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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은혜를 받은 히스기야에게도 삶의 어려운 상황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대하 32:1)
언뜻 보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걸맞지 않은 두 의미가 함께 한 문장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은 전시 상황입니다. 앗수르의 군대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대하 32:1a)
뒤에 나오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앗수르 왕의 침략이 있었다’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때는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대하 32:2)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하면서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유다의 왕 히스기야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왕 위에 오르는 역대하 29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대하 29장 1절은 그의 치세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대하 29:1)
그의 평가가 바로 이어서 이렇게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대하 29:2)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던 유다의 드물었던 왕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일을 하던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어떤 충성된 일을 하였다는 말일까요? 아무래도 32장 1절이 이 말을 하고 있으니 앞의 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 충성된 일은 31장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이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따라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대하 31:4)
31장은 이 이야기를 길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충성되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삶을 보살피는 이야기의 결과로 이런 내용이 성경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대야 3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대하 31:20~21)
한마디로 말하면 히스기야가 열심으로 충성되게 하나님의 일을 돌봄으로써 그의 삶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이 조금 전에 읽었던 32장 1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대하 32:1)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충성스러운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형통함의 축복을 받은 히스기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충성스러운 일을 한 후에 그가 적군인 앗수르 군대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듯 역대야 31장의 내용만 보아도 형통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인데요. 사실 29장부터 이어지는 히스기야의 모든 일생과 그의 공적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들을 생각해 본다면 32장 1절의 말씀이 참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회복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하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역대야 28장 한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대하 28:1~4)
아하스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아람 왕이 쳐들어와서 유다 백성들을 다메섹으로 포로로 잡아갑니다. 심지어는 동족인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유다 백성들을 12만 명이나 살해하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비극적인 일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당시에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지만 도움을 준다고 찾아왔던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리어 예루살렘을 쳐서 재물들을 빼앗아 갑니다. 이 모든 것이 아하스 왕이 다스렸던 16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역대하 28장의 내용만 보아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겼던 왕의 16년 치세 동안 전쟁의 사건만 세 번에 걸쳐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크게 패하였고 살육을 당하며 모든 재물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하스가 죽은 후에 히스기야 왕이 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25세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하스의 통치 기간이 16년이었다는 내용을 보면 아마도 히스기야는 9살 때부터 자라면서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을 옆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아버지의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16년 동안 후계 수업을 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는 일을 제일 처음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쏟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절대로 밟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왕,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 히스기야의 첫 출발의 내용을 29장 3절 이후의 말씀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왕이 되던 그 첫 해 첫째 달에, 닫혔던 주님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하였다. 그는 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성전 동쪽 뜰에 모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레위 사람들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이제 그대들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또 그대들의 조상이 섬긴 주 하나님의 성전을 성결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말끔히 없애도록 하시오. 우리의 조상이 죄를 지어,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켜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등지고 말았소.” (대하 29:3~6, 새번역)
이 이야기를 보면 히스기야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정치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왕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진노하셔서, 우리를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직접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이오. 조상들이 칼에 맞아 죽고,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이 사로잡혀 갔소. 이제 나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거두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소. (대하 29:8~10, 새번역)
정리하면 히스기야는 자신이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통치 방향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모든 제사를 회복하자. 우리가 지금까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유린당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결심하였다. 나는 주 하나님만을 섬기는 왕이 될 것이다. 이제 주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과 나라가 되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히스기야는 우선 성전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이방의 물건들과 이방 신들을 모두 다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를 복원하죠.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감사제를 회복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절기들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와 예배가 가능하여지도록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분깃을 나누어 주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29~31장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32장 1절 말씀이죠.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라는 말은 앞서 있는 히스기야의 모든 사역들을 종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과 제사를 잘 회복하고, 예배의 절기와 성직의 회복도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충성스러운 일을 다 마쳤습니다.
<참 예배자로 서는 것이 어려운 일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전개가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충성스러운 일을 다 마친 후에 적군이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군대가 아니라 당시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코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실수를 보면서 주변 나라들에게 유린과 살육을 당하고 침략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아서라고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그는 성전 예배를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절기와 모든 것들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이 다 마치게 된 후에 적군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히스기야는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죠.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아서,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아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왔지.’,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고 늘 게으름을 부리며 결국 신앙이 해이해져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징계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서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의 이야기가 그런 사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배자가 되어도 때로는 적군이 쳐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경험한 현실이었습니다.
때로 초신자들을 만나면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갑자기 믿게 되어서 그런지 그들의 신앙이 아주 역동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거는 신앙으로 보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거예요. 내 사업과 모든 것도 다 철저하게 지켜 주실 테니까 걱정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시는 초신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때로는 조금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또 많은 성도님들 중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죠. 새벽 재단도 쌓고 주일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요. 늘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헌금 생활과 교회 일에 힘쓰며 목회자나 어려운 이웃들도 잘 돕습니다. 그야말로 정직하고 아름답게 멋진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실 거예요. 업도 잘되게 해 주시고 평탄하게 해 주실 거예요. 나의 모든 것들을 다 지켜 주실 겁니다. 목사님 그렇지요?”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대답하기 참 어렵습니다. 아니라고 말하면 굉장히 실망하실 것 같고, 맞다고 말하면 혹시라도 나중에 거짓말했다고 생각할까 봐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지켜 나가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예배자로서 바르게 살아가더라도 우리 앞에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옛날에 예배당에 나가지 않고 교회 생활 잘하지 않을 때도 이런 어려움은 없었는데, 도리어 예배당에 나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주님을 섬겼는데 왜 나에게 이런 적군이 몰려온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이러한 질문과 회의를 우리에게 던져 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그렇게도 아버지가 갔던 길을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히스기야 아닙니까? 그래서 성전과 예배를 다시 회복하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겨 보려고 노력했던 히스기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의 때와 달라진 것이 별반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때도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왔고요. 이제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성전을 잘 정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앗수르의 군대가 또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살아가면서 이렇게 히스기야가 경험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예배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분들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 말씀은 왜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히 보여 주고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였기 때문에 그가 형통하게 되었다. 그가 형통한 왕이 되었다.’라는 말 뒤에, ‘그래서 그의 치세 동안에는 어떤 누구도 그와 그의 나라에 도전해 온 사람이나 나라가 없었고 외부 세력도 침공해 오지 못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서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런 말씀이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 예배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능력의 진가는 고난이 닥칠 때 발휘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과 더불어 무너진 성벽과 망대들을 다시 쌓고, 요새도 다시 세우고, 창과 방패도 많이 만들고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굳세고 담대하여야 한다. 앗시리아의 왕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앗시리아의 왕과 함께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다. 앗시리아의 왕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군대의 힘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계신다.” 백성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힘을 얻었다. (대하 32:7~8, 새번역)
예배자로 나섰던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고난이 닥쳤을 때 아버지 아하스 때와는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그냥 무참하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큰 대군이 몰려왔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서 성벽과 망대를 다시 쌓았고 나름의 전투 준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옆에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던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굳게 믿습니다. 이것이 과거와 달라진 점입니다. 그들은 이제 기도할 줄 아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대하 32:20)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딱 한 줄로 결과를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앗시리아 왕의 진영에 있는 모든 큰 용사와 지휘관과 장군을 다 죽여 버리셨다. 앗시리아 왕은 망신만 당하고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다. 그가 그의 신전으로 들어갔을 때에, 제 몸에서 난 친자식들이 거기서 그를 칼로 죽였다. (대하 32:21, 새번역)
엄청날 것 같았던 전쟁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주 단순한 전쟁이 되고 말았고, 앗수르는 패하여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를 복원하며, 절기를 다시 세우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조치하였던 히스기야의 신앙 개혁 운동은 강대국의 침략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의 회복은 강대국이 침략해 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고, 결과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우리가 늘 날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깊고 충성스러운 예배와 신앙생활이 어려운 문제를 막지는 않습니다.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을 이길 힘이 예배자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와 함께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신앙이 좋다고 죽음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죠. 그래서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도리어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또 다른 통로가 되죠.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예배자로 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힘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마치 영적인 체력을 단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체력을 단련한다고 어려운 일이 도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체력을 만든 사람은 어떤 건강의 어려움이 왔을 때 그것을 이길 능력과 체력이 있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늘 예배자로 서게 되면 갑자기 어떤 어려운 일이 왔을 때 영적인 체력으로 그 일을 극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옵니다. 그러나 참 예배자는 그 시련을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 능력을 반드시 헤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으로 오늘도 힘차게 기죽지 말고 우리의 모든 문제와 더불어 싸우며, 주님을 의지하고 승리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rials Come Even to The True Worshiper
2 Chronicles 32:1, 18-21
Second Kings 32:1, today’s Scripture, shows an interesting turn of events in a life of faith:
“After these acts of faithfulness Sennacherib king of Assyria came and invaded Judah and besieged the fortified cities, and thought to break into them for himself.”(2 Chronicles 32:1 NASB)
The passage starts by telling the story of a crisis that befell the Kingdom of Judah. King Sennacherib of Assyria had besiegedit to conquer it. Assyria had invaded Judah.
However what is interesting is the first part of the verse: “After these acts of faithfulness.”Someone had done something good, but who did what?
Verse 2 tells us the “who” part: Hezekiah. It was when Hezekiah was king of Judah:
“Now when Hezekiah saw that Sennacherib had come”(2 Chronicles 32:2a NASB)
It was Hezekiah who did all these acts of faithfulness. But what did he do exactly?
The answer can be found by tracing all the way back to chapter 29 which describes his enthronement. Second Chronicles 29:1 summarizes his rule as follows:
“Hezekiah began to reign when he was five and twenty years old, and he reigned nine and twenty years in Jerusalem.”(2 Chronicles 29:1 NASB)
Furthermore, 29:2 assesses him in this one sentence:
“He did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according to all that his father David had done.”(2 Chronicles 29:2 NASB)
In short, he was a good king of Judah who did right in the eyes of God. But what acts of faithfulness did he do?
These acts of faithfulness primarily seem to refer to Hezekiah’s deeds mentioned in the text immediately preceding chapter 32. Chapter 31 describes Hezekiah commanding the people of Jerusalem to sharefood with the priests and Levites so that they could fulfill their duty. Since the Levites and priests did not receive land as an inheritance, the other tribes had a duty to provide for their needs. But apparently this had not been done properly.
In accordance with the law of the Lord, Hezekiah ensures that the Levites and priests fulfill their duty by making the people provide for their needs:
“Also he commanded the people who lived in Jerusalem to give the portion due to the priests and the Levites, that they might devote themselves to the law of the LORD.”(2 Chronicles 31:4 NASB)
Chapter 31 gives a long description of whatHezekiah did, including verse 19, the last part of the chapter, which describes the situation as follows:
“Also for the sons of Aaron the priests who were in the pasture lands of their cities, or in each and every city, there were men who were designated by name to distribute portions to every male among the priests and to everyone genealogically enrolled among the Levites.”(2 Chronicles 31:19 NASB)
Moreover, the last verse of 2 Chronicles 31 mentions that Hezekiah prospered because of all that he did before the Lord:
“Thus Hezekiah did throughout all Judah; and he did what was good, right and true before the LORD his God.Every work which he began in the service of the house of God in law and in commandment, seeking his God, he did with all his heart and prospered.”(2 Chronicles 31:20-21 NASB)
Now, considering this flow of the story, the very next scene is both interesting and somewhat confusing. Immediately after stating that Hezekiah “prospered,” the Bible says in 32:1 that Sennacherib king of Assyria invaded Judah:
“After these acts of faithfulness Sennacherib king of Assyria came and invaded Judah and besieged the fortified cities, and thought to break into them for himself.”(2 Chronicles 32:1 NASB)
After saying that Hezekiah prospered by doing faithful deeds in the Lord’s sight, the Bible immediately describes how the Assyrian army invaded Judah after these deeds. It makes me wonder, ‘How can we call this prosperity?’
The course of events in chapter 31 and 32:1 alone go completelyagainst the concept of prosperity.Considering the larger picture, however, including Hezekiah’s faithful deeds and words in chapter 29 and onwards, 32:1 becomes even more confusing.
Let’s delve deeper.
Hezekiah’s father was King Ahaz who is described in2 Chronicles 28. The following is a summary of Ahaz’s reign:
“Ahaz was twenty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sixteen years in Jerusalem; and he did not do right in the sight of the LORD as David his father had done.But he walked in the ways of the kings of Israel; he also made molten images for the Baals.Moreover, he burned incense in the valley of Ben-hinnom and burned his sons in fire, according to the abominations of the nations whom the LORD had driven out before the sons of Israel.He sacrificed and burned incense on the high places, on the hills and under every green tree.”(2 Chronicles 28:1-4 NASB)
Ahaz did not serve God. And the result was devastating. The text following the above verses shows that the king of Aram attacked Judah, taking many captives to Damascus; even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ttacked Judah during Ahaz’s reign, killing 120,000 and taking 200,000 as captives. Accordingly,Ahaz soughtthe help of Assyria, but this only led to Tiglath-Pileser, king of Assyria, attacking and plundering Judah.
This is what happened during the 16 years of Ahaz’s reign. In 2 Chronicles 28 alone, we see that during the 16-year rule of Ahaz who had turned from God and served idols, there were three wars, all of which ended in great defeat, slaughter, andloss of wealth for Judah.
Then after the death of Ahaz, his son Hezekiah succeeded him. Since Hezekiah was 25 years old when he came to the throne, he would have seen all 16 years of his father’s rule. He would have been nine when his father started his reign, meaninghe was old enough to at leastspot his father’s faults.
Consequently, as soon as Hezekiah became king, he started purifying the Temple and exertedgreat efforts to serve only God. To avoid repeating the same mistakes as his father, Hezekiah was determined to become a king who served only God, to make Judah a people that served only God.
Let’s read the beginning of Hezekiah’s rule described in 2 Chronicles 29:3 and onwards in the New Living Translation (NLT):
“In the very first month of the first year of his reign, Hezekiah reopened the doors of the Temple of the Lord and repaired them. He summoned the priests and Levites to meet him at the courtyard east of the Temple. He said to them, ‘Listen to me, you Levites! Purify yourselves, and purify the Temple of the Lord, the God of your ancestors. Remove all the defiled things from the sanctuary. Our ancestors were unfaithful and did what was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our God. They abandoned the Lord and his dwelling place; they turned their backs on him. They also shut the doors to the Temple’s entry room, and they snuffed out the lamps. They stopped burning incense and presenting burnt offerings at the sanctuary of the God of Israel.’”(2 Chronicles 29:3-7, NLT)
He goes on to say:
“That is why the Lord’s anger has fallen upon Judah and Jerusalem. He has made them an object of dread, horror, and ridicule, as you can see with your own eyes. Because of this, our fathers have been killed in battle, and our sons and daughters and wives have been captured. But now I will make a covenant with the Lord, the God of Israel, so that his fierce anger will turn away from us.”(2 Chronicles 29:8-10 NLT)
In short, Hezekiah made the direction of his rule clear as soon as he became king: “Let us return to the Lord. Let’s purify the Temple and restore all sacrifice. The reason we were invaded and plundered until now isbecause we didn’t serve God. So, I have made a resolution. I will rule this country, serving only God.”
In the passages following the above verses, we see that Hezekiah completely purifies the Temple, throws out every object used for idol worship, offers sacrifices to God in the purified Temple, restores the observance of the Passover and the Festival of Unleavened Bread, and commands the people to give a portion of their goods to the priests and Levites so that all sacrifices could be carried out properly.
So, as you can see, Hezekiah’s act of ensuring the priests and Levites their portions which we read earlier came at the final stage of his restoration.
Therefore, the expression in 32:1, “After these acts of faithfulness […],” refers to all that Hezekiah did—including the restoration of the Temple, worship, festivals, and priesthood.
But an interesting development takes place. After all that he had done to restore the Temple in all faithfulness to God, the enemy attacked. And this enemy was no small army; it was the most powerful military force in the world.
Think about it. Seeing his father’s mistakes, Hezekiah realized that the reason Judah was invaded, plundered, and slaughtered by other nations was because it had failed to serve God properly; consequently, he restores Temple worship and resolves to serve only God. But after all his work of restoration, the enemy invades the land. How must we interpret this?
In life, when we meet hardships, we sometimes believe thatwe have come to sufferbecause we havefailed to serve God properly, didn’t attend church, didn’t worship properly, or because our faith has become weak. This is not entirely wrong, since the Bible has many cases supporting such beliefs. King Ahaz is one example.
Because he didn’t serve God, Ahaz brought God’s wrath and eventually suffered humiliation, as his people were slaughtered and plundered.
However, even the man who serves and worships God well may face an enemy attack. Hezekiah is an example.
Sometimes when I meet baby Christians, I see them serve God with a great passion, believing that God will keep them from all troubles since they have come to believe in God anew. This of course is a precious faith.
They ask me, “Pastor, I now attend early morning prayer services. I never miss a Sunday service. I always start my day with prayer. I help my neighbors in need. I give generously to God. I help ministers out. This is how faithful I am… So won’t God protect me and keep me from trouble?” When I am asked such a question, it’s hard to answer either“Yes” or “No.”
Indeed. As we can see in Hezekiah’s case, we may face troubles in life even when we have kept our faith well, have done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have been a good Christian and a good worshiper.
When this happens,some of us get disappointed. Why has this happened to me when I have led such a life of faith? God, I am disappointed. Why am I being attacked by this enemy when I have served You so well?
Today’s story of Hezekiah is more than enough to engender such questions and doubts. This great king tried so hard to steer away from his father’s path and to serve God in all faithfulness. Yet it appears as though things were not much different from his father’s time. The Assyrian army invaded Judah when his father did not serve God; it also invaded Judah when he served God faithfully.
Then what’s the point in serving God well?
In life, we often experience what Hezekiah went through. When this happens, we experience a crisisin worship.
How must we interpret such phenomena? Does it mean that God does not exist? Is it proof that He doesn’t exist? Is it evidence that there is no need to believe in God?
Why does the Bible not hide such facts? How great it would sound if the Bible stated, “Because Hezekiah acted in all faithfulness before the Lord, no war or outside attack ever happened during his reign.”But why does the Bible write that a great tribulation fell upon King Hezekiah who so amazingly resolved to return to the Lord and served only Him?
To our great amazement, the story unfolds as follows.
Hezekiah, togetherwiththe people, restores the city’s broken walls, raises up watch towers, builds a fortress, makes spears and shields, and encourages the people. Then he says:
“‘Be strong and courageous! Don’t be afraid or discouraged because of the king of Assyria or his mighty army, for there is a power far greater on our side! He may have a great army, but they are merely men. We have the Lord our God to help us and to fight our battles for us!’ Hezekiah’s words greatly encouraged the people.”(2 Chronicles 32:7-8, NLT)
After restoring worship and dedicating themselves to serving God wholly, Hezekiah and the people of Judah trusted in God in a crisis, an Assyrian invasion. And though it would be a hard battle, they firmly believe in victory. This was what had changed from the past.
Furthermore, they became a people who knew how to pray. In this crisis, they pray:
“Then King Hezekiah and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cried out in prayer to God in heaven.”(2 Chronicles 32:20 NLT)
Then something amazing happened:
“And the Lord sent an angel who destroyed the Assyrian army with all its commanders and officers. So Sennacherib was forced to return home in disgrace to his own land. And when he entered the temple of his god, some of his own sons killed him there with a sword.”(2 Chronicles 32:21, NLT)
This was how the war against the powerful Assyria ended. It turned out to be, in a sense, an uneventful war.
Here we realize something. Although Hezekiah’s religious reform—which included a cleansing of the Temple, restoration of sacrifices and festivals, and resumption of the full duties of the priests and Levites—did not prevent the occurrence of an attack of a powerful nation, Hezekiah’s revival of faith made the people of Judah trust in God in a great crisis, and eventually resulted in overcoming difficulty.
Dear Church, this is the reason we believe and live in faith. We come to church every Sunday, worshipingtogether andserving God with a pure heart. But our sincere, faithful worship and our life of faith do not prevent troubles from happening.
Trials come even to the true worshiper. But the true worshiper has the strength to overcome them. God is with him in the midst of his conundrum and solves it. As I said many times, even the faithful Christian faces death. The difference is, God has already solved our problem of death through Jesus Christ. Therefore, death becomes a path of life for us who believe.
Nothing, no trial, can ever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True worshipers who trust and follow God receive His help. And theywill be more than conquerors. With this faith, may you all become conquerors even in trials.
역대하 32:1
1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역대하 32:18~21
18
산헤립의 신하가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예루살렘 성 위에 있는 백성을 놀라게 하고 괴롭게 하여 그 성을 점령하려 하였는데
19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형통의 은혜를 받은 히스기야에게도 삶의 어려운 상황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아주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대하 32:1)
언뜻 보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걸맞지 않은 두 의미가 함께 한 문장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은 전시 상황입니다. 앗수르의 군대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대하 32:1a)
뒤에 나오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앗수르 왕의 침략이 있었다’라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때는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대하 32:2)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하면서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유다의 왕 히스기야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왕 위에 오르는 역대하 29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대하 29장 1절은 그의 치세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 동안 다스리니라 (대하 29:1)
그의 평가가 바로 이어서 이렇게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대하 29:2)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삶을 살았던 유다의 드물었던 왕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일을 하던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어떤 충성된 일을 하였다는 말일까요? 아무래도 32장 1절이 이 말을 하고 있으니 앞의 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 충성된 일은 31장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이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따라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대하 31:4)
31장은 이 이야기를 길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충성되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삶을 보살피는 이야기의 결과로 이런 내용이 성경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대야 31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대하 31:20~21)
한마디로 말하면 히스기야가 열심으로 충성되게 하나님의 일을 돌봄으로써 그의 삶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이 조금 전에 읽었던 32장 1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대하 32:1)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충성스러운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형통함의 축복을 받은 히스기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충성스러운 일을 한 후에 그가 적군인 앗수르 군대를 맞닥뜨리게 되었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듯 역대야 31장의 내용만 보아도 형통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인데요. 사실 29장부터 이어지는 히스기야의 모든 일생과 그의 공적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들을 생각해 본다면 32장 1절의 말씀이 참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회복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하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역대야 28장 한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대하 28:1~4)
아하스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아람 왕이 쳐들어와서 유다 백성들을 다메섹으로 포로로 잡아갑니다. 심지어는 동족인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유다 백성들을 12만 명이나 살해하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비극적인 일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당시에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지만 도움을 준다고 찾아왔던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리어 예루살렘을 쳐서 재물들을 빼앗아 갑니다. 이 모든 것이 아하스 왕이 다스렸던 16년 동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역대하 28장의 내용만 보아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겼던 왕의 16년 치세 동안 전쟁의 사건만 세 번에 걸쳐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크게 패하였고 살육을 당하며 모든 재물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하스가 죽은 후에 히스기야 왕이 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25세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하스의 통치 기간이 16년이었다는 내용을 보면 아마도 히스기야는 9살 때부터 자라면서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을 옆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아버지의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16년 동안 후계 수업을 받으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는 일을 제일 처음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쏟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절대로 밟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섬기는 왕,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이 히스기야의 첫 출발의 내용을 29장 3절 이후의 말씀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왕이 되던 그 첫 해 첫째 달에, 닫혔던 주님의 성전 문들을 다시 열고 수리하였다. 그는 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성전 동쪽 뜰에 모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레위 사람들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이제 그대들 자신을 먼저 성결하게 하고, 또 그대들의 조상이 섬긴 주 하나님의 성전을 성결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말끔히 없애도록 하시오. 우리의 조상이 죄를 지어,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켜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성소를 등지고 말았소.” (대하 29:3~6, 새번역)
이 이야기를 보면 히스기야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정치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왕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진노하셔서, 우리를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직접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이오. 조상들이 칼에 맞아 죽고,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들이 사로잡혀 갔소. 이제 나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거두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소. (대하 29:8~10, 새번역)
정리하면 히스기야는 자신이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통치 방향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모든 제사를 회복하자. 우리가 지금까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유린당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결심하였다. 나는 주 하나님만을 섬기는 왕이 될 것이다. 이제 주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과 나라가 되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히스기야는 우선 성전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이방의 물건들과 이방 신들을 모두 다 부수어 버립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를 복원하죠. 그리고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감사제를 회복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절기들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와 예배가 가능하여지도록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분깃을 나누어 주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29~31장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32장 1절 말씀이죠.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라는 말은 앞서 있는 히스기야의 모든 사역들을 종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과 제사를 잘 회복하고, 예배의 절기와 성직의 회복도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충성스러운 일을 다 마쳤습니다.
<참 예배자로 서는 것이 어려운 일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 전개가 이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충성스러운 일을 다 마친 후에 적군이 쳐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군대가 아니라 당시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코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실수를 보면서 주변 나라들에게 유린과 살육을 당하고 침략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아서라고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그는 성전 예배를 복원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절기와 모든 것들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이 다 마치게 된 후에 적군이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히스기야는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죠.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아서,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아서 이런 어려움이 나에게 왔지.’,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고 늘 게으름을 부리며 결국 신앙이 해이해져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징계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서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의 이야기가 그런 사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배자가 되어도 때로는 적군이 쳐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히스기야가 경험한 현실이었습니다.
때로 초신자들을 만나면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갑자기 믿게 되어서 그런지 그들의 신앙이 아주 역동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거는 신앙으로 보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실 거예요. 내 사업과 모든 것도 다 철저하게 지켜 주실 테니까 걱정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시는 초신자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때로는 조금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또 많은 성도님들 중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죠. 새벽 재단도 쌓고 주일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요. 늘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헌금 생활과 교회 일에 힘쓰며 목회자나 어려운 이웃들도 잘 돕습니다. 그야말로 정직하고 아름답게 멋진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실 거예요. 업도 잘되게 해 주시고 평탄하게 해 주실 거예요. 나의 모든 것들을 다 지켜 주실 겁니다. 목사님 그렇지요?”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대답하기 참 어렵습니다. 아니라고 말하면 굉장히 실망하실 것 같고, 맞다고 말하면 혹시라도 나중에 거짓말했다고 생각할까 봐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지켜 나가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예배자로서 바르게 살아가더라도 우리 앞에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분들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옛날에 예배당에 나가지 않고 교회 생활 잘하지 않을 때도 이런 어려움은 없었는데, 도리어 예배당에 나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주님을 섬겼는데 왜 나에게 이런 적군이 몰려온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이러한 질문과 회의를 우리에게 던져 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그렇게도 아버지가 갔던 길을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히스기야 아닙니까? 그래서 성전과 예배를 다시 회복하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겨 보려고 노력했던 히스기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의 때와 달라진 것이 별반 없어 보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때도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왔고요. 이제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성전을 잘 정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앗수르의 군대가 또 쳐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의미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살아가면서 이렇게 히스기야가 경험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예배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분들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 말씀은 왜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히 보여 주고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였기 때문에 그가 형통하게 되었다. 그가 형통한 왕이 되었다.’라는 말 뒤에, ‘그래서 그의 치세 동안에는 어떤 누구도 그와 그의 나라에 도전해 온 사람이나 나라가 없었고 외부 세력도 침공해 오지 못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서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훨씬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런 말씀이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 예배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능력의 진가는 고난이 닥칠 때 발휘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과 더불어 무너진 성벽과 망대들을 다시 쌓고, 요새도 다시 세우고, 창과 방패도 많이 만들고 백성들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굳세고 담대하여야 한다. 앗시리아의 왕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은 앗시리아의 왕과 함께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다. 앗시리아의 왕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군대의 힘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계신다.” 백성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힘을 얻었다. (대하 32:7~8, 새번역)
예배자로 나섰던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고난이 닥쳤을 때 아버지 아하스 때와는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그냥 무참하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큰 대군이 몰려왔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서 성벽과 망대를 다시 쌓았고 나름의 전투 준비를 했습니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옆에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던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앗수르가 쳐들어왔을 때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굳게 믿습니다. 이것이 과거와 달라진 점입니다. 그들은 이제 기도할 줄 아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대하 32:20)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딱 한 줄로 결과를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앗시리아 왕의 진영에 있는 모든 큰 용사와 지휘관과 장군을 다 죽여 버리셨다. 앗시리아 왕은 망신만 당하고 자기 나라로 되돌아갔다. 그가 그의 신전으로 들어갔을 때에, 제 몸에서 난 친자식들이 거기서 그를 칼로 죽였다. (대하 32:21, 새번역)
엄청날 것 같았던 전쟁은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주 단순한 전쟁이 되고 말았고, 앗수르는 패하여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를 복원하며, 절기를 다시 세우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조치하였던 히스기야의 신앙 개혁 운동은 강대국의 침략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의 회복은 강대국이 침략해 오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고, 결과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우리가 늘 날마다 예배의 자리로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깊고 충성스러운 예배와 신앙생활이 어려운 문제를 막지는 않습니다.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옵니다. 그러나 이 시련을 이길 힘이 예배자에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와 함께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신앙이 좋다고 죽음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죠. 그래서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도리어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또 다른 통로가 되죠.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예배자로 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힘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마치 영적인 체력을 단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체력을 단련한다고 어려운 일이 도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체력을 만든 사람은 어떤 건강의 어려움이 왔을 때 그것을 이길 능력과 체력이 있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늘 예배자로 서게 되면 갑자기 어떤 어려운 일이 왔을 때 영적인 체력으로 그 일을 극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옵니다. 그러나 참 예배자는 그 시련을 이길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그 능력을 반드시 헤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믿음으로 오늘도 힘차게 기죽지 말고 우리의 모든 문제와 더불어 싸우며, 주님을 의지하고 승리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8월 4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온다” (대하 32장 1절, 18-21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54장, 54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대하 32장 1절, 18-21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8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 때로는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형통은 무엇일가요? 성경적인 형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줍니다. 앗수르의 침략을 통해 이스라엘에 위기가 찾아왔는데 그 앞부분이 참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여기서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사람은 바로 히스기야입니다.
히스기야가 한 충성된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백성들이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책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하나님의 성전을 정화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로 인하여 성경은 히스기야가 형통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성스런 행동을 해서 히스기야가 형통하였다고 해놓고 바로 이어서 이런 충성스런 일을 한 후에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왔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형통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배자가 되어도 때로 적군이 쳐들어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우리의 신앙을 잘 지키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더라도 우리 앞에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일까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증거일까요?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던 히스기야의 백성들은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전쟁이지만 승리를 굳게 믿습니다. 이것이 과거와 달라진 점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개혁운동은 강대국의 침략이라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신앙의 회복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고, 결과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옵니다. 그런데 그 시련을 이길 힘이 예배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승리를 맛보며 살아가는 소망의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기
-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점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는데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경험할 때 성경이 말하는 형통에 회의를 느꼈던 적이 있나요? 개인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예배자로 세워 주셔서,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참 예배자에게도 시련은 오지만, 주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시련을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시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어렵고 힘든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