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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

창세기 1 : 31 ~ 30

김경진 목사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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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 : 31 ~ 30

31 ~ 30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는 예술가입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십니다. 하나님은 미술가이십니다. 그분은 빛을 통해 아름다운 색을 만드시고, 산과 하늘과 바다에 멋진 물감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설치미술가이십니다. 온 우주와 해와 달, 별들을 달아매시고, 그것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조각가이십니다. 땅속에서 바위가 솟아나게 하시고, 바람과 비를 통해 멋진 조각품들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나무들이 땅에서 올라오게 하셨으며,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열매가 맺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음악가이십니다. 바다의 파도 소리, 새들의 노랫소리, 하늘의 천둥소리, 매미의 울음소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온 우주가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여러 번 “보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움을 형상화하여 온 우주와 세상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멋진 드라마의 작가이자 소설가이십니다. 골고다 언덕, 곧 모든 것이 끝나고 십자가 죽음과 죄가 위용을 자랑하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무덤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제3막이 끝나고 제4막, 그 절정의 순간에 하나님이 기막힌 반전의 드라마를 써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술가이십니다.
예수님도 뛰어난 예술가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예사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시인처럼 세상 만물 속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하나님의 의미를 찾아내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속에는 들이 있고, 그 위에는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푸른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며, 그 하늘 아래는 씨 뿌리는 농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가에 핀 하찮은 백합화를 보시며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셨고, 그것을 노래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진흙을 발라 고쳐 주셨을 때, 또 성전에 올라가 상인들을 내쫓으셨을 때, 그분의 모습은 오늘날의 행위예술가를 닮았습니다. 그분이 잡히시던 밤 제자들과 식사를 하고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그 모습, 떡과 잔을 드시며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신 그 예전, 그것은 오고 오는 세대가 지금까지도 지키고 기억하는 멋진 예술적 행위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도 예술가이시고, 예수님도 예술가이시기에,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역시 예술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라는 말씀을 바꾸면, “하나님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창조해 낼 수 있는 예술적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술가입니다. 하나님의 예술성이 사람의 영혼과 마음에 스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가 예술성을 회복할 때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교리적인 관점과 진위 판단적인 관점에 매몰될 때가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무엇이 맞는가? 무엇이 틀린가?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나와 있는가? 무엇이 정통인가? 누가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인가? 누가 맞는가? 누가 틀린가?” 이러한 모습은 율법적인 양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과 접근 역시 매우 귀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만 집중하면 자칫 신앙의 예술성을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교회 역사 가운데 정의를 내세운 수많은 투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 바돌로뮤 대학살 사건이 그중 하나입니다. 그때 가톨릭교도들은 수많은 개신교도를 살해한 후 기뻐했고, 교황은 이 날을 ‘테 데움(Te Deum)’이라 칭하며 하나님의 날로 선언했습니다. 십자군전쟁을 비롯해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앙의 예술성이 희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편을 나눠 싸우고, 자신의 주장만 맞다고 주장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간간이 지켜보며,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름답게 신앙을 표현하는 것, 즉 신앙의 예술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를 넘어선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나름의 계약을 맺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노동력을 제공해 주면 그에게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약속한 사람이 약속대로 노동력을 제공했는지, 아닌지는 정의의 문제로 판가름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약속한 대로 돈을 지불했는지, 아닌지 역시 정의의 차원에서 판가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길을 가다 불쌍한 사람을 만나 마음에 감동이 일어 그를 도와주었다면,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계약도 없이, 어떤 노동력의 제공도 없이, 그저 마음에 감동이 일어 선행을 베풀었다면, 바로 거기서 정의의 차원과 거래의 차원을 넘어선 예술적 차원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종종 아름다움은 정의를 넘어선 저편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하실 때도 정의의 차원에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의 차원에서 대하셨다면,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간은 파멸 받아 마땅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다루셨다면, 인간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정의의 차원과 경제적 관점에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시는 예술적 행동을 감행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예술성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예술적 관점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시급히 요청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 사회 가운데도 삶의 예술성이 요청된다고 봅니다. 한국 사회가 너무나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맞다.” “틀리다.” “내가 맞다.” “네가 틀렸다.”와 같은 판별과 정의의 관점이 득세합니다. SNS에 잘못된 글 하나만 올려도 벌떼같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죽이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 자신이 “맞다.”고 하고, 모두 “내가 생각하는 대로 가면 사회가 올바로 된다.”라고 주장하지만, 거기에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양식도 사라져 버린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랑과 열정이 신앙의 예술성을 회복시킵니다.

저는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예술적 관점에서 목회를 해보길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 속에서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한국 교회가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어떻게 신앙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며 목회의 길에 들어서려 합니다. 아마 이러한 관점 아래 여러 차례 말씀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살펴보며, 창조의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예술성을 창조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길 원합니다.
먼저 예술의 밑바탕에는 동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열정’의 동력입니다. 사랑과 열정으로 시작된 곳에는 언제나 예술적 경지가 나타나곤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눈빛이 불타오르고 모든 관심이 서로를 향합니다. 상대방의 모든 움직임과 일거수일투족이 의미가 됩니다. 그를 위해서는 100송이 장미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니, 100만 송이 장미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는 매혹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동력입니다.
인간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지 않으시고 자기 아들을 내 주신 하나님의 예술적 행동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사랑이 동력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랑이 위대한 모험을 할 수 있게 한 출발점이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창세기 1장 1절에도 한 단어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랑과 열정으로〕 천치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구절을 바꾸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열정으로 나와 같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창조성과 예술성을 회복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처럼 사랑이 동력입니다. 예술의 동력은 사랑입니다.
나아가 세상에는 사랑의 동인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예술 자체가 그렇습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무용이든 예술 자체가 사랑의 동력으로 창조됩니다. 때문에 “가난한 예술가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술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에 겨워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합니다. 불꽃같은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이 결혼 생활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은 이미 예술적 매혹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결혼 생활은 반드시 예술로 풀어내야만 합니다. 그 자체가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의 예술성이 정의의 차원으로 변질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맞고 틀린지, 누가 자신의 임무를 다했는지, 누가 시댁 혹은 처가에 더 잘하고 못하는지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결혼 생활이 정의의 차원으로 바뀌면 결국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의 예술성을 망각하면 결혼 생활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래 그 생활은 사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배우자를 바라보며 “당신, 참 아름답습니다. 참 멋집니다.”라고 꼭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머릿속에는 “이 말은 객관적이지 않다. 정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예술이 탄생할 것입니다. 행복이 형성될 것입니다. 결혼 생활은 그렇게 풀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예술의 영역입니다. 예수께 찾아왔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그 가치를 따지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데, 오히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서 나눠 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칭찬하시며, 이 일을 이후 세대도 기억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보다 그녀는 예수님을 위해 단 일회의 유일한 예술적 행동을 했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예수님을 대하며,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릴 그분을 위해 어떤 조건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이 가졌던 것 중 최고의 것을 그분께 소비했습니다. 그 깊은 사랑이 위대한 사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예술로 풀어야 합니다. 옳거나 그르다는 기준을 넘어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풀어야만 합니다. 물론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정의의 차원도 신앙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위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십자가 사랑이 그 아름다움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사랑으로 풀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새벽기도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봉사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지 골똘히 고민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예술적 신앙의 형태입니다. 이제 저는 소망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예술적 신앙이 우리 가운데 멋지게 나타나길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가치 없는 재료일수록 예술적 경지와 가치는 상승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예술은 늘 보잘것없는 재료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을 재료로 위대한 예술품인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도예가의 손에 잡히기 전에 흙은 그저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흙이 도예가의 손에 붙잡히면, 위대한 백자가 탄생하기도 하고 청자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조각가의 손에 들리기 전에 돌은 그저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조각가가 돌을 다듬고 만지고 닦으면, 그것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되고, 비너스 상도 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처음부터 위대한 것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버려진 것,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것을 재료로 삼습니다. 그 재료를 새롭게 빚고, 쪼개며, 무언가를 덧붙여서 아름다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키도 작고 욕심 많은 세리 삭개오를 주님은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어부 베드로, 의심 많던 도마도 부르셔서 주님의 멋진 제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김지철 목사님께서 결혼식 주례를 하실 때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작품이며, 아내는 남편의 작품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저도 앞으로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꼭 인용하려고 합니다.
혹시 우리는 내 아내와 남편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이삼십 년을 함께 지내온 부부들은 상대방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만나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나….”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옆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상처 난 그 배우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빚어서 만든 사람입니다. 내가 쪼아서, 상처내서 만든 그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나의 작품입니다.
재료가 나쁠수록 예술적 경지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나쁜 상태라면 도리어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내 아내와 남편을 멋지게 빚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를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가족, 직장 동료, 친구들이 우리가 빚어야 할 멋진 재료입니다. 또 소망교회 역시 우리가 빚어야 할 재료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목회를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를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 가길 원합니다.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 자리를 지킬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울 수 있는 예술의 속성은 ‘조화’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각각의 자리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바다의 물과 강의 물, 땅속의 물까지 그 자리를 지정하셨습니다. 물들이 자기 자리를 지킬 때, 나무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를 통해 멋진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그곳이 에덴동산입니다. 한편 모든 물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며 혼돈스러웠던 땅의 모습을 성경은 ‘혼돈’ 혹은 ‘공허’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아름다움입니까? 모든 것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며 피조물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들어 두신 후 때마다 “보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땅으로 존재할 때, 바다는 바다로 존재할 때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속성입니다. 밥알이 밥그릇 안에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밥풀이 머리카락에 붙는 순간 그것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때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인간은 세상을 섬기고 관리할 때 아름답습니다.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할 때 아름답고, 학자는 연구할 때 아름답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에 있을 때, 장로는 장로의 자리를 지킬 때, 권사는 권사의 자리를 지킬 때, 찬양대원은 찬양을 부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기에 아름답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에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느 자리가 여러분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리입니까? 죄인은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죄가 무엇입니까? 인간 본연의 자리를 망각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죄인 된 모습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혹시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빛나는 삶,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저녁 소망교회 위임목사가 되는 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위임목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소망교회 목사로서, 우리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아름다운 목회가 어떤 것인지 몰두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교회를 꿈꾸며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십니다. 예수님도 예술가이십니다. 물론 성령님도 예술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예술가가 되십시오. 함께 예술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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