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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냄새, 번제를 드리라

레위기 1: 1 ~ 9

김경진 목사

2019.09.2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 레위기입니다. 번제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 특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이 명령이 유효한지 질문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초대교회 교인들도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제사에서 자유롭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넘어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유일하고도 유효한 제사의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릴 제사나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를 무시하고 지내도 될까요?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역시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을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다섯 가지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하나인 ‘번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번제는 희생제물 전부를 태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계약을 맺는 제사가 바로 번제입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구약의 제사들과 함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제사장들은 번제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하나님이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지, 어떤 예배를 구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레위기 1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크게 세 종류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종류는 3절, 10절, 14절에 등장합니다. 먼저 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그리고 10절입니다.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14절입니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하나님은 번제를 제물로 드릴 때, 소를 바치거나, 양이나 염소를 바치거나, 혹은 새를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물의 크기를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격도 큰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소 또는 새입니다. 심지어 새는 산비둘기입니다. 어디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에 또 다른 단서를 붙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를 바치든, 양과 염소를 바치든, 새를 바치든, 모두 번제로 받아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나아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초청입니다.
믿음이 약해 하나님께 큰 것을 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하나님께 너그럽게 드리길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소를 바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를 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를 따지지 않으시고, 새든지 소든지, 그 어떤 것도 제물로 받으시며 용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마음이 가난하든지, 믿음이 가난하든지, 경제적으로 가난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상관없이 당신께 나오는 자들을 받으시겠다고 오늘 본문을 통해 표명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 자신이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리는 절차는 어떻습니까? 소와 양, 새를 바치는 과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정신만큼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를 제물로 바치는 절차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주어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는 새번역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절의 말씀입니다.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레위기 1:3, 새번역)

이 말씀에서부터 번제 드리는 절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선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 곧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막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제사 드리는 장소를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면 성막 가까이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물을 가진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만 보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만 보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전에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가 거쳐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4절에 나타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레위기 1:4, 새번역)

두 번째로 예배자는 자신이 가져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킵니다. 즉 “내가 죽어야 할 사람인데, 네가 죽는구나. 네가 죽어야겠구나.” 하고 자신의 죄책을 희생제물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매우 중요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레위기 1:5, 새번역)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성막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막의 뜰은 가로와 세로가 약 100규빗, 너비는 50규빗입니다. 오늘날 수치로 환산하면, 약 45미터 길이에 23미터 정도 되는 너비의 뜰입니다. 뜰 안에는 성막, 즉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성막의 길이는 13미터 정도며, 성막을 둘러싸고 좌우에 여백이 있어야 하므로, 아마 번제단은 성막 뜰 중앙쯤에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위에서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수송아지를 잡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를 직접 살해하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라는 말씀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배자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사람은 예배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포로기 이후에는 레위인들에 의해 제사가 대신 드려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예배자들이 적극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배자는 예배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해야 하는 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레위기 1장 6절 이후의 말씀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고기 저민 것과 그 머리와 기름기를 제단에서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아야 한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레위기 1:6~9 중, 새번역)

이것이 절차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제사장이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첫째, 제물을 회막 어귀까지 끌고 와야만 합니다. 둘째, 제물의 머리에 손수 안수해야 합니다. 셋째, 제물을 직접 살해, 곧 죽여야 합니다. 넷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아야 합니다. 다섯째,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제사장에게 건네줘야 합니다. 모든 소를 잡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물의 피를 받아서 제단 사방에 뿌리는 일입니다. 제단에 불을 피워놓고 있다가 제물을 씻어 올려주면 그것을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장작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을 태우는 일을 제사장이 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을 제사장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배자,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제사 드리는 자의 상황을 오늘 우리 예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저 방관적으로 구경하듯이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 절차는 목사님이나 예배 인도자나 혹은 기도자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는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찬양과 기도, 말씀과 봉헌, 이 모든 순서에 적극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탐내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은 번제에 대한 절차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9 중)

이 말씀의 뜻은 ‘번제는 불로 드리는 제사인데, 이렇게 번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으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고대 설화 중에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ic)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홍수를 피한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분이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 수많은 신이 파리 떼처럼 몰려왔다는 기사가 이어집니다. 이 내용이 전하는 바는 ‘인간에게는 적대적이면서도 제물이 타는 냄새에는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저급한 신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이 구절은 자칫, 하나님을 고기 냄새를 탐하는 저급하고 배고파하는 신으로 폄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하나님이실까? 고대 근동의 그러저러한 신들과 같은 종류의 하나님에 불과하신 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제사, 곧 이 번제와 같은 제사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제물이 타는 냄새나 피의 냄새를 원하시는 게 아님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냄새에 탐닉하여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는 그와는 전혀 다른 냄새입니다.

희생제물을 향한 비통함과 침통함을 아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성막에서 제사 드리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성막의 뜰은 흰색 세마포로 싸여 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오는 문은 약 9미터입니다. 그곳에는 기둥이 넷 있습니다. 휘장은 청색과 자색과 홍색 실로 수놓아진 천으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안에 번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기둥을 통과하고, 휘장을 통과하여, 소를 몰고 성막 뜰 안으로 제사 드리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가로와 세로가 2.3미터, 높이는 1.3미터인 번제단이 보입니다. 번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동으로 된 뿔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늘 피가 묻어 있었기에,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코뿔소의 뿔에 받힌 동물의 내장에서 피가 흘러나오듯이 동으로 된 뿔에서 피가 흐릅니다. 그야말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제단입니다.
제물을 드리려는 사람이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분위기는 도살장과 같습니다. 안수 기도를 하며 소와 눈이 마주칩니다. 소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인 줄 알았는지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네가 대신 죽는구나. 참으로 잔인하지만, 내가 살아야 하겠기에….” 그렇게 되뇌면서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소를 단단히 묶습니다. 이후 소의 머리 부분으로 다가갑니다. 소의 목에 칼을 깊숙이 꽂습니다. 피가 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아래에는 대야가 있습니다. 동으로 만든 대야, 그곳으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소는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가, 몇 번을 움직이다가 그만 깊은 잠이 듭니다. 피는 계속 흘러내립니다. 제사장은 대야에서 피를 손에 묻히고는 번제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또 다른 피입니다. 앞서 죽었던 소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제단에 또 다른 소의 피가 발라집니다. 그리고 피가 뿌려집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아마도 제사 드리는 이가 현장에서 이렇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무거운 부담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지는 장면은 늘 이렇게 참혹합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피가 튀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피가 새하얀 휘장에 묻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의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제사장들이 가져가 불에 넣고 태워버립니다.
대야에 받아진 피는 제단 위에 부어집니다. 제단은 밑바닥이 없습니다. 그냥 땅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피를 아마 제단에 있던 불이 다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피는 땅으로 스며들어 갔겠지요. 또 다른 소의 피가 그렇게 또 땅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소의 피가 또다시 땅으로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온통 피 냄새가 진동하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옆에서는 또 다른 소가 죽어갑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또 다른 소가 들어옵니다.
이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예배자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면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침통함,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희생되는 소에 대한 미안함, 자신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 나가는 소에 대한 비통함….
예배자는 소가 죽어 나가는 모습, 피 흘리며 불태워지는 순간을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죽어 나가고, 자신이 피 흘려지고, 자신이 불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치 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돌아가듯이, 모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모두 다 태우고, 자신만이 살아서 회막 문을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마음의 냄새’를 올려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번제의 절차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번제는 절차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들여다보고, 내가 그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자가 된다면, 그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자신을 죽이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조각내는 예배입니다. 제물과 함께 타들어 가는 예배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며 애통해하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자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우리는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단번에 유효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소로 몸소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그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 올라서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모든 피를 다 흘리시며 물까지 쏟아 운명하셨습니다. 그분의 피는 갈보리 언덕의 땅이 받아 마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제사, 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공하신 제사입니다.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 곁에 섰습니다. 어떤 이는 창으로 예수님을 찔렀고, 어떤 이는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고, 어떤 이는 주님을 부인했고, 어떤 이는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고난당하심, 곧 그분의 죽음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함께 극명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예배는 주술적인 놀이가 아닙니다. 예배는 값싼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관찰할 만한 흥미로운 예식이 아닙니다. ‘마음의 냄새’입니다. 향기로운 냄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맡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향해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향기로운 그 냄새를 올려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A Pleasing Aroma, Burnt Offering
Leviticus 1:1-9

Today’s scripture comes from Leviticus. The passage talks about the burnt offering, the first sacrifice, and God’s commands and procedures related to it. Is the burnt offering valid even today? Since the age of the New Testament, we do not have to sacrifice burnt offerings to God in the literal sense because Jesus Christ sacrificed Himself for us once for all. Yet, we cannot ignore or abandon the sacrifices of the Old Testament. They are precious because they teach us how God’s people should worship and what attitude is needed in worship.

Among the five sacrifices in the Old Testament, the burnt offering was the most basic and significant one. By totally consuming the offering on the altar, the burnt offering was a deep confession that God is our God and we are His. It could be given with other offerings and had to be performed every day by the priests. Throughchapter 1 which regulates this offering, we will be able to learn what God wants from worshippers.

First, by the types of animal sacrifices allowed, we learn that anyone could come to God to worship, regardless of his faith, financial status or situation. God allowed worshippers to offer bulls, sheep, goats or doves as animal sacrifices as seen in verses 3, 10, and 13. This shows how considerate God was for the poor who couldn’t afford bulls or sheep. Also, it shows God’s consideration for those whose faith was weak.

Then what were the procedures and rules for the burnt offering? First, in verse 3, it says, “If the offering is a burnt offering from the herd, you are to offer a male without defect. You must present it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so that it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Leviticus 1:3) Accordingly, the worshipper first had to physically approach the entrance of the tent to present the offering. He had to come near to God. This means that, to give a worship acceptable to the Lord, the worshipper must draw near to God himself and present his offering.

The second step was to lay his hand on the burnt offering: “You are to lay your hand on the head of the burnt offering, and it will be accepted on your behalf to make atonement for you.” (Leviticus 1:4) Through this act, the worshipper passed his sin on to the animal. In other words, he is saying, ‘I should be the one to die for my sins, but you will die in my stead.’

The third step, a most important one, was to slaughter the animal: “You are to slaughter the young bull before the Lord, and then Aaron’s sons the priests shall bring the blood and splash it against the sides of the altar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Leviticus 1:5) This meant that the worshipper had to kill the animal himself. Thus, the Bible is teaching us that the worshipper must play a very active role in worship.

The worshipper had to carry out many procedures proactively: “You are to skin the burnt offering and cut it into pieces. The sons of Aaron the priest are to put fire on the altar and arrange wood on the fire. Then Aaron’s sons the priests shall arrange the pieces, including the head and the fat, on the wood that is burning on the altar. You are to wash the internal organs and the legs with water, and the priest is to burn all of it on the altar. It is a burnt offering, a food offering, an aroma pleasing to the Lord.” (Leviticus 1:6-9)

To summarize, the person who came to give an offering to the Lord had to 1) take the offering to the tent’s entrance, 2) lay his hand on it, 3) slaughter it himself, 4) skin it and cut it to pieces, and 5) wash the internal organs and legs and give them to the priest. The priest would then splash its blood on the sides of the altar and burn the offering. Therefore, much of the work was done by the worshipper. This was what God wanted.

Let’s apply this to ourselves today. When we worship, we must not be passive. We must not be onlookers. The procedures of worship cannot be carried out by the pastor or the worship leader in our stead. We, as worshippers, must worship actively. God is seeking such worshippers.

Now, let me get to the main message of my sermon today. Today’s passage on the burnt offering concludes with these words: “It is a burnt offering, a food offering, an aroma pleasing to the Lord.” (Leviticus 1:9) Indeed, it is an interesting verse.It is saying that when a burnt offering is given to the Lord, He receives it and is pleased with its scent. What does this mean?

Does it mean that our God is a vile god who literally likes the scent of burning meat? There are actually such gods in a Mesopotamian poem called the Epic of Gilgamesh. In this epic, the gods swarm to an altar of burning sacrifices after a great flood. Does the above verse in Leviticus mean that Our God is such a god? Of course, not.

This is what God says in Isaiah: “‘The multitude of your sacrifices—what are they to me?’ says the Lord. ‘I have more than enough of burnt offerings,of rams and the fat of fattened animals;I have no pleasurein the blood of bulls and lambs and goats.’” (Isaiah 1:11) According to this verse, it is not the scent of blood or the animal sacrificesthemselves that God wants. He is not such a vulgar god. Then what is it that He wants?

Imagine the scene of the burnt offering at the tabernacle. The court of the tabernacle would have been surrounded by white curtains. At the center of the court is the altar. The altar is covered with blood. There, a man brings his bull. He ties it up and takes a knife to its throat. The bull resists vehemently at first, but soon it slumps to the floor, dead. Red, fluorescent flood flows from it. There is blood everywhere.The man cries to himself, ‘I am so sorry. I should have been the one slaughtered for my sins.’ Then the next man comes.

As such, the scene of the burnt offering was a terrible, devastating sight. It was far from pretty. At this terrible scene, what would the worshipper have felt? Complete agony. He would have felt deep remorse, agony, and contrition for the fact that his animal had to die in his stead. He would have felt every painful moment of the bull being slain in his stead. Ultimately, he would have felt himself dying, bleeding, and burning. This was the burnt offering.

Dear Church, what is the true worship that God seeks? We find the answer in the detailed steps of the burnt offering. God wants the worshipper to “die” in worship. He wants the worshipper to cut himself to pieces and give himself wholly to God. This is the aroma that God wants. This is pleasing to Him.

Therefore, David sings in Psalms, “You do not delight in sacrifice, or I would bring it;you do not take pleasure in burnt offerings.My sacrifice, O God, is a broken spirit;a broken and contrite heartyou, God, will not despise.” (Psalms 51:16-17) Even when the burnt offering was still being performed, David knew that it was not the sacrifice itself that God was pleased with. He knew that it was a broken and contrite heart that God wanted.

As I mentioned in the beginning, we do not give burnt offerings in the literal sense anymore. But, this, we know. Jesus, the perfect lamb that died for our sins once for all, went up to the altar. He was sentenced to death on the cross in the courts of Jerusalem. He was whipped and pierced for our sins. He was crucified. He bled for us. His precious blood flowed on the hills of Calvary. When He breathed His last, the heavens and earth cried. This was the sacrifice and offering that God prepared for us. And, to the people who scorned and pierced Him, Jesus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Luke 23:34)

Dear Church, what does it mean to worship? It means to be at the scene of Our Lord’s death—to stand right next to Jesus with a contrite and broken heart, while He is pierced, slaughtered and slain. Worship also means to share in His resurrection with joy and thanksgiving.

Dear Church, worship is not a magical chant or a cheap play. It is not an interesting ceremony to be observed. It is to draw near to and meet Our Lord who died and rose for us. Therefore, worship means coming to the Lord with a broken, contrite, and thankful heart. This is a pleasing aroma to God. This scent is the offering that God see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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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 1 ~ 9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 레위기입니다. 번제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 특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이 명령이 유효한지 질문하게 되는 본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초대교회 교인들도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제사에서 자유롭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넘어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유일하고도 유효한 제사의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께 드릴 제사나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를 무시하고 지내도 될까요?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역시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을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다섯 가지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하나인 ‘번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번제는 희생제물 전부를 태우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계약을 맺는 제사가 바로 번제입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다양한 구약의 제사들과 함께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제사장들은 번제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하나님이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는지, 어떤 예배를 구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레위기 1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크게 세 종류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의 종류는 3절, 10절, 14절에 등장합니다. 먼저 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그리고 10절입니다.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14절입니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하나님은 번제를 제물로 드릴 때, 소를 바치거나, 양이나 염소를 바치거나, 혹은 새를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물의 크기를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격도 큰 차이가 났을 것입니다. 소 또는 새입니다. 심지어 새는 산비둘기입니다. 어디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왜 이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에 또 다른 단서를 붙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를 바치든, 양과 염소를 바치든, 새를 바치든, 모두 번제로 받아주겠다.”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나아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도 부르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초청입니다.
믿음이 약해 하나님께 큰 것을 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하나님께 너그럽게 드리길 원치 않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소를 바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를 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의 종류를 따지지 않으시고, 새든지 소든지, 그 어떤 것도 제물로 받으시며 용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마음이 가난하든지, 믿음이 가난하든지, 경제적으로 가난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에 상관없이 당신께 나오는 자들을 받으시겠다고 오늘 본문을 통해 표명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 자신이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리는 절차는 어떻습니까? 소와 양, 새를 바치는 과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정신만큼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를 제물로 바치는 절차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조금 더 주어를 명료하게 밝히고 있는 새번역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절의 말씀입니다.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여라. (레위기 1:3, 새번역)

이 말씀에서부터 번제 드리는 절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선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 곧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막 앞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제사 드리는 장소를 지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면 성막 가까이 나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물을 가진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직접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만 보내서는 안 됩니다. 다른 것만 보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 전에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가 거쳐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4절에 나타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레위기 1:4, 새번역)

두 번째로 예배자는 자신이 가져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제사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킵니다. 즉 “내가 죽어야 할 사람인데, 네가 죽는구나. 네가 죽어야겠구나.” 하고 자신의 죄책을 희생제물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매우 중요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레위기 1:5, 새번역)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성막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막의 뜰은 가로와 세로가 약 100규빗, 너비는 50규빗입니다. 오늘날 수치로 환산하면, 약 45미터 길이에 23미터 정도 되는 너비의 뜰입니다. 뜰 안에는 성막, 즉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성막의 길이는 13미터 정도며, 성막을 둘러싸고 좌우에 여백이 있어야 하므로, 아마 번제단은 성막 뜰 중앙쯤에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위에서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수송아지를 잡아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소를 직접 살해하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라는 말씀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배자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사람은 예배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포로기 이후에는 레위인들에 의해 제사가 대신 드려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예배자들이 적극적으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배자는 예배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해야 하는 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레위기 1장 6절 이후의 말씀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우고, 그 불 위에 장작을 지피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이, 고기 저민 것과 그 머리와 기름기를 제단에서 불타는 장작 위에 벌여 놓아야 한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을 모두 제단 위에다 놓고 불살라야 한다. (레위기 1:6~9 중, 새번역)

이것이 절차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제사장이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요청하십니다.
첫째, 제물을 회막 어귀까지 끌고 와야만 합니다. 둘째, 제물의 머리에 손수 안수해야 합니다. 셋째, 제물을 직접 살해, 곧 죽여야 합니다. 넷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아야 합니다. 다섯째,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제사장에게 건네줘야 합니다. 모든 소를 잡는 제사의 과정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물의 피를 받아서 제단 사방에 뿌리는 일입니다. 제단에 불을 피워놓고 있다가 제물을 씻어 올려주면 그것을 올려놓는 일을 합니다. 장작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을 태우는 일을 제사장이 합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을 제사장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배자,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제사 드리는 자의 상황을 오늘 우리 예배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드릴 때 그저 방관적으로 구경하듯이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 절차는 목사님이나 예배 인도자나 혹은 기도자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는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찬양과 기도, 말씀과 봉헌, 이 모든 순서에 적극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탐내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은 번제에 대한 절차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9 중)

이 말씀의 뜻은 ‘번제는 불로 드리는 제사인데, 이렇게 번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으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피의 냄새를 맡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고대 설화 중에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ic)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홍수를 피한 ‘우트나피쉬팀’이라는 분이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 수많은 신이 파리 떼처럼 몰려왔다는 기사가 이어집니다. 이 내용이 전하는 바는 ‘인간에게는 적대적이면서도 제물이 타는 냄새에는 파리 떼처럼 달려드는 저급한 신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이 구절은 자칫, 하나님을 고기 냄새를 탐하는 저급하고 배고파하는 신으로 폄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러한 하나님이실까? 고대 근동의 그러저러한 신들과 같은 종류의 하나님에 불과하신 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제사, 곧 이 번제와 같은 제사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제물이 타는 냄새나 피의 냄새를 원하시는 게 아님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냄새에 탐닉하여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저급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는 그와는 전혀 다른 냄새입니다.

희생제물을 향한 비통함과 침통함을 아는 자가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성막에서 제사 드리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성막의 뜰은 흰색 세마포로 싸여 있습니다. 성막으로 들어오는 문은 약 9미터입니다. 그곳에는 기둥이 넷 있습니다. 휘장은 청색과 자색과 홍색 실로 수놓아진 천으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 안에 번제단이 놓여 있습니다.
기둥을 통과하고, 휘장을 통과하여, 소를 몰고 성막 뜰 안으로 제사 드리는 사람이 들어갑니다. 가로와 세로가 2.3미터, 높이는 1.3미터인 번제단이 보입니다. 번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동으로 된 뿔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늘 피가 묻어 있었기에, 여전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코뿔소의 뿔에 받힌 동물의 내장에서 피가 흘러나오듯이 동으로 된 뿔에서 피가 흐릅니다. 그야말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제단입니다.
제물을 드리려는 사람이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분위기는 도살장과 같습니다. 안수 기도를 하며 소와 눈이 마주칩니다. 소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운명인 줄 알았는지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네가 대신 죽는구나. 참으로 잔인하지만, 내가 살아야 하겠기에….” 그렇게 되뇌면서 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소를 단단히 묶습니다. 이후 소의 머리 부분으로 다가갑니다. 소의 목에 칼을 깊숙이 꽂습니다. 피가 살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아래에는 대야가 있습니다. 동으로 만든 대야, 그곳으로 피가 흘러내립니다.
소는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가, 몇 번을 움직이다가 그만 깊은 잠이 듭니다. 피는 계속 흘러내립니다. 제사장은 대야에서 피를 손에 묻히고는 번제단의 네 뿔에 바릅니다. 또 다른 피입니다. 앞서 죽었던 소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제단에 또 다른 소의 피가 발라집니다. 그리고 피가 뿌려집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아마도 제사 드리는 이가 현장에서 이렇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도 무거운 부담감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지는 장면은 늘 이렇게 참혹합니다.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피가 튀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피가 새하얀 휘장에 묻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의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순간, 제사장들이 가져가 불에 넣고 태워버립니다.
대야에 받아진 피는 제단 위에 부어집니다. 제단은 밑바닥이 없습니다. 그냥 땅입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피를 아마 제단에 있던 불이 다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피는 땅으로 스며들어 갔겠지요. 또 다른 소의 피가 그렇게 또 땅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소의 피가 또다시 땅으로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온통 피 냄새가 진동하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옆에서는 또 다른 소가 죽어갑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또 다른 소가 들어옵니다.
이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예배자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 마음이 느껴지면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침통함,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희생되는 소에 대한 미안함, 자신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 나가는 소에 대한 비통함….
예배자는 소가 죽어 나가는 모습, 피 흘리며 불태워지는 순간을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죽어 나가고, 자신이 피 흘려지고, 자신이 불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치 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돌아가듯이, 모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모두 다 태우고, 자신만이 살아서 회막 문을 나섭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마음의 냄새’를 올려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번제의 절차 속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번제는 절차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들여다보고, 내가 그 자리에서 제사 드리는 자가 된다면, 그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자신을 죽이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예배입니다. 자신을 조각내는 예배입니다. 제물과 함께 타들어 가는 예배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며 애통해하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자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6~17)

우리는 한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단번에 유효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소로 몸소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그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 올라서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고, 모든 피를 다 흘리시며 물까지 쏟아 운명하셨습니다. 그분의 피는 갈보리 언덕의 땅이 받아 마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주신 제사, 번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공하신 제사입니다.
그 자리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 곁에 섰습니다. 어떤 이는 창으로 예수님을 찔렀고, 어떤 이는 주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고, 어떤 이는 주님을 부인했고, 어떤 이는 주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고난당하심, 곧 그분의 죽음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함께 극명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예배는 주술적인 놀이가 아닙니다. 예배는 값싼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예배는 관찰할 만한 흥미로운 예식이 아닙니다. ‘마음의 냄새’입니다. 향기로운 냄새,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맡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향해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의 냄새를, 향기로운 그 냄새를 올려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19년 9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향기로운 냄새, 번제를 드리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11장, 25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레1:1-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 본문은 구약의 제사 중에서 첫 번째 제산인 번제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제사의 구체적인 절차입니다. 오늘날 구약성서가 말하는 제사를 직접 드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구약제사를 대체하는 유효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레위기의 번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어떠한 자세로 예배해야 하는지 번제를 통하여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먼저 번제의 제물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3, 10, 13절). 하나님께서는 “번제물로 소, 양이나 염소, 혹은 새를 제물로 받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물의 크기나 가치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배려이며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절차는 어떻습니까? ① 예배자는 하나님께 예배(제사) 드리기 위해 번제물을 회막 문 앞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3). ② 예배자는 자신이 가져온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4). ③ 제물을 직접 잡아서 죽여야 합니다(5). ④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아야 합니다(6). ⑤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9절). 그렇다면 제사장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물의 피를 받아서 제단의 사방에 피를 뿌리고, 모든 제물을 태우는 일을 합니다. 이것을 예배 상황에 적용한다면 예배자는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번제에 대한 절차를 마무리 하면서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번제의 제사 자체(기름이 타는 냄새나 혹은 피의 냄새)를 원하지 않으십니다(사1:1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예배)는 번제물(자신)을 조각내고 온전하게 바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냄새를 원하십니다. 이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시51:16-17). 번제는 구약의 제사로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단번에 유효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참 제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가까이서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향기로운 냄새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냄새를 제물로 받기 원하십니다.

나누기

1.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자입니까? 아니면 수동적인 참여자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온전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참 예배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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