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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예찬하게 됩니다
누구나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것이 연애할 때 가지는 감정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 싶은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연애편지를 써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 연인들은 긴 편지를 쓰기보다는 핸드폰으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쓴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멋진 수식어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쑥스러운 언어가 쓰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의 별이요, 나의 태양이요, 나의 심장, 나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덧붙이면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칭찬하고 예찬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예찬입니다. 멀리 떨어져있으면 그리워하고, 만나면 그를 높여 세워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 속에는 노래와 시와 예찬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최고의 연인인 하나님께서 내 연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노래 중의 노래, 칭찬 중의 칭찬,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찬입니다. 우리는 ‘할렐루야’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찬양이라는 말에는 그를 높이고 인정하고 칭찬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높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높이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노래요, 찬송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노래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찬양이 없다면 아직 내속에 기쁨과 설렘,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가슴이 열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찬양 속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고, 애타는 사랑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찬양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성벽건축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제 완공된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성전과 성벽의 재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소원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벽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면서 마음껏 노래하자고 요청합니다. 신앙의 잔치, 찬양의 잔치, 예배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면서 행했던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느헤미야 12:27)
여기 보면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레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본래 이스라엘의 찬양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레위 사람들은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할 제목이 없었고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백성은 파멸 당했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에 그들이 감사하며 노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흩어진 그들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하자!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하자!”고 선포하면서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감사로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는 곡조와 가사, 찬양을 부르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찬양에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우리를 설레게 만들고 영적인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뛰놀게 하는 곡조를 찬양 속에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도 좋아하시지만 귀로 듣는 아름다움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보기에 아름답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를 만드시고 흠향하셨습니다.
작곡가 하이든(Haydn)은 ‘천지창조’라는 곡을 만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천지창조를 작곡했을 때보다 더 경건한 때는 없었다.” 그는 작곡을 하는 음악가로서 이 곡을 만들 때 가장 경건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그 작품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내 펜이 춤추며 뛰논다.” 그리고 그는 그의 곡 말미에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고백을 함께 써놓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작곡을 하는 음악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영혼이 뛰놀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감사한 일일까요?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혜의 역사를 감탄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우리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한 시간 남짓 예배를 드립니다. 만약 예배에서 찬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찬양을 빼면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자체가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자체가 내 안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찬양에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가사입니다. 찬양의 가사는 신앙고백이고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찬양했을 때 그들은 시편의 내용을 가사 삼아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가사 속에는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은혜의 도우심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찬양대가 찬양할 때 때로는 합창이기 때문에 가사가 잘 안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가사를 스크린에 함께 기록해놓습니다. 그 때 우리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서 ‘아! 저 찬양이 나의 찬양입니다. 저 찬양의 가사가 나의 기도입니다. 저 찬양의 가사가 나의 신앙고백입니다!’라고 함께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곡조와 가사가 함께 어우러져야 그 찬양이 살아있는 찬양이 됩니다. 그리고 찬양대가 그것을 나의 고백,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찬양이 살아 움직여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세 번째 중요한 요소는 찬양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찬양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느헤미야 12:30)
그들은 몸을 씻고 동물의 피를 뿌리며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거룩한 것이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찬양하는 레위사람도, 백성들도,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한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거짓과 허위가 있으면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께 다 토해내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이란 곡조와 가사를 통해 나의 신앙고백과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아 흠향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돌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찬양하면서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찬양대와 백성들을 함께 초청하여 성벽에 함께 오르자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찬양대와 백성들의 절반을 이끌고 함께 오른쪽 성벽 길을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반대편인 왼쪽 성벽 길로 갔습니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느헤미야 12:31)
성경은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보내 한 바퀴를 돌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합니다. 성벽을 지을 때 대적자들이 느헤미야를 비난하고 조롱했었습니다. “성벽을 저렇게 허술하게 지으면 어떻게 하는가! 여우가 올라가서 걸어도 무너질 것 같구나!” 그래서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들에게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려서 마침내 이처럼 귀한 성벽을 건축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건축한 성벽을 밟으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삶을 회상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는데, 흩어진 이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에 다시 모이게 하시고 다시 성벽을 짓고 다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영원히 찬양해야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헤미야 12:43)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들은 뜨거운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즐겁고 기쁜 것을 찾으려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고 감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의 예배를 위해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 속에 세상에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소망교회의 예배는 절제된 경건의 모습을 가진 예배입니다. 마치 장미송이가 막 터져서 만개하려는 순간, 그 아름다움이 절제된 순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절제가 너무 커서 기쁨이 억제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려는 것이 억제되고, 우리가 안에 있는 주를 향한 감격이 억제된다면, 그 절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절제만이 강조되면 그것은 죽은 예배, 죽은 찬양이 되고, 문자 속에 가두어진 예배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그 감격을 소리쳐 외쳤습니다. 예루살렘 밖까지 그 소리가 널리 퍼져 감사의 축제와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졌습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찬양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더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에 그 소리가 멀리 들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벽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들에게 무슨 사건이 있구나! 저들이 저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망하고 낙담하며 방황했던 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소식이 무엇일까?’ 이처럼 변화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뻐하는 모습이 그들의 눈과 귀에까지 선하게 비쳐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 평화와 풍요의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중에 소망교회를 모르는 분들은 없습니다. 아니,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소망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교회가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대통령이 배출됐기 때문에 자랑스럽습니까? 그것도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큰 자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랑,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랑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교회가 내 속에 있는 기쁨과 감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공동체라는 것을 세상에 자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바뀌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까? 내속에서 나를 억누르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유되었습니까? 죄책감 속에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던 것들이 죄 용서를 받은 기쁨으로 인하여 회복되었습니까? 그 외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소망교회와 성도들의 자랑스러움과 이 시대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영혼의 싫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권태감 속에서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기도 속에 싫증이 나를 붙잡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해도 입만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가 게으를 때 감사의 노래가 나오지 않습니다. 찬양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성벽을 봉헌할 때 찬양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를 완성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또 무엇이 우리를 찬양하지 못하게 합니까? 유혹이 나를 미혹하고, 사탄이 나를 어둠의 세력 속에 가둘 때 찬양이 사라집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세속적인 안락 속에 빠져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 찬양을 하려고 하니 내 마음에 찬양이 없는 것입니다. 내 속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데 하나님께 이것을 토해내지 않고 혼자 끙끙 앓을 때 내 속에 찬양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도 죄책감이 없고 스스로 뻔뻔해질 때 찬양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때, 내가 하나님의 복된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인 것을 확인할 때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사랑 없이는 찬양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생기듯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좋아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기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을 기뻐하면서 살아라!
인생을 즐거워하면서 살아라!
인생을 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에 이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12: 27 ~ 44
27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3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44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사랑을 하면 상대방을 예찬하게 됩니다
누구나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만나고 싶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은 것이 연애할 때 가지는 감정입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고 싶은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연애편지를 써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 연인들은 긴 편지를 쓰기보다는 핸드폰으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쓴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멋진 수식어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쑥스러운 언어가 쓰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의 별이요, 나의 태양이요, 나의 심장, 나의 기쁨입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덧붙이면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칭찬하고 예찬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예찬입니다. 멀리 떨어져있으면 그리워하고, 만나면 그를 높여 세워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 속에는 노래와 시와 예찬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연인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최고의 연인인 하나님께서 내 연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노래 중의 노래, 칭찬 중의 칭찬, 그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찬입니다. 우리는 ‘할렐루야’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찬양이라는 말에는 그를 높이고 인정하고 칭찬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높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높이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노래요, 찬송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 노래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찬양이 없다면 아직 내속에 기쁨과 설렘,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의 가슴이 열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찬양 속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고, 애타는 사랑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찬양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본문에서 느헤미야는 성벽건축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제 완공된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성전과 성벽의 재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소원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벽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면서 마음껏 노래하자고 요청합니다. 신앙의 잔치, 찬양의 잔치, 예배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성벽을 봉헌하면서 행했던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느헤미야 12:27)
여기 보면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레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본래 이스라엘의 찬양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레위 사람들은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할 제목이 없었고 감사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백성은 파멸 당했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으며, 백성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에 그들이 감사하며 노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흩어진 그들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하자!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하자!”고 선포하면서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감사로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찬양을 부를 때에는 곡조와 가사, 찬양을 부르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찬양에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우리를 설레게 만들고 영적인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뛰놀게 하는 곡조를 찬양 속에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도 좋아하시지만 귀로 듣는 아름다움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보기에 아름답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를 만드시고 흠향하셨습니다.
작곡가 하이든(Haydn)은 ‘천지창조’라는 곡을 만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천지창조를 작곡했을 때보다 더 경건한 때는 없었다.” 그는 작곡을 하는 음악가로서 이 곡을 만들 때 가장 경건했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그 작품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내 펜이 춤추며 뛰논다.” 그리고 그는 그의 곡 말미에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고백을 함께 써놓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작곡을 하는 음악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영혼이 뛰놀며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멋지고 감사한 일일까요?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혜의 역사를 감탄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우리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한 시간 남짓 예배를 드립니다. 만약 예배에서 찬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찬양을 빼면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자체가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자체가 내 안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찬양에 중요한 두 번째 요소는 가사입니다. 찬양의 가사는 신앙고백이고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찬양했을 때 그들은 시편의 내용을 가사 삼아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가사 속에는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 은혜의 도우심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찬양대가 찬양할 때 때로는 합창이기 때문에 가사가 잘 안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가사를 스크린에 함께 기록해놓습니다. 그 때 우리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서 ‘아! 저 찬양이 나의 찬양입니다. 저 찬양의 가사가 나의 기도입니다. 저 찬양의 가사가 나의 신앙고백입니다!’라고 함께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곡조와 가사가 함께 어우러져야 그 찬양이 살아있는 찬양이 됩니다. 그리고 찬양대가 그것을 나의 고백, 나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찬양이 살아 움직여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세 번째 중요한 요소는 찬양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찬양을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느헤미야 12:30)
그들은 몸을 씻고 동물의 피를 뿌리며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거룩한 것이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찬양하는 레위사람도, 백성들도, 성문과 성벽도 정결하게 한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속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 거짓과 허위가 있으면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님께 다 토해내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이란 곡조와 가사를 통해 나의 신앙고백과 기도로써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아 흠향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돌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찬양하면서 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찬양대와 백성들을 함께 초청하여 성벽에 함께 오르자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찬양대와 백성들의 절반을 이끌고 함께 오른쪽 성벽 길을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반대편인 왼쪽 성벽 길로 갔습니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느헤미야 12:31)
성경은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오른쪽과 왼쪽으로 보내 한 바퀴를 돌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합니다. 성벽을 지을 때 대적자들이 느헤미야를 비난하고 조롱했었습니다. “성벽을 저렇게 허술하게 지으면 어떻게 하는가! 여우가 올라가서 걸어도 무너질 것 같구나!” 그래서 느헤미야는 모든 백성들에게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려서 마침내 이처럼 귀한 성벽을 건축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건축한 성벽을 밟으면서 그동안 지나왔던 삶을 회상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는데, 흩어진 이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에 다시 모이게 하시고 다시 성벽을 짓고 다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영원히 찬양해야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찬양하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느헤미야 12:43)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들은 뜨거운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무리 즐겁고 기쁜 것을 찾으려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즐거움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고 감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의 예배를 위해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 속에 세상에 주지 못하는 기쁨,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적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소망교회의 예배는 절제된 경건의 모습을 가진 예배입니다. 마치 장미송이가 막 터져서 만개하려는 순간, 그 아름다움이 절제된 순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절제가 너무 커서 기쁨이 억제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려는 것이 억제되고, 우리가 안에 있는 주를 향한 감격이 억제된다면, 그 절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절제만이 강조되면 그것은 죽은 예배, 죽은 찬양이 되고, 문자 속에 가두어진 예배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랍게도 하나님 앞에 그 감격을 소리쳐 외쳤습니다. 예루살렘 밖까지 그 소리가 널리 퍼져 감사의 축제와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모습이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어졌습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찬양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나 더 명백한 것이 있습니다.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에 그 소리가 멀리 들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벽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들에게 무슨 사건이 있구나! 저들이 저렇게 변화된 이유가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망하고 낙담하며 방황했던 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소식이 무엇일까?’ 이처럼 변화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뻐하는 모습이 그들의 눈과 귀에까지 선하게 비쳐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민족에게 자유와 민주, 평화와 풍요의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려야합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중에 소망교회를 모르는 분들은 없습니다. 아니, 성도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소망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교회가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대통령이 배출됐기 때문에 자랑스럽습니까? 그것도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큰 자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랑,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랑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교회가 내 속에 있는 기쁨과 감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공동체라는 것을 세상에 자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바뀌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까? 내속에서 나를 억누르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치유되었습니까? 죄책감 속에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던 것들이 죄 용서를 받은 기쁨으로 인하여 회복되었습니까? 그 외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소망교회와 성도들의 자랑스러움과 이 시대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영혼의 싫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권태감 속에서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기도 속에 싫증이 나를 붙잡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찬양을 해도 입만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가 게으를 때 감사의 노래가 나오지 않습니다. 찬양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가지는 축복입니다. 성벽을 봉헌할 때 찬양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를 완성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또 무엇이 우리를 찬양하지 못하게 합니까? 유혹이 나를 미혹하고, 사탄이 나를 어둠의 세력 속에 가둘 때 찬양이 사라집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세속적인 안락 속에 빠져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 찬양을 하려고 하니 내 마음에 찬양이 없는 것입니다. 내 속에 근심과 염려가 가득한데 하나님께 이것을 토해내지 않고 혼자 끙끙 앓을 때 내 속에 찬양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영적인 위기를 맞으면서도 죄책감이 없고 스스로 뻔뻔해질 때 찬양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할 때, 내가 하나님의 복된 아들이요 사랑하는 딸인 것을 확인할 때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사랑 없이는 찬양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생기듯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 속에 기쁨의 찬양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좋아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기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을 기뻐하면서 살아라!
인생을 즐거워하면서 살아라!
인생을 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에 이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