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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 31 ~ 36

김경진 목사

2021.10.31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갈망하며 참된 삶, 참된 자유에 이르길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어려운 일 만나지 않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살기 위함일까요? 이 세상에서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일까요? 예수 잘 믿으면 이 땅에서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이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유식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일까요? 혹시 살다가 불치병이 걸리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죠. 기도하면서 좋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이유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작은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왜 나오셨습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서도 ‘언젠가는 예배당에 나가야지’하고 생각하시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무엇일까? 나의 생애를 관통해 내는 지혜는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며, 진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유함을 입고 해방감을 느끼기 원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깨달음은 매인 것들을 알게 해 주고 그것으로부터 풀려나게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해 주고, 만나는 모든 어려움을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예수 잘 믿는다고 코로나가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가난이나 질병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죠. 교회를 잘 나간다고 해서 실패나 좌절 또는 고통을 면제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참된 자유와 참된 해방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마음과 몸의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 마음의 평정을 훈련받고, 최면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정을 유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진리를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듯이 그저 마음을 돌아보고 평정을 유지하는 일, 건강을 돌아보는 일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모든 의미를 관통해 내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게 하는,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평정심, 자유함, 해방감을 주는 것이 참된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렸던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1~2절)

“나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와 함께 로마서 8장을 시작한 바울은 허무 속에서 굴복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을 상기시킨 후에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깨달음을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 37~39절, 새번역)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환란도, 박해도, 굶주림도, 심지어는 죽임도 어찌할 수 없는 참 진리를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도록 하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 죽는 존재임을 직시하게 하며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죠.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늙어 가고 죽어갈 뿐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경험한 깨달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진리였습니다.
그가 인간의 허물을 직시합니다. 피조물의 허물을 직시합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무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분명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진리이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된 진리를 얻으려다 스스로를 더 속박하고 맙니다.>

이 깨달음을 평상시에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깨달음을 가지고 평생 동안 일관되게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끝까지 살아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일관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매이며 결국은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첫 번째 장면은 선악과를 만들어 주시는 장면이죠.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그분을 떠나는 자유로 사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죠.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운명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해 주는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을 또다시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고 자유를 베풀어 주시고자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는 모습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뵈옵고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에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분명한 말로 규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어나 말의 규정에 매이기를 원치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름 가운데에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이나 형태로 한정되는 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이 사실을 보여 주죠.
하나님은 형상이나 틀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고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틀 안에 들어오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규정하고 규범화하고 형상화하곤 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모습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 모세에게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실 바로 그때에,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절하고 있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 32장 4절)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인간은 자유로우시고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으신 하나님을 송아지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우리의 신이다!” 말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나약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율법을 내려 주셨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이죠. 한마디로 은혜였습니다. 생명의 길이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였습니다. 율법을 자발적으로 따라 즐겁게 살아갔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행복이었을 것이고, 생명력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글자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면, 문자라는 또 다른 형상에 매이지만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문자 안에 율법을 가두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구별하고 나누며 법을 세웠습니다. 규범을 더욱더 구체화했습니다. 그 결과, 살 길을 알려 주시고자 주신 율법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들고 죄인과 의인을 구별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들을 증오하고 시기하거나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착각하며 율법주의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잘못된 도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안타까워하시며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나무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법을 외식으로 치장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겁박하며,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듯이 오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고자 스스로를 포로 삼는 인간을 위하여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오도된 틀에서부터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빠져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이스라엘 백성이 초점을 맞추길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짓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판단하는 율법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다가오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8~19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눈먼 자들과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약한 자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만들어 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2절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한복음 8장 33절 중)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죄의 종이 된 지도 모른 채, 죽음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참된 자유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존재로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부활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17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며, 나를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죽음 이후에도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 중, 새번역)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계시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소망이 됩니다. 나를 해방시킵니다. 나를 자유케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도 다시 자유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1517년 10월 31일 밤, 꼭 504년 전의 일입니다. 종교 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중세 교회가 초대 교회의 믿음, 참된 해방과 참된 자유를 주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죄의 종, 율법의 종이 되고 교회법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인간이 만든 법과 규정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고해 성사를 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금식해야만 한다는 가르침도 세워졌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뿐만 아니라 고행을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주어졌습니다. 사제나 수녀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거룩한 성인의 상에 가서 존경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죄가 된다고 전해졌습니다. 하나 둘, 이러한 법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당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지던 중세 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칼뱅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당시의 교회법을 다루는 사람들, 입법자들]은 일 년 내내 매우 악한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해가 바뀔 때에 고해 성사를 빠뜨리는 것이 훨씬 더 큰 악행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매일 음행으로 온몸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금요일에 고기를 조금 맛보는 것을 더욱 악하다고 하며… 사제가 천 번의 간음죄를 짓는 것보다 단 한 번의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더욱 큰 악행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보다는 교회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더욱 큰 죄악이 되며, 전 인류에게 악을 행하는 것보다는 성상에게 존경을 표시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더욱 큰 악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화 시킨다는 것이 이와 같은 실례들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기독교 강요』, IV. x. 10.)

잘못된 규정들을 끊임없이 채워 가면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중세 교회를 칼뱅은 한탄합니다.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그들[중세로마교회]이 영원한 죽음의 고통 아래에서 매우 가혹하게 결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하는 제도들은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 법들 가운데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너무 많으며 그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쌓아 놓는다면 그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큰 어려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극심한 고뇌와 공포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목적은 마치 구원에 필수적인 이들을 명하는 것처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내적으로 얽어매고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게 하는 이러한 법령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IV. x. 2.)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자유로움, 해방,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교회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법령들에 매여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던 중세 교회를 향하여 모든 것을 벗겨 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 개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자유가 교회 안에서 왜곡되고 변질되는 현상을 다시 펴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 개혁 504주년을 보내는 오늘, 우리는 여전히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사슬과 속박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정말 많은 일들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우리는 잠시 2년 동안 멈춰 섰고,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모든 일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왜 그 일을 해 왔는가, 나는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 왔는가,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했었는가.’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그 일이 무거운 짐이었는지 아니면 기쁨의 춤과 같은 일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과연 주님의 참다운 해방 가운데 살고 있는지, 참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골고다 십자가 위에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원하며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원히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The Truth Will Set You Free

John 8: 31-36

Why do we believe in Jesus? To avoid life’s tribulations and disasters? To become rich and powerful? Do we believe in Christ because faith in Christ makes us successful in this world? Because it makes us more humane and refined? Or because we will be cured of incurable diseases?

Why do we come to church and pursue faith? To make friends and build a social network? Because praying will give us what we want? Do we come to church to get a spouse, succeed in business, and build a family?

These, of course, may be “elementary” reasons for attending church, but the ultimate reason of faith is to know the truth and to become free from all things that bind us. True realization liberates us from all oppression, teaches us the reason we live, and helps us face life’s difficulties without fear.

Believing in Christ does not make us immune to the coronavirus. Nor does it exempt us from diseases or poverty. Becoming a believer does not mean that we will not face failure and pain. This we know all too well from experience.

Therefore, the ultimate reason we believe in Christ is to live in this world in freedom, peace, and joy—whatever our circumstances. In short, we believe in Christ to gain true freedom and liberation.

In Romans 8 we see Paul enjoy this freedom in the truth:

“Therefore, there is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who gives life has set you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Romans 8: 1-2)

Paul, who starts Romans 8 with this declaration, reminds his readers of the groans beingmade byall creation subject to futility and concludes Chapter 8 with this acknowledgement: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Romans 8: 35, 37-39)

Paul came to realize that nothing—not even persecution, tribulations, starvation, or death—could interfere with this truth: God’s love for us in Christ Jesus is absolute. The moment he came to know this love of God, he experienced true freedom.

Our faith, too, is all about having this true freedom and liberation that come from the same realization. This is why we believe in Christ.

From the very beginning the Bible says that God gave man freedom. After creating Adam and Eve, the first humans, Godplaced the tree of life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t the center of the garden of Eden—even though He knew that man would eat from the latter. God wanted to give man freedom. God gave man the freedom to follow or to leave Him.

Yet with that freedom Adam chose to leave God, becoming a slave to sin. The result of abandoning God was death. Therefore, all men since Adam were destined to die. This is the state of the fallen man, the reality of the man who abandoned God. The Bible shows us this sad reality of man: Although God wanted to give him freedom from the very beginning, he used his freedom to choose the wrong and became bound.

When the Israelites were slaves in Egypt, God wanted to give them freedom and liberation. So He called Moses and delivered His chosen people from Egypt. Here we see God who continues to love man and desires to give him true freedom and liberation.

When Moses asked God at the burning bush, “What is your name?”, God answered, “I am Who I am.” (Exodus 3: 14)

God did not confine Himself to a singledefinition of words. God made it clear that He, too, was free. God does not want Himself to be constrained to a certain image. This is why the second of the Ten Commandments is “Thou shall not make unto thee any graven images.” God is free and indefinite and cannot be limited to an image or a shape.

But man continued to define God, creating norms and images. When God was commanding Moses on Mt. Sinai not to make any graven images, Aaron and the Israelites were worshiping an idol:

“He took what they handed him and made it into an idol cast in the shape of a calf, fashioning it with a tool. Then they said, ‘These are your gods, Israel,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Exodus 32: 4)

The Israelites fashioned God, who cannot be expressed in any shape or form whatsoever, into an image of a calf and said, “These are your gods.” Here we see man’s true state and weakness.

As such, man is always bound and trapped by something.

God delivered the Israelites from Egypt and gave them the law, the life principles of freedom and happiness. Therefore, when God first gave the Israelites the law, it was grace. It was their God-given way of life. It was wisdom that led to a blessed life. At first, there was life and wisdom in the law—as long as they were not bound by the letter of the law, and as long as it did not become an image.

Yet man became bound by the letter of the law. The letter of the law trapped the law. Man created endless laws and rules on what do to and what not to. With that law, man started to kill. With that law, he separated “the righteous” and “the sinner,”despised and looked down on“law-breakers,” mistakenly believed that obeying the law to the letter granted salvation, and fell into the trap of legalism. Although God gave us salvation as a gift, man came to believe that he had to earn it by observing the law. This concealed the glory of God.

This is why Jesus was heartbroken and rebuked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As Jesus saw it,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notcapable of keeping the law themselves and only “wore” it like a trinket. Yet they threatened others with it, saying that one could not be saved if he failed to obey the law.

But Jesus showed people that God wanted to love and save them. Jesus quoted from Isaiah: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oclaim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set the oppressed free, 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Luke 4: 18-19)

Jesus wanted to make the Israelite people, who had become slaves to the law, children of God again. This is what Jesus says in John 8, today’s Scripture: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John 8: 31-32)

To this, the Jews answered, “We are Abraham’s descendants and have never been slaves of anyone. How can you say that we shall be set free?” (John 8: 33)They had become slaves to the law, but did not know it. They did not even recognize what had enslaved them. They were unaware of their state, even though they had no true freedom.

Jesus wanted to give such people true freedom. He wanted to give them the truth that would set them free.

What is that truth? In John Chapter 14, Jesus sai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 6)

The truth that sets us free is Jesus Christ. How does Christ set us free? We are set free by Christ because God’s love for us is manifested in Him.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d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For God did not send his Son into the world to condemn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John 3: 16-17)

God sent his Son, Jesus, to save us. This means that God is on our side. It is proof that God loves us.

Most of all, God sent his Son to die on the cross and enter death, in order to free man from the chains of death. Furthermore, God made Jesus the first fruit of resurrection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who was incarnated. This is the gospel. It is the good news because it is the message that God, who is on our side, has broken man’s unbreakable chain and yoke.

Therefore, we, too, rejoice in what Paul rejoiced in. We rejoice in the fact that we have hope in resurrection beyond death. But our joy goes beyond even that. Our joy is that the One who did this for us, God, is on our side and loves us. For this we give thanks.

This realization made Paul confess that nothing could ever separate him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It is what made him bold even before martyrdom.

A Christian is someone who lives in such joy of salvation. To be saved means to accept in faith that Jesus moved us from death to life, that God loves us eternally. When we have this faith, we are free. Being sure of one’s salvation is to have confidence that nothing can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Dear Church, today is Reformation Sunday. Five hundred and four years ago on October 31, 1517, the Reformation began. Why did it come about? Because the Medieval Church strayed from the faith of the Early Church and became a slave to sin, the law, and the rules of the Church.

As time passed, the gospel, which started in Jesus, became tainted by man-made laws and rules.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made endless laws that restricted the true freedom that God gave us:for example, a believer could not be forgiven without confession to a priest, fasting was an obligation, priests and nuns could not marry, failing to greet a holy saint with a kiss and show respect was a sin, and so on.

True freedom from God was nowhere to be found, and people in those times were subject to condemnation and forced to practice endless abstinence, fasting, penance, condemnation, andharsh religious practices. Calvin expressed his deep grief over this reality in hi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he Reformation was a movement thatcorrected the Medieval Church’s distortion and corruption of our God-given freedom in the truth. Its aim was to allow all men to experience God’s true salvation through Christ, the Truth.

Dear Church, today, as we celebrate the 504th anniversary of the Reformation, we see thefutile chains and yokes that the Korean Church has placed on itself.

If someone is teaching that something more must be done to be saved, then he/she is a false prophet. If someoneclaimsthat one cannot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one receives further spiritual training, then he/she is a hired hand.

God’s love has already been shown to us on the cross on Calvary and in the empty grave of Jesus. God wants to save us. He wishes to deliver us from death and desires that we live in freedom forever.

“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1 John 4: 9)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1 John 4: 18)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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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 31 ~ 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갈망하며 참된 삶, 참된 자유에 이르길 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습니까?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어려운 일 만나지 않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살기 위함일까요? 이 세상에서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일까요? 예수 잘 믿으면 이 땅에서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이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유식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일까요? 혹시 살다가 불치병이 걸리면 고침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죠. 기도하면서 좋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이유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작은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왜 나오셨습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면서도 ‘언젠가는 예배당에 나가야지’하고 생각하시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진리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무엇일까? 나의 생애를 관통해 내는 지혜는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며, 진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자유함을 입고 해방감을 느끼기 원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깨달음은 매인 것들을 알게 해 주고 그것으로부터 풀려나게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해 주고, 만나는 모든 어려움을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예수 잘 믿는다고 코로나가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가난이나 질병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죠. 교회를 잘 나간다고 해서 실패나 좌절 또는 고통을 면제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유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참된 자유와 참된 해방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서 마음과 몸의 평정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 마음의 평정을 훈련받고, 최면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정을 유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를 두고 진리를 얻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듯이 그저 마음을 돌아보고 평정을 유지하는 일, 건강을 돌아보는 일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모든 의미를 관통해 내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게 하는,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평정심, 자유함, 해방감을 주는 것이 참된 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렸던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로마서 8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장 1~2절)

“나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와 함께 로마서 8장을 시작한 바울은 허무 속에서 굴복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을 상기시킨 후에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깨달음을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 37~39절, 새번역)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환란도, 박해도, 굶주림도, 심지어는 죽임도 어찌할 수 없는 참 진리를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도록 하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 죽는 존재임을 직시하게 하며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요청하죠.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늙어 가고 죽어갈 뿐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경험한 깨달음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진리였습니다.
그가 인간의 허물을 직시합니다. 피조물의 허물을 직시합니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무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분명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진리이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된 진리를 얻으려다 스스로를 더 속박하고 맙니다.>

이 깨달음을 평상시에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깨달음을 가지고 평생 동안 일관되게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끝까지 살아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일관성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매이며 결국은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첫 번째 장면은 선악과를 만들어 주시는 장면이죠.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그분을 떠나는 자유로 사용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죠.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운명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해 주는 인간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을 또다시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고 자유를 베풀어 주시고자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는 모습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자유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뵈옵고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에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분명한 말로 규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어나 말의 규정에 매이기를 원치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이름 가운데에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형상이나 형태로 한정되는 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 이 사실을 보여 주죠.
하나님은 형상이나 틀에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고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틀 안에 들어오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규정하고 규범화하고 형상화하곤 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는 모습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 모세에게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실 바로 그때에, 아론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은 산 아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절하고 있었습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 32장 4절)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상상해 봅니다. 인간은 자유로우시고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으신 하나님을 송아지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우리의 신이다!” 말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나약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율법을 내려 주셨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삶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이죠. 한마디로 은혜였습니다. 생명의 길이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였습니다. 율법을 자발적으로 따라 즐겁게 살아갔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행복이었을 것이고, 생명력을 가지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글자에 갇히지만 않았더라면, 문자라는 또 다른 형상에 매이지만 않았더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다시 문자 안에 율법을 가두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구별하고 나누며 법을 세웠습니다. 규범을 더욱더 구체화했습니다. 그 결과, 살 길을 알려 주시고자 주신 율법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들고 죄인과 의인을 구별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들을 증오하고 시기하거나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는 일로 착각하며 율법주의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잘못된 도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안타까워하시며 율법을 다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나무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율법을 지킨다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법을 외식으로 치장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겁박하며,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듯이 오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고자 스스로를 포로 삼는 인간을 위하여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오도된 틀에서부터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빠져나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이스라엘 백성이 초점을 맞추길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를 짓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지 판단하는 율법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다가오기 원하시는지를 보여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8~19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눈먼 자들과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약한 자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힘을 실어 주셨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만들어 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2절 중)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요한복음 8장 33절 중)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죄의 종이 된 지도 모른 채, 죽음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참된 자유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존재로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부활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17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시며, 나를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죽음 이후에도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이 깨달음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 중, 새번역)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계시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소망이 됩니다. 나를 해방시킵니다. 나를 자유케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도 다시 자유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1517년 10월 31일 밤, 꼭 504년 전의 일입니다. 종교 개혁이 왜 일어났습니까? 중세 교회가 초대 교회의 믿음, 참된 해방과 참된 자유를 주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죄의 종, 율법의 종이 되고 교회법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인간이 만든 법과 규정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고해 성사를 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반드시 금식해야만 한다는 가르침도 세워졌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뿐만 아니라 고행을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주어졌습니다. 사제나 수녀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거룩한 성인의 상에 가서 존경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죄가 된다고 전해졌습니다. 하나 둘, 이러한 법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당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또 다른 무거운 짐을 지던 중세 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칼뱅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당시의 교회법을 다루는 사람들, 입법자들]은 일 년 내내 매우 악한 생활을 지속하는 것보다 해가 바뀔 때에 고해 성사를 빠뜨리는 것이 훨씬 더 큰 악행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매일 음행으로 온몸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금요일에 고기를 조금 맛보는 것을 더욱 악하다고 하며… 사제가 천 번의 간음죄를 짓는 것보다 단 한 번의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더욱 큰 악행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보다는 교회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더욱 큰 죄악이 되며, 전 인류에게 악을 행하는 것보다는 성상에게 존경을 표시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더욱 큰 악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효화 시킨다는 것이 이와 같은 실례들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기독교 강요』, IV. x. 10.)

잘못된 규정들을 끊임없이 채워 가면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중세 교회를 칼뱅은 한탄합니다.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그들[중세로마교회]이 영원한 죽음의 고통 아래에서 매우 가혹하게 결정하고 매우 엄격하게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하는 제도들은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 법들 가운데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너무 많으며 그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쌓아 놓는다면 그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큰 어려움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이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극심한 고뇌와 공포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여기에서 하고자 하는 목적은 마치 구원에 필수적인 이들을 명하는 것처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내적으로 얽어매고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게 하는 이러한 법령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IV. x. 2.)

이것이 바로 종교 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자유로움, 해방,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교회가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법령들에 매여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던 중세 교회를 향하여 모든 것을 벗겨 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 개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자유가 교회 안에서 왜곡되고 변질되는 현상을 다시 펴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 개혁 504주년을 보내는 오늘, 우리는 여전히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사슬과 속박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정말 많은 일들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우리는 잠시 2년 동안 멈춰 섰고,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모든 일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왜 그 일을 해 왔는가, 나는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해 왔는가, 어떤 목적으로 그 일을 했었는가.’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그 일이 무거운 짐이었는지 아니면 기쁨의 춤과 같은 일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과연 주님의 참다운 해방 가운데 살고 있는지, 참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골고다 십자가 위에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원하며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영원히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고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021년 10월 3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8장, 29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8:31-3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3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고 잘 살기 위함일까요?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일까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귈 수 있어서 일까요? 물론 이런 초보적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궁극적인 이유는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의 요약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이런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롬 8:35, 37-39). 바울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참된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첫 인간 아담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떠났고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후에 민족이 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유와 해방의 지침으로 주신 율법을 문자라는 또 다른 형상에 가두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그 율법으로 사람들을 옥죄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율법의 노예가 되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케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2).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 10월 31일에서 꼭 504년이 되는 날입니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을까요? 당시 중세의 교회가 이러한 초대교회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죄의 종이 되고 또 다른 율법과 교회의 법에 종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러한 현실을 가슴아파합니다: “…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보다는 교회들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이 더욱 큰 죄악이 되며, 전 인류에게 악을 행하는 것보다는 성상에게 존경을 표시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더욱 큰 악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변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IV. x. 10).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 그리고 내 안에 만연해 있는 이러한 세속의 사슬과 헛된 속박들을 끊어 버립시다. 그리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진리 안에서 우리의 두려움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영원토록 자유롭게 살아갑시다. 

 나누기

1.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내 안에 바꾸고 끊어버려야 할 습관이나 마음의 어둠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 다시 진리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합시다. 눈을 감고 그 사랑에 빠져봅시다. 어떤 마음이 올라오는지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고, 모든 벗어야 할 것들을 벗어 버리고, 참다운 생명으로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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