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
<익히 알려진 달란트 비유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된 므나의 비유가 같은 내용을 다루고는 있지만, 달란트라는 단위를 사용하는 비유는 이곳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사실 이 비유는 대림절에 적절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내용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6~28장까지는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예수님의 강론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크게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입니다. 25장 1~13절까지 소개되고 있죠. 이어서 오늘 본문인 달란트 비유가 14~30절에 걸쳐 등장합니다. 그리고 31절부터 마지막 절인 4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양과 염소를 나누시듯 사람들을 좌우로 나누시고 심판하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 중에서 앞뒤에 놓인 두 비유는 마지막 순간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 주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비유에서는 신랑인 예수님이 오시는 날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나뉘고 있죠. 양과 염소를 나누는 비유 역시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를 향해 심판 앞에 깨어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렇듯 두 비유는 전반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비유 사이에 오늘 읽은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 역시 주인이 돌아오는 날을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날로서 묘사합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시점과,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시점이 존재하며 그 사이의 시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이후부터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하는 시간까지, 그 중간의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보낼 지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릴 적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또 열심히 일하여서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당연한 게 아닌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 신임을 얻었으니 일할 맛이 나지 않았겠는가? 다섯 달란트만큼은 아니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역시 한 달란트보다는 많이 받았으니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과연 일할 의욕이 있었을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주인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이 일할 맛이 났겠습니까? 주인이 올 때 본전이라도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땅에 묻었다가 돌려드린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달란트 비유를 읽다 보면 완전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자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서는 똑같은 반응을 보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의미는 차별성에 있지 않습니다.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느냐에 따른 구별이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섯과 둘, 그리고 하나라는 차별에 눈길을 둔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받은 달란트는 서로 다릅니다.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공평하게 받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시점에서부터 주인이 돌아오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공평하게 기회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입니다.
<놀랍게도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세 명의 종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
그리고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소개된 이후 달란트 비유가 시작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4)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5장 1절에 소개된 ‘천국은 마치’라는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열 처녀의 비유를 드셨고, 다시 천국을 이야기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14절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 즉 하늘나라,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들어갈 때 종들을 불러 소유를 맡기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신랑이 돌아오는 시점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라면, 마찬가지로 양과 염소 비유도 인자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시점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면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떠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다른 비유와 차별성을 가집니다. 독일 성서공회가 발간한 독일어 관주 성경은 달란트의 비유를 유예된 시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의 비유들이 종말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든가, 준비하고 있으라든가 하는 경고를 내용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달란트 비유)서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슬기롭게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포되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견지에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걸맞은 것과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하여 각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누어 주신 재능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_ 독일 성서공회, 『관주·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p.43~44
그렇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물론 인간의 현실이 고려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똑같은 건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건강이 다르고 체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태어난 국가가 다르듯이 우리 모두는 동일한 조건에서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차별이기보다는 현실입니다. 독일어 성경은 이러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이 적다고 핑계를 대거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서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거나 아마도 또한 손가락 하나도 더럽히지 않을 요량으로 진력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비참한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_ 독일 성서공회, 『관주·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p.44
한마디로 시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공평하게 주신 기회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주인이 남긴 달란트의 크기에 연연하며 불평해 하는 일은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세 가지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첫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적게 받았으니 불공평하다.’는 생각입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착각입니다. 남들이 가진 달란트의 크기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정작 자신이 가진 것은 불만스러워하는 삶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고 어떤 사람은 권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젊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여성입니다. 남의 것을 보면서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다양하게 만드셨고 각자에게 달란트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역시 종이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러합니다. 크든 작든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어서 주시는 영역입니다. 도리어 우리의 영역이라 함은 다섯인지, 둘인지, 하나인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주어진 시간만큼은 우리의 것이고, 주어진 그 시간만큼이 책임이 됩니다. 자,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모두에게 일할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주인이 오셔서 다시 계산하시는 그날까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올 한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한 해를 우리가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몫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를 몽땅 묻어 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순간부터 시간은 멈추어 섰습니다. 시간을 낭비한 셈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을 나무라면서 말하지요. “차라리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내가 돌아올 때 원금과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할 것 아니냐?” 이자라는 개념이 시간의 개념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네가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라도 맡겨서 시간의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으로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는 또 있습니다. 25장 24절 전반부에 나타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마 25:24 중)
본 구절에 ‘굳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향하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켈로스’(σκληρός,skléros)는 ‘완고하다’, ‘고집 세다’, ‘굽히지 않는다’, ‘건조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비유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뜻이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겁니다. 종은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서 “당신은 고집 센 분입니다. 완고한 분입니다. 거친 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주인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고집 세고, 변화가 없고, 완고하고,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였습니다. 완고한 주인이기에 혹시나 일을 잘못 벌였다가 큰일이 날까 걱정한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그가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주인을 향해 가진 오해가 결국 그로 하여금 달란트를 땅에 묻도록 합니다. 어쩌면 결과적으로 한 달란트라는 본전은 건졌으니 비록 이익은 내지 못하였지만 중간은 한 게 아닐까 안심하며 선을 지키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은 재물의 가치를 높이거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종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의 일에 종들이 동참할 기회를 주시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이 없었더라면 주인은 이자를 주는 사람에게 돈을 맡겼겠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날에 원금과 함께 이자를 받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들에게 일부분씩,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면서 주인의 사업에 동참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의미입니다. 이 의미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한 종이 되고 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달란트를 맡김으로써 그의 일에 종이 참여하도록 기회를 주었지만 종은 동업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명예롭고 귀한 일을 해 내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세 번째 오해는 이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4)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장이 나옵니다. 종이 판단합니다. “주인,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 당신은 인색한 분이십니다.”라는 해석과, 반대로 “심지 않고도 거둘 수 있는 능력 있는 분 아니십니까? 내가 버는 한 달란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분 아니십니까?” 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종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생각이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일확천금을 꿈꿀 때가 많습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심지 않고 많이 거두는 방법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욱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깐 심지 않아도 거두시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과정이 없어도 당연히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이것이 믿음이지.’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가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 우리가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윤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심어야 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과정이 없어도 괜찮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내실 것이다.”는 관점은 때로는 큰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인의 큰 진노를 사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때 우리는 씨를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아름답게 사용하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겠습니다.>
정리해 봅니다. 달란트의 크기를 보느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누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사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날아가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집 세고 굳은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다. 늘 창조적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을 꿈꿔 보십시다. 하나님은 고착되고 완고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이끌어 주시며 창조적인 일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심으로 멋진 열매를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뿐 아니라 하늘나라 역시 심는 자가 거둔다는 원리가 작용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심지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른 봄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둡니다. 이 법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불고의 법입니다. 선을 심는 자는 선으로 거둡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 않은 사람은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특별히 2022년 1월 연초를 보내면서 또 설날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다시 한 번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심고 거둘지 결단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루터가 말하고 스피노자가 인용한 글귀, “나는 내일 세상의 마지막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 하늘나라를 거두는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님은 오늘도 바라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 14 ~ 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익히 알려진 달란트 비유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된 므나의 비유가 같은 내용을 다루고는 있지만, 달란트라는 단위를 사용하는 비유는 이곳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사실 이 비유는 대림절에 적절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내용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6~28장까지는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 부활하시는 예수님의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예수님의 강론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크게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입니다. 25장 1~13절까지 소개되고 있죠. 이어서 오늘 본문인 달란트 비유가 14~30절에 걸쳐 등장합니다. 그리고 31절부터 마지막 절인 4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양과 염소를 나누시듯 사람들을 좌우로 나누시고 심판하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 중에서 앞뒤에 놓인 두 비유는 마지막 순간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 주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비유에서는 신랑인 예수님이 오시는 날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나뉘고 있죠. 양과 염소를 나누는 비유 역시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를 향해 심판 앞에 깨어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렇듯 두 비유는 전반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비유 사이에 오늘 읽은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 역시 주인이 돌아오는 날을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날로서 묘사합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나는 시점과,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 시점이 존재하며 그 사이의 시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이후부터 돌아와서 종들과 결산하는 시간까지, 그 중간의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보낼 지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릴 적 저는 달란트의 비유를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또 열심히 일하여서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당연한 게 아닌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 신임을 얻었으니 일할 맛이 나지 않았겠는가? 다섯 달란트만큼은 아니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역시 한 달란트보다는 많이 받았으니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과연 일할 의욕이 있었을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주인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이 일할 맛이 났겠습니까? 주인이 올 때 본전이라도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땅에 묻었다가 돌려드린 게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달란트 비유를 읽다 보면 완전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자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서는 똑같은 반응을 보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의미는 차별성에 있지 않습니다.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느냐에 따른 구별이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섯과 둘, 그리고 하나라는 차별에 눈길을 둔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받은 달란트는 서로 다릅니다.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공평하게 받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시점에서부터 주인이 돌아오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공평하게 기회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입니다.
<놀랍게도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세 명의 종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 25:1)
그리고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소개된 이후 달란트 비유가 시작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마 25:14)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5장 1절에 소개된 ‘천국은 마치’라는 문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열 처녀의 비유를 드셨고, 다시 천국을 이야기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14절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다.” 즉 하늘나라,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들어갈 때 종들을 불러 소유를 맡기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신랑이 돌아오는 시점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라면, 마찬가지로 양과 염소 비유도 인자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시점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면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떠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달란트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다른 비유와 차별성을 가집니다. 독일 성서공회가 발간한 독일어 관주 성경은 달란트의 비유를 유예된 시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앞의 비유들이 종말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든가, 준비하고 있으라든가 하는 경고를 내용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달란트 비유)서는 그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을 슬기롭게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포되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견지에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걸맞은 것과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하여 각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누어 주신 재능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_ 독일 성서공회, 『관주·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p.43~44
그렇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물론 인간의 현실이 고려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똑같은 건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건강이 다르고 체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태어난 국가가 다르듯이 우리 모두는 동일한 조건에서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차별이기보다는 현실입니다. 독일어 성경은 이러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이 적다고 핑계를 대거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서 결국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거나 아마도 또한 손가락 하나도 더럽히지 않을 요량으로 진력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비참한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_ 독일 성서공회, 『관주·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p.44
한마디로 시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공평하게 주신 기회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주인이 남긴 달란트의 크기에 연연하며 불평해 하는 일은 지혜로운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세 가지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첫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적게 받았으니 불공평하다.’는 생각입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착각입니다. 남들이 가진 달란트의 크기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정작 자신이 가진 것은 불만스러워하는 삶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모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고 어떤 사람은 권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젊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여성입니다. 남의 것을 보면서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다양하게 만드셨고 각자에게 달란트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한 달란트 역시 종이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러합니다. 크든 작든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어서 주시는 영역입니다. 도리어 우리의 영역이라 함은 다섯인지, 둘인지, 하나인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주어진 시간만큼은 우리의 것이고, 주어진 그 시간만큼이 책임이 됩니다. 자,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모두에게 일할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주인이 오셔서 다시 계산하시는 그날까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올 한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한 해를 우리가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것이 우리 몫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달란트를 몽땅 묻어 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순간부터 시간은 멈추어 섰습니다. 시간을 낭비한 셈입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종을 나무라면서 말하지요. “차라리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내가 돌아올 때 원금과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할 것 아니냐?” 이자라는 개념이 시간의 개념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네가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라도 맡겨서 시간의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으로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종은 결국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는 또 있습니다. 25장 24절 전반부에 나타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마 25:24 중)
본 구절에 ‘굳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향하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켈로스’(σκληρός,skléros)는 ‘완고하다’, ‘고집 세다’, ‘굽히지 않는다’, ‘건조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비유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뜻이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겁니다. 종은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서 “당신은 고집 센 분입니다. 완고한 분입니다. 거친 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주인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고집 세고, 변화가 없고, 완고하고,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였습니다. 완고한 주인이기에 혹시나 일을 잘못 벌였다가 큰일이 날까 걱정한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그가 두려워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주인을 향해 가진 오해가 결국 그로 하여금 달란트를 땅에 묻도록 합니다. 어쩌면 결과적으로 한 달란트라는 본전은 건졌으니 비록 이익은 내지 못하였지만 중간은 한 게 아닐까 안심하며 선을 지키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은 재물의 가치를 높이거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종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에게는 주인의 일에 종들이 동참할 기회를 주시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이 없었더라면 주인은 이자를 주는 사람에게 돈을 맡겼겠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날에 원금과 함께 이자를 받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들에게 일부분씩,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면서 주인의 사업에 동참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의미입니다. 이 의미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한 종이 되고 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해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달란트를 맡김으로써 그의 일에 종이 참여하도록 기회를 주었지만 종은 동업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명예롭고 귀한 일을 해 내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세 번째 오해는 이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 25:24)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장이 나옵니다. 종이 판단합니다. “주인,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 당신은 인색한 분이십니다.”라는 해석과, 반대로 “심지 않고도 거둘 수 있는 능력 있는 분 아니십니까? 내가 버는 한 달란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분 아니십니까?” 라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종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생각이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일확천금을 꿈꿀 때가 많습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심지 않고 많이 거두는 방법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욱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깐 심지 않아도 거두시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과정이 없어도 당연히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이것이 믿음이지.’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가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 우리가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윤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반드시 심어야 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과정이 없어도 괜찮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거둘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내실 것이다.”는 관점은 때로는 큰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인의 큰 진노를 사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때 우리는 씨를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아름답게 사용하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겠습니다.>
정리해 봅니다. 달란트의 크기를 보느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누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사이,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날아가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고집 세고 굳은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다. 늘 창조적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을 꿈꿔 보십시다. 하나님은 고착되고 완고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이끌어 주시며 창조적인 일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대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심으로 멋진 열매를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뿐 아니라 하늘나라 역시 심는 자가 거둔다는 원리가 작용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심지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른 봄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둡니다. 이 법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은 불고의 법입니다. 선을 심는 자는 선으로 거둡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 않은 사람은 거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특별히 2022년 1월 연초를 보내면서 또 설날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다시 한 번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심고 거둘지 결단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루터가 말하고 스피노자가 인용한 글귀, “나는 내일 세상의 마지막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 하늘나라를 거두는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님은 오늘도 바라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1월 2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 (마 25:14-19, 24-3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4장, 49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 25:14-19, 24-3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월 2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달란트 비유를 읽을 때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 왜 차별을 두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한 달란트 받은 자 입장에서 볼 때 불공평 속에 똑같은 반응을 보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은 아닌지, 차라리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반납하는 행동이 마땅해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달란트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함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뜻을 어떻게 오해하고 행동했던 것일까요?
설교의 요약
달란트 비유는 종말의 시간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앞뒤로 열 처녀 비유, 양과 염소 비유가 있는데 이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달란트를 맡기고 떠난 시점부터 다시 돌아오는 시점의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핵심은 시간입니다. 맡긴 달란트는 차이가 있어도 기회로 주어진 시간은 모두 똑같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이렇게 오해하였을지 모릅니다. 주인이 불공평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차별을 두어 맡겨졌다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불평과 내 부족함만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받았는가의 문제는 사실 내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나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일할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이는 주인을 완고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고집 센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죠. 이러한 인식은 그 한 달란트라도 지켜내는 것이 더 지혜로운 생각으로 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생각은 달랐죠. 이윤을 창출하고자 함이 달란트를 맡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주인의 일에 동참할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자를 주는 이들에게 맡겨서 돌아오는 날 원금과 이자를 받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일에 공헌하는 그 명예롭고 귀한 기회를 스스로 날려 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색하다는 의미일수도 있지만 심지 않아도 거둘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주인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이런 오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니까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과정이 없어도,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큰 믿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주인의 큰 진노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할 때는 심어야 하고 가꿔야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달란트의 크기가 아니라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고집 센 굳은 분으로 생각지 말고 맡기신 일에 창조적 사역으로 기꺼이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심는 자들이 결국 거둔다는 것입니다. 올 한해 나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시간 최선을 다합시다. 주님의 창조적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합시다. 세상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끊임없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심어 기쁨의 열매를 거두는 주의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오해처럼 나 또한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진 않습니까?
2. 선물로 주신 올 한 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성실히 심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무리기도
아버지 하나님, 새로운 한 해 선물로 주신 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원합니다. 늘 새로운 창조 사역을 감당하시며 그 사역에 동참케 하실 때 기쁨과 충성으로 담당케 하옵소서. 심고 거두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기에, 날마다 생명의 복음을 씨 뿌리며 귀한 열매 거두는 한 해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