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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조금만 안 사람

요나 3: 1~10

김경진 목사

202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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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3: 1~10

1~10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 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요나의 행적을 담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학교를 경험한 분들이라면 요나 선지자를 모르시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요나서는 소예언서 중에서 4장으로 구성된 아주 짧은 책입니다. 그 안에는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많아서 교회학교 교재로 많이 사용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우선 첫 번째로 요나라는 예언자는 여로보암 2세(B.C 789-748) 시대,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언 활동을 한 곳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땅 앗수르 지역의 니느웨 성이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예언서에는 하나님께서 그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내용, 즉 신탁의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요나서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는 아주 짧은 신탁의 말씀만 있을 뿐, 대부분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행적과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욘 1:1~2)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니느웨라는 땅은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앗수르의 큰 성읍이었습니다. 후에는 앗수르의 수도가 될 성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이방인의 큰 성에 가서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중)

이 구절을 원어에 가깝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아직 사십 일이 남아 있다.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탁의 명령을 받은 요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어쩌면 이스라엘도 아닌 이방 민족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정말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후에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하는 요나의 모습에 잘 드러납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2 중)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하시는 줄 이미 알았습니다.” 항의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챈 요나는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거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곳은 니느웨, 지금은 이라크 지역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 지역인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동쪽인 니느웨 땅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아주 흥미롭게 전해 줍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단어가 나오는데 ‘내려갔다’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야라드(יָרַד yarad)’ 라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피하여 먼저는 욥바라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욘 1:3a)

여기서 ‘내려갔다’는 표현에 ‘야라드’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을까요? 내려가면 정말 피할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표현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욘 1:3b)

우리말 성경은 ‘배에 올랐더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야라드’ 동사를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욥바로 내려갔고, 그가 배로 내려갔다는 뜻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큰 풍랑을 일으키셔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욘 1:5b)”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도 ‘야라드’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죠.
이렇게 요나는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욥바로, 배로,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 마치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실 것 같은 자리까지 요나는 계속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가 눈까지 감아 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인간! 이 모습은 비단 요나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이고, 또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처음 보여 준 행동도 바로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정말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더 솔직하게는 우리 자신 안에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죠. 마치 하나님이 보지 못하시는 곳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며 ‘하나님도 나를 보지 못하시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이미 보고 계셨고 주시하고 계셨습니다. 배 밑바닥에 누워 있는 요나를 보셨고, 그가 탄 배를 향하여 바람마저 던지십니다. 목표 지점을 향하여 정확하게 폭풍을 던지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풍랑을 만났고 제비를 뽑은 후에야 이 풍랑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가 배에 함께 탄 선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9~10)

여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나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행적만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어찌 도망가고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집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선원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은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동사에 ‘야레(יָראֵ yare)’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요나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내려간 반면에 선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부르짖습니다. 16절은 선원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 후에도 크게 두려워하여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선지자 요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던 선원들입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오래 믿어 온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버린, 강팍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경외 불감증에 걸린 것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을 볼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헌금에 손을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거짓말로 교회 일을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배 안으로 내려가고, 배 밑창까지 내려가서 눈을 감았던 요나.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십니다. 바다 아래로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으로 내려가게 하시죠. 그는 그곳에서 진정한 어둠을 경험합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장 깊은 내려감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의 항변에도 끝까지 그를 붙드시며 함께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상황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욘 2:3,6 중)

그 캄캄한 곳에서 이제는 눈을 떠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자신이 도망하고 내려가던 그곳보다 더 깊은 곳, 하나님이 없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그곳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곳에도 계실까?’ 생각되는 바로 그곳에서 요나는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요나서 2장이 그의 기도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즉시로 응답해 주십니다. 물고기로 그를 토해 내게 하시고 살 기회를 주신 것이죠.
요나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한 가지 은혜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고 내려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추적하셨던 것이죠. 그리고 결국 그를 붙잡아 내셨습니다. 여기서 은혜되는 또 다른 부분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요나에게 이 사역을 맡기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니느웨만 구원하기를 원하셨다면 다른 사람을 부르시고 뜻을 이루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따라가시며 그를 만나 주십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도 믿는 자들이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한 요나, 그래서 내려가고 또 내려간 요나를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게 하시고는 가장 큰 어둠을 직면하게 하십니다. 더 이상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 같은 자리까지 내려가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요나를 일으켜 세우시며 현존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피하여 숨음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 안 계실 만한 곳을 찾다가도 고통이 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요나의 현주소이자 우리 신앙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요나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이었죠.
여기에 요나가 잘 알지 못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니느웨로 가게 하실 때에 요나는 그들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욘 4:2b)

“하나님, 내가 이미 알았습니다. 다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내 손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지 제가 다 압니다.” 마치 이런 태도입니다. 어쩌면 교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은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나타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요나의 이야기를 보면 ‘안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줄 알았다는 것이죠. “내가 이 폭풍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 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다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요나는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용서해 달라고 빌지 않았을까? 왜 그때 그는 회개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서 모두 죽게 되었을 때 배 밑에서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며 선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욘 1:6, 새번역)

하나님께서 선장의 말을 빌려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요나 너는 왜 기도하지 않느냐!”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겪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만 풍랑이 잔잔해질 것이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맞히는 능력 있는 선지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제 사십 일이 남았다. 너희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다.” 그는 니느웨가 멸망할 미래만을 전합니다. 다만 40일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회개하라고도, 기도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고치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성의 있게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흘 길을 걸을 만큼 큰 성읍이었던 니느웨를 단 하루 동안만 돌며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요나를 일으키며 구원해 가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습니다. 심지어 니느웨 성의 왕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물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욘 3:7~9, 새번역)

오히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금식하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삶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용서해 주셨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조용한 시골 마을에 나이트클럽이 생겼습니다. 클럽이 번창하자 마을 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나이트클럽이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청년들이 영적‧도덕적으로 타락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얼마 후에 번개가 나이트클럽 지붕을 쳐서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트클럽 사장이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겁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기도해서 클럽이 망했다는 소장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 법정에 나온 교인들이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많이 알려진 예화입니다. 물론 실제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믿는 사람들의 문제를 꼭 짚어 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기도의 능력은 믿지 못하는, 또 기도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요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뜻과 계획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뜻을 바꿀 수 있을지 질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바꾸십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분의 뜻을 자꾸 바꾸십니다. 뜻을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을 때도 하나님은 들으셨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부르며 기도했을 때도 들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업으로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듣고 부르며 기도했던 니느웨 백성들의 기도도 들어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함께 기도합시다.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2022년 9월 1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하나님을 조금만 안 사람” (욘 3:1-1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07장, 44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욘 3:1-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1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캐나다의 한 조용한 시골마을에 나이트클럽이 생겼습니다. 클럽이 번창하자 청년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할 것을 우려한 마을 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나이트클럽이 망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정말 얼마 후 번개가 쳐서 나이트클럽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클럽의 사장은 기도 때문에 클럽이 망했다며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나온 교인들은 “우리가 기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도리어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을 꼬집은 풍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사십 일 뒤 니느웨 성이 무너질테니 가서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요나는 직감적으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한 구원의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들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싫었던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나서에는 흥미로운 단어가 반복되는데, 그것은 바로 내려가다는 뜻의 ‘야라드’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욥바로 내려가고, 배로 내려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어두운 곳, 하나님이 보지 못하실 곳을 찾아 끝없이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 자신의 눈을 감아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이미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는 요나처럼 마치 하나님이 찾지 못하는 곳을 향해 끝없이 내려갑니다.

결국 요나는 풍랑을 만나게 되고, 이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선원들에게 인정합니다. 이때 요나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히브리어: 야레)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은 바로 이방인들이었던 선원들입니다. 풍랑으로 인해 모두가 죽게 되었을 때, 선장은 요나를 깨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욘 1:6, 새번역) 이방인인 선장이 기도하라고 보채지만, 정작 요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니느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가 건성건성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모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가려고 했고, 어려움 중에도 기도하지 않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을 알되 조금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실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알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누기

1. 요나는 물고기 뱃속, 곧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뒤에야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물고기 뱃속 같았던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리고 그때 어떤 기도를 드렸나요?

2. 요나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신앙의 도전 또는 기도부탁을 받은 적이 있나요?

 

마무리기도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탄원에 그 뜻을 돌이키시는 크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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