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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2절은 속도감 있는 삶을 재촉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방향성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흥분되기도 하고 활력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귀한 말씀이기도 하죠.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한 운동선수가 마지막 피치를 내서 목표 지점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하곤 합니다. 이어지는 13절, 14절 말씀은 그러한 느낌을 더욱더 강화시켜 줍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새번역은 조금 더 역동적으로 번역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3~14, 새번역)
본문을 읽다 보면 역동성이 느껴지고 속도감도 느껴집니다. 빨리 달려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죠. 이 본문을 가지고 어느 목사님과 함께 묵상을 나누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 나도 빨리 달려야겠다. 1등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곤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은 매번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나는 안 달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말씀을 읽는 중에 16절 말씀을 보면서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6)
빨리 달려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 말씀을 읽고 나니 ‘아, 괜찮구나.’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꼭 일등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어느 단계에 있든지 그저 달리면 되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꼴찌로라도 들어가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을 통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통찰을 얻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달려가노라’는 용어 때문에 운동성에 귀착되곤 합니다. 빨리 움직여서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본문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달려가노라’라는 의미로 번역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서신 등 성경 여러 곳에서 신앙생활을 달음질에 유비적으로 연결시켜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또한 그러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1)
여기서 ‘경주를 한다’는 표현 역시 ‘달음질한다’는 말씀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2장 2절이나 5장 7절에도 달음질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본문 안에 나타난 ‘달음질’에 해당하는 단어와, 본문 말씀 가운데 ‘달려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서로 다릅니다. ‘달음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트렉코’(τρέχω, trechó)로서 ‘달린다’, ‘경주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디오코’(διώκω, diókó)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빌립보서에서는 ‘달리다’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이러한 용례로는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대부분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의미로는 ‘박해하다’가 있고, ‘빠르다’라는 의미 또한 가집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 말씀을 한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중)
여기서 ‘박해를 받다’는 단어에 ‘디오코’가 사용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눅 17:23)
이때에도 ‘따르지 말라’는 표현에 ‘디오코’가 사용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달려가노라’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해 볼 수 있죠. “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박해를 받노라.” 혹은 “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따라가노라.” 사실 이렇게 보면 ‘달려가노라’와 의미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 새번역)
바울은 지금 이 본문에서 아직 목표점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 즉 도상에 있지만 목표 지점을 향하여 박해를 받으며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어지는 빌립보서 3장 16절 역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빌 3:16, 새번역)
<바울은 율법주의와 방종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삶을 권면합니다.>
자, 이렇게 본문 속에서 속도감을 제하고 나면 한 가지 분명한 과제가 남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말하는 목표 지점이란 어디일까요? 다시 말해 14절에서 그가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푯대는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당시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듣고 걱정하면서 쓴 서신이 빌립보서입니다. 물론 빌립보서에는 칭찬의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특별히 염려되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합니다. 먼저는 그가 율법주의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였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는데 도리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면서 과거로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가르친 것입니다. 결국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서로 부딪히며 싸움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강한 우려를 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을 주장하면서 사실은 방종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향한 염려였습니다.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제는 마음껏 살아도 된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모두에 대한 염려로부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합니다. 그가 빌립보서 3장 앞부분에서는 방종의 삶을 사는 자들을 개로 칭하며 그들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바울 자신을 가리켜 열심에 있어서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흠이 없는 자라고 이야기하며, 그럼에도 이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다고 전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달음질은 빨리 달리며 성취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푯대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달음질을 속도감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칫 선행을 통한, 혹은 열심을 통한 자기 구원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감리교회의 경우, 이 본문에서 성화의 신학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열심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바울에게 푯대는 무엇입니까? 어디에 있든지, 어느 단계에 있든지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목표 지점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울이 추구하는 목표 지점은 빌립보서 3장 12절 바로 앞부분인 8~9절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8~9)
바울이 말합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이제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며 그가 말한 목표 지점입니다. 여기서 동사 ‘발견되다’에 ‘휴리스코’(εὑρίσκω, heuriskó)의 수동태인 ‘휴레쏘’(εὑρεθῶ, heurethō)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즉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발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도상에 있으며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열심히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전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그분으로부터 의를 얻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발견되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추구하며 걸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추구해야 할 것이 선행이나 빠짐없는 예배 출석이나, 지속적인 헌금 생활이나 교회의 직분 활동, 설교나 찬양 활동이 아닙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외적인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예배 출석이나 선행이나 헌금, 직분 활동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매주 예배당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의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도 어렵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구원의 순례 길을 바울은 지금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단계가 아니라, 얼마나 앞서 있느냐가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0으로 좁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순간, 그분이 우리를 발견하시는 순간, 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시는 순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라본 푯대는 결국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날까지 비록 빨리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겠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방향성과 함께 바울은 죽음 너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삶으로 안내합니다.>
연결되는 맥락에서 바울에게는 두 번째 푯대가 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이 세상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너머 부활에 이르는 길을 봅니다. 그 부활을 푯대로 놓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음의 날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빼고 나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죽음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 너머의 부활을 봅니다. 부활을 희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고 나타난 부활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좇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아직은 잡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 부활을 향하여 손을 뻗으며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부활을 좇는 삶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빌립보서 3장 10~12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새번역)
첫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절대로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부활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삶입니다. 부활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네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으면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달려가고자 하는 길은 이렇습니다. 마지막에 부활에 이르는 길, 바로 그 길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믿어야 하는 길, 그리스도처럼 고난에 참여하며 죽음에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 바울은 부활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앞장인 빌립보서 2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1)
그렇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기 비하, 종의 형체를 취하는 모습,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 길에는 십자가가 있지만 그곳을 넘어서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참된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구원을 이루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부활을 바라보고 삽니다. 우리의 푯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목표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소망이자 희망입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고난도, 십자가도, 죽음도 거쳐야만 합니다. 그렇게 죽음을 통과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될 때에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이 푯대를 향하여 방향을 분명하게 하고 함께 전진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6)
Toward the Goal
Philippians 3:10-16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arrived at my goal,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Philippians 3:12)
This is a very inspiring and thrilling verse. Many people, loving it, have based their faith on it. When we read it, we often imagine an athlete making his final push as he runs toward the finish line. The verses that follow, Verses 13 and 14, reinforce this image:
“Brothers and sisters, I do not consider myself yet to have taken hold of i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for which God has called me heavenward in Christ Jesus.” (Philippians 3:13-14)
The Message Bible translates this more dynamically:
“I’m not saying that I have this all together, that I have it made. But I’m well on my way, reaching out for Christ, who has so wondrously reached out for me. Friends, don’t get me wrong: By no means do I count myself an expert in all of this, but I’ve got my eye on the goal, where God is beckoning us onward—to Jesus. I’m off and running, and I’m not turning back.” (Philippians 3: 12-14 MSG)
Reading this version, we feel a dynamic beat and a fast tempo. It makes us want to run faster.
A pastor I know once shared his meditation on this passage with me: “Pastor Kim, whenever I read this Scripture, I felt a pressure. I felt I had to run faster, to come in first, and so on. It weighed heavy on my heart. But you know what? Verse 16 liberated me: ‘Only let us live up to what we have already attained.’ (Philippians 3:16) I realized that I didn’t have to come in first. Where you are in the race does not matter. You just had to run! It doesn’t matter if you come in last! You just have to make it to the finish line! Finally I realized that this passage wasn’t about ‘speed,’ but ‘direction’!”
This is an incredible insight. Yes, it’s true. We tend to focus on the word “run.” So, we feel pressured to run fast and to come in first in the race where many people are competing.
But this is not the message of this text. To be exact, the original word used for “run” need not be translated as run.
Paul often compared our faith to running a race in his epistles such as 1& 2 Corinthians and Galatians. For example, let’s look at 1 Corinthians and Hebrews:
“Do you not know that in a race all the runners run, but only one gets the prize? Run in such a way as to get the prize.” (1 Corinthians 9:24)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Hebrews 12:1)
These are some verses where Paul uses the analogy of the race. The imagery of the race appears in Galatians 2:2, 5:7, and other places in the Bible, too.
But the original word used for “run the race” in the above verses is “trechó (τρέχω)”, which is different from the word used in today’s passage from Philippians 3. Trechó literally means “to run,” or “to run a race.”
But the original word for “run the race” in Philippians 3 is “diókó (διώκω)”, a word with a different meaning and usage. Diókó’s predominant meaning is “to be persecuted” and is mainly translated as “to follow.”
For example, let’s look at Matthew 5: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10)
The original word used for “persecuted” in this verse is diókó, the very word seen in Philippians 3:12.
Also, Jesus says in Luke 17, “People will tell you, ‘There he is!’ or ‘Here he is!’ Do not go running off after them.” (Luke 17:23) The original word for “go running off” in this verse is also diókó.
Therefore, if we read today’s passage from this perspective, it reads like this:
“I am persecuted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Or “I am running off after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That is why the Message Bible translated this part as follows:
“I am not saying that I have this all together, that I have it made. But am well on my way, reaching out for Christ, who has so wondrously reached out for me.” (Philippians 3:12 MSG)
In short, Paul is saying that he is still on a journey toward somewhere, and has not yet arrived at his goal, but continues to follow that goal even under persecution.
Interpreted this way, Verse 16 appears more consistent.
“Now that we are on the right track, let’s stay on it.” (Philippians 3:16 MSG)
Now if we eliminate the “speed element” in today’s passage, one important question remains. Where is Paul going? Where is his final destination, his goal? If speed is not the issue, what lies at the endpoint of our race?
Paul says in Verse 14 that he is pressing on toward the goal. So my question is, “What is that goal?” The reason why we are not considering the pace of the race is to avoid a misinterpretation of this text.
When Paul was writing Philippians in chains, he was deeply concerned about the legalism in the church of Philippi. He was also worried about people who mistook self-indulgence for freedom.
That is why in Philippians 3 Paul referred to such people as “dogs”, warning the Christians in Philippi to stay away from them. While stating that he was flawless in terms of zeal and the law, he considered all these worthle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When we interpret this passage as teaching us to run fast, we may easily be trapped in legalism and come to believe in a salvation reached through good works and zeal. This is far from the message. This text is ultimately teaching us Christ Himself, not the law or zeal.
Let’s return to my question. Where is Paul headed? What is his goal? What is that finish line that we must run toward, regardless of where we are in the race?
The first goal pursued by Paul is found in Philippians 3:8-9: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because of the surpassing worth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garbage, that I may gain Christ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ough faith in Christ—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on the basis of faith.” (Philippians 3:8-9)
Paul is saying that he wants to gain Christ through faith and be found in Him. This was Paul’s desire and goal.
The original word for “to be found” in this verse is “heurethō (εὑρεθῶ)”, the passive of “heuriskó (εὑρίσκω).” This fact is very significant. Paul did not believe his salvation to be complete. He thought he was still on a course, straining to reach his goal. This is why he continued to press forward.
Believing in Christ is not the end. Believing in Christ means to press toward the final destination, which is being found in Christ after being saved through a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Him.
Our goal ought not to be to do good works, to attend every service, to tithe without fail, to serve as a leader, to preach, or to sing praises. To be precise, our goal is something greater, going beyond all these outward appearances of faith. We may do good works, attend service faithfully, tithe, and become a leader in church. But what are we ultimately pursuing by doing all these? And what is that ultimate goal we must pursue even when we are not doing such things? It is to be found in Christ through the righteousness that we gain through Him.
We cannot do this with our own strength. Nor can we do it with our deeds. Nor by keeping the law. We can only by found by God in Christ through faith. This is the only path to salvation. Paul was going the pilgrim’s journey. And, in this journey, what matters is not where one is, but where he is headed.
When we shift our gaze to God, our distance with Him becomes “0.” The moment He sees us and finds us, our distance with Him does not matter. It doesn’t matter where we are, what stage we are in. What matters is pursuing the goal, that is, to be found in Christ through faith.
This was the goal Paul pressed toward. He raced to be found by God in Christ. He desired to finish the pilgrim’s journey, with the hope that he would be found by God on the last day.
Paul’s second goal, which is related to the first goal, is found in these verses:
“I want to know Christ—yes,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participation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and so, somehow, attaining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Philippians 3:10-11)
Paul’s second goal was to “somehow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Paul did not believe this world was the end. Accordingly, he didn’t despair before death. He saw a way to resurrection, a way that went beyond death. And he hoped for resurrection, making it his goal.
Brothers and sisters, we all die. Everyone born is destined to die someday. If we take away all the time given to us, then all we are left with is death. What I am trying to say is that death is our reality.
But this was not Paul’s thinking. Yes, Paul was aware of the looming presence of death. Yet he hoped for what lay beyond: resurrection. Christians have hope in the resurrection revealed and manifested to us by Jesus Christ. Paul was pursuing that resurrection. He had not reached it yet it. But he says he is running after it to finally attain to it.
Then how can we “attain to the resurrection”? How must we live in order to pursue and reach the resurrection?
“I gave up all that inferior stuff so I could know Christ personally, experience his resurrection, be a partner in his suffering, and go all the way with him to death itself. If there was any way to get in o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I wanted to do it.” (Philippians 3:10-11 MSG)
Attaining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is to: first, know Christ personally; second, experience his resurrection; third, be a partner in his suffering; and fourth, go all the way with him to death itself. Paul says that he gets in o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by doing these four things.
This was the path that Paul ran. What is the road that ultimately leads to resurrection? It is the path of knowing Christ, of knowing and believing in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of attaining to death by participating in His suffering. Paul is saying that through such a path he will be able to reach the resurrection.
Paul expressed such thoughts in Philippians 2, the chapter which comes right before today’s text:
“In your relationships with one another, have the same mindset as Christ Jesus: Who, being in very nature God, did not consider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used to his own advantage; rather, he made himself nothing by 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 being made in human likeness. And 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 he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death—even death on a cross! Therefore God exalted him to the highest place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and every tongue acknowledge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Philippians 2:5-11)
Wasn’t this the goal Paul had his eyes on? Paul understood that if he followed the path of Jesus, who humbled Himself by becoming obedient to death, he would face the cross, but, at the same time, he knew he would see God who raised Jesus from the dead as well as the hope of resurrection.
In the verse succeeding the above passage, the Lord speaks to us through Paul: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Philippians 2:12)
The meaning of Philippians 2:12 is connected to today’s Scripture: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all this, or have already arrived at my goal, but I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Philippians 3:12)
In other words, “to work out your salvation” means to “press on to take hold of 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Dear Church, our last is death. Death is the last thing we experience on earth. But Christians look to the resurrection even as we live life on earth. Our goal is to somehow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To reach that resurrection, we simply must have the name of Christ. We also have to go through suffering, the cross, and even death. Even though our pace may seem slow, let’s run toward that goal with a hope that we will be found by God in Christ in the end and that we will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The Lord speaks to us:
“Only let us live up to what we have already attained.” (Philippians 3:16)
Amen.
빌립보서 3: 10 ~ 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흥분되기도 하고 활력감을 느끼게도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귀한 말씀이기도 하죠.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마치 한 운동선수가 마지막 피치를 내서 목표 지점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하곤 합니다. 이어지는 13절, 14절 말씀은 그러한 느낌을 더욱더 강화시켜 줍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새번역은 조금 더 역동적으로 번역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3~14, 새번역)
본문을 읽다 보면 역동성이 느껴지고 속도감도 느껴집니다. 빨리 달려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죠. 이 본문을 가지고 어느 목사님과 함께 묵상을 나누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 나도 빨리 달려야겠다. 1등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곤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말씀은 매번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나는 안 달리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 말씀을 읽는 중에 16절 말씀을 보면서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6)
빨리 달려야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 말씀을 읽고 나니 ‘아, 괜찮구나.’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꼭 일등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어느 단계에 있든지 그저 달리면 되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꼴찌로라도 들어가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말씀을 통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통찰을 얻으신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달려가노라’는 용어 때문에 운동성에 귀착되곤 합니다. 빨리 움직여서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본문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달려가노라’라는 의미로 번역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서신 등 성경 여러 곳에서 신앙생활을 달음질에 유비적으로 연결시켜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4)
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또한 그러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1)
여기서 ‘경주를 한다’는 표현 역시 ‘달음질한다’는 말씀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이 외에도 갈라디아서 2장 2절이나 5장 7절에도 달음질의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본문 안에 나타난 ‘달음질’에 해당하는 단어와, 본문 말씀 가운데 ‘달려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서로 다릅니다. ‘달음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트렉코’(τρέχω, trechó)로서 ‘달린다’, ‘경주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는 ‘디오코’(διώκω, diókó)가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빌립보서에서는 ‘달리다’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이러한 용례로는 이곳에서만 나타나고 대부분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의미로는 ‘박해하다’가 있고, ‘빠르다’라는 의미 또한 가집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 말씀을 한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중)
여기서 ‘박해를 받다’는 단어에 ‘디오코’가 사용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데,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눅 17:23)
이때에도 ‘따르지 말라’는 표현에 ‘디오코’가 사용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달려가노라’ 단어를 다양한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서 3장 12절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해 볼 수 있죠. “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박해를 받노라.” 혹은 “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따라가노라.” 사실 이렇게 보면 ‘달려가노라’와 의미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빌 3:12, 새번역)
바울은 지금 이 본문에서 아직 목표점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 즉 도상에 있지만 목표 지점을 향하여 박해를 받으며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어지는 빌립보서 3장 16절 역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어쨌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 (빌 3:16, 새번역)
<바울은 율법주의와 방종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삶을 권면합니다.>
자, 이렇게 본문 속에서 속도감을 제하고 나면 한 가지 분명한 과제가 남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말하는 목표 지점이란 어디일까요? 다시 말해 14절에서 그가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푯대는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당시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듣고 걱정하면서 쓴 서신이 빌립보서입니다. 물론 빌립보서에는 칭찬의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특별히 염려되는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합니다. 먼저는 그가 율법주의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였지만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는데 도리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면서 과거로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가르친 것입니다. 결국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서로 부딪히며 싸움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람들을 향하여 강한 우려를 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을 주장하면서 사실은 방종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향한 염려였습니다.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제는 마음껏 살아도 된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모두에 대한 염려로부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합니다. 그가 빌립보서 3장 앞부분에서는 방종의 삶을 사는 자들을 개로 칭하며 그들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바울 자신을 가리켜 열심에 있어서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흠이 없는 자라고 이야기하며, 그럼에도 이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다고 전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달음질은 빨리 달리며 성취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푯대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달음질을 속도감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칫 선행을 통한, 혹은 열심을 통한 자기 구원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감리교회의 경우, 이 본문에서 성화의 신학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이 아니라, 열심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까? 바울에게 푯대는 무엇입니까? 어디에 있든지, 어느 단계에 있든지 우리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목표 지점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울이 추구하는 목표 지점은 빌립보서 3장 12절 바로 앞부분인 8~9절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8~9)
바울이 말합니다. 자신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얻고 이제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며 그가 말한 목표 지점입니다. 여기서 동사 ‘발견되다’에 ‘휴리스코’(εὑρίσκω, heuriskó)의 수동태인 ‘휴레쏘’(εὑρεθῶ, heurethō)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즉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발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도상에 있으며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열심히 좇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전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그분으로부터 의를 얻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발견되는 걸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추구하며 걸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추구해야 할 것이 선행이나 빠짐없는 예배 출석이나, 지속적인 헌금 생활이나 교회의 직분 활동, 설교나 찬양 활동이 아닙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씀드린다면 외적인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예배 출석이나 선행이나 헌금, 직분 활동을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매주 예배당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의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도 어렵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 길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구원의 순례 길을 바울은 지금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단계가 아니라, 얼마나 앞서 있느냐가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0으로 좁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순간, 그분이 우리를 발견하시는 순간, 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시는 순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바라본 푯대는 결국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날까지 비록 빨리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겠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방향성과 함께 바울은 죽음 너머의 부활을 소망하는 삶으로 안내합니다.>
연결되는 맥락에서 바울에게는 두 번째 푯대가 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이 세상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너머 부활에 이르는 길을 봅니다. 그 부활을 푯대로 놓고 바라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음의 날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빼고 나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죽음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 너머의 부활을 봅니다. 부활을 희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고 나타난 부활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좇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아직은 잡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 부활을 향하여 손을 뻗으며 나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부활을 좇는 삶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빌립보서 3장 10~12절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새번역)
첫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절대로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부활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삶입니다. 부활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네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으면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달려가고자 하는 길은 이렇습니다. 마지막에 부활에 이르는 길, 바로 그 길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길,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믿어야 하는 길, 그리스도처럼 고난에 참여하며 죽음에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 바울은 부활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앞장인 빌립보서 2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1)
그렇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기 비하, 종의 형체를 취하는 모습,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 길에는 십자가가 있지만 그곳을 넘어서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참된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구원을 이루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부활을 바라보고 삽니다. 우리의 푯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목표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소망이자 희망입니다.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고난도, 십자가도, 죽음도 거쳐야만 합니다. 그렇게 죽음을 통과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발견될 때에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이 푯대를 향하여 방향을 분명하게 하고 함께 전진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 3:16)
2022년 2월 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푯대를 향하여” (빌 3:10-1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장, 40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빌 3:10-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어떤 목사님은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나도 빨리 달려가야할텐데, 1등을 해야할텐데’하는 생각으로 늘 부담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더 묵상해보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절)라는 구절을 보고, ‘아, 꼭 1등을 안 해도 되는구나! 어느 단계에 있든지, 그저 달려가면 되는 거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달리기라는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지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달려간다’는 동사는 원어로 ‘디오코’입니다. 이 말은 사실 달리기로 번역되는 것보다는 ‘박해를 받다’, ‘따르다’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 디오코라는 단어는 ‘달린다’는 말보다는 ‘박해를 받고’(마 5:10), ‘따르지 말라’(눅 17:23)는 말로 번역이 된 사례가 많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으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박해를 받노라/따라가노라.”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의 의미가 더욱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목표점에 도착하지 않은 도상에 있으며, 그러나 그 목표점을 향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쫓아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방향, 즉 푯대가 무엇일까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는 율법주의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을 위해 어떤 것들을 꼭 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자유를 오인하며 방종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극단적인 양쪽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구원은 그저 우리의 열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자동적으로 알아서 되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열심을 내어 주일성수, 선행, 헌금, 봉사 등을 계속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푯대, 우리가 신앙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의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라본 푯대는 바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체는 바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아무리 커보여도, 우리에게는 부활의 푯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고 보여졌습니다. 부활을 쫓아가는 삶, 그것은 먼저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의 푯대입니다.
나누기
1. 지금까지 자신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푯대 또는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혹 나의 의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는지 돌아봅시다.
2. 부활을 쫓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 내 삶과 가정 가운데 실천할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마무리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발견되기 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고난과 죽음조차 넘어 부활에 이르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푯대를 향하여 날마나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