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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 : 38 ~ 43
38 ~ 43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나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9장 중 마지막 단락에 해당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마가복음 9장 38절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9:38)
아마 요한은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고 제자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귀신을 내쫓고 있었고, 이를 요한이 금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런 자의 행동을 금한 것은 요한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로열티는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닌가! 예수님과 동행하지도 않고 그분을 따르지도 않은 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 자가 그분의 이름을 들먹이며 기적을 행사하는 모습이 꽤나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요한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만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감히 다른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건 자신들에 대한 모욕이자 예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요한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39절입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9:39 중)
그리곤 더욱 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도 더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마가복음 9:40~41)
대단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도,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고도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주님의 말씀을 연구하지도 않았고, 동고동락한 사이도 아닌데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제자들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떠 준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한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무례히 사용하지 말라는 요한의 주장이 무색하게, 또 예수님의 이름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던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권능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일어난 이 권능의 역사는 ‘제자들’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사건으로 실재화되었습니다.
‘제자’라는 의식이 강할수록, 주님을 따르는 열심히 특별할수록 우리는 종종 제자로서의 로열티를 기대합니다. 제자들만이 누리는 특별한 혜택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40) 주님과 제자들을 반대하지만 않아도 우리 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에게만 열려 있지 않고,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도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포용성입니다.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연대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 물 한 그릇을 나누는 작은 손길을 통해서도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비록 교회 개혁을 도모하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주어진 날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포용성인 것입니다.
제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엄격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포용적인 관점이 다음 구절인 42절부터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마가복음 9:42)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귀신을 내쫓고 있던 자’를 ‘작은 자’로 표현하며, 이런 작은 자 중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어 바다에 던지는 게 낫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요한을 향해 예수님은 칭찬은커녕 책망을 하십니다. 이후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강력합니다. 43~47절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43~47)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사람에게는 열려 있던 하나님 나라가 제자들에게는 도리어 엄격히 닫힌 공간이 됩니다. 제자라면, 손이 죄를 범하면 그 손을 찍어 버리지 않고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제자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발이 범죄 하면 그 발도 찍어 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눈이 범죄 하면 빼어 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만큼 제자들에게는 엄격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렇듯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어떤 융통성이나 유연성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너무 엄격합니다. 그러니 누가 제자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지나가는 이에게 물 한 잔 주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열린 공간이 되는 하나님 나라가, 제자에게는 너무나 기준이 높은 곳입니다. 작은 자 하나만 실족하게 해도 닫힌 나라가 된다면 누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겠으며, 또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주님은 이토록 유독 제자들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것일까?”
엄격성과 포용성의 조화 가운데 서로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 보길 바랍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설렁설렁, 그저 대충대충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 가득한 교회가 있습니다. 또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며 교회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는 않고 목회자의 뜻이나 교인 몇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저 복이나 구하며 저급한 신앙의 틀을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교인으로 가득 찬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과 교회를 향해 주님이 “그들도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나아가 “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다.”라고 하신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더욱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따르며 진정한 제자도를 구현하려는 우리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너는 이 부분이 부족하구나. 네 눈이 범죄 했으니, 눈을 빼든, 손을 자르든 해야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주님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 말씀을 들으며 안도감을 얻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 다행이다. 나 같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향해서는 활짝 열려 있지만, 주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는 엄격히 닫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쩌면 제자가 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세상에서 막 살다가 물 한 그릇 나눠 주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게 훨씬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그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설마 세상의 종교인이나 심지어 이단,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하는 자들이나 교회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열어 놓으셨다는 뜻이겠습니까? 아무라도 들어올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일까요? 열심히, 바르게,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며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대강 살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일까요?
먼저 오늘 말씀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마지막 절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포용성과 엄격성을 전하시며, 주님은 마지막 50절에서 “서로 화목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까? 바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앞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툼의 내용은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지, 누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지를 두고 쟁론했습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 교훈의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조금은 충격적인 표현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더 큰가를 두고 다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화목하며 평화를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제자들 가운데 조금 더 능력 있는 제자도 있었을 테고, 조금 부족한 제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헌신하는 제자가 있는 반면 헌신이 부족한 제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서로를 영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듯이, 제자들이 서로 영접함으로써 주님을 영접하며 주님을 보내신 이를 영접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영접과 화목의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타인에게는 포용적으로 대하라는 말씀, 이것이 ‘화목’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교회들이 서로를 영접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화목을 이루는 방법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포용성과 엄격성을 우리의 삶에서 적용해 나가야 합니다. 즉 상대방을 향해서는 무한히 열린 태도를 지니고, 동시에 나 자신을 향해서는 엄격하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늘 개혁의 대상을 우리가 아닌 다른 이에게 둘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불의, 그릇된 것, 부당한 것, 잘못된 점을 꼼꼼히 찾아내면서도 내 안에서 그런 점을 발견하면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힘내어 소리치고, 잘못된 세속주의와 기복주의, 성장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우리 안에서는 그와 같은 개혁의 기준을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요한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그분의 이름을 이용해 기적을 베푸는 자를 금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직 ‘주님’이라고 예수께 고백하지는 못한 단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생’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요한의 모습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은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이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요한을 보게 됩니다.
물론 개혁을 시도할 때 높은 기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를 감싸는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넓고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넓은 가슴으로 이웃에게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포용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열심히 우리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민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에게는 포용성이, 자신에게는 엄격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분은 걱정을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포용만 하면 어떡합니까? 과연 바른 신앙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교회 같지도 않은 교회를 받아들이고 교인 같지도 않은 교인을 받아들이면, 교회는 혼란스러워지고 혼탁해지고 순수성을 잃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저 대강 잘 지내라. 대충 덮고 마음대로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포용성은 혼합을 말하지 않습니다. 병합으로 인한 질적 저하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혼돈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강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를 넣어 두셨습니다. 5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50)
바로 ‘소금’입니다.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부패를 방지하고, 독을 없애며, 맛을 냅니다. 이런 소금을 우리 가운데 두라고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화목과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우리 주위에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에 한 발, 교회에 한 발을 걸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기독교인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물론 못마땅한 교회들, 미숙한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포용하며 함께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그 안에는 반드시 ‘소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 됩니다. 소금이 있어야 부패를 막을 수 있고 독을 없앨 수 있습니다. 또한 소금이 있어야 맛이 납니다. 소금이 없으면 포용은 힘을 잃고, 혼합과 변질 상태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해야 합니다. 그들과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고, 불의도 가득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 속에서 소금이 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런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습니까? 그저 물 한 그릇 떠 주면서 구원을 바라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대충대충 다른 사람의 도움만 바라며 구원의 대열에 서는 사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소금이 되어 공동체를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부터 설 명절이 시작됩니다. 여러 가족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명절에 가족끼리 불화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원리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상대방을 향해서는 무한히 열린 태도 곧 포용적인 태도로, 나 자신을 향해서는 엄격한 태도로 대한다면 우리 가정은 보다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시누이를 보며 ‘그래, 시집에서 수고하고 왔을 테니 여기서는 푹 쉬게 해 주자.’라는 마음으로, 며느리를 보며 ‘저 아이도 귀한 집 딸인데 우리 집에서 편안하게 해 주자.’라는 마음으로, 시부모님이나 처가 부모님을 보며 ‘나이가 드셨으니 당연하지.’라는 마음과 태도로 말입니다. ‘왜 나만 일하고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하지?’라는 마음과 태도가 아니고 말입니다. 혹시 가정에서 아직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소금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화목과 평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화해와 공생을 모색하고, 미국과 북한이 평화를 위한 길을 찾고 있습니다. 총과 칼을 들이대던 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물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또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미 화해와 평화의 삶을 본보기로 보이셨고, 제자들에게 그러한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당연히 그 일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해와 화목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자는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는 그 엄격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의 넒은 마음으로 나아가며 세상 속에서 화목과 평화를 일구어 가는 귀한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