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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에베소서 2: 14 ~ 18

김경진 목사

2019.03.24

< 모든 것의 시작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말합니다.
“나는 너랑 놀 수가 없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합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왕자가 불쑥 묻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게 어떤 거야?”
여우가 대답합니다.
“그건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는 거지.”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될 거야.”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은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겐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밀밭은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이제부터 사랑하게 될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많은 분이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 즉 ‘관계를 맺는다’는 게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갈구하는 진정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만남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 김춘수도 “꽃”이란 시에서 이러한 관계 맺음을 아름답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1인칭인 ‘내’가 있고, 3인칭인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3인칭 ‘그것’은 내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3인칭인 ‘그것’이 내게 다가오고 내 마음에 들어올 때, 또 그것을 내가 ‘너’라고 불러 줄 때, 그때부터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어린 왕자의 이야기처럼, 여우가 밀밭만 봐도 소년의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관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는 자신의 책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언제나 관계가 있는 법입니다. 특별히 나와 너의 관계에서부터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 태초의 에덴동산에 진정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

성경을 통해서도 태초부터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온 세상과 하나님이 관계 맺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순간순간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의 기쁨, 새로운 관계의 기쁨을 누리신 하나님입니다.
그중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며 정성껏 만든 창조물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여진’, 그리고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아시고, 아담도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을 만드시고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있었다는 점입니다. 온전한 세상인 에덴동산을 만드셨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 홀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잠들었을 때, 그의 갈빗대를 떼어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 여자가 아담에게 왔을 때 아담은 환호하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녀를 ‘하와’라고 칭했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하기 전부터 이미 온전한 관계 안에 거주하던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중)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만드실 때도 삼위 하나님이 하나로 계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창조 과정에서도 함께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온전한 하나가 되어 교류하며 교제하시고, 온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면서 서로 타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운행하시며, 서로 길들여진 상태이자 영원히 깨지지 않는 온전한 관계 속에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표현 자체가 관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이 말씀은 아담이 모든 피조물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고, 이로써 그들 하나하나가 아담에게 꽃이 되었고, 이름을 가진 나무가 되었으며,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짐승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피조물 하나하나를 온전한 관계 속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의 충일이 임한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며,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한 교제 가운데 계시며, 아담과 하와는 한 부부로 온전히 한 몸을 이루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온전한 관계와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관계가 온전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하고 온전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 에덴동산의 온전한 관계가 깨졌습니다. >

그런데 온전한 관계에 틈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뱀에게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결국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습니다.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충일하고 온전한 관계, 사랑의 관계가 망가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죄를 지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9~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9~10)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은 또 다른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깊은 감탄의 관계였던 남편과 아내, 즉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져 버립니다. 급기야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그 여자’라는 말로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중)

그뿐만 아니라 하와 역시 뱀을 가리키며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3 중)

하와와 뱀의 관계도 깨져 버렸습니다. 이로써 모든 자연과 피조물의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입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창세기 3:15 중)

성경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에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깨진 순간, 원수가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깨진 관계가 만들어낸 인간의 부산물이요, 죄의 부산물입니다.
모든 것이 온전한 관계 속에 있던 에덴동산에 엄청난 파문이 일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갈라졌고, 아담과 하와 사이가 갈라졌으며, 인간과 모든 짐승 및 피조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참혹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이제는 땅과 인간의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더는 땅이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흙을 재료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 흙조차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내용이 이와 같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줍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고,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다른 피조물과도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든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으며,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도 깨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더는 인간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실 수 없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하십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어떤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모든 관계가 깨지고 얽히며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때부터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왔음을 알려 줍니다.
인간에게 닥친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온전하고 공의로우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불행해졌으며, 땅은 엉겅퀴를 내고, 남편과 아내가 온전한 사랑 안에 있지 못하며,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과 사람이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불행의 근원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초적 관계의 단절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 죄란 관계의 단절이자 파괴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근거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죄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죄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혹은 “죄란 ‘관계의 단절’이다.”라고 말입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와 말, 의도가 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욕설을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의 욕설은 결국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관계를 단절시킬 것입니다. 때문에 욕설은 잘못인 동시에 죄가 됩니다. 또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속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를 속임으로써 나와 그의 관계는 더 지속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이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런 이치로 남편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것을 아내가 알게 된 순간,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망가지고 맙니다. 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의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일은 죄가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전한 관계가 되지 못하는 상태 역시 죄입니다. 최근 몇몇 연예인에게서 일어난 범죄는 이와 같은 만연한 죄악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남자와 여자가 온전한 교제로 들어가는 고귀한 만남인 ‘성’을 한낱 욕망의 놀이로 삼으며,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진정한 성의 의미와 가치를 모독한 것입니다.
죄란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이자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죄의 결과는 언제나 관계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여러 모양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란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이고, 나쁜 마음을 먹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자, 교만하며, 사치스럽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죄란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짐으로 시작된,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관계가 깨지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3인칭의 위치에 머물게 놓아두는 것도 죄악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꽃이 되고, 내가 하나님에게 꽃이 되는 진정한 만남을 만들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막힘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는 것이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가 죄이므로, 반대로 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구원이란 이제부터 죽지 않게 된 우리의 현실에 있는 게 아닙니다. 혹은 영원히 살게 된 우리의 미래에 있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의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입니다.

< 주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8)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화평한 관계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의 초석입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회복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은 비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이후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관계 회복이 있은 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교회가 한 몸이 되기를 요청하십니다. 나아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 온전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길 원하시며,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온전히 충일한 관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회복이며 화평케 함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임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 소리가 나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아들을 내려다보셨고,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은 물속에서 물 위로 올라오던 중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충일한 교제의 기쁨을 나누시던 그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관계이자 충일한 관계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세례를 받은 후 물에서 올라올 때,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가 이런 선언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구 때문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며,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향해 어떤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나의 사랑아!”라고 불러 주시듯이, 우리도 “나의 사랑이시여! 나의 기쁨이시여!”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있다고, 주님만을 갈망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밀밭을 보고 어린 왕자가 생각나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깊은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한 관계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태초의 관계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태초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충일하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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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 14 ~ 18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모든 것의 시작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

어린 왕자가 여우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말합니다.
“나는 너랑 놀 수가 없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미안해.” 어린 왕자가 말합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왕자가 불쑥 묻습니다.
“길들여진다는 게 어떤 거야?”
여우가 대답합니다.
“그건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는 거지.”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될 거야.”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은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겐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밀밭은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이제부터 사랑하게 될 거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많은 분이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 즉 ‘관계를 맺는다’는 게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심으로 갈구하는 진정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만남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 김춘수도 “꽃”이란 시에서 이러한 관계 맺음을 아름답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1인칭인 ‘내’가 있고, 3인칭인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3인칭 ‘그것’은 내게 어떠한 의미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3인칭인 ‘그것’이 내게 다가오고 내 마음에 들어올 때, 또 그것을 내가 ‘너’라고 불러 줄 때, 그때부터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어린 왕자의 이야기처럼, 여우가 밀밭만 봐도 소년의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관계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는 자신의 책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언제나 관계가 있는 법입니다. 특별히 나와 너의 관계에서부터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관계가 있습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 태초의 에덴동산에 진정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

성경을 통해서도 태초부터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온 세상과 하나님이 관계 맺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순간순간 ‘보기에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의 기쁨, 새로운 관계의 기쁨을 누리신 하나님입니다.
그중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며 정성껏 만든 창조물이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여진’, 그리고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아시고, 아담도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을 만드시고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있었다는 점입니다. 온전한 세상인 에덴동산을 만드셨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 홀로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잠들었을 때, 그의 갈빗대를 떼어 여자를 만드십니다. 그 여자가 아담에게 왔을 때 아담은 환호하며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녀를 ‘하와’라고 칭했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하기 전부터 이미 온전한 관계 안에 거주하던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중)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만드실 때도 삼위 하나님이 하나로 계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창조 과정에서도 함께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온전한 하나가 되어 교류하며 교제하시고, 온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면서 서로 타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운행하시며, 서로 길들여진 상태이자 영원히 깨지지 않는 온전한 관계 속에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표현 자체가 관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2장 19절을 보면, 더욱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19)

이 말씀은 아담이 모든 피조물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고, 이로써 그들 하나하나가 아담에게 꽃이 되었고, 이름을 가진 나무가 되었으며,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짐승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피조물 하나하나를 온전한 관계 속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의 충일이 임한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며,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한 교제 가운데 계시며, 아담과 하와는 한 부부로 온전히 한 몸을 이루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온전한 관계와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관계가 온전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하고 온전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 에덴동산의 온전한 관계가 깨졌습니다. >

그런데 온전한 관계에 틈이 생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뱀에게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결국 금단의 열매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습니다.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충일하고 온전한 관계, 사랑의 관계가 망가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죄를 지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9~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9~10)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은 또 다른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깊은 감탄의 관계였던 남편과 아내, 즉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져 버립니다. 급기야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그 여자’라는 말로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중)

그뿐만 아니라 하와 역시 뱀을 가리키며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3 중)

하와와 뱀의 관계도 깨져 버렸습니다. 이로써 모든 자연과 피조물의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입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창세기 3:15 중)

성경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에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깨진 순간, 원수가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깨진 관계가 만들어낸 인간의 부산물이요, 죄의 부산물입니다.
모든 것이 온전한 관계 속에 있던 에덴동산에 엄청난 파문이 일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갈라졌고, 아담과 하와 사이가 갈라졌으며, 인간과 모든 짐승 및 피조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참혹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이제는 땅과 인간의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더는 땅이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흙을 재료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 흙조차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내용이 이와 같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줍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셨고,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다른 피조물과도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데, 죄악으로 말미암아 모든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으며,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땅의 관계도 깨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도 더는 인간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실 수 없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하십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어떤 일이 발생한 것입니까? 모든 관계가 깨지고 얽히며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때부터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왔음을 알려 줍니다.
인간에게 닥친 가장 큰 불행이 있다면, 온전하고 공의로우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불행해졌으며, 땅은 엉겅퀴를 내고, 남편과 아내가 온전한 사랑 안에 있지 못하며,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과 사람이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불행의 근원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원초적 관계의 단절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 죄란 관계의 단절이자 파괴입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근거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죄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죄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혹은 “죄란 ‘관계의 단절’이다.”라고 말입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와 말, 의도가 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욕설을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의 욕설은 결국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관계를 단절시킬 것입니다. 때문에 욕설은 잘못인 동시에 죄가 됩니다. 또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속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를 속임으로써 나와 그의 관계는 더 지속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이는 것은 죄가 됩니다. 이런 이치로 남편이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것을 아내가 알게 된 순간,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망가지고 맙니다. 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의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일은 죄가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전한 관계가 되지 못하는 상태 역시 죄입니다. 최근 몇몇 연예인에게서 일어난 범죄는 이와 같은 만연한 죄악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남자와 여자가 온전한 교제로 들어가는 고귀한 만남인 ‘성’을 한낱 욕망의 놀이로 삼으며,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진정한 성의 의미와 가치를 모독한 것입니다.
죄란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이자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죄의 결과는 언제나 관계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여러 모양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란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나쁜 행위를 하는 것이고, 나쁜 마음을 먹고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자, 교만하며, 사치스럽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죄란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짐으로 시작된,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관계가 깨지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3인칭의 위치에 머물게 놓아두는 것도 죄악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꽃이 되고, 내가 하나님에게 꽃이 되는 진정한 만남을 만들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막힘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는 것이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가 죄이므로, 반대로 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의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구원이란 이제부터 죽지 않게 된 우리의 현실에 있는 게 아닙니다. 혹은 영원히 살게 된 우리의 미래에 있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의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입니다.

< 주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8)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화평한 관계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관계의 초석입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회복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은 비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이후의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관계 회복이 있은 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온 교회가 한 몸이 되기를 요청하십니다. 나아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 온전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길 원하시며,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온전히 충일한 관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회복이며 화평케 함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임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 소리가 나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아들을 내려다보셨고,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은 물속에서 물 위로 올라오던 중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충일한 교제의 기쁨을 나누시던 그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관계이자 충일한 관계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세례를 받은 후 물에서 올라올 때,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가 이런 선언을 들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구 때문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며,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향해 어떤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나의 사랑아!”라고 불러 주시듯이, 우리도 “나의 사랑이시여! 나의 기쁨이시여!”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찾고 있다고, 주님만을 갈망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밀밭을 보고 어린 왕자가 생각나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깊은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한 관계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태초의 관계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태초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충일하고 깊고 오묘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9년 3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294, 9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엡2:14-18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2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이 세상에는 1인칭의 「내가」있고, 3인칭의 「그것」이 있습니다이 3인칭의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3인칭의 「그것」이 나에게 다가와 내 마음속에 들어오고그것을 내가 「너」라고 불러 줄 때그때부터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됩니다사실이러한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래서 마틴 부버는 그의 책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모든 것의 시작은 관계이며특별이 나와 너의 관계에서부터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설교의 요약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는 창조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온 세상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시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셨고그 때마다 보시기에 좋아하셨습니다하지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2:18). 그래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하와)를 만들어 주셨고아담과 하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삼위일체로 온전한 관계 안에 계셨습니다(1:26).

모두가 서로 의미가 되고어떠한 것도 소외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 삼위일체의 온전한 교제 가운데 계셨고아담과 하와는 온전한 한 몸을 이루며 교제 가운데 있었으며하나님과 인간(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교제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복을 누렸습니다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완벽한 교제 가운데관계 가운데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는 그만 깨어지고사랑의 관계였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단절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습니다(3;12). 뿐만 아니라 땅과 인간의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3:17).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에덴동산의 모든 균형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고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고인간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인간과 땅의 관계도 그만 깨어지고 말았습니다결국 죄란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이며 상태를 말합니다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혼자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죄입니다또한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그저 「그것」 정도에 머물도록 놓아두는 것이 죄입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죄라면관계를 만들어 내는 모든 행위는 바로 구원의 행위입니다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2;14-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이것이 은혜이며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를 온전한 관계 속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깨어진 관계를 회복된 경험이 있습니까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회복하였습니까함께 나눠보세요.

2. 관계의 회복의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한 관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지금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까서로를 축복하며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저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금 화목과 회복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이제 주님의 자녀답게 온전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며 가정과 교회사회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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