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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증언되었습니다. >
아주 오래전 방영된 <쾌걸 조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영화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 시뇨르 조로(Senor Zorro)는 펄프매거진의 작가 존스턴 매컬리가 1919년에 창조한 가공인물입니다. 조로는 당시 남부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식민지에 살던 귀족인데, 때로는 검은 망토를 입고, 때로는 가면을 쓰며 독재자들이나 악당을 무찌르고 약자를 돕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제가 어릴 때 쾌걸 조로가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을 볼 때면 동생들과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쾌걸 조로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중 가장 멋진 장면을 꼽으라면, 조로가 악당을 물리치고 주위 커튼이나 옷자락에 검으로 조로의 첫 글자를 뜻하는 ‘Z’라는 표식을 새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쾌걸 조로가 다녀갔다’는 표식이었고, 동시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환호와 열광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관련해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처럼 부활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던져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활의 주인공이라면 무슨 일을 할 것 같습니까?
저라면 부활하자마자 빌라도를 찾겠습니다. 잠자던 빌라도를 깨워 부활한 제 몸을 보여주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커튼에 저의 못 박힌 손자국을 찍어 놓고 오겠습니다. 제사장 안나스도 만날 것이며, 가야바도 만나러 갈 것입니다. 제 손에 못을 박은 군사들도 찾아갈 것입니다. 제 속옷을 나눠 가진 군병들도 찾아가 그 속옷에도 피 묻은 못 자국 흔적을 남기고 올 것입니다. 쾌걸 조로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예루살렘이 난리통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황제에게 예수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에 예수의 부활 소식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은 속속 잡혀 들어갔을 것입니다.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통쾌할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온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에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것도 새벽녘에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치유된 여인입니다. 그토록 흠 많고 당시 정황으로는 신뢰받기 어려운 여인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이틀을 잡는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
이런 자의 부활 증언을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당시는 여인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귀신들렸던 한 여인의 증언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을까요? 차라리 나다나엘이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덕망 있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 증언이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에 의해 예수 부활 사건이 증언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크고 멋지게 예수 부활이 선포되고 부각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님의 은혜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째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두 번째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큰 두려움이 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유기했다는 죄목으로, 자신들이 처형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부활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으로 설 것을 촉구하십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주님의 부활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얼마든지 부활 사건은 거창하게, 드러나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군과 천사를 동원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처참히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갔던 것처럼, 엄청난 재앙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복수극처럼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 위대한 부활의 증거를 막달라 마리아처럼 연약한 여인에게, 더욱이 보잘것없는 어부와 세리와 같은 제자들에게 맡기셨을까요? 여전히 큰 궁금증이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히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천군과 천사를 대동해 모든 이를 벌하시고 죽이며 악한 세력을 궤멸시켰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부활과 동시에 ‘심판’을 이루시는 분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 모두가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의로운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악도 남겨두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정의롭게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은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부활 소망이 주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 후 다시 심판하러 오시기까지,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 권세는 무너졌고 사탄의 힘은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드러나게 행하지 않으신 이유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7~48절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7~4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근본적인 목적과 계획은 심판이 아닌,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심판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허락하시며 구원받을 이들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주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를 기다리는 주님의 ‘은혜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증입니다. ‘아직 심판이 이르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도 주님을 믿고, 주님의 부활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일종의 표증인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군사력을 통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이 일으키는 강력한 기적이나 힘으로 전파되지도 않았습니다. 강력한 원수 갚음이나 적대적인 감정 표현으로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자들을 통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며,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 이유입니다.
< 부활 신앙은 주님의 평안을 내 것으로 삼는 신앙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은, 앞으로 부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기를 원하셨을까요? 주님의 부활 소식과 함께 주님께 부름 받은 이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 자격 조건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을 빌어 주는 말씀이기도 하며, 능력으로 평강을 창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인사로,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인사말 정도로 이 말씀을 건네셨을까요? 여기에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샬롬’ 곧 ‘평강을 빕니다’라고 인사해 왔던 그 간절한 바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평강’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를 선사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며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루어 내신 ‘평강’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유익이며 은총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배신과 폭력, 조롱과 능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이 살아나셨을 때, 그 안에는 적의가 없었습니다. 그분 안에 분노와 원망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자마자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허락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든지 분노가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원망과 비애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평안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마저 우리에게 나눠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평안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부활 신앙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첫 아담을 만드실 때 생기를 불어넣으셨듯이, 주님은 큰 호흡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전에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성령을 허락하시는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50일의 마지막 날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절기를 보내면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 받을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대합니다. 이 절기가 바로 ‘기쁨의 50일’입니다.
< 부활 신앙은 용서를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서’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한복음 20:23)
부활하신 주님은 평안과 성령을 허락하신 후 ‘용서’를 요청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도, 해석도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이나 사도들에게만 주신 예수님의 사죄권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혹자는 세례를 주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 줘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신 말씀이라는 데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고난받으시고 능욕당하시며 배신당하셨는데, 더욱이 억울한 처형을 당하신 주님이 부활 후 하신 말씀이 ‘용서’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도리어 원수 갚고 싶을 상황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원수를 향한 용서의 마음을 여전히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서도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용서를 실행하시며, 제자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입니다. 부활의 현장에는 이렇듯 언제나 놀라운 일로 가득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목도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누리지 못하는 ‘평안’과 ‘평강’을 누리는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강을 누리는 종교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성령’의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는 종교입니다.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신앙의 삶을 살아내는 종교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용서’를 전하는 종교입니다. 부활 생명이라는 명제에는 항상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라는 세 가지 단어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저는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파면과 관련한 참회의 예배를 기획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예배를 기획하며 함께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미나도 이루어졌는데, 교회사를 연구하시는 김인수 교수님이 그간의 교회 역사를 짚어가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교단은 모두 한결같이 신사참배를 한 창피한 역사를 가진 부끄러운 교단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낯을 들을 수 없는 교단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교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런 교단이 더욱 정통성 있는 교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단은 군소교단으로 남게 되었고, 한국 교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용서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결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결은 유지했지만 용서가 없었기에, 그들은 보다 큰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순결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우리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을 용서하고, 가족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기도 제목을 나누다 보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문제로, 딸은 어머니와의 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며 용서하지 못해 나오는 기도 제목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고, 아내를 죽도록 미워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식을 미워하기도 하고, 친지를 미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우들끼리 미워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미워하는 순간 관계는 깨집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순간 그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통해서만 관계가 회복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참 평안과 평강을 누린다는 것이자, 이 세상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며,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 이 귀한 부활의 선물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한복음 20: 19 ~ 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증언되었습니다. >
아주 오래전 방영된 <쾌걸 조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영화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 시뇨르 조로(Senor Zorro)는 펄프매거진의 작가 존스턴 매컬리가 1919년에 창조한 가공인물입니다. 조로는 당시 남부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식민지에 살던 귀족인데, 때로는 검은 망토를 입고, 때로는 가면을 쓰며 독재자들이나 악당을 무찌르고 약자를 돕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제가 어릴 때 쾌걸 조로가 나타나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을 볼 때면 동생들과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쾌걸 조로가 방영되는 시간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열광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중 가장 멋진 장면을 꼽으라면, 조로가 악당을 물리치고 주위 커튼이나 옷자락에 검으로 조로의 첫 글자를 뜻하는 ‘Z’라는 표식을 새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쾌걸 조로가 다녀갔다’는 표식이었고, 동시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환호와 열광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우리는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관련해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처럼 부활했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도 던져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활의 주인공이라면 무슨 일을 할 것 같습니까?
저라면 부활하자마자 빌라도를 찾겠습니다. 잠자던 빌라도를 깨워 부활한 제 몸을 보여주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는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커튼에 저의 못 박힌 손자국을 찍어 놓고 오겠습니다. 제사장 안나스도 만날 것이며, 가야바도 만나러 갈 것입니다. 제 손에 못을 박은 군사들도 찾아갈 것입니다. 제 속옷을 나눠 가진 군병들도 찾아가 그 속옷에도 피 묻은 못 자국 흔적을 남기고 올 것입니다. 쾌걸 조로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행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예루살렘이 난리통이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황제에게 예수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보고했을 것입니다. 온 세상에 예수의 부활 소식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은 속속 잡혀 들어갔을 것입니다.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통쾌할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온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에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것도 새벽녘에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치유된 여인입니다. 그토록 흠 많고 당시 정황으로는 신뢰받기 어려운 여인에게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이틀을 잡는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다!”
이런 자의 부활 증언을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당시는 여인의 증언은 법정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귀신들렸던 한 여인의 증언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을까요? 차라리 나다나엘이나 아리마대 요셉처럼 덕망 있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 증언이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에 의해 예수 부활 사건이 증언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더 크고 멋지게 예수 부활이 선포되고 부각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님의 은혜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째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두 번째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때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큰 두려움이 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유기했다는 죄목으로, 자신들이 처형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고는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부활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으로 설 것을 촉구하십니다. 제가 보기엔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주님의 부활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얼마든지 부활 사건은 거창하게, 드러나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군과 천사를 동원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처참히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 장자들이 하루아침에 죽어 나갔던 것처럼, 엄청난 재앙과 함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복수극처럼 등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 위대한 부활의 증거를 막달라 마리아처럼 연약한 여인에게, 더욱이 보잘것없는 어부와 세리와 같은 제자들에게 맡기셨을까요? 여전히 큰 궁금증이 일어나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히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천군과 천사를 대동해 모든 이를 벌하시고 죽이며 악한 세력을 궤멸시켰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부활과 동시에 ‘심판’을 이루시는 분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주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 모두가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의로운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악도 남겨두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정의롭게 심판하실 주님의 심판 앞에서 누구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은혜’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부활 소망이 주어지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활 후 다시 심판하러 오시기까지,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 권세는 무너졌고 사탄의 힘은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을 드러나게 행하지 않으신 이유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 47~48절입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7~4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근본적인 목적과 계획은 심판이 아닌,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심판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시간을 허락하시며 구원받을 이들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주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를 기다리는 주님의 ‘은혜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증입니다. ‘아직 심판이 이르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도 주님을 믿고, 주님의 부활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일종의 표증인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군사력을 통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이 일으키는 강력한 기적이나 힘으로 전파되지도 않았습니다. 강력한 원수 갚음이나 적대적인 감정 표현으로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자들을 통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며,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신 이유입니다.
< 부활 신앙은 주님의 평안을 내 것으로 삼는 신앙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은, 앞으로 부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어떤 자격을 갖추기를 원하셨을까요? 주님의 부활 소식과 함께 주님께 부름 받은 이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 자격 조건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을 빌어 주는 말씀이기도 하며, 능력으로 평강을 창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인사로,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의 첫 만남에서 인사말 정도로 이 말씀을 건네셨을까요? 여기에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샬롬’ 곧 ‘평강을 빕니다’라고 인사해 왔던 그 간절한 바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평강’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를 선사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며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루어 내신 ‘평강’을 우리에게 나눠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평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유익이며 은총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배신과 폭력, 조롱과 능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이 살아나셨을 때, 그 안에는 적의가 없었습니다. 그분 안에 분노와 원망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자마자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허락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얼마든지 분노가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원망과 비애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평안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마저 우리에게 나눠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평안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부활 신앙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첫 아담을 만드실 때 생기를 불어넣으셨듯이, 주님은 큰 호흡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전에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
주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성령을 허락하시는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쁨의 5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을 축하하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50일의 마지막 날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절기를 보내면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 받을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대합니다. 이 절기가 바로 ‘기쁨의 50일’입니다.
< 부활 신앙은 용서를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용서’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한복음 20:23)
부활하신 주님은 평안과 성령을 허락하신 후 ‘용서’를 요청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도, 해석도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이나 사도들에게만 주신 예수님의 사죄권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혹자는 세례를 주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 줘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신 말씀이라는 데 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고난받으시고 능욕당하시며 배신당하셨는데, 더욱이 억울한 처형을 당하신 주님이 부활 후 하신 말씀이 ‘용서’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도리어 원수 갚고 싶을 상황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과 함께하셨습니다. 원수를 향한 용서의 마음을 여전히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서도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용서를 실행하시며, 제자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입니다. 부활의 현장에는 이렇듯 언제나 놀라운 일로 가득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목도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따라가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이 누리지 못하는 ‘평안’과 ‘평강’을 누리는 종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강을 누리는 종교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성령’의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는 종교입니다.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우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신앙의 삶을 살아내는 종교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용서’를 전하는 종교입니다. 부활 생명이라는 명제에는 항상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라는 세 가지 단어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저는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파면과 관련한 참회의 예배를 기획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예배를 기획하며 함께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미나도 이루어졌는데, 교회사를 연구하시는 김인수 교수님이 그간의 교회 역사를 짚어가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교단은 모두 한결같이 신사참배를 한 창피한 역사를 가진 부끄러운 교단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낯을 들을 수 없는 교단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교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런 교단이 더욱 정통성 있는 교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단은 군소교단으로 남게 되었고, 한국 교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는 용서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결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결은 유지했지만 용서가 없었기에, 그들은 보다 큰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순결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우리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을 용서하고, 가족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기도 제목을 나누다 보면,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문제로, 딸은 어머니와의 관계 문제로 힘들어하며 용서하지 못해 나오는 기도 제목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미워하고, 아내를 죽도록 미워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식을 미워하기도 하고, 친지를 미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우들끼리 미워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미워하는 순간 관계는 깨집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순간 그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통해서만 관계가 회복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참 평안과 평강을 누린다는 것이자, 이 세상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며,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 이 귀한 부활의 선물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4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1장, 28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20:19-2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부활주일을 기쁨으로 보냈고, 오늘도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빌라도,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손에 못을 박은 군사들에게 보복행위를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설교의 요약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 –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러한 흠이 많은, 그리고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얼마든지 부활의 사건은 빛나게 드러날 수 있었는데, 가장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부활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 위대한 부활의 증거를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에게,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어부, 세리 같은 제자들에게 맡기셨을까요?
이 질문은 엄청난 질문처럼 생각되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력들을 궤멸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셨다면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았을 것이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심판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사망의 권세와 사탄의 힘을 무력화 시키셨지만,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을 미루신 것입니다(요12:47-28).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궤멸되었음을 알려주는 희망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을 기다리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부활의 증인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실까? 첫째로 “평강이 있을 지어다.” 주님은 참 평안을 가지고 계셨고, 우리에게 이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말씀은 “용서(요20:23)”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능욕을 당하시고 배신을 당하셨지만, 제자들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원수를 갚고 싶었을 그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평강을 잃지 않으셨고, 성령과 함께 계셨으며, 원수를 향한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모습입니다. 평안하라.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용서하라.
부활생명이라는 명제 속에는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라는 세 가지 단어가 숨겨져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참 평안, 평강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평강, 성령, 그리고 용서… 부활의 이 귀한 선물을 여러분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어떤 일에 사용하기 원하십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평안하라.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건지신 하나님!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참 평안 가운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서로 용서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