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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창세기 22: 11 ~ 18

김경진 목사

2021.08.22

<너무도 유명한 오늘 본문에서 저를 잠시 머물게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이보다 잘 알려진 본문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보고 또 보아도 지치지 않을 만큼 귀한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설교가들이 이 본문을 놓고 설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연구하며 말씀의 뜻을 찾고자 씨름해 왔습니다. 부족한 저도 여러분과 함께 지난 3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말씀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본문을 읽으면 참으로 귀한 믿음을 보게 되고요. 이삭의 관점에서 읽으면 이삭의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숫양의 모습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자상하신 아버지의 모습, 준비해 나가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곤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 중 또 다른 한 면을 계시의 영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보일까요? 아마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광신적인 믿음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로 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 이야기는 위대한 믿음의 기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놓는 것이 바로 큰 믿음이다.’ 라고 우리는 배워 왔고 또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부담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늘 그렇게 믿지 못하는, 그만큼 주님 앞에 믿음을 보여 드리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러워하곤 하였습니다.
한때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던 중, 창세기 22장 12절 말씀 앞에 잠시 멈추어 선 적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순간,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다급하게 멈추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12절)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 숫양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던 이 구절에서 그날은 특별하게 한 단어가 제 마음속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00 하는 줄 알았노라

여러분, 00 안에 어떤 말씀이 들어가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00 안에 다른 표현이 있다고 착각하며 읽어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줄 알았노라”이런 말씀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어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다르게는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믿는) 줄 알았노라” 라고 읽으며 ‘사랑’ 또는 ‘신뢰’가 들어가야 적절하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의 눈에 들어온 단어는 사랑도, 신뢰도 아닌 ‘경외’라는 단어였습니다. 참으로 새롭게 다가왔고 어쩌면 낯설게도 느껴졌던 단어였습니다.
‘경외’, 히브리어로는 야레(יָרֵא yare)인 이 단어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노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토 친척 고향집을 떠난 일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선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단한 믿음을 보인 것 같은 아브라함 안에도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행위에 감명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의 행위 근저에 있었던 믿음의 근거, 믿음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뻐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을 알리고 인정받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아브라함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믿음의 출발점은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곧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경외심’을 보셨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무자비한 신에 대한 공포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두려움’은 자상하신 부모님을 향한 두려움 혹은 공경을 의미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공경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무겁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더 많은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실까요? 더 높은 액수의 헌금을 기뻐하실까요? 물론 이것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또 다른 동기를 가진 채 헌금을 드릴 수도, 헌신을 할 수도,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기가 명예욕일 수도 있고, 어떤 자리를 연연하는 태도일 수도 있고, 인기를 구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출석하고, 예배의 자리에서 헌신을 다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구합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할까요? 온라인 예배를 처음 드릴 때에는 정중하게 드리고 은혜도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해이해지고 녹화된 방송을 보는 정도로 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점점 나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온라인 예배가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죠.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으로 묘사해 왔고, 이해해 왔습니다. 신을 향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일이 참다운 지혜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문화가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공포심들이 많았고, 종교가 공포심을 이용해 권력을 누려 온 것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역자를 두려워하라는 말도 아니고, 신앙생활의 어떤 형태를 두려워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무서운 마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무겁게 여긴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따르길 원한다는 마음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나는 왜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이 있다면 마음속에 솔직하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12장 18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하여 모세를 도울 지도자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때 지도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일한 단어 ‘야레’ 즉 ‘두려워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출애굽기 18장 21절)

성경은 우리에게 ‘능력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야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외심을 보신 하나님이 사랑의 눈길로 그를 살피시며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정통하게도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아주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온 교회가 지금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이 단어는 조금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레’라는 말은 ‘라아’ (רָאָה raah)에서 왔습니다. ‘라아’라는 말에서 바뀐 형태가 ‘이레’입니다. 라아는 ‘보다’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빛을 보시니”(창 1:3~4)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보셨다’는 말씀이 바로 라아입니다. 동시에 성경에서 라아는 ‘나타나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과 18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죠. 다시 말씀드리면 이 라아는 ‘나타난다’는 표현도 되고 보는 것에 주목해서 ‘본다’는 뜻도 함께 가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보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학자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 4절 말씀입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장 4절)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이 문장 속에 라아라는 단어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22장 2절에 나오는 ‘모리아’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모리아’는 ‘높은 땅’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너무 높아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라는 단어 속에도 라아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 주셔서 숫양을 보게 해 주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22장 1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창세기 22장 13절 중)

여기에서도 라아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라아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라아의 또 다른 형태인 ‘이레’가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에서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이해되는 단어죠. 그런데 주님께서 ‘보신다’는 관점으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면 ‘여호와 이레’는 ‘주님께서 보신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 하더라.” 라고 말이지요.
자, 다시 아브라함의 두려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살피고 계신다’ 라는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게 될 모습을 생각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죠. 첫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장 10절 중)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첫 번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여호와 이레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위로를 얻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말씀으로 읽게 되면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이레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말씀으로 읽어야 할까요?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뜻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랑스런 눈길이며, 살피시는 눈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관점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실 때 불꽃 같은 심판의 눈으로 보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후에도 그에게 무엇을 더 줄 수 있을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시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말씀은 인간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눈길입니다. 이것이 둘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아브라함, 그런 그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시며 아브라함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할 때,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잘 표현한 말씀이 아론의 축복 기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장 24~26절 중)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하여 우리 주님은 얼굴을 비춰 주시고 그 얼굴을 향하여 드사 우리를 주목하여 주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사랑의 눈길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늘 읽어 드리는 용서의 말씀 시편 103편 가운데 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은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며 무엇인가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God Is Watching

Genesis 22: 11-18

Can there be a more famous passage? The story of Abraham offeringhis son Isaac is well known by both Christians and non-Christians. It has been preached time and again, and countless people have wrestled with its meaning. I, too, preached on this passage not long ago in March with the title “God Will Provide.”

What more is there to say about this story then? Will we be able to discover a deeper will of God and a fresh meaning through today’s study of the same Scripture? Some of you who are skeptical may have already lost an interest in today’s sermon. That was how I felt too, as I was rereading this passage a few weeks ago. Such a well-known story… An important text, for sure, but not one that needs to be preached again…

However, as I revisited the passage, Idiscovered something amazing. And I could hear God’s gentle voice speaking to me. So, today, I want to share with you that voice of God.

How would a modern man view the story of Abraham who sacrificed his son whom he got at 100? Surely, Abraham would seem fanatical. Perhaps he is the reason why that person does not go to church. Yet, Abraham has always been the golden standard for great faith. He showed us what faith really is. In church, we have been taught, and teach, that a great faith is one that sacrifices even one’s son. At the same time, Abraham’s story has always filled us Christians with an inaptitude regarding our lack of faith.

One day, as I was reading Abraham’s story, Genesis 22:12 made me pause for a long time. This verse describes the very moment that God urgently sends an angel to Abraham as he is about to slay his son: “‘Do not lay a hand on the boy,’ he said. ‘Do not do anything to him.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ecause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only son.’” (Genesis 22: 12)

I have probably read this verse more than a hundred times, but, this time, one word pieced my heart: “fear.” The angel of the Lord said he now knew that Abraham “feared” Godbecause he gave him his son. The angel didn’t say that he knew Abraham “loved” God, or “trusted in” God. He said, “I know now that you fear God”. The Bibles explicitly uses the word “fear.” In Hebrew it is “ יָרֵא (yare),” which means “to revere, to fear.”

We learn from this verse that at the bottom of Abraham’s sacrifice was his fear of God. Abraham feared God. The starting point of his faith was none other than fear of God. Genesis 22:12, therefore,unveils the root of Abraham’s great faith:his fear of God.

It was his fear of God that enabled him to leave his homeland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and to go up Mt. Moriah to sacrifice his son. Abraham wasn’t “gambling”with his son’s life when he sacrificed Isaac. Many Christians are moved by Abraham’s strong faith because he appears to be willing to risk even the life of his son, as if he were playing a dangerous game of roulette. But what did God see in Abraham? He saw the very foundation, the starting point of his faith: his fear of God. Pleased with this attitude, God praised him: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can we show our faith to God and get his praise? By attending church every Sunday? By making a great commitment and giving a large offering? Genesis 22:12 tells us the answer. We show our faith and we are recognized by God when we let God know that we fear Him.

From man’s perspective, the starting line of faith is fear, fear of God. Having a fear of God is the beginning of faith. Many people pursue a greater faith. They worry about their small faith.

Why does it seem that our faith is going nowhere? When we first started worshipping online at the start of the pandemic, we were hungry for God, and we experienced a deep grace. But now it’s as if we are watching a TV program. Why is our faith not growing?

To be frank, it’s because we no longer fear God.

As history moved through the ancient and medieval periods and reached modernity, people came to think that to escape God/gods was to become truly human—believing even that true wisdom was found by liberating man from his fear of God/gods.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is thinking was thedriving force behind almost all cultural developments in the modern era. It is true that, inpast history,misguided fear of God/gods existed, and we cannot deny that religions used this fear to exercise their power.

But if God really existed, and if we establish that He does, it is only fitting that we fear Him. I am not saying that we must fear the Church, the pastors, and the ministers. Nor am I suggesting that we must fear not coming to church. I am simply saying that we must fear God, the living God.

But people today don’t. Our faith does not grow because we do not know how to fear God, because we do not have a fearful heart. This is the problem.

What is faith? What does it mean to live a life of faith? An authentic faith life is a process of letting God know how much we fear Him. Abraham did this though his life process. By lifting his knife to his son he proved his fear of God. This was why he was named the “Father of Faith.” He knew how to fear God.

Are you frustrated with your small faith? Does it feel like you’re not growing at all in terms of faith? If so, ask yourself honestly, “Do I fear God, truly?”

Exodus 18 describes how Jethro, Moses’ father-in-law, appointed leaders to help Moses. An important quality of these leaders was that they should fear God, and here “ יָרֵא (yare)” is used: “But select from all the people some capable, honest men who fear God and hate bribes. Appoint them as leaders over groups of one thousand, one hundred, fifty, and ten.” (Exodus 18: 21)

An essential attribute of one entrusted with God’s work is “ יָרֵא (yare),” a God-fearing heart.

Then how did Abraham develop his fear of God? A clue is given in today’s text: “Jehovah Jireh.” Traditionally, this expression is interpreted as meaning “God will provide.” All are on the same page that this is the canonical interpretation. Yet,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Abraham’s fear of God”, the main theme of today’s message, another interpretation is possible.

The Hebrew word for “Jireh”is “רָאָה(raah)”, which is actually used more often to signify “to see.” “Raah” is the verb used to describe that God was pleased with what He “saw” after He created the light.The main usages of this verb are “to appear, to look, to see.” For example, “raah” is used in Genesis 17:1 and 18:1 when God “appeared” to Abraham. Accordingly, a considerable number of theologians interpret “jireh (raah)” as “to see.”

There is no denying that “raah” is used extremely purposefully in today’s text. For example, verse 4 says, “On the third day Abraham looked up and saw the place in the distance.” (Genesis 22: 4) Here “looked up” is derived from the verb “raah.”

Furthermore, the name “Moriah” in verse 2, which means high land, is related to “raah.” Moriah also means a “land of vision”, or a very high place from which everything can be seen. The word Moriah is also rooted in “raah.”

What about the scene where God opens Abraham’s eyes to see the ram caught in a thicket, the animal to be sacrificed in Isaac’s stead? Here “raah” is used again: “Abraham looked up and there in a thicket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Genesis 22:13)

Therefore, “Jehovah Jireh” may be more fittingly interpreted as going beyond the meaning of “God will provide” to encompass that of “God sees.”

From this perspective, Genesis 22:14 may be interpreted freshly: So Abraham called that place Jehovah Jireh, and to this day it is said, “God sees.”

Now let’s return to Abraham’s fear of God. What made him such a God-fearing person? Wasn’t it because he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God always saw him, that God is “Jehovah Jireh,” a God who “sees”? Wasn’t this what made him so fearful of and reverent toward God?

Indeed, the fact that God is watching us and seeing us instills in us men a fear of God. We cannot but be fearful when we imagine ourselves being bared before Him. What did Adam, the first man, say to God after he ate from the tree of knowledge? He answered, “I heard you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so I hid.” (Genesis 3:10)

Until now, we tended to feel consolation in the expression “Jehovah Jireh” because we interpreted it as “God will provide” or “God will prepare.” However, when we interpret it as “God sees,” our immediate response would be fear.

Then how must we read and understand “Jehovah Jireh” in today’s passage? Should we interpret it as “God provides” or “God sees”?Let me rephrase this question. Can the two interpretations be harmonized or connected in some way?

From our point of view, that God sees and watches us instills a fear in us humans, but from God’s perspective His act of seeing is an act of love and care. Abraham went to God with fear, conscious of the fact that God was “watching” him, and God was pleased with that. But when “God” saw Abraham, He would be watching him, constantly thinking, “What more can I do for my servant? How can I help him?” This is the very link that connects thetwo interpretations above.

In our journey in which God prepares for us and finally provides for us, God is first there at the mountain, watching us continuously. Because He is there, always watching us, He is able to recognize us, make a way for us, and bless us upon seeing that we fear Him.

Aaron’s blessing in Numbers well expresses God’s loving eyes on us: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Numbers 6: 24-26)

When we stand before God with a fearful and reverent heart, God makes his face shine upon us, turns his face toward us, sees us, and works for us. Jehovah Jireh. God sees. God is watching us carefully. This makes us fear. But Jehovah Jireh also means God prepares. To us this is also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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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 11 ~ 18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너무도 유명한 오늘 본문에서 저를 잠시 머물게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이보다 잘 알려진 본문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보고 또 보아도 지치지 않을 만큼 귀한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설교가들이 이 본문을 놓고 설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연구하며 말씀의 뜻을 찾고자 씨름해 왔습니다. 부족한 저도 여러분과 함께 지난 3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말씀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본문을 읽으면 참으로 귀한 믿음을 보게 되고요. 이삭의 관점에서 읽으면 이삭의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숫양의 모습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자상하신 아버지의 모습, 준비해 나가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곤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 중 또 다른 한 면을 계시의 영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보일까요? 아마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광신적인 믿음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로 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 이야기는 위대한 믿음의 기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놓는 것이 바로 큰 믿음이다.’ 라고 우리는 배워 왔고 또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부담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늘 그렇게 믿지 못하는, 그만큼 주님 앞에 믿음을 보여 드리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러워하곤 하였습니다.
한때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던 중, 창세기 22장 12절 말씀 앞에 잠시 멈추어 선 적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순간,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다급하게 멈추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 12절)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 숫양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던 이 구절에서 그날은 특별하게 한 단어가 제 마음속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00 하는 줄 알았노라

여러분, 00 안에 어떤 말씀이 들어가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00 안에 다른 표현이 있다고 착각하며 읽어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 하는 줄 알았노라”이런 말씀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읽어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다르게는 “네가 네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믿는) 줄 알았노라” 라고 읽으며 ‘사랑’ 또는 ‘신뢰’가 들어가야 적절하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의 눈에 들어온 단어는 사랑도, 신뢰도 아닌 ‘경외’라는 단어였습니다. 참으로 새롭게 다가왔고 어쩌면 낯설게도 느껴졌던 단어였습니다.
‘경외’, 히브리어로는 야레(יָרֵא yare)인 이 단어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노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에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토 친척 고향집을 떠난 일도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선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대단한 믿음을 보인 것 같은 아브라함 안에도 두려움이 있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행위에 감명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의 행위 근저에 있었던 믿음의 근거, 믿음의 출발점을 분명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뻐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을 알리고 인정받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아브라함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믿음의 출발점은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곧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경외심’을 보셨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무자비한 신에 대한 공포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두려움’은 자상하신 부모님을 향한 두려움 혹은 공경을 의미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공경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무겁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더 많은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실까요? 더 높은 액수의 헌금을 기뻐하실까요? 물론 이것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또 다른 동기를 가진 채 헌금을 드릴 수도, 헌신을 할 수도,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기가 명예욕일 수도 있고, 어떤 자리를 연연하는 태도일 수도 있고, 인기를 구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출석하고, 예배의 자리에서 헌신을 다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구합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할까요? 온라인 예배를 처음 드릴 때에는 정중하게 드리고 은혜도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해이해지고 녹화된 방송을 보는 정도로 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점점 나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온라인 예배가 우리의 신앙을 약하게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죠.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인간다운 것으로 묘사해 왔고, 이해해 왔습니다. 신을 향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일이 참다운 지혜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 문화가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공포심들이 많았고, 종교가 공포심을 이용해 권력을 누려 온 것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역자를 두려워하라는 말도 아니고, 신앙생활의 어떤 형태를 두려워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무서운 마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신앙생활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무겁게 여긴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따르길 원한다는 마음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습니다. ‘나는 왜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분들이 있다면 마음속에 솔직하게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있는가?’
출애굽기 12장 18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하여 모세를 도울 지도자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때 지도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일한 단어 ‘야레’ 즉 ‘두려워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출애굽기 18장 21절)

성경은 우리에게 ‘능력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야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외심을 보신 하나님이 사랑의 눈길로 그를 살피시며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전통적으로 그리고 정통하게도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아주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전통적으로 온 교회가 지금까지도 같은 방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이 단어는 조금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레’라는 말은 ‘라아’ (רָאָה raah)에서 왔습니다. ‘라아’라는 말에서 바뀐 형태가 ‘이레’입니다. 라아는 ‘보다’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빛을 보시니”(창 1:3~4)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보셨다’는 말씀이 바로 라아입니다. 동시에 성경에서 라아는 ‘나타나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과 18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죠. 다시 말씀드리면 이 라아는 ‘나타난다’는 표현도 되고 보는 것에 주목해서 ‘본다’는 뜻도 함께 가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보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학자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 4절 말씀입니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세기 22장 4절)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이 문장 속에 라아라는 단어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22장 2절에 나오는 ‘모리아’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모리아’는 ‘높은 땅’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너무 높아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리아’라는 단어 속에도 라아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 주셔서 숫양을 보게 해 주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22장 1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창세기 22장 13절 중)

여기에서도 라아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라아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라아의 또 다른 형태인 ‘이레’가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에서 사용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이해되는 단어죠. 그런데 주님께서 ‘보신다’는 관점으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면 ‘여호와 이레’는 ‘주님께서 보신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보고 계신다 하더라.” 라고 말이지요.
자, 다시 아브라함의 두려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살피고 계신다’ 라는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두려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게 될 모습을 생각한다면 두려울 수밖에 없죠. 첫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장 10절 중)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첫 번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여호와 이레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위로를 얻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말씀으로 읽게 되면 일차적으로는 두려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이레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으로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말씀으로 읽어야 할까요?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뜻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랑스런 눈길이며, 살피시는 눈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관점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실 때 불꽃 같은 심판의 눈으로 보고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후에도 그에게 무엇을 더 줄 수 있을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시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말씀은 인간에게는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눈길입니다. 이것이 둘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아브라함, 그런 그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시며 아브라함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고 계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할 때,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잘 표현한 말씀이 아론의 축복 기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장 24~26절 중)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하여 우리 주님은 얼굴을 비춰 주시고 그 얼굴을 향하여 드사 우리를 주목하여 주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사랑의 눈길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두려움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늘 읽어 드리는 용서의 말씀 시편 103편 가운데 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은 주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따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시며 무엇인가를 준비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힘차게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8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창 22:11~1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5, 54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22:11~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늘 위대한 믿음의 기준과 같은 위치를 차지해 왔습니다성도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믿음이 없거나 부족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태도를 기쁘게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보이고 인정을 받는 방법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독자 이삭을 바치려했던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말씀하십니다여기에서 경외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 야레(yare)는 경외하다’,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출발선순종의 행위 근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인간의 편에서 볼 때믿음의 출발점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면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나태해진 신앙생활자라지 않는 것 같은 믿음 생활에 회의가 들 때면 먼저 솔직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나는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을까요이는 본문 속 여호와 이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뜻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레의 원어는 라아(raah)로써 보다’, ‘나타나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합니다여호와께서 보신다는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하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보고 계시다 하더라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보실 것이라는 믿음에서였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날 연약함과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봄은 어떻습니까하나님의 눈길은 인간을 심판하고 정죄함에 있지 않습니다우리를 잘 아는 주님께서 살펴주시는 것이고 끊임없는 긍휼의 눈길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과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뜻을 하나로 연결하는 열쇠는 우리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보고 계심이 새로운 길을 여시고복을 내리시며 준비하고 계신 여호와 이레라는 것을 안다면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 앞에 경건함두려움 속에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서는 일입니다.

나누기

1. 신앙인으로서 내 행동 양식과 마음가짐의 근저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2. 여호와 이레’, 우리를 끊임없이 살피며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내 행동양식과 마음가짐의 근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마다 있게 하옵소서두려움을 넘어 우리를 끊임없이 살피며 보고 계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눈길에 붙들리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하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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