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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는 분명하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몇 개의 기적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을 알려 주는 특별한 본문입니다. 예를 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막 5:39)
이 말씀을 하시고 아이를 살려 주십니다. 어쩌면 그때 사람들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인데, 죽은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인 나사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39)
이 말씀과 더불어 죽었던 나사로가 장사되었다가 수족을 베로 동인 모습 그대로 나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정말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까지 마치 기다리신 것 같은 정황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11장 첫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1)
베다니에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는 자매였고, 예수님 역시 그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가족과 예수님의 관계는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의 위급한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면 바로 발길을 돌려서 그들에게로 향하여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11장 6~7절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반응을 알려 줍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6~7)
요한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지역에 계셨습니다. 거리상으로 예루살렘과 나사로의 집인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약 2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반나절 길도 되지 않는 거리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이틀이나 더 그곳에 머무르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 베다니로 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지역, 베다니에서 더 먼 유대 지역으로 나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늦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섭섭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마리아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셨을까요? 처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이 말씀의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나사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이런 판단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신 것처럼 보이죠.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는 죽지 않는다고 잘못 판단하셔서 시간을 끄시다가, 그만 나사로가 죽는 상황을 맞이하셨다는 추측도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실 만한 분이신데 왜 이런 판단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4)
아무것도 예수님께 이런 말을 전한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어 가는 것을 아시면서도 긴 시간을 밖에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나사로를 깨우러, 그를 살리러 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다니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여기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시간을 끄셨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를 다시 살려 내심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고, 예수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 가고 있음에도 시간을 끄셨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을 한계 짓지 않는 믿음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내용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1~4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밝히 알게 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게 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자임을 분명히 믿게 하기 위해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는 믿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
그러니까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시면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나사로가 죽고 말았던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불만과 한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름 믿고 있었는데, 그들의 믿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서는 분명히 해결해 주실 수 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아무리 나쁜 병에 걸렸더라도 주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분명히 살려 내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는 그 믿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절망하며 ‘이제 주님께서 오셔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하였지만,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는 예수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까지 기다리셨던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에게도 소망이시지만 죽은 자에게도 소망이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소용 있는 믿음이라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고, 또 보이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치는 데에만 주력하셨겠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중풍병자와 귀먹은 자를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내어 쫓아 주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겠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가 살아 있는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적을 보여 주시는 데 만족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기적도 그 이상은 보여 주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 삼켜진 다음에도 우리를 살려 내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를 살려 내는 아주 특별한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병이 들었을 때는 병 고침을 받기도 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한편에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능력과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우리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실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서 모범 수업으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능력의 한계 범위가 어디에까지 이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아는 신앙에서 믿는 신앙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신앙의 태도에 대해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관점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 내용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고 드디어 베다니에 나타나신 예수님. 예수님께 마르다는 실망스러운 어조로 ‘예수님께서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나름의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막연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이후에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1~22)
이 말을 할 때 마르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나사로가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기대를 가진 것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뒤의 맥락이 그러합니다.
아마 마르다의 생각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때에 맞춰 오시기만 했더라도 나사로가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늦게 오심으로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른 기도를 해 주실 수는 있겠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평안을 빌어 주신다면 우리 안에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겠습니까? 슬프고 힘들지만 주님께서 현실의 삶을 사는 우리를 위해 고통을 잊도록 기도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라는 하나의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 11:23)
마르다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이 나오니까 약간 당황했겠죠. 그리고 나름대로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멋진 대답이기는 합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지금 즉시 이 자리에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는데, 마르다는 나름 배운 게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서기관들을 통해서 배웠던 것이었겠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활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니겠죠. 그러나 언젠가는 살아날 것을 나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어찌 보면 위로가 됩니다.”
마르다가 대답한 말씀 중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아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안다’라는 말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과 마르다의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마르다는 계속해서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믿느냐”, 즉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르다가 “내가 안다”(Οἶδα, 오이다)라는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느냐?”(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라고 질문과 단어를 바꾸고 계십니다.
<아는 것을 넘어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믿음으로 주님께 뛰어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때로 믿음을 내가 아는 무엇으로 정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죠. 설교 말씀을 통해서나 성경 공부나 여러 가지 신앙 훈련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 갑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 아는 것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부·성자·성령, 그러나 한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죠. 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고, 결국 모든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도 역시 그와 같은 흐름 속에서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의 오라비가 죽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을 나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고쳐서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 ‘무엇을 고백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구를 믿고 있느냐?’,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이며 생명이 되는 나를 너는 믿고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앙을 교리로 정하고, 그 교리를 통해서 신앙을 배워 갑니다. 우리 신앙 안에는 알아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고, 그것들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교리를 아는 것,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사실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미련할 만큼 단순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을 통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 죽음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주님께 무작정 달려드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맹인은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신다’라는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8)
이 말씀을 하고 그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또 어떤 이는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 23:42)
이 한마디의 고백으로써 그는 낙원에 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밑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 거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그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서 분명히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아이는 그저 아빠가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아빠!”라고 부르고는 바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 내지 않겠습니까? ‘아빠’라고 부르고 뛰어드는 이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고상한 경건의 지식도 중요하고 필요하겠지만, 정작 은혜는 예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삶의 문제가 있습니까? 불치병에 걸려 있습니까? 출구가 없는 막힌 곳에 들어서 있습니까? 예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의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해결책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이미 완전히 해결하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전능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17~27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는 분명하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몇 개의 기적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을 알려 주는 특별한 본문입니다. 예를 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적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막 5:39)
이 말씀을 하시고 아이를 살려 주십니다. 어쩌면 그때 사람들이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인데, 죽은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인 나사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39)
이 말씀과 더불어 죽었던 나사로가 장사되었다가 수족을 베로 동인 모습 그대로 나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정말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까지 마치 기다리신 것 같은 정황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11장 첫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1)
베다니에 한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는 자매였고, 예수님 역시 그들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가족과 예수님의 관계는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의 위급한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면 바로 발길을 돌려서 그들에게로 향하여 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11장 6~7절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반응을 알려 줍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6~7)
요한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위급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지역에 계셨습니다. 거리상으로 예루살렘과 나사로의 집인 베다니 사이의 거리는 약 2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반나절 길도 되지 않는 거리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이틀이나 더 그곳에 머무르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 후에 베다니로 가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지역, 베다니에서 더 먼 유대 지역으로 나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늦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 섭섭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마리아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토록 사랑하는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셨을까요? 처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이 말씀의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나사로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이런 판단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신 것처럼 보이죠.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는 죽지 않는다고 잘못 판단하셔서 시간을 끄시다가, 그만 나사로가 죽는 상황을 맞이하셨다는 추측도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실 만한 분이신데 왜 이런 판단을 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4)
아무것도 예수님께 이런 말을 전한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어 가는 것을 아시면서도 긴 시간을 밖에 계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나사로를 깨우러, 그를 살리러 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베다니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여기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시간을 끄셨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그를 다시 살려 내심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고, 예수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 가고 있음에도 시간을 끄셨던 첫 번째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을 한계 짓지 않는 믿음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내용 속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1~4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밝히 알게 하고,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게 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자임을 분명히 믿게 하기 위해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는 믿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
그러니까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시면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나사로가 죽고 말았던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불만과 한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름 믿고 있었는데, 그들의 믿음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서는 분명히 해결해 주실 수 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아무리 나쁜 병에 걸렸더라도 주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분명히 살려 내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는 그 믿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가 절망하며 ‘이제 주님께서 오셔도 더 이상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하였지만,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는 예수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까지 기다리셨던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에게도 소망이시지만 죽은 자에게도 소망이시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만 소용 있는 믿음이라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고, 또 보이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치는 데에만 주력하셨겠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시고, 중풍병자와 귀먹은 자를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내어 쫓아 주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겠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가 살아 있는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적을 보여 주시는 데 만족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기적도 그 이상은 보여 주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 삼켜진 다음에도 우리를 살려 내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를 살려 내는 아주 특별한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병이 들었을 때는 병 고침을 받기도 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한편에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능력과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우리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사실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서 모범 수업으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부활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능력의 한계 범위가 어디에까지 이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아는 신앙에서 믿는 신앙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신앙의 태도에 대해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관점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 내용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고 드디어 베다니에 나타나신 예수님. 예수님께 마르다는 실망스러운 어조로 ‘예수님께서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현실 세계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나름의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막연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이후에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요 11:21~22)
이 말을 할 때 마르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나사로가 살아날 것입니다’라는 기대를 가진 것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뒤의 맥락이 그러합니다.
아마 마르다의 생각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때에 맞춰 오시기만 했더라도 나사로가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늦게 오심으로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른 기도를 해 주실 수는 있겠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평안을 빌어 주신다면 우리 안에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겠습니까? 슬프고 힘들지만 주님께서 현실의 삶을 사는 우리를 위해 고통을 잊도록 기도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라는 하나의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 11:23)
마르다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이 나오니까 약간 당황했겠죠. 그리고 나름대로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멋진 대답이기는 합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지금 즉시 이 자리에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는데, 마르다는 나름 배운 게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서기관들을 통해서 배웠던 것이었겠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부활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니겠죠. 그러나 언젠가는 살아날 것을 나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어찌 보면 위로가 됩니다.”
마르다가 대답한 말씀 중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아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안다’라는 말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과 마르다의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마르다는 계속해서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믿느냐”, 즉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르다가 “내가 안다”(Οἶδα, 오이다)라는 말을 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느냐?”(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피스튜온 에이스 에메)라고 질문과 단어를 바꾸고 계십니다.
<아는 것을 넘어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믿음으로 주님께 뛰어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때로 믿음을 내가 아는 무엇으로 정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훈련을 받죠. 설교 말씀을 통해서나 성경 공부나 여러 가지 신앙 훈련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 갑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 아는 것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부·성자·성령, 그러나 한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죠. 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고, 결국 모든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도 역시 그와 같은 흐름 속에서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의 오라비가 죽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을 나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고쳐서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 ‘무엇을 고백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구를 믿고 있느냐?’,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이며 생명이 되는 나를 너는 믿고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앙을 교리로 정하고, 그 교리를 통해서 신앙을 배워 갑니다. 우리 신앙 안에는 알아야 하는 것들도 많이 있고, 그것들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교리를 아는 것,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사실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미련할 만큼 단순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을 통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땅의 문제뿐만 아니라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 죽음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주님께 무작정 달려드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맹인은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신다’라는 소식을 듣고는 소리 내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 18:38)
이 말씀을 하고 그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또 어떤 이는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눅 23:42)
이 한마디의 고백으로써 그는 낙원에 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밑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 거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물론 그 아이는 아버지에 대해서 분명히 잘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아이는 그저 아빠가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아빠!”라고 부르고는 바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떻게 합니까? 그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 내지 않겠습니까? ‘아빠’라고 부르고 뛰어드는 이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고상한 경건의 지식도 중요하고 필요하겠지만, 정작 은혜는 예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삶의 문제가 있습니까? 불치병에 걸려 있습니까? 출구가 없는 막힌 곳에 들어서 있습니까? 예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의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해결책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이미 완전히 해결하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전능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7월 28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지식을 넘어 믿음으로” (요 11장 17-27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539장, 543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요 11장 17-27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7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바로 고치지 않으시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 같다는 여러 정황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도 영광을 받으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도 예수님을 나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에만 국한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음에 삼켜진 후에도, 우리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잘 살고, 병고침을 받고자 하는 것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죽음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때로 우리는 이 믿음을 아는 것으로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교리를 아는 것,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을 넘어섭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넘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가 모르는 세상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의뢰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이며, 그분께 은혜를 입고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부스러기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아는 것을 넘어 우리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으로,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소망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기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지식의 차원에 머물렀다가 지식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로 도약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개인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어, 그 주님을 붙잡고 이 땅에서 은혜를 누리며, 또한 저 하늘나라까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꼭 붙잡고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