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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불평 사이에서

시편 50: 22 ~ 23

김지철 목사

2015.11.15

누구에게나 불안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인기 개그맨이 방송 활동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불안장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불안장애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때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불안한 감정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질환입니다. 그런 증상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벡(Beck)이라는 사람이 총 21개의 문항으로 자가진단 불안척도(Beck Anxiety Inventory, BAI)를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가, 몸이 찌뿌둥하고 아픈가 등 마음에 대한 질문과 몸에 대한 질문이 함께 있습니다. 불안의 증상으로는 사소한 일에도 지나치게 염려하고 겁을 먹는다, 안절부절 못해서 주위가 산만하다, 소화가 잘 안되고 불면증이 있다 등입니다.
그런데 이 문항들을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쉽게 나타나는 증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제게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증상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두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지속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슬픔이나 불행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사와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몸은 상하고 마음은 찢겨져서 그냥 짐승처럼 소리치고 싶을 뿐입니다. 화가 나고 때로는 누군가가 밉습니다. ‘왜 내게 이런 불행과 슬픔이 다가오는가!’ 그저 탄식만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낙심하게 됩니다. 화목하던 가정이 깨지게 되면 슬픔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면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우리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과 분노가 지속되게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멈추도록 명령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슬픔과 분노를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픔과 분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감사와 불평,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불평쟁이’입니다. 감사하는 존재라고 하기에는 매일 불평을 합니다. 걸핏하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늘 불평만 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론 감사의 정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감사와 불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감사와 불평 가운데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인생살이의 걱정과 근심입니다.
내 앞에 마치 장애물처럼 놓여 있는 거대한 산을 보며 ‘저 높고 험한 산을 넘으면 무지개 뜨는 아름다운 동산이 나를 맞이할 거야. 그때 쉬어야지’ 하며 산을 넘었는데, 넘고 보니 그곳에는 무지개 뜨는 아름다운 동산이 아니라 이전 것보다 더 거대하고 험악한 산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이 자꾸만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근심과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야 근심과 걱정도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있다는 것은 걱정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앞으로 만날 염려와 근심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면서 걱정과 근심을 피하려고 하면 도망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피하기보다 오히려 걱정과 근심에 부딪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걱정과 근심을 내면에 하나하나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것이 어느 순간 나를 붙잡기 시작해 불안이 됩니다. 불안이 되면 자긍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져 스스로를 자신 안에 가두게 됩니다. 그리고는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잘나가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던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끊어버리는 것이 이러한 경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걱정과 근심이 밖으로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평과 분노입니다. 거기에는 나를 정당하게 대해 주지 않은, 내 존재의 가치를 무시한 누군가에 대한 막연한 분노도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일종의 습관화된 자기를 향한 불평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걱정과 근심이 밖으로 터지면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미움의 장벽들을 쌓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미움의 장벽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이 절제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사나워지고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현장을 목격하며 함께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똑같은 위기 속에 있지만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무겁고 힘든 짐을 지셨구나.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서 참 억울한 인생을 사셨구나.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통의 자리에 계셨구나. 그런데 그것이 나를 이 분노와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염려와 근심과 불평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불안과 불평에서부터 벗어나 변화될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짐과 네 슬픔을 대신 질 테니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과 안식을 주겠다”고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의 짐’이란 마음의 근심과 걱정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포함이 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이 마치 율법이 되어 우리를 얽어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억압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네 인생이 얼마나 억압을 당했느냐. 질병 때문에 인생에 기쁨도 없고 자존감마저 다 무너지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만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죄악 가운데 죄책감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종도 사탄의 종도 아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의 친구다”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인간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를 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불평 속에서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편 50:22)

결론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너희 양심도 말하고 자연 만물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말하고 있는데, 네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너희 마음속에 두지 않는 순간 너희의 영혼이 찢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감사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미련하게 됩니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생각이 미련해지고 어두워지면 마음에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감사가 있습니까? 살아있는 것이 감사합니까? 내 옆에 가족이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까? 예수를 믿은 것이 감사합니까? 내게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까? 이 감사가 있으면 신앙이 바로 선 사람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내 영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장로교 전통에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신학적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수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떻게 자녀에게 영광을 받을까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를 이만큼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 한마디면 아버지 어머니는 가슴이 벅찹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을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을 누릴 수가 없고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끔찍할 거야’ 하고 자기 암시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불평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스로를 자기감정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불평 속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해?’ 이것이 불평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불평의 순간, 자기감정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맙니다. ‘내게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갔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고 스스로를 무능력자로, 형편없는 존재로 비하하게 됩니다.
불평이라는 감정에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최고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노예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노예시대에는 노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인은 강제로 이별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주인을 배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통한 자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인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주인이 짝을 지어 주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감사가 살아납니다.

감사하게 되면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자유자가 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기뻐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감정표현입니다.
자유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사랑하십시오. 사랑해야 자유가 생깁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줄 알아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과 감사 안에 자유와 자발성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한 가지만 결심하면 됩니다.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라,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리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자녀를 키워 보셨습니까? 자녀를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종처럼 키우셨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무조건 “예!” 하는 인간으로 키우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자녀가 아니라 종입니다. 자녀라면 때로는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그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종이 아닌 자유자로 키우는 것처럼 하나님도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유자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 저항하는 말을 하는 것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이 위대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 감사를 다짐합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감정의 주인 역할을 하라고 말입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면,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감사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근심과 염려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감사의 기도가 우리 입과 마음속에 담길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23절 마지막에 나타나듯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탐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헌금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물 때문이 아니라 예물 속에 내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인지를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인 건강지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배를 잘 드리는가, 새벽에 기도하는가, 말씀을 읽는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예수님을 전도하는가 등이 건강지수의 한 지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내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내 영혼이 감사하고 있는가? 내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감사하는가?’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일에 교회를 가고 때로 새벽기도도 하고 전도의 현장에도 있는데, 내 영혼에 감사가 사라졌다면 영적으로 병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감사주일입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평생 감사할 것을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을 감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시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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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0: 22 ~ 23

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구에게나 불안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인기 개그맨이 방송 활동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불안장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불안장애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때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불안한 감정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질환입니다. 그런 증상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벡(Beck)이라는 사람이 총 21개의 문항으로 자가진단 불안척도(Beck Anxiety Inventory, BAI)를 만들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가, 몸이 찌뿌둥하고 아픈가 등 마음에 대한 질문과 몸에 대한 질문이 함께 있습니다. 불안의 증상으로는 사소한 일에도 지나치게 염려하고 겁을 먹는다, 안절부절 못해서 주위가 산만하다, 소화가 잘 안되고 불면증이 있다 등입니다.
그런데 이 문항들을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쉽게 나타나는 증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제게도 종종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증상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한두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지속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슬픔이나 불행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사와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몸은 상하고 마음은 찢겨져서 그냥 짐승처럼 소리치고 싶을 뿐입니다. 화가 나고 때로는 누군가가 밉습니다. ‘왜 내게 이런 불행과 슬픔이 다가오는가!’ 그저 탄식만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낙심하게 됩니다. 화목하던 가정이 깨지게 되면 슬픔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면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우리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과 분노가 지속되게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멈추도록 명령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슬픔과 분노를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픔과 분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감사와 불평,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불평쟁이’입니다. 감사하는 존재라고 하기에는 매일 불평을 합니다. 걸핏하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늘 불평만 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으론 감사의 정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감사와 불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감사와 불평 가운데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인생살이의 걱정과 근심입니다.
내 앞에 마치 장애물처럼 놓여 있는 거대한 산을 보며 ‘저 높고 험한 산을 넘으면 무지개 뜨는 아름다운 동산이 나를 맞이할 거야. 그때 쉬어야지’ 하며 산을 넘었는데, 넘고 보니 그곳에는 무지개 뜨는 아름다운 동산이 아니라 이전 것보다 더 거대하고 험악한 산이 놓여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걱정과 근심이 자꾸만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근심과 걱정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야 근심과 걱정도 끝나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있다는 것은 걱정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앞으로 만날 염려와 근심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면서 걱정과 근심을 피하려고 하면 도망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피하기보다 오히려 걱정과 근심에 부딪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걱정과 근심을 내면에 하나하나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것이 어느 순간 나를 붙잡기 시작해 불안이 됩니다. 불안이 되면 자긍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져 스스로를 자신 안에 가두게 됩니다. 그리고는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잘나가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던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끊어버리는 것이 이러한 경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걱정과 근심이 밖으로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평과 분노입니다. 거기에는 나를 정당하게 대해 주지 않은, 내 존재의 가치를 무시한 누군가에 대한 막연한 분노도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일종의 습관화된 자기를 향한 불평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걱정과 근심이 밖으로 터지면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미움의 장벽들을 쌓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미움의 장벽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계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이 절제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사나워지고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현장을 목격하며 함께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똑같은 위기 속에 있지만 주님이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훨씬 더 무겁고 힘든 짐을 지셨구나.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고난의 자리에서 참 억울한 인생을 사셨구나. 표현할 수 없는 큰 고통의 자리에 계셨구나. 그런데 그것이 나를 이 분노와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염려와 근심과 불평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불안과 불평에서부터 벗어나 변화될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짐과 네 슬픔을 대신 질 테니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과 안식을 주겠다”고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의 짐’이란 마음의 근심과 걱정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도 포함이 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이 마치 율법이 되어 우리를 얽어매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신앙이 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억압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네 인생이 얼마나 억압을 당했느냐. 질병 때문에 인생에 기쁨도 없고 자존감마저 다 무너지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을 만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죄악 가운데 죄책감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종도 사탄의 종도 아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요, 나의 친구다”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인간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를 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불평 속에서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편 50:22)

결론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너희 양심도 말하고 자연 만물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말하고 있는데, 네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너희 마음속에 두지 않는 순간 너희의 영혼이 찢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감사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미련하게 됩니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생각이 미련해지고 어두워지면 마음에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감사가 있습니까? 살아있는 것이 감사합니까? 내 옆에 가족이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까? 예수를 믿은 것이 감사합니까? 내게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까? 이 감사가 있으면 신앙이 바로 선 사람입니다. 감사가 있으면 내 영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장로교 전통에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이라는 신학적 목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수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떻게 자녀에게 영광을 받을까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를 이만큼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 한마디면 아버지 어머니는 가슴이 벅찹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을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을 누릴 수가 없고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끔찍할 거야’ 하고 자기 암시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불평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스로를 자기감정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불평 속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해?’ 이것이 불평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불평의 순간, 자기감정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맙니다. ‘내게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갔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하고 스스로를 무능력자로, 형편없는 존재로 비하하게 됩니다.
불평이라는 감정에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을 할 줄 아는 최고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노예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노예시대에는 노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인은 강제로 이별을 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주인을 배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통한 자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주인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는 주인이 짝을 지어 주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감사가 살아납니다.

감사하게 되면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할 줄 알게 되면 자유자가 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인간을 기뻐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감정표현입니다.
자유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사랑하십시오. 사랑해야 자유가 생깁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감사할 줄 알아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랑과 감사 안에 자유와 자발성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한 가지만 결심하면 됩니다.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라,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리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자녀를 키워 보셨습니까? 자녀를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종처럼 키우셨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무조건 “예!” 하는 인간으로 키우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자녀가 아니라 종입니다. 자녀라면 때로는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그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종이 아닌 자유자로 키우는 것처럼 하나님도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유자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 저항하는 말을 하는 것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이 위대하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평생 감사를 다짐합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감정의 주인 역할을 하라고 말입니다.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면, 우리가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감사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근심과 염려가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까? 감사의 기도가 우리 입과 마음속에 담길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리고 23절 마지막에 나타나듯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을 탐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헌금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물 때문이 아니라 예물 속에 내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인지를 보시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인 건강지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배를 잘 드리는가, 새벽에 기도하는가, 말씀을 읽는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예수님을 전도하는가 등이 건강지수의 한 지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내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내 영혼이 감사하고 있는가? 내 옆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감사하는가?’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일에 교회를 가고 때로 새벽기도도 하고 전도의 현장에도 있는데, 내 영혼에 감사가 사라졌다면 영적으로 병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감사주일입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평생 감사할 것을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을 감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시는 우리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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