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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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 반갑고 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사말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에 다가가기에 앞서서 우리 서로 간에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인사하는가 하면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시겠습니다. 우리 서로 같이 인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제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요한서신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인간적 감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거라고 고백하며 인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공동체여야 합니다. 소망의 식구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잘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담겨 있는지요. 오늘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 딱 한 절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담겨 있는 말씀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한번 찬찬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급하다’, ‘성정이 불같다’의 대명사는 아무래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읽어 보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성정이 급한 베드로가 썼는지 의구심이 느껴질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급하던 베드로가 말한 ‘오래 참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불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베드로가 이것까지도 전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드로서는 베드로가 정말 진심으로 회개한 후에 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전서 1장 13절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담겼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믿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내게는 어떤 말씀이 담겨 있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과연 찬양하는 존재인가?’ 이것을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이신지요?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꼭 담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식구 여러분, 마음을 꼭 동이고 근신하셔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되셔야겠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의 마음에 담겨 있던 주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순교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동이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허리를 묶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충격적인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가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 모릅니다. 난 몰라요.’라며 세 번이나 부정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못내 죄책감과 서글픔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 만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어보셨습니다. 멋쩍었던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젊어서는 띠 띠고 아무 데나 돌아다녔지만, 네가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들이 너에게 띠를 띠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리고 가게 될 거다.” 여기서 나오는 단어가 ‘동이다’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아마 마음속 깊숙한 곳에 그 단어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내가 누구에게 매인 바가 되었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늘 기억에 남는 마음 가운데 남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64년경에 로마의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14개 구역 가운데 10개 구역이 전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네로가 자기 궁궐을 짓고자 일부러 화재를 냈다는 일설이 강력한 사실로 대두되고 있지만,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거나 원형 경기장의 횃불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도 목숨을 건지고자 로마의 길을 따라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아피아 길(Via Appia)이라는 길을 걸어가면서 베드로는 자기 목숨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저 앞에서 주님께서 걸어오시더랍니다. 베드로가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큰 찔림을 받아서 다시 로마 시내로 들어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처럼 똑바로 못 박혀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거꾸로 못 박아 주십시오.” 이게 교회의 전승에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나는 무엇에 묶여 있어야 하는가?’, ‘나는 무엇에 동이어 있어야 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늘 떠나지 않는 인생의 주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이 세상은 참으로 반짝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쫓아가면 나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저 자리에 올라가기만 하면…’, ‘내가 그것을 성취하기만 하면…’, ‘내가 그것을 얻어 내기만 하면…’ 나는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신앙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에 묶여 계십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이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채 예수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자기 이름을 포기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돌로매’입니다. 사진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공부했던 신학교 옆 대학 박물관에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이 바돌로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쭉 열거되어 나옵니다. 예전에 주일 학교 다니셨을 때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노래 많이 불러 보셨지요.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를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다 열거되는데, 딱 한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가 바돌로매입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의 조합인데, ‘바르’라는 단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돌로매’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를 지칭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이라고 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나’라는 히브리 말이 나중에 ‘요한네스’, ‘요한’이라는 헬라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도 말이 됩니다. 바돌로매는 자기의 이름을 지우고 돌로매의 아들로 남았습니다.
학자들은 바돌로매가 누굴까 고민하다가 발견했던 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의 짝들입니다. 빌립이 전도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와 보라 했더니,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겠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나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가 곧 정치 지도자였는데,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율법교사들은 높은 단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것도 언덕 위 큰 회중들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합니다. 나는 불의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기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밀한 가운데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은밀한 하나님께서 보실 테니,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나다나엘이 기도했던 무화과나무 아래는 아무도 몰랐던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주님은 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자기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바돌로매로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후에 그의 죽음을 보고 나다나엘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예수를 위하여 죽으리라.’라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북쪽으로 다마스커스, 다메섹 쪽으로 가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이란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조금 전에 보신 그림에 바돌로매가 성경책을 왼손에 들고 있습니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이 사람, 성경 말씀을 전하다가 칼로 죽임을 당했는데 살가죽이 다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저는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저는 돌로매의 아들 바돌로매입니다.” 이렇게 살아간 모습이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신앙의 선배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냈던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예수의 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예배당에 오는 것은 관성의 법칙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신앙 고백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재물, 힘, 권력과 세상의 반짝이는 것에 묶여 있던 사람입니다. 이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허리를 동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또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주의 식구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근신’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은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맑은 마음을 갖지 못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둔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엄두섭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장로회 신학대학교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교리, 조직, 직제, 건물이나 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는 예수의 얼이 중요합니다. 얼을 잃어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얼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얼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얼간이 그리스도인, 얼빠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엄두섭, 『예수의 얼』)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나는 얼간이었구나. 얼빠진 그리스도인이었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지식, 관심에 날마다 집중하며 살았던 거로구나.’ 제가 얼마나 저 스스로에 대해서 슬펐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이 영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기뻐지겠지요. 내가 바라던 게 성취되어야 기뻐지겠지요. 아니 내가 딱히 바라고 원하지는 않았어도 나한테 좋은 일 벌어졌을 때 우리는 기뻐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쁨을 ‘신앙의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쁨을 고백할 줄 압니다. 도대체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우와, 하나님 감사해요. 이야! 주님 고맙습니다.” 고백하며 살아갈 줄 압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얼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우리가 서야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살아 내시는 여러분 되길 부탁드립니다.
<맑은 마음을 가질 때,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외국에서 공부할 때 아주 작은 한인 교회를 맡았습니다. 거기에서 열심히 즐겁게 신앙생활 했는데, 그만 한 여집사님이 암에 걸렸습니다. 젊은 분이셔서 그랬는지 순식간에 온몸에 암이 퍼졌습니다. 교회가 모여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집사님 살려 주세요. 아기들이 아직 어린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림프를 따라 암 세포가 온몸에 다 퍼졌던 겁니다. 의사들도 포기했습니다. 이분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병원에서 소리 지를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의인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 믿는 그 믿음으로 저를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가 기도할 때 우리 집사님 꼭 낫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어떻게 기도했는가 하면, “하나님, 집사님 몸에다가 손대고 기도할 때 그때만이라도 좀 안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손대고 기도하면 이분이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아파했습니다. 제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시는데요?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이 마지막 날 밤인지 몰랐습니다. “집사님 죄송해요. 좋은 목사님 만났으면 집사님께서 덜 아팠을 텐데, 못난 목사 만나서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집사님이 제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줬습니다. “목사님 괜찮아요. 설교 시간에 늘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 잘해 주실 거라고요. 하나님 잘해 주고 계세요. 제가 뭘 깨달았는지 아세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마음을 깨달았어요. 목사님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저를 도리어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송해하는 저한테 찬송 하나를 불러 줬는데, 그 뒤로 십수 년 동안 이 찬송을 못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잘 부릅니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송가 315장, 2절)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게 됐어요.” 이렇게 고백하고 그날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분 돌아가신 후에 우리 교회가 모여서 많이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으면서 이런 생각할 때가 많거든요. ‘하나님, 이 문제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이거 해결되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많이 되돌아봤습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맑은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근신해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가 보입니다. 나의 마음에는 여전히 고통과 무너짐이 있고, 답답하고 칼칼한 마음, 나도 모르게 쌓인 서글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어렵지만, 그래도 “우와! 이야~” 하며 살아갈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해 주고,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거라고 믿으며 “하나님 고마워요. 감사해요.”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 그렇게 맑은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는 토요일이 3·1절입니다. 많은 민족의 선배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게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를 위해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속에 맑은 마음으로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특이하지요? 잘 아시겠습니다만 시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 선생님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동주 선생님은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루타 실험을 당하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윤동주 시문학의 화두 하나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부끄러움’이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윤동주 선생님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 서시에도 나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
‘별’과 ‘바람’ 사이의 간극은 수십만, 수백만 킬로미터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간극이 있는데 이 땅에서 부는 바람에 별이 스친다고요? 말이 안 되는 겁니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다가 우리 삶의 현실에 바람이 불면 하나님의 눈길이 스치는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자세여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게는 큰 부끄러움이 있었답니다. 첫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저 만주에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 못 한다는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인데 나라 독립을 위해 조금도 노력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조금 더 진실하게 믿지 못한 것을 부끄럽다고 여겼습니다. 맑은 마음이란 이런 거다 싶습니다.
일주일 또 살아갑니다. 살아가시는 삶의 여정에 여러분 마음에 허리를 동이셔야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묶여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신하셔야 합니다. 맑은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눈엔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부끄러워하는 사람인가? 이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 여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 내는 여러분 되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사실 것이지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o Be Without a Speck of Shame
1 Peter 1:13
Dear Somang Church, I am truly happy to see you. Let’s greet each other with one of my favorite words: I love you. Let’s say to each other, “I love you.” Let’s greet each other with love. Dear Church, I love you.
The epistles of John state that God is love. This is why the words “I love you” are not man’s sentimental confession but our confession toward God. “God is alive; so He will surely do it. I love you.” This should be the greeting of a Christian community. Dear Somang Church, I love you. I believe God will be good to you.
What words are deeply embedded in your hearts? Today, we will be looking at just one verse in 1 Peter. These were the words deeply embedded in Peter’s heart. I hope you will have a chance to read 1 Peter and 2 Peter this week, or later.
Peter was known to be the most hot-tempered among Jesus’ disciples. But the words in 1 Peter and 2 Peter are so moving that it is hard to believe that it was this hot-tempered man whowrote them. Peter, infamous for his impatience, is patient in these letters.
Dear Church, you must not consider it strange when fiery trials come. To our Lord, a thousand years is like a day, and vice versa. Our Lord is not slow in coming; He is waiting for everyone to reach repentance. This is what Peter says.First Peter and Second Peter seem to have been written after Peter had truly repented.
Particularly, 1 Peter 1:13 seems to have been deeply engraved in Peter’s heart. We live in this world as Christians, believing in God. We are peopleof faith. If this is so, we must deeply reflect on ourselves: Are we truly Christians? What words are engraved in our hearts? What kind of life are we living? Are we praising God in our lives?
“I want to be a Christian in my heart. In my heart, in my heart.”
Dear Church, you are Christians, right? As we read today’s Scripture, may you deeply reflect on what it means to live in this world as Christians. Dear brothers and sisters, you must gird up the loins of your mind and be sober. With such a mind, you must hope for the Lord’s grace until His coming. This is what Peter teaches us.
The meaning of “to gird up” in Greek is to literally strap a belt around one’s waist. But this word would have been quite a shock to Peter. It seems he kept Jesus’ words deep in his heart. As you know, Peter denied Jesus three times. Because of this, he was laden with a deep sense of guilt and sadness.
Peter made many mistakes in his life. But Jesus appeared to him at the Sea of Tiberias. He asked him three times,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Embarrassed, Peter replies, “You know that I love you.” Then Jesus says, “When thou wast young, thou girdedst thyself, and walkedst whither thou wouldest: but when thou shalt be old, thou shalt stretch forth thy hands, and another shall gird thee, and carry thee whither thou wouldest not.” (John 21:18) Here the word “gird” appears again. So this word would have been embedded in Peter’s heart. He would have thought, ‘Who girds me? Who am I bound by? Who am I?’
As you know, the Great Fire of Rome started around 64 AD. The damage was massive, with ten out of 14 districts being destroyed. Although it has been widely believed that Nero deliberately set the city on fire to build his palace, Nero blamed the Christians. He persecuted them, crucifying them and burning them in the Colosseum for light. During this persecution, Peter fledRome to save his life. He is known to have taken the ancient road called the Appian Way. As he was fleeing,he saw Jesus walking toward him. So he asked, “Lord, where are you going?,” which in Latin is “Domine, quo vadis?” Jesus replied He was going to Rome to be crucified again. These words pierced Peter’s heartso deeply that he returned to Rome to be crucified. He is known to have requested to be crucified upside down because he felt unworthy to die in the same manner as Christ. This is according to Christian oral tradition.
Probably, Peter constantly thought of something/someone “girding” him all his life. This was his life’s theme. Dear Church, what girds, or binds, you? The world is full of glamour. We often think we will be happy if we seek glamour. We think we will surely be happy if only we reach a certain position, or accomplish and gain something.
Dear Somang Church, what are you bound by? Among Jesus’ disciples there was one who gave up his name: Bartholomew. Let me show you a portrait of him which I saw in a museum near the seminary I attended. In Matthew 10 the names of Jesus’ disciples are listed. In Sunday School we used to sing their names: Peter, James, John, Philip, Bartholomew, Matthew, Thomas, Andrew, Simon Zelotes, James son of Alpheus, Thaddues, Judas Iscariot. The names of all the disciples are listed but one: Bartholomew. “Bartholomew” is a combination of Aramaic and Hebrew, which means “son of Talmai.”
At Caesarea Philippi Jesus calls Peter “Simon Bar-Jonah.” Here “Bar-Jonah” means “son of Jonah.” “Jonah,” which is Hebrew, is later transliterated “Jonas” in Greek and “John” in English. So “Simon Bar-Jonah” means “Simon son of John.” But Bartholomew’s name is erased. After much study, scholars concluded that Bartholomew is Nathanael. In the Bible the names of the disciples often appear in pairs: Peter and Andrew; James and John; and Philip and Bartholomew.Nathanael was brought to Jesus by Philip. When Philip told Nathanael to come and see Jesus, he asks what good can come out of Nazareth. Jesus appears to Nathanael and says,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which stuns him.
He was shocked because that place under the fig tree was his secret place of prayer. At the time, religious leaders such as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liked to pray in public places. They made it known that they fasted twice a day, tithed, and were different from tax collectors. This is how they prayed. But godly people liked to pray discreetly. As Jesus taught in the Sermon on the Mount, they liked to pray in secret because they knew God would see them. The place under the fig tree was a place only Nathanael knew. It was a secret, unknown place. But how could Jesus know? How?
So Nathanael confesses that Jesus is truly the Son of God on the spot and becomes His disciple. However, he erased his name. He just made himself known as the son of Talmai. Nathanael was deeply moved by Peter’s death. I too will die for Christ. That is why he went north to Damascus and preached the Gospel in Azerbaijan, Armenia, and Iran. In the painting I showed you, Bartholomew is holding the Bible in one hand and a sword in the other. Bartholomew was killed by the sword, skinned to death, while preaching the Bible. He was martyred. When asked, “Who are you?”, his answer was “I am nothing.I am just the son of Talmai.”
When we look at the lives of Jesus’ disciples and that of our ancestors of faith, it becomes clear how we should live in this world. Dear Church, it is not by habit or by inertia that we should come to church each Sunday. Aren’t we confessing our faith by coming to church each Sunday and doing all that we do? If this is so, we must stand before God when we approach Him. We must confess, “Lord, I have been bound by power, position, hobby, and glamour. But may I now gird up the loins of my mind before You, as a faithful Christian.”
Peter also advises us to gird up the loins of our minds and be sober. To be sober in Greek means to be clear-minded. If our minds are not clear, it is hard to seek the Lord’s grace until His coming. To have a clear mind means to have Christ in our hearts, to not lose the spirit of Christ. When the late Pastor Um Doo-Seob visited the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he preached, “The foundation of Christianity is not doctrine, organization, system, building, or land. It is Jesus Christ. Having the Spirit of Jesus, that is, thinking of Jesus, is critical. The person who has lost his/her spirit is an idiot. The Christian who has lost Christ’s spirit is an idiotic Christian.”
My heart sank. I had been an idiot. An idiotic Christian. While professing to believe in Christ, I did not think of, or concentrate on, Christ. I had been focused on my thoughts, my knowledge, and my interests. This grieved me deeply.
Shall we sing this together?
At the cross, at the cross
Where I first saw the light,
And the burden of my heart rolled away,
It was there by faith I received my sight,
And now I am happy all the day!
Dear Church, what must we do to make our joy everlasting? When we accomplish what we are passionate about or what we want, we are happy. When good things happen we are happy. But the Bible doesn’t explain joy as such. It states that joy comes from confessing our faith. Those with faith know how to confess their faith. They know joy. Even in times when we cannot be joyful, they can say, “Lord, thank you!” They know how to confess this. How is this possible? Those who seek the grace of Jesus until His coming are steeped in thoughts of Christ daily.
Therefore, we must not lose the spirit of Christ and stand firm. May you live like this. When I was studying abroad, I pastored a small church. While happily living a life of faith there, a deaconess was suddenly diagnosed with cancer. Being young, her cancer spread quickly. The church prayed in all earnestness. ‘Lord, please save her. Heal her. Her children are so little. God, help her.’ But the cancer spread all over her body through her lymph. The doctors gave up. She was in so much pain that she would scream in the hospital. I prayed earnestly to God: ‘Lord, I am not a righteous person, but since you have made me righteous by faith, please, Lord, heal her when I pray for her.’ But God didn’t seem to answer my prayers. So later I would lay my hands on her, ‘Lord, make the pain go away at least when I lay my hands on her.’ But she would scream in pain when I laid my hands on her. I was devastated. ‘Lord, why are you doing this?’ My heart throbbed. The night before she died, I said to her, ‘I am so sorry. If you had met a better pastor, he would have lessened your pain.” The deaconess held my hand and said, “Pastor, it’s all right. You always said in your sermon God will be good to us. Do you know what I have come to know? I now know how much our Lord suffered when He was crucified. I know that now. Pastor, it’s okay. Don’t cry.” This was how she comforted me. She also sang a hymn for me. A hymn I couldn’t bring myself to sing for years after her death. But a hymn that I sing well now:
I love Thee because Thou hast first loved me,
And purchased my pardon on Calvary’s tree
I love Thee for wearing the thorns on Thy brow
If ever I loved Thee, my Jesus, ’tis now.
The deaconess confessed, “Pastor, I know how He loves me.” She died the next morning. After her death, our church pondered her death a lot. As Christians we often pray, ‘Lord, make this problem go away.’ But what does the Lord want from us?
Dear Church, we must be sober. We must be clear-minded. We must make ourselves obedient to Christ. Then we will see. How He loves us. Yes, we have our pain, our brokenness, our hurts, and our frustrations. But dear brothers and sisters, our Lord gives grace to us all. Those who have that grace can live on, despite their difficulties. They can confess, “God is good. God watches over us. Thank you, Lord.” We must have such a pure heart.
This Saturday is March First Movement Day. Our forefathers gave their lives for this nation. But are we living for Korea today? We must be clearminded about this too.
The title of today’s message is unique. As you may know well, it is taken from Yun Dong-ju’s poem. Poet Yun is known to have died in a prison in Fukuoka at the age of 27, after being subject to human experimentation. If someone asked, “What is a major theme of Yun’s poems?”, I would say unhesitatingly say, “shame.”
So in Heaven and Wind and Stars and Poems, a posthumous collection of his poems, the word “shame” appears frequently. “Foreword,” his mostfrequently quoted poem by Koreans, also mentions “shame.”
To be without a speck of shame until death
as I look up to the heaven above,
I even anguished at the wind
ringing through the leaves.
I will love all creatures destined to die
the same way my heart marvels at the stars.
And I should gladly walk down the road given to me.
It is a night the stars are touched by the wind.
The distance between the stars and the wind will be more than millions of kilometers. How can the wind touch the stars? But as we live life looking to Christ, the winds in our lives will touch even God. Poet Yun wished he had not even a speck of shame toward heaven. Yet he had a great shame. As the eldest son, he was ashamed of failing to care for his mother in Manchuria. As a Korean, he was ashamed of not doing more for Korea’s independence. As a Christian, he was ashamed of not believing in Christ with more sincerity. He felt shame. It was because he had a pure heart.
We will live yet another week. May you gird the loins of your minds as you live your life. You must be sober, reflecting on what binds you. You must be clear-minded. What do I see? Where am I going? Do I feel shame? We must reflect upon these questions.
Be Thou my vision, O Lord of my heart
Naught be all else to me, save that Thou art
Thou my best thought, by day or by night
Waking or sleeping, Thy presence my light
May you live out these lyrics. I am confident that you will. I love you, Church. God knows that I do.
베드로전서 1:1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 반갑고 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사말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에 다가가기에 앞서서 우리 서로 간에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인사하는가 하면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시겠습니다. 우리 서로 같이 인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제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하나님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요한서신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인간적 감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거라고 고백하며 인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공동체여야 합니다. 소망의 식구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잘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말이 여러분의 마음에 담겨 있는지요. 오늘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 딱 한 절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담겨 있는 말씀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한번 찬찬히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급하다’, ‘성정이 불같다’의 대명사는 아무래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읽어 보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성정이 급한 베드로가 썼는지 의구심이 느껴질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급하던 베드로가 말한 ‘오래 참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불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베드로가 이것까지도 전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드로서는 베드로가 정말 진심으로 회개한 후에 쓴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전서 1장 13절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담겼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믿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내게는 어떤 말씀이 담겨 있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나는 과연 찬양하는 존재인가?’ 이것을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이신지요?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꼭 담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식구 여러분, 마음을 꼭 동이고 근신하셔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되셔야겠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베드로의 마음에 담겨 있던 주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순교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동이다’라는 헬라어 단어의 뜻은 ‘허리를 묶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베드로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충격적인 단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가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 모릅니다. 난 몰라요.’라며 세 번이나 부정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못내 죄책감과 서글픔으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 만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어보셨습니다. 멋쩍었던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젊어서는 띠 띠고 아무 데나 돌아다녔지만, 네가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들이 너에게 띠를 띠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리고 가게 될 거다.” 여기서 나오는 단어가 ‘동이다’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아마 마음속 깊숙한 곳에 그 단어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내가 누구에게 매인 바가 되었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늘 기억에 남는 마음 가운데 남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64년경에 로마의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14개 구역 가운데 10개 구역이 전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네로가 자기 궁궐을 짓고자 일부러 화재를 냈다는 일설이 강력한 사실로 대두되고 있지만,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거나 원형 경기장의 횃불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도 목숨을 건지고자 로마의 길을 따라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아피아 길(Via Appia)이라는 길을 걸어가면서 베드로는 자기 목숨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저 앞에서 주님께서 걸어오시더랍니다. 베드로가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큰 찔림을 받아서 다시 로마 시내로 들어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처럼 똑바로 못 박혀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거꾸로 못 박아 주십시오.” 이게 교회의 전승에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나는 무엇에 묶여 있어야 하는가?’, ‘나는 무엇에 동이어 있어야 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늘 떠나지 않는 인생의 주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이 세상은 참으로 반짝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쫓아가면 나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저 자리에 올라가기만 하면…’, ‘내가 그것을 성취하기만 하면…’, ‘내가 그것을 얻어 내기만 하면…’ 나는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신앙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에 묶여 계십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이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채 예수님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자기 이름을 포기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바돌로매’입니다. 사진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공부했던 신학교 옆 대학 박물관에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사람이 바돌로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쭉 열거되어 나옵니다. 예전에 주일 학교 다니셨을 때 예수님 제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노래 많이 불러 보셨지요. 베드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를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다 열거되는데, 딱 한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가 바돌로매입니다.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아람어와 히브리어의 조합인데, ‘바르’라는 단어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돌로매’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를 지칭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이라고 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나’라는 히브리 말이 나중에 ‘요한네스’, ‘요한’이라는 헬라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도 말이 됩니다. 바돌로매는 자기의 이름을 지우고 돌로매의 아들로 남았습니다.
학자들은 바돌로매가 누굴까 고민하다가 발견했던 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의 짝들입니다. 빌립이 전도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와 보라 했더니,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겠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나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당시 종교 지도자가 곧 정치 지도자였는데,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율법교사들은 높은 단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그것도 언덕 위 큰 회중들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합니다. 나는 불의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리와는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기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밀한 가운데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은밀한 하나님께서 보실 테니,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나다나엘이 기도했던 무화과나무 아래는 아무도 몰랐던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주님은 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자기의 이름을 지웠습니다. 그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바돌로매로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후에 그의 죽음을 보고 나다나엘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도 예수를 위하여 죽으리라.’라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북쪽으로 다마스커스, 다메섹 쪽으로 가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이란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조금 전에 보신 그림에 바돌로매가 성경책을 왼손에 들고 있습니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이 사람, 성경 말씀을 전하다가 칼로 죽임을 당했는데 살가죽이 다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저는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냐?” “저는 돌로매의 아들 바돌로매입니다.” 이렇게 살아간 모습이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신앙의 선배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냈던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예수의 얼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예배당에 오는 것은 관성의 법칙으로 오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신앙 고백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재물, 힘, 권력과 세상의 반짝이는 것에 묶여 있던 사람입니다. 이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허리를 동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또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주의 식구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근신’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은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맑은 마음을 갖지 못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둔다’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엄두섭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장로회 신학대학교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교리, 조직, 직제, 건물이나 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는 예수의 얼이 중요합니다. 얼을 잃어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얼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얼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얼간이 그리스도인, 얼빠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엄두섭, 『예수의 얼』)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나는 얼간이었구나. 얼빠진 그리스도인이었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에 집중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지식, 관심에 날마다 집중하며 살았던 거로구나.’ 제가 얼마나 저 스스로에 대해서 슬펐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이 영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기뻐지겠지요. 내가 바라던 게 성취되어야 기뻐지겠지요. 아니 내가 딱히 바라고 원하지는 않았어도 나한테 좋은 일 벌어졌을 때 우리는 기뻐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쁨을 ‘신앙의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쁨을 고백할 줄 압니다. 도대체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우와, 하나님 감사해요. 이야! 주님 고맙습니다.” 고백하며 살아갈 줄 압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까지 은혜를 바라는 사람들은 날마다 예수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얼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우리가 서야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살아 내시는 여러분 되길 부탁드립니다.
<맑은 마음을 가질 때,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외국에서 공부할 때 아주 작은 한인 교회를 맡았습니다. 거기에서 열심히 즐겁게 신앙생활 했는데, 그만 한 여집사님이 암에 걸렸습니다. 젊은 분이셔서 그랬는지 순식간에 온몸에 암이 퍼졌습니다. 교회가 모여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집사님 살려 주세요. 아기들이 아직 어린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졌습니다. 림프를 따라 암 세포가 온몸에 다 퍼졌던 겁니다. 의사들도 포기했습니다. 이분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병원에서 소리 지를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의인의 반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 믿는 그 믿음으로 저를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가 기도할 때 우리 집사님 꼭 낫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어떻게 기도했는가 하면, “하나님, 집사님 몸에다가 손대고 기도할 때 그때만이라도 좀 안 아프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손대고 기도하면 이분이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아파했습니다. 제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시는데요?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이 마지막 날 밤인지 몰랐습니다. “집사님 죄송해요. 좋은 목사님 만났으면 집사님께서 덜 아팠을 텐데, 못난 목사 만나서 죄송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집사님이 제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줬습니다. “목사님 괜찮아요. 설교 시간에 늘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 잘해 주실 거라고요. 하나님 잘해 주고 계세요. 제가 뭘 깨달았는지 아세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마음을 깨달았어요. 목사님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저를 도리어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송해하는 저한테 찬송 하나를 불러 줬는데, 그 뒤로 십수 년 동안 이 찬송을 못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잘 부릅니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보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찬송가 315장, 2절)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게 됐어요.” 이렇게 고백하고 그날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분 돌아가신 후에 우리 교회가 모여서 많이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으면서 이런 생각할 때가 많거든요. ‘하나님, 이 문제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이거 해결되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많이 되돌아봤습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맑은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근신해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가 보입니다. 나의 마음에는 여전히 고통과 무너짐이 있고, 답답하고 칼칼한 마음, 나도 모르게 쌓인 서글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소망의 식구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어렵지만, 그래도 “우와! 이야~” 하며 살아갈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해 주고,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거라고 믿으며 “하나님 고마워요. 감사해요.”라고 고백할 줄 압니다. 그렇게 맑은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는 토요일이 3·1절입니다. 많은 민족의 선배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게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를 위해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말이 우리의 마음속에 맑은 마음으로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특이하지요? 잘 아시겠습니다만 시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 선생님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동주 선생님은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루타 실험을 당하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윤동주 시문학의 화두 하나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주저함 없이 ‘부끄러움’이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윤동주 선생님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 서시에도 나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
‘별’과 ‘바람’ 사이의 간극은 수십만, 수백만 킬로미터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간극이 있는데 이 땅에서 부는 바람에 별이 스친다고요? 말이 안 되는 겁니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다가 우리 삶의 현실에 바람이 불면 하나님의 눈길이 스치는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자세여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에게는 큰 부끄러움이 있었답니다. 첫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저 만주에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 못 한다는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사람인데 나라 독립을 위해 조금도 노력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답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를 조금 더 진실하게 믿지 못한 것을 부끄럽다고 여겼습니다. 맑은 마음이란 이런 거다 싶습니다.
일주일 또 살아갑니다. 살아가시는 삶의 여정에 여러분 마음에 허리를 동이셔야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묶여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신하셔야 합니다. 맑은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눈엔 무엇이 보이는가?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부끄러워하는 사람인가? 이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 여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 내는 여러분 되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사실 것이지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벧전1:13)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63장, 31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사랑합니다.” 하나님=사랑이시니, “사랑합니다”=“하나님 합니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하나님 살아계시니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러니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격려입니다.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케렌시아”는 투우 경기에 앞서 화가 난 소를 잠시 진정시키는 곳입니다. 안식처, 위로의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예배의 자리가 우리 모두의 안식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설교의 요약>
본문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을 권면하기 위한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AD64년, 로마 대화재 때, 로마의 14 구역 가운데 10 구역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신의 궁전을 지으려 했던 네로 스스로 벌인 일이라 짐작하지만, 모든 원인은 그리스도인에게 몰렸습니다. 십자가 형과 로마 원형 경기장을 밝히는 횃불로 그리스도인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베드로서는 이 시기 어간에 쓰여졌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했던 권면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다.” 라는 말은 요21장의 사건을 조명합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베드로가 아피아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의 말씀은 “나는 다시 십자가에 달리려 로마에 간다.” 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발걸음을 돌렸고,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근신하다”는 헬라어로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주님께 저질렀던 많은 실수들, 겟세마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했던 부인 등을 반영합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통해 신앙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자신의 마음에 담긴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그리고 맑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의 얼>, 엄두섭 목사 “기독교의 기초는 교리, 조직, 직제, 건물이나 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는 예수의 얼이 중요합니다. 얼을 잃어버린 사람을 얼간이라고 얼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얼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얼간이 그리스도인, 얼빠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유학시절 자그마한 한인교회를 목회할 때에 만났던 젊은 여집사님, 암에 걸렸던 분의 간증입니다. “목사님, 괜찮아요. 예수님의 아픔이 얼마나 컸는지 이제 알게 되었어요.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불러준 찬송입니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문제 안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아픔 가운데서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마루타 실험을 당해 죽임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의 화두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시길 바랍니다.
<나누기>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 “맑은 눈을 가지라” 외부의 문제들과 자신의 어려움들 속에서 먼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나누어 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참 고맙습니다. 우리네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메시아가 되어 주시고 우리들을 구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갖고 살아가면서도 마치 내가 모든 것을 한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았던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날마다 우리들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맑은 마음으로 세상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