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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멋지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멋진 이미지, 아름다운 이미지, 매력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면 어떤 이미지가 잘 어울릴까요? 성경에도 여러 가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생수의 이미지도 있고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가장 적절한 이미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잔치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돌잔치를 해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를 해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의 환갑잔치, 진갑잔치를 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잔치는 즐거움의 표시입니다. 함께 교제하고 기뻐하는 현장이 바로 잔치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잔치의 종교입니다.
만약 기독교의 이미지를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세례요한에게서 가지고 왔다면 조금은 어두웠을 것입니다. 절제와 회개와 심판의 이미지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미지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혼인집의 신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기에 예수님을 미워했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먹고 마시는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미지도 잔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잔치와도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잔치에는 반드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배드리는 것이 잔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기쁨이 가득한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능력, 생명과 구원, 평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적인 잔치를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셨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살고 계셨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약 5~6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이미 그 잔치 집에 가 계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는 마리아 친척의 자녀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는 여기에서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혼인잔치의 즐거움의 표시인 포도주가 다 떨어졌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약 일주일 정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음식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잔치의 흥겨움을 가져다줄 포도주가 바닥이 났습니다. 아마 잔치를 베푼 사람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혹스러움을 가진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위기의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챘습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위기가 생기면 누가 가장 먼저 알까요? 그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래서 애태우고 염려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는 단순히 초청받은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 잔치 자리의 주인이었습니다. 이 위기 상황을 파악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한복음 2:3)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는 말이 쏟아집니다. 마리아의 이 말은 불평의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간청의 말이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명백하지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불평 같기도 하고 간청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불평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 2:4)
예수님은 어머니의 말을 불평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만약 불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마리아의 신앙을 보다 성숙시키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불평이란 삶을 살면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불평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문제점을 잘 지적합니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디가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불평한다는 것은 위기와 위협이 되는 문제에 쉽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불평한다는 것은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성장하려고 한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불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 게으름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가 갖고 있는 연약함에 대해서 불평할 줄 알아야 스스로 변화되고 그것을 통해서 더 큰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좋은 면에서 보면 거룩한 불만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쌓아왔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내 보낼 수 있는 것도 불평이 갖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불평을 반복하면, 이 불평은 거대한 부정적인 힘으로 내게 다가오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대하지 않으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불평은 상대방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고갈시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불평이 갖는 속성입니다.
불평을 한두 번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불평하는 것은 그 속에 심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는 마음이 없거나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불평을 반복해서 토해냅니다. 그리고 불평은 하다보면 쉽게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방 매일 푸념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맙니다.
불평을 신뢰로 바꾼 마리아로 인해 혼인 잔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불평으로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아 너 왜 가만히 있니? 이렇게 문제가 생겼는데 나 혼자 걱정해야 되겠니?” 하며 아들에게 탄식하면서 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냉정하게 끊었습니다. “이건 어머니의 일입니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마음을 바꿉니다. 어머니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신앙과 신뢰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한복음 2:5)
그녀는 다시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었던 불평이 다시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내 아들 예수를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이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리아의 신뢰와 간청 때문에 예수님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 자리를 더 멋지고 풍요롭게 만드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행복한 자리로 바꿔놓으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 집은 예수님이 있었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플러스의 사람, 곱하기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공동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저 사람이 있음으로 이 공동체가 축복받고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괜히 기분이 나쁜 사람, 손해를 볼 것 같은 사람, 화를 입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히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유형을 나눌 때 수학의 공식처럼 플러스, 마이너스, 곱하기, 나누기의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플러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가 나에게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뿌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는 플러스의 사람을 사귀어야합니다. 아니, 우리도 플러스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이너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내 것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거기에다 짐 하나를 더 얹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플러스 인생을 가진 사람의 복입니다.
세 번째 곱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중하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남을 위해서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 내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바칩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남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나누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순한 마이너스가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머릿속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합니다.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해치고 사람들의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피하십시오. 멀리가 계십시오. 이들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때로는 플러스의 사람이 될 때가 있고, 마이너스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심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곱하기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나누기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플러스의 인물처럼 보여 집니다. 그녀는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염려했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축복을 지속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실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지혜요 신앙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곱하기를 한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냉정하게 거절하셨지만, 결국 참된 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복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내 속에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와 맡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물이 변화된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한복음 2:10)
처음에는 좋았다가 점점 나빠지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 좋은 것으로 시작했다가 더 넘치게 좋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위기가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 불평의 마음이 생깁니다. 한두 번은 불평하셔도 괜찮습니다. 친구에게 불평할 수 있고, 가까운 이웃에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십시오. 그 이후의 불평은 하나님께 하십시오. 하나님에게 마음껏 토로하십시오. ‘나를 왜 이렇게 대하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습니까? 왜 내게 이런 고난과 질병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 토해내고 하나님께 불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불평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변하여 고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움직이십니다. 건강의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주십니다. 직장과 사업의 포도주가 바닥나고 내 인간관계의 포도주가 바닥이 났을 때에도, 인생을 사는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바닥이 났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내 곁에 오시면 이것이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생명의 역사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소중한 축복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주신 것을 다시 기억하면서 내게 부족한 것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주님께서 바닥난 인생을 다시 아귀까지 채우시고 우리 인생에 새로운 축복과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달려 나가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 1 ~ 11
1
11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멋지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멋진 이미지, 아름다운 이미지, 매력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면 어떤 이미지가 잘 어울릴까요? 성경에도 여러 가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생수의 이미지도 있고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가장 적절한 이미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잔치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돌잔치를 해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혼인 잔치를 해보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의 환갑잔치, 진갑잔치를 해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잔치는 즐거움의 표시입니다. 함께 교제하고 기뻐하는 현장이 바로 잔치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잔치의 종교입니다.
만약 기독교의 이미지를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세례요한에게서 가지고 왔다면 조금은 어두웠을 것입니다. 절제와 회개와 심판의 이미지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미지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혼인집의 신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기에 예수님을 미워했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먹고 마시는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이미지도 잔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잔치와도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반드시 있어야할 것이 무엇일까요? 잔치에는 반드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배드리는 것이 잔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드릴 때 우리에게 기쁨이 가득한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능력, 생명과 구원, 평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영적인 잔치를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셨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이 살고 계셨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약 5~6km 떨어진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이미 그 잔치 집에 가 계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는 마리아 친척의 자녀의 결혼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는 여기에서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혼인잔치의 즐거움의 표시인 포도주가 다 떨어졌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약 일주일 정도 지속됩니다. 그런데 음식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잔치의 흥겨움을 가져다줄 포도주가 바닥이 났습니다. 아마 잔치를 베푼 사람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당혹스러움을 가진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위기의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챘습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위기가 생기면 누가 가장 먼저 알까요? 그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그래서 애태우고 염려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는 단순히 초청받은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이 잔치 자리의 주인이었습니다. 이 위기 상황을 파악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한복음 2:3)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는 말이 쏟아집니다. 마리아의 이 말은 불평의 말이었을까요 아니면 간청의 말이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명백하지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불평 같기도 하고 간청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그녀가 불평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 2:4)
예수님은 어머니의 말을 불평으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만약 불평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마리아의 신앙을 보다 성숙시키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불평이란 삶을 살면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불평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문제점을 잘 지적합니다.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디가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불평한다는 것은 위기와 위협이 되는 문제에 쉽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불평한다는 것은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성장하려고 한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불평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 게으름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가 갖고 있는 연약함에 대해서 불평할 줄 알아야 스스로 변화되고 그것을 통해서 더 큰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좋은 면에서 보면 거룩한 불만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쌓아왔던 스트레스를 한방에 내 보낼 수 있는 것도 불평이 갖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불평을 반복하면, 이 불평은 거대한 부정적인 힘으로 내게 다가오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대하지 않으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불평은 상대방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고갈시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불평이 갖는 속성입니다.
불평을 한두 번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불평하는 것은 그 속에 심리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는 마음이 없거나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불평을 반복해서 토해냅니다. 그리고 불평은 하다보면 쉽게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방 매일 푸념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맙니다.
불평을 신뢰로 바꾼 마리아로 인해 혼인 잔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불평으로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들아 너 왜 가만히 있니? 이렇게 문제가 생겼는데 나 혼자 걱정해야 되겠니?” 하며 아들에게 탄식하면서 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냉정하게 끊었습니다. “이건 어머니의 일입니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마음을 바꿉니다. 어머니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신앙과 신뢰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요한복음 2:5)
그녀는 다시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갖고 있었던 불평이 다시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내 아들 예수를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이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마리아의 신뢰와 간청 때문에 예수님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 자리를 더 멋지고 풍요롭게 만드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행복한 자리로 바꿔놓으셨습니다. 이 혼인 잔치 집은 예수님이 있었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플러스의 사람, 곱하기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공동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저 사람이 있음으로 이 공동체가 축복받고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괜히 기분이 나쁜 사람, 손해를 볼 것 같은 사람, 화를 입을 것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괜히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유형을 나눌 때 수학의 공식처럼 플러스, 마이너스, 곱하기, 나누기의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플러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가 나에게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뿌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는 플러스의 사람을 사귀어야합니다. 아니, 우리도 플러스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마이너스(-)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내 것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거기에다 짐 하나를 더 얹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플러스 인생을 가진 사람의 복입니다.
세 번째 곱하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중하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남을 위해서 삶을 풍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남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 내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바칩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쏟아 부으면서 남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나누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단순한 마이너스가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머릿속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합니다.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해치고 사람들의 인생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피하십시오. 멀리가 계십시오. 이들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때로는 플러스의 사람이 될 때가 있고, 마이너스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열심을 가지고 남을 도와주는 곱하기의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나누기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플러스의 인물처럼 보여 집니다. 그녀는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염려했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축복을 지속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실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지혜요 신앙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곱하기를 한 사람도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냉정하게 거절하셨지만, 결국 참된 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복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길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내 속에 있는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아와 맡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문제를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물이 변화된 포도주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한복음 2:10)
처음에는 좋았다가 점점 나빠지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 좋은 것으로 시작했다가 더 넘치게 좋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위기가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 불평의 마음이 생깁니다. 한두 번은 불평하셔도 괜찮습니다. 친구에게 불평할 수 있고, 가까운 이웃에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십시오. 그 이후의 불평은 하나님께 하십시오. 하나님에게 마음껏 토로하십시오. ‘나를 왜 이렇게 대하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습니까? 왜 내게 이런 고난과 질병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 토해내고 하나님께 불평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불평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변하여 고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움직이십니다. 건강의 포도주가 바닥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건강을 주십니다. 직장과 사업의 포도주가 바닥나고 내 인간관계의 포도주가 바닥이 났을 때에도, 인생을 사는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바닥이 났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내 곁에 오시면 이것이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생명의 역사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소중한 축복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주신 것을 다시 기억하면서 내게 부족한 것을 주님께 아뢰십시오. 주님께서 바닥난 인생을 다시 아귀까지 채우시고 우리 인생에 새로운 축복과 생명의 역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달려 나가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