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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십니까

에베소서 2:14~18

김경진 목사

2024.11.03

<평안의 차원은 다양하며 어떠한 노력으로도 사람은 늘 스스로 평안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평안하십니까”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예 그럭저럭 삽니다.” 아마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정말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산다.’라는 생각이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평안하다’라는 생각이 들어도, 무엇인가 찜찜하고 어려운 일이 어느새 닥칠 것 같은 두려운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평안하다’라는 말은 ‘평화롭다’, ‘온전하다’, 혹은 ‘건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샬롬”이라는 말로, 신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 말은 소극적으로 보면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본다면 건강하고 번성하며 무슨 일이든 잘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안하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차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차원의 평안함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는 사업을 하던 중에 일이 잘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평안하다’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평안입니다.

또 ‘관계’의 평안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자주 불화하고 싸운다면 그 가정은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그 교회는 평안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겠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 평안이 사라집니다. 한편으로는 ‘내면’의 평안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 있는 자아와 욕망, 욕구, 이런 것들을 다스리면서 내적인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평안의 차원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한 평안의 차원들은 서로 얽혀 있고 연계되어 있기도 합니다. 환경이 힘들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면의 평안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면 사회적 관계가 깨어질 수 있죠. 이처럼 평안의 차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평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이 잘되면 평안할 줄 알았는데 정작 사업이 잘되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깨어져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좋아져서 평안할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속을 썩여서 평안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이, 아이들이, 부부 관계가 잘되면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병이 생겨서 걱정이 많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오고 평안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도 쉽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가 좋아도 또 다른 문제 때문에 평안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평안하지 못합니다.

 

<평안을 찾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지만, 평안을 찾은 듯해도 갑작스러운 현실 앞에서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찾아서 노력합니다.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림 없이 평안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였습니다. 종종 말씀드리는 ‘시닉(Cynics)’이라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견유학파(犬儒學派)’로 알려진 사람들이죠. 그들은 자족하는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중심인물로 디오게네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삶을 가만히 보니 무엇인가 갖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걱정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갖고 있으면 자녀가 아플까 봐 걱정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 돈을 지켜야 해서 불안합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버리면 평안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아가고, 집도 짓지 않고 나무 사이에 살면서 평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이 마치 개와 같은 삶이어서 견유학파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서 평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명상이나 요가 같은 마음을 다스리는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에서도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니르바나(Nirvana)’라는 불교의 용어가 있지 않습니까? ‘니르’라는 말은 ‘꺼진다’라는 말이고, ‘바나’라는 말은 ‘불’을 의미합니다. 즉, ‘번뇌의 불이 사라진다’라는 의미죠. 한마디로 말하면 근심과 걱정, 분노 등 온갖 번뇌가 꺼진 궁극적인 마음의 평온 상태, 모든 욕망과 고통이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는 이와 같은 평안을 개인의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참으로 고상합니다. 많은 종교가 그 길을 찾아가고 있고요. 목회자로서도 그런 분들에 대해 동일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나 감동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도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출처마저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네스 기록에 매우 큰 관심이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개미를 훈련해서 춤을 추게 하면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개미에게 춤을 가르치려 했다고 합니다. 음악을 틀어 주면 개미가 춤을 출 수 있도록 했는데, 자그마치 10년 동안 열심히 훈련을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는 정말로 음악을 틀어 주면 개미가 춤을 출 수 있게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 개미를 데리고 기네스 대회에 출전하는 날, 그는 배가 고파서 잠시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마지막으로 개미가 제대로 춤을 추는지 확인하기 위해 개미를 꺼냈습니다. 역시 개미는 신들린 듯이 아주 멋지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웨이터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웨이터가 오자 식탁 위에서 춤추고 있는 개미를 가리키면서 “이것 좀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웨이터는 황급히 손으로 개미를 꾹 눌러서 잡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물론 지어진 이야기이며 개미가 춤을 추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10년간 열심히 훈련한 주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각이 드는 이야기입니다. 명상이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이런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어떤 한 번의 현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평정이라면 과연 그것을 마음의 평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평화는 산이나 명상의 자리에 머물 때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현실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자녀와 가족, 여러 가지 사업과 함께 있으면 지켜 낼 수 없는 평안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평안, 곧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평안을 얻기를 원합니까? 오늘은 답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평안을 얻습니다.”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어서 먼저 답을 드렸습니다. 이제 차분히 그 내용을 설명해 드리려 합니다.

믿음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매우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평안, 평화와 관련해서 명상이나 수행과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우선 성경은 왜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인간인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삶과 내면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우리는 평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신 그 평안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 어쩌면 조금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이 예시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 한국전이 휴전된 날이 1953년 7월 27일입니다. 어떻게 휴전이 되었을까요? 판문점에서 각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서 휴전 협정에 사인했습니다. 휴전 협정에 조인한 후에 그것이 바로 모든 군인에게 알려지고 발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하였습니다.

전선에서 열심히 전투하고 있는 병사들은 판문점 어느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휴전 협정의 조인식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하달되어 각 전선으로 도달했을 때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실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휴전이라는 평화를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휴전 발표가 났을 때 명령서를 받은 군인이 휴전과 관련된 명상이나 깊은 사색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즉각 발동되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실행될 때 효력을 발생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이 선포가 과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이 어떻게 우리 안에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니 잘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화해가 어떻게 나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 답을 저는 지난 시간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화해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실존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여러분에게 ‘성령 세례’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음성을 듣는 경험이 성령 세례의 자리에서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그 고백을 듣는 실존의 자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아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씀이 그저 하나의 명분이 아니라 나에게로 다가온 말씀이 되어 내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나 같은 죄인도 받아 주신다. 나같이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도 기뻐해 주신다. 그리고 나같이 병든 사람도, 혼자 사는 사람도 품어 주신다. 나같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이 사랑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멀리 있다고 느껴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삶에만 관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죽음에 이후에도 관여하실 분이시고, 이미 내가 모태에서 생성되기도 전부터 나를 알고 계셨던 분이시며,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의 죽음 이후에도 나를 돌아보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경험이 우리를 평안으로 이끕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평안히 창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깊은 명상이나 사색, 수행이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평안은 사실 가짜 평안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이제 내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 생겨나는 평안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나의 내면이 정돈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환경이 조금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가난과 병과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평온한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의 부부 관계가 평안한지,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평안하십니까?”라는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롬 8:31, 새번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롬 8:35, 새번역)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7~39, 새번역)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오는 평안이 진정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평안이자,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평안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믿음이 우리를 평안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평안을 가지고 또 다른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8)

 

단순히 평안을 누리는 사람을 넘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화가 이루어지는 환경을 만들며 주위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문 중 일부를 읽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문 중 일부)

 

우리가 누리는 평안으로 온 세상에 평안을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믿음을 실천함으로 화평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을 누리고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Are You At Peace?

 

Ephesians 2:14-18

 

The title of today’s sermon is“Are You At Peace?” Dear Church, are you at peace?

 

“Peace”encompasses a state ofbeing at peace, healthy, whole, and sound. The Hebrew Old Testament predominantly uses “Shalom” for it, while the New Testament “Eirene.”

 

“To be at peace,” interpreted passively, means anabsence of war, while an active interpretation refers to a state where people are healthy, prosperous, and thriving. Thus the meaning of“to be at peace”includes diverse dimensions.

 

For example, let’s think about peace in terms of our external circumstances. Currently, wars and conflicts are ongoing in Ukraine, Russia, and the Middle East. We cannot say that people in these regionsliving under such circumstances are at peace. Let’s say a man is plagued by various difficulties in his business. We cannot say that a man under such circumstances is at peace either.

We may also talk about peace in terms of our relationships. If spouses fight and disagree all the time, there will be no peace in their family. If church members fight and criticize one another, you cannot say that their church is a peaceful one. When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break down, it is hard to be at peace.

 

Another dimension of peace is inner peace, which is the pursuit of peace in our minds. It is to maintain a calm state of mind individually by controlling one’s inner self, desires, and greed.

 

These various dimensions of peace, however, are intricately linked. If your circumstances are difficult, it is hard to find inner peace. On the other hand, if your inner self is not healthy, social relationships fail.

 

Therefore all these dimensions of peace are intertwined.

 

Then, are you at peace?

 

Some of us are not at peace because of struggling businesses, somebecause of difficult circumstances, some because of family discord, while some because of their inability to control themselves.

 

You think you will be at peace if only your business goes well, but even when  your business is thriving you are not at peace. Despite business success, your marriage is not working, robbing you of peace. Then you think peace will come when your marriage is healed. But it turns out that your child is giving you problems, which again robs you of peace. You shed tears because of your beloved child.

 

Then we think we will have peace when our kids thrive. We think peace will come when our marriage improves and our business goes well. But that isn’t the case. Sickness makes us anxious again. We find ourselves fearing death, devoid of peace.

 

Therefore, even the rich are not at peace because of all sorts of problems; even happy couples are not at peace because of some otherissue; and even parents with great children are not at peace because of another problem.

 

Consequently, we are constantlywithout peace. This is why countless people have pondered thisquestion:“How can man be at peace?” You will have asked yourself the same question.

 

Man has constantly pondered how he can enjoy perfect peace—since he desires to be at peaceeven as he goes through life’s ever-changing experiences, diverse circumstances, and environment.

 

As one of the answers to this question, many people have tried to reach inner peace or equilibrium. This is becauseman’s environment is constantly changing. Businesses, marriages, parent-child relationships, and health may fail at any time. So many conclude thatinner peace and equilibrium is what’s important, regardless of the circumstance.

 

Accordingly, many rely on meditation, yoga, and various exercises to control the mind. Buddhism teaches that meditation and ascetic practicescangrant us peace.

 

The Buddhist term nirvana is a combination of “nir,”whichmeans“to blow out,” and “vana,”whichmeans“fire.” So it means to extinguish the flame of passions. In short, it refers to an ultimate peaceful state of the mindwhere various passions, such as worry, concern, anger, are gone, or a mental state where all desire and pain have beenextinguished. Buddhism teaches that such a peace can be gained by personal meditation and ascetic practices.

 

Even today many try to gain peace of mind through such ways.

 

Listen to this funny story. There was once a man who was keen on making it into the Guiness Book of Records. So he trained an ant to dance. After ten years of training with no days off, the ant could wiggle its body and dance to music.

 

Finally on the day of the contest, he went into a restaurantbecause he was hungry. After ordering, he took out his ant to make a final check on his ant’s dancing. It danced like crazy. The man, bursting with pride, called the waiter and said, “Waiter! Have a look at this!,” pointing to his ant on the table.

 

The waiter hurriedlysquashed the ant with his finger, saying,“Sir, I am so sorry. We will pay more attention to pest control in the future.”

 

This is a funny, made-up story I read years ago, but one can imagine the man’sconfusion and sense of futility after all his efforts to train the ant.

 

This, I think, is comparable to our efforts for mindcontrol. We think we have gained peace after trying to maintaincalmness of mind, but it is not easy. In fact, it is impossible.

 

Such peace is only possible when we are on top of a mountain or during meditation; it cannot be sustained after returning to reality. It is hard to maintain peace and calm in the midst of raising kids, maintaining various family relationships, doing business, and working.

 

This is why Buddhists must leave everything behind. They have to leave the secular world. This is probably why temples are built deep in the mountains.

 

Then how can we Christians enjoy peace?

 

For starters, Christians do not gain peace through controlling their minds but through faith.

 

The key to enjoying peace lies not in calming one’s mind, practicing asceticism, controlling one’s thoughts, and trying to set your mind on the right path, but in faith.

 

This is what differentiates Christianity from other religions. You need to understand this well.

 

Most people think peace of mind is consequential to gaining peace. This is understandable since our environment is constantly changing. So, people try not to be shaken regardless of their circumstances by controlling their mind.

 

But the Bible presentsa different way.

 

First it asks us why we are not at peace. Its answer is this. The reason man is not at peace is becausehis relationship with God our Creator is broken. At the bottom of all our problems in life, including our inner struggles, lies our broken relationship with God. This is what needs to be fixed.

 

But the Bible tells us that Jesus came to mend this broken relationship and did restore it through His death on the Cross. In short, man’s broken relationship with God has been restored by Jesus.

 

Today’s passage testifies about this fact: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by abolishing in his flesh the law with it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His purpose was to create in himself one new man out of the two, thus making peace,and in this one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by which he put to death their hostility.He came and 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Ephesians 2:14-17)

 

Then why is it important to believe that Jesus reconciled us to God?

 

The Korean War erupted in the early morning of June 25, 1950. But do you know when the gunshots stopped? July 27, 1953. This was the day on which the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in Panmunjom. Then the ceasefire began. There were of course some big and small conflicts on the eastern and western fronts that day. But when news of the Armistice Agreement was delivered andcommandsgiven, the fighting parties needed faith.

 

It was necessary to have faith in the words that “the armistice has begun.” Those who believedin the command put down their rifles and it was at this moment that peace came.

 

The declaration that we have been reconciled to God is valid to those who believe. By faith we make this proclamation ours. This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gained through deep meditation or ascetic practices.

 

For example,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soldiers on the eastern and western fronts did not have to meditate on or think deeply of the matter. All they had to do was to accept it. Then the ceasefire would immediatelybecome effective.

 

Therefore, Paul says in Romans 5: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Romans 5:1)

 

This means that through faith we can enjoy the peace God has accomplished through Jesus Christ.

 

Then can this fact, this declaration that our relationship with God has been restored solve all our problems? How can having peace with God give us peace?

 

How can having peace with God, who is far away, be related to our peace? If we want peace, wouldn’t it be faster to create an environment where business thrives, where family relations are harmonious, and where there is no sickness, wars, or conflicts?

 

The notion of reconciling with a distant, invisible God to gain peace sounds somewhat abstract. Moreover, some people have difficulty accepting that they must be reconciled to God because they haven’t done anything particularly wrong.

 

But think about it. I gave a sermon on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hat did I say we experiencethrough it?

 

We come to hear the words “You are my beloved son/daughter—with whom I am well pleased!” This precisely is ourexperience ofreconciliation with God, which transforms us.

 

I am a beloved child of God—with whom He is well pleased. God receives even sinners like me. He receives even people like me with so many weaknesses. He rejoices in even poor people like me. He embraces evensickpeople like me. Hewelcomes even solitary people like me. He is a friend to lonely people like me. To experience this love is to experience reconciliation with God.

 

This experience alters everything.

 

God does not just intervene in matters of this world through our lifetime, but also in what comes after death. He has known us from when we were in our mother’s womb; He knowseverything about us; and He will look after us even in death.

 

God says to us, “You are my son. You are my daughter. I am pleased with you.” This experience leads us to peace.

 

Therefore peace is not gained bydeep meditation, reflection, ascetic practices, or training. It is gained through faith. Peace starts from believing that our Lord loves us and that we have become His beloved children.

 

When we believe this, our inner thoughts become aligned and we have peace inside. When we believe this, we are able to bear our harsh circumstances. When we believe this, we can withstand poverty, sickness, and hardship. Our hearts become filled with passion, joy, and happiness. We can even bear death. We can give thanks even in times of difficulty.

 

This is our life of faith.

 

Dear Church, are you at peace? This is not a question asking whether you have a peaceful state of mind. Neither is it asking whether your marriage is healthy. Nor is it askingwhether your business is doing well or not.

 

Dear Church, are you at peace? Do you believe the fact that God is on your side? The latter question could be said to be a paraphrase of the former.

 

Are you at peace?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Romans 8:31)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Romans 8:35)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Romans 8:37-39)

 

This confession, this faith leads us to peace. Therefore, peace is obtained through faith.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2 Corinthians 5:18)

 

We need to go beyond merely enjoying peace and become people who make peace. That is, we need to become peacemakers.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error, truth;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Taken from The Peace Prayer by Saint Francis of Assisi)

 

May we all have peace with this faith. May we have peace in this world by putting this faith into action and creating a world that makes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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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4~18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평안의 차원은 다양하며 어떠한 노력으로도 사람은 늘 스스로 평안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평안하십니까”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예 그럭저럭 삽니다.” 아마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정말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그렇게 산다.’라는 생각이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평안하다’라는 생각이 들어도, 무엇인가 찜찜하고 어려운 일이 어느새 닥칠 것 같은 두려운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평안하다’라는 말은 ‘평화롭다’, ‘온전하다’, 혹은 ‘건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샬롬”이라는 말로, 신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 말은 소극적으로 보면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본다면 건강하고 번성하며 무슨 일이든 잘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안하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차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차원의 평안함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평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는 사업을 하던 중에 일이 잘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평안하다’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평안입니다.

또 ‘관계’의 평안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자주 불화하고 싸운다면 그 가정은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그 교회는 평안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겠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 평안이 사라집니다. 한편으로는 ‘내면’의 평안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 있는 자아와 욕망, 욕구, 이런 것들을 다스리면서 내적인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평안의 차원들이 있습니다. 이 다양한 평안의 차원들은 서로 얽혀 있고 연계되어 있기도 합니다. 환경이 힘들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내면의 평안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면 사회적 관계가 깨어질 수 있죠. 이처럼 평안의 차원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평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이 잘되면 평안할 줄 알았는데 정작 사업이 잘되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깨어져서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좋아져서 평안할 줄 알았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속을 썩여서 평안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이, 아이들이, 부부 관계가 잘되면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병이 생겨서 걱정이 많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오고 평안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도 쉽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가 좋아도 또 다른 문제 때문에 평안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평안하지 못합니다.

 

<평안을 찾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지만, 평안을 찾은 듯해도 갑작스러운 현실 앞에서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찾아서 노력합니다.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림 없이 평안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였습니다. 종종 말씀드리는 ‘시닉(Cynics)’이라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견유학파(犬儒學派)’로 알려진 사람들이죠. 그들은 자족하는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중심인물로 디오게네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삶을 가만히 보니 무엇인가 갖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걱정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갖고 있으면 자녀가 아플까 봐 걱정되고 평안이 없습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 돈을 지켜야 해서 불안합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버리면 평안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아가고, 집도 짓지 않고 나무 사이에 살면서 평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이 마치 개와 같은 삶이어서 견유학파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서 평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한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명상이나 요가 같은 마음을 다스리는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불교에서도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니르바나(Nirvana)’라는 불교의 용어가 있지 않습니까? ‘니르’라는 말은 ‘꺼진다’라는 말이고, ‘바나’라는 말은 ‘불’을 의미합니다. 즉, ‘번뇌의 불이 사라진다’라는 의미죠. 한마디로 말하면 근심과 걱정, 분노 등 온갖 번뇌가 꺼진 궁극적인 마음의 평온 상태, 모든 욕망과 고통이 정지된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는 이와 같은 평안을 개인의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참으로 고상합니다. 많은 종교가 그 길을 찾아가고 있고요. 목회자로서도 그런 분들에 대해 동일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분들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나 감동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없지도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출처마저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네스 기록에 매우 큰 관심이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개미를 훈련해서 춤을 추게 하면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개미에게 춤을 가르치려 했다고 합니다. 음악을 틀어 주면 개미가 춤을 출 수 있도록 했는데, 자그마치 10년 동안 열심히 훈련을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는 정말로 음악을 틀어 주면 개미가 춤을 출 수 있게까지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 개미를 데리고 기네스 대회에 출전하는 날, 그는 배가 고파서 잠시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마지막으로 개미가 제대로 춤을 추는지 확인하기 위해 개미를 꺼냈습니다. 역시 개미는 신들린 듯이 아주 멋지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웨이터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웨이터가 오자 식탁 위에서 춤추고 있는 개미를 가리키면서 “이것 좀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웨이터는 황급히 손으로 개미를 꾹 눌러서 잡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물론 지어진 이야기이며 개미가 춤을 추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10년간 열심히 훈련한 주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각이 드는 이야기입니다. 명상이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이런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 어떤 한 번의 현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그런 평정이라면 과연 그것을 마음의 평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평화는 산이나 명상의 자리에 머물 때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현실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자녀와 가족, 여러 가지 사업과 함께 있으면 지켜 낼 수 없는 평안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평안, 곧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평안을 얻기를 원합니까? 오늘은 답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평안을 얻습니다.”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어서 먼저 답을 드렸습니다. 이제 차분히 그 내용을 설명해 드리려 합니다.

믿음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매우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평안, 평화와 관련해서 명상이나 수행과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우선 성경은 왜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인간인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삶과 내면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우리는 평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신 그 평안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 어쩌면 조금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이 예시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지 않았습니까? 그 한국전이 휴전된 날이 1953년 7월 27일입니다. 어떻게 휴전이 되었을까요? 판문점에서 각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서 휴전 협정에 사인했습니다. 휴전 협정에 조인한 후에 그것이 바로 모든 군인에게 알려지고 발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하였습니다.

전선에서 열심히 전투하고 있는 병사들은 판문점 어느 구석에서 이루어지는 휴전 협정의 조인식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하달되어 각 전선으로 도달했을 때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실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휴전이라는 평화를 얻어 낼 수 있었습니다. 휴전 발표가 났을 때 명령서를 받은 군인이 휴전과 관련된 명상이나 깊은 사색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되었습니다. 그러면 즉각 발동되는 것입니다. 마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실행될 때 효력을 발생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이 선포가 과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이 어떻게 우리 안에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니 잘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 화해가 어떻게 나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 답을 저는 지난 시간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화해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실존의 자리에서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여러분에게 ‘성령 세례’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음성을 듣는 경험이 성령 세례의 자리에서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그 고백을 듣는 실존의 자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아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말씀이 그저 하나의 명분이 아니라 나에게로 다가온 말씀이 되어 내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나 같은 죄인도 받아 주신다. 나같이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도 기뻐해 주신다. 그리고 나같이 병든 사람도, 혼자 사는 사람도 품어 주신다. 나같이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신다. 이 사랑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멀리 있다고 느껴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의 모든 것을 바꿉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삶에만 관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죽음에 이후에도 관여하실 분이시고, 이미 내가 모태에서 생성되기도 전부터 나를 알고 계셨던 분이시며,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의 죽음 이후에도 나를 돌아보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경험이 우리를 평안으로 이끕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평안히 창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깊은 명상이나 사색, 수행이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평안은 사실 가짜 평안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이제 내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 생겨나는 평안이 진정한 평안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나의 내면이 정돈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환경이 조금 힘들어도 견딜 수 있습니다. 가난과 병과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의 마음 상태가 평온한지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또한 여러분의 부부 관계가 평안한지,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평안하십니까?”라는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의 편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롬 8:31, 새번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롬 8:35, 새번역)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7~39, 새번역)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오는 평안이 진정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평안이자,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평안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믿음이 우리를 평안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평안을 가지고 또 다른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8)

 

단순히 평안을 누리는 사람을 넘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피스메이커(peacemaker)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평화가 이루어지는 환경을 만들며 주위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문 중 일부를 읽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음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문 중 일부)

 

우리가 누리는 평안으로 온 세상에 평안을 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믿음을 실천함으로 화평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을 누리고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11월 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평안하십니까” (엡 2장 14-18)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538장, 41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엡 2장 14-18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1월 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사업에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다면 진정한 평안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환경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설교의 요약

평안이라는 말은 ‘평화롭다, 건강하다, 온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하기를 원하지만 삶의 복잡한 환경에서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유지하며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수행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평안을 누립니다.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마음을 잘 다스리고 정돈하는 노력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평안이 없는 이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믿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믿는 사람에게만 이 화목이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깊은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휴전 발표가 났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깊은 사색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사람은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태에서 생성되기도 전에 우리를 아셨고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돌보아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깊은 명상이나 사색, 수행이나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이제 내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부터 평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순히 평안을 누리는 것을 넘어 평화를 만드는 사람, 세상을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 마음의 참된 평안을 얻기 위해 자신이 했던 다양한 노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환경과 상황은 어려워도 참된 평안을 체험했던 적이 있나요? 함께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하며 죄로 가득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평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믿음으로 이 평화를 맛보게 하시고 믿음으로 이 평안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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