,” is by no means a sign that God is displeased with us.

 

Jesus, the Son of God, isconcerned for those who are weeping and hungry now. He desires to give them hope.

 

When you ponder these words, “Blessed are you who hunger now, for you will be satisfied,” you will see that they are a truth unveiled to us by time.

 

Now is the present. It is not eternity. It is a fleeting moment.

 

Our situation changes and evolves endlessly. Therefore, the one who hungers now is led to dream of a different future. He will one day be satisfied.

 

He will not hunger forever. At least not during his life on earth. This is the paradox of time. Those who hunger now will be filled.

 

On the contrary, those who are full now will become hungry. This is what we experience continuously in the flow of time.

 

Therefore, Jesus’ words on the plain meansthis: Since you hunger now and because you are weeping now, you must have faith that something different will come.

 

Jesus is telling us that when hunger comes, we must remember that it has come to us for just a while. We must believe that we will not hunger forever. This is our fear. When we are starving or weeping, we think that this state will go on forever. We think we will never get out of this situation. But now is not forever. Now is the present which will pass. The situation will change and those who hunger will be satisfied and the satisfied will hunger.

 

This is the reality of life.

 

These are the lyrics to an often sung hymn:

 

“Light after darkness, gain after loss,

Strength after weakness, crown after cross;

Sweet after bitter, hope after fears,

Home after wandering, praise after tears.

 

[Refrain] Now comes the weeping, then the glad reaping;

Now comes the labor hard, then the reward.

 

Sheaves after sowing, sun after rain,

Sight after mystery, peace after pain;

Joy after sorrow, calm after blast,

Rest after weariness, sweet rest at last. [Refrain]

 

Near after distant, gleam after gloom,

Love after loneliness, life after tomb;

After long agony rapture of bliss—

Right was the pathway leading to this. [Refrain]”

(“Light After Darkness,” F.R. Havergal)

 

Dear Church, are you in the darkness? Light will come. Are you in a storm? It will be calm. Are you caught in a shower? You will see the sun. This is our experience and the truth.

 

I have given you two interpretations of “now.” I want to share a thirdinterpretation.

 

The “now” that Jesus talks about may refer to the “now” of Jesus’ time 2000 years ago; but it may also refer to the“now” of those of us who are hearing and reading His words again today.

 

Still, His “now” may refer to our entire lives lived in this world.

 

In other words, Jesus may be saying we might be poor ourwhole life on earth. We alsomight live in hunger our entire life. Furthermore, we mightlive in pain and sadness our whole life.

 

Jesus predicted that His disciples would live such a life:

 

“Blessed are you when men hate you, when they exclude you and insult you and reject your name as evil, because of the Son of Man.”(Luke 6:22)

 

The disciples who decided to follow Jesus would be persecuted,insulted, and rejected in this world like Jesus. If we viewedtheir lives on earth from the world’s perspective, it would appear theyended in tragedy. Yet, Jesus says that those facing such persecutions now are blessed.

 

Then He says:

 

“Rejoice in that day and leap for joy,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Luke 6:23)

 

These words are aimed at those who are persecuted and insulted for following Christ. But Jesus tells them to rejoice instead. Becausethere will be a reward for them in eternal heaven.

 

In other words, those who are suffering, experiencing hardships, are poor,weeping, andin pain in their present lives, in their reality now, will be rewarded in heaven.

 

The Greek word for “reward” is “μισθός (misthos),” which includes the meanings“reward, compensation, and punishment.” In other words, there will be a reward from God who judges all things fairly.

 

These words are primarily aimed at Jesus’ disciples who will be persecuted for the Gospel. At the same time, they are given to the people listening Jesus’ words behind the disciples.

 

To this crowd, Jesus’ words would have meant the following: “Don’t be disappointed if things are unfair, if you live in pain, if you weep, or if you are sick your entire life on earth. I want to tell you this. You will later be rewarded in heaven.” This was what Jesus was telling the crowd.

 

Therefore, blessed are those who are poor now. Blessed are those who are weeping now.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now. And blessed are those who are now beaten unrighteously, face trials, and are evenmurdered.

 

There will be a reward for them in heaven. On that day we will see the righteousness, justice, and fairness of God.

 

Therefore, now is by no meansforever.

 

Our Lord tells us to rejoice when we face such difficult times.

 

In the original Greek, “rejoice” is used in the passive voice. An English translation of it would be “you will be made very joyful.”The Greek Bible uses “χάρητε”, the passive voice of “χαίρω (chairó)”which means “to rejoice, be glad, be joyful.”

 

The joy we feel in times of extreme hardshipis not something we can generate. This joy has to come from somewhere. It is given to us.

 

How can poverty, sadness, and unfair treatment be a reason for rejoicing? Even the words ensuring future compensation are no comfort to the one who is suffering today.

 

If there is a reason for rejoicing in suffering—even though that joy may be given to us passively—then it is not becauseof a future reward in itself, but becauseof our faith in God who prepares that reward for us.

 

This faith is to believe that God will eventually make all things fair. We are consoled when we have this faith. We can bear hardships, looking to our Lord who will do this. And we can have joy.

 

Stephen looked to heaven when he was martyred. He saw the glory of God and Jesus standing at His right hand. Stephen met his death with his gaze on Jesus.

 

God tells us to “leap for joy.” This means to jump up and down in happinesseven in the midst of suffering.

 

The word“leap”appears just twice in Luke. The Greek word for it is “σκιρτάω (skirtaó),”which means “to leap, to jump, to exult.”

 

The first usage of this word in Luke is when Elizabeth, the mother of John the Baptist, greets Mary when she visits her home. The Bible says that the baby in Elizabeth’s womb “leaped” when Elizabeth greeted Mary. The second usage is found in today’s Scripture.

 

Dear brothers and sisters, are you weeping now? Are you hungering now? Are you being treated unfairly now? Now is not forever. God will give us a new day.

 

Are you still suffering? Does this life on earth seem hopeless? Look to heaven. Look to the Lord who looks at us and encourages us. Look at the reward He holds. And be comforted. Rejoice. Faith will lead us to joy and thanksgiving. No matter our circumstanc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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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20~23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상치 못한 고난을 당할 때 신앙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종종 예수님을 믿다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연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마는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는가?”,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필요할 때, 왜 나의 아버지를 데리고 가셨는가?”, “예수님을 그렇게도 잘 믿고 헌신적이었던 아내를 왜 그렇게 데려가셨는가?”, “내가 가장 힘들 때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에게 거부당한 것 같은 경험이 상처가 되어서 하나님을 떠난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목회자도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힘든 일을 직접 당할 때 당사자들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적어도 이런 생각과 기대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무언가 복을 받을 수 있겠지’,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셔서 나의 기도를 다 들어주시겠지’, 또 ‘내가 예수를 잘 믿으면 그래도 이 땅에서 불이익은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큰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죠. “하나님은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나에게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배신했으니, 내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안 믿는 것과는 차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비추어 주시는 한 줄기의 빛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뒤 따를 제자들에게 우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첫 번째 설교를 하신 후, 두 번째의 본격적인 강해가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평지 설교로 알려져 있는 본문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느 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데리고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십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내용을 다시 그림으로 그려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실 때 옆을 따라가던 일부의 무리가 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마치시고 그들 중에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신 듯 보입니다. 그리고 평지로 내려오시죠.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내려오셨을 때 12명의 제자들과 무리 및 많은 백성이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의 능력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눅 6:20a)

 

성경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눈을 맞추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일차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막 12명의 제자를 선출하신 다음에 그들 앞에 첫 번째 강론을 시작하십니다. 즉, 이 말씀은 첫 번째로 12명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뒤에 다른 제자들과 많은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차적인 말씀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b)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가난한 자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첫 설교를 하실 때에도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눅 4:18a)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죠. 그리고 두 번째 설교를 시작하시며 역시 가장 먼저 가난한 자를 언급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 6:20b)

 

여기서 ‘너희’는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앞선 6장 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걸어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길을 가다가 밭에서 이삭을 주워 먹는 것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던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습니다. 그들이 배고프고 가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너희 가난한 자는”이라는 말씀 속에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지금주리고 배고파하는 자들을 향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12명의 제자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 앞으로 나왔겠습니까? 부자들, 잘 사는 사람들, 여유로운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 앞에 나올 이유가 없었겠죠. 그들은 좋은 집에서 잘 자고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야 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지로 나왔던 사람들은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어서 예수님께 나왔겠죠. 살 소망이 없고 배가 고파서, 병이나 귀신이 드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난한 자’라고 시작하는 이 말씀은 이런 모든 상황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병 들어서 가난하고, 그리고 귀신 들려서 가난합니다. 무언가 핍절된 상태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서 ‘너희 가난한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의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풀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

‘주리다’라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굶주림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상존합니다. 영적으로 주릴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주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관계나 여러 가지 관점에서 주린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매우 흥미로운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 단어는 ‘지금’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눈’(νῦν[nun], now, at present, at this time, 지금, 현재)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이 단어를 이곳에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를 표현합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라는 뜻인데,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당시의 현재를 의미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던 2천여 년 전 어느 마을 평지에 있었던 수많은 군중들, 그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들, 지금 우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난한 이들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2천 년이 지났으니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겠지만, 그러나 그때 그 지점에 그들은 울고 있었고, 배고파하고 있었고, 핍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지금’이라는 말은 당시의 ‘지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금’입니다. 2024년 11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지금을 말합니다.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주리고 있는 자, 지금 배고파하고 있는 자, 지금 울고 있는 자,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인 바로 나, 바로 너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배고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영원이 아니기에, 지금 배고픈 이들은 달라질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먼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의 배고픔과 슬픔, 부족한 현실들이 결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표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 우는 자, 지금 배고파하는 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울고 있는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시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는 이 단어는 현재를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의미로 ‘영원하다’는 말의 반대 개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영원’이 아니죠. 다시 말하면 이 ‘지금’은 지나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수없이 상황은 바뀌고 뒤바뀌어 변화합니다.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고픈 지금은 또 다른 미래를 꿈꾸게 합니다. 언젠가는 배가 부를 것입니다.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배고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주는 혜택이고,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지금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배부른 자는 배고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겪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배고프고 슬플 때, 지금 이것이 와 있으니 이제 다른 것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를 말씀하십니다. 배고픔이 왔을 때 이 배고픔이 잠시만 나에게 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두려움은 배고프고 슬플 때, 이것이 영원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영원히 아닙니다. 지금은 지나가는 현재입니다. 상황은 바뀔 것이고,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배부른 자는 배고플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종종 부르는 찬송 중에 이런 가사의 찬송이 있습니다.

1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바람 분 후에 잔잔하고,

소나기 후에 햇빛 나며, 수고한 후에 쉼이 있네

2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

3 괴로움 후에 평안 있고, 슬퍼한 후에 기쁨 있고,

멀어진 후에 가까우며, 고독함 후에 친구 있네

4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

(새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둠 속에 있습니까? 지금 곧 빛이 이를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지금 잔잔하게 될 것입니다. 소나기를 맞고 있습니까? 지금 햇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지금이라는 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의 상이 주어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앞서 지금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말씀드렸는데, ‘지금’의 나머지 한 가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은 2천 년 전 당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시간의 현재일 수도 있지만, 2천 년 후의 지금인 오늘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우는 ‘지금’일 수도 있죠. 그런데 ‘지금’은 또 한편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전체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생 가난할 수도 있고, 배고픔을 가지고 살 수도 있으며, 또 평생 울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삶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이미 예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2)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갈 것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핍박받고 욕을 들으며, 버림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세상의 관점으로 이 땅에서의 삶 그 자체로 본다면 비극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지금 현실 속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3)

 

물론 이 말씀은 예수를 따르다가 받는 핍박과 고난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과 핍박을 받고 순교의 자리에 설 때 도리어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현실에서 고난과 어려움, 가난, 배고픔, 울음,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간 사람은 하늘에서 걸맞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상’이라는 단어는 ‘미스도스(μισθός[misthos], reward, recompense, punishment)’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보상’과 ‘심판’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시는 보상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복음을 위해 박해받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며, 동시에 그 뒤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평생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되고 울고 아파하며 지내게 된다고 하여도 실망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 너희는 훗날 보상을 하늘에서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지금 우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 배고픈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지금 이유 없이 매를 맞고 힘든 일을 겪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늘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평과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결코 영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은 결코 영원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틀어 모든 지금도 결코 영원이 아닙니다.

 

<지금을 뛰어넘는 기쁨은 주어지는 기쁨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시간에 도리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기뻐하라’라는 명령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헬라어의 단어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카이로’(χαίρω[chairó], rejoice, be glad, be joyful, 기쁘다)의 수동형으로 ‘카레테’(χάρητε)입니다. 극심한 역경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은 사실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어디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야만 합니다. 수동형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 슬픔,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어떻게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내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좋은 일이 오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평생 어려움을 당해도 받을 것이 있으니까 기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쁨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누리는 기쁨은 수동형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앞으로 받을 보상이 아니라 그 보상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바르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말씀을 주제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결국은 보상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슬픔에 대한 보상, 어려움에 대한 보상, 억울함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차원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성령을 통하여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울고 있습니까? 지금 배가 고프십니까? 지금 억울하십니까? 지금은 영원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저 지나가는 날입니다. 지금은 현실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새날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삶에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늘을 바라봅시다.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응원하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며, 그분이 준비하고 있는 상급을 바라보며 힘차게 삶을 달려갑시다. 그럴 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11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지금은 영원이 아니다” (눅 6장 20-2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82장, 312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눅 6장 20-23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1월 2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금의 고통과 슬픔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에는 ‘지금’이라는 흥미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 단어를 이곳에서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린자는, 지금 우는 자는 …’ 여기서 ‘지금’은 어떤 의미일까요? 1차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당시의 현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금’은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현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2024년 11월의 마지막 주일인 24일 오늘,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배고픈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이고 지금 배고픈 사람들이고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며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의 배고픔과 슬픔, 지금의 부족함이 마치 신의 저주처럼 여겨지는 이 현실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에 대해 더 생각할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그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전체의 삶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평생 가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평생 울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이 땅에서 핍박을 받고 욕을 듣게 되고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런 일을 당하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는 시간에 도리어 기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극심한 역경 가운데서 누리는 기쁨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이유는 보상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울고 있습니까?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지금은 영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날을 주실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위로를 얻으십시오. 믿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기쁨과 감사로 이끌 것입니다.

 

나누기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슬픔과 배고픔 그리고 삶의 고통은 어떤 것인가요?
  • 지금 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며 지금 우는 자가 웃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현재 고통을 경험하는 나에게 힘과 위로가 된다면 함께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지금 고통받는 자,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억울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한 우리를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며, 응원하고 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우리가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늘의 보상을 기대하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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