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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9월 17일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소망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97회 총회가 열립니다. 올해는 총회가 생긴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2년 9월 1일에 평양신학교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번이 100회 총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97회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마지막 시절인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합니다. 그리고 1941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총 3번의 총회는 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97회 총회가 된 것입니다.
올해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입니다. 교회란, 이웃을 위하고 연약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총회 기간 동안 많은 교회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마음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에 속하는 교회는 약 8000개이고, 교인의 숫자는 280만 명에 이릅니다. 이러한 수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 Wood)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던 1885년을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외국 선교사가 아닌, 서상륜에 의해 1884년 황해도에 ‘소래교회’라는 이름의 첫 교회가 세워진지 약 1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그 성장의 결과로, 총회 대표로는 목사, 장로 각 750명씩을 파송하였고, 1500명의 총대회원들이 총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규모를 가진 총회의 기초는 다름 아닌 지역 교회입니다.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교단 총회의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란 먼저, 장소를 의미합니다. 허공에 뜬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뿌리를 박고,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세워집니다.
사도바울은 2000년 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고린도’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놓여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는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무역이 성했고 상업으로 아주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곳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히랍어로 아프로디테(Aphrodite)라 불리고 로마어로는 비너스(Venus)라 불리는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신전입니다. 그 여신을 섬기는 의식이 무질서와 무절제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전에는 공창(公娼)제도가 있어서 성적 타락이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린도 사람이 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인의 생활을 즐긴다, 간음을 행하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고린도는 교회가 세워지기에는 세속성이 너무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무절제와 무질서의 자리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수도원처럼 외딴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린도전· 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책명부터가 그러합니다. 고린도전·후서의 책명에서 ‘고린도’를 표현할 때 영어로는 COR, 독일어로는 KOR이라고 씁니다. 여기에 점만 찍으면 마치 대한민국을 나타내는 약자처럼 다가옵니다.
내부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파와 분쟁이 있고, 도덕적으로 취약하며,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문제를 지녔던 교회였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동시에 갈등도 있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걸기도 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성령님의 직통 계시를 더 사모하고 은사를 받기 위해 지나치게 마음을 쏟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영적 체험으로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많은 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2)
사도바울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 가운데 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룩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분쟁과 다툼, 성적인 타락이 있고, 열광주의 신앙에 빠져 복음의 내용을 잃어버린 교회를 향해서 거룩하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도대체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적으로 거룩해집니다.
맞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비록 나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내 성품은 선하게 바꿔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우리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존재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부름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교회는 장소나 조직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장소나 건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 우리를 만지시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집니다. 비록 나는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존재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이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함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거룩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제발 그 거룩이라는 말 좀 쓰지 말아주세요.”라고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닥다리 표현 아닙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딱딱하고 고루합니다. 너무 근엄하고 엄숙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도 없고, 앞뒤로 꽉 막히고, 여유도 주지 않는 것, 그것이 거룩 아닙니까?”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오늘날의 사회 풍조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거룩함에 대항하고, 거룩함을 파괴시키고자 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모더니즘(Modernism)입니다. 이것은 이성과 합리를 존중하며 변하지 않는 가치관과 참진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조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가치관을 파괴하고 핵심적인 가치를 뒤집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므로 진정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순과 혼돈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등의 모든 현장에서 무질서와 혼란을 경험하는 이유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누어진 것일 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너희만 거룩하다 하지 말라. 너희만 진리를 갖고 있다 하지 말라. 너희만 특별한 존재라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종교마저 다원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실까요? 진정 이 시대에는 ‘거룩함’이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요?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도 다니지만 거룩이라는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거룩이라는 표현은 부담이 돼.’ 거룩을 떠나서 예수를 믿고, 거룩을 떠나서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나는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함을 향해서 나아가라. 나는 지혜로우니 너희도 참된 지혜를 가져라. 내가 진리이니 너희도 진리 앞에 나오라”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거룩함의 경험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 애통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는 구별되는 분, 나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나는 아침안개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제한적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 속에 거하시는 분임을 알 때 떨림이 생깁니다. 나는 매일 죄를 짓고, 내 속의 악과 탐욕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무능, 연약함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적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섰을 때, 그는 자기 실존의 연약함과 죄악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사야가 성전문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자기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활기 넘치고 적극적인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고백했던 것은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였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도망가게 하고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2000년의 시간을 지나며 교회가 타락했던 적이 있었다면, 그 때는 분명 두렵고 떨림을 잊어버렸을 때였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부패해진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잃고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타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떠는 영적 지도자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갖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올려드리게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감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즉 거룩함에 들어가는 것은 이 두려움과 떨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마음은 곧 다른 것으로 이어집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강력하게 끌어당기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매우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넘어선 기쁨과 감격, 설렘과 새로움을 줍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두 번째 경험입니다.
모세는 도망가려 했지만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두려움으로 전율하며 모든 것을 다 그만두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를 떠나소서.” 이야기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예수님은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거룩함은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매혹으로, 매력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부르신 예수님 안에 하늘의 보화들, 즉 비밀과 계시, 지혜 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즉, 나와 이웃과 세계를 향한 꿈과 비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실존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고린도전서 1:1)
사도바울의 고백 속에는 우리나라 말로 ‘소명’과 ‘사명’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사도로 파송을 입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콜링(calling)과 샌딩(Sending)이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원하십니다.
소망교회는 대한민국 서울, 그 안에서도 강남 압구정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번영과 쾌락의 도시 한 가운데 놓여진 교회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한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부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존재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내가 네게 새로운 꿈과 사명을 허락해 주겠다. 이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라. 네가 서있는 그 자리, 너의 가정, 너의 직장, 이 사회와 역사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그 거룩함을 선포하라”
거룩함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특성입니다. 내가 아직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고, 내 성품이 온전히 순해지지 않았어도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식한다면,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품성, 예수 그리스도의 꿈,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가슴에 품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주님과 함께 매일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 1 ~ 3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한국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9월 17일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소망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97회 총회가 열립니다. 올해는 총회가 생긴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2년 9월 1일에 평양신학교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번이 100회 총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97회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마지막 시절인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합니다. 그리고 1941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총 3번의 총회는 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97회 총회가 된 것입니다.
올해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인, 작은 이들의 벗’입니다. 교회란, 이웃을 위하고 연약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총회 기간 동안 많은 교회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마음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에 속하는 교회는 약 8000개이고, 교인의 숫자는 280만 명에 이릅니다. 이러한 수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 Wood)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던 1885년을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외국 선교사가 아닌, 서상륜에 의해 1884년 황해도에 ‘소래교회’라는 이름의 첫 교회가 세워진지 약 1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그 성장의 결과로, 총회 대표로는 목사, 장로 각 750명씩을 파송하였고, 1500명의 총대회원들이 총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런 큰 규모를 가진 총회의 기초는 다름 아닌 지역 교회입니다. 각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교단 총회의 기초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란 먼저, 장소를 의미합니다. 허공에 뜬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뿌리를 박고,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세워집니다.
사도바울은 2000년 전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고린도’라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놓여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는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무역이 성했고 상업으로 아주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곳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히랍어로 아프로디테(Aphrodite)라 불리고 로마어로는 비너스(Venus)라 불리는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신전입니다. 그 여신을 섬기는 의식이 무질서와 무절제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전에는 공창(公娼)제도가 있어서 성적 타락이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린도 사람이 된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인의 생활을 즐긴다, 간음을 행하다’ 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고린도는 교회가 세워지기에는 세속성이 너무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무절제와 무질서의 자리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수도원처럼 외딴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린도전· 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책명부터가 그러합니다. 고린도전·후서의 책명에서 ‘고린도’를 표현할 때 영어로는 COR, 독일어로는 KOR이라고 씁니다. 여기에 점만 찍으면 마치 대한민국을 나타내는 약자처럼 다가옵니다.
내부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파와 분쟁이 있고, 도덕적으로 취약하며,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문제를 지녔던 교회였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동시에 갈등도 있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걸기도 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영적 열광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성령님의 직통 계시를 더 사모하고 은사를 받기 위해 지나치게 마음을 쏟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영적 체험으로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이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많은 교회를 향해서 사도바울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2)
사도바울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 가운데 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룩하다고 말씀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분쟁과 다툼, 성적인 타락이 있고, 열광주의 신앙에 빠져 복음의 내용을 잃어버린 교회를 향해서 거룩하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도대체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적으로 거룩해집니다.
맞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비록 나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고, 내 성품은 선하게 바꿔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우리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존재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부름의 주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교회는 장소나 조직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장소나 건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 우리를 만지시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집니다. 비록 나는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존재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이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함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거룩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제발 그 거룩이라는 말 좀 쓰지 말아주세요.”라고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닥다리 표현 아닙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딱딱하고 고루합니다. 너무 근엄하고 엄숙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도 없고, 앞뒤로 꽉 막히고, 여유도 주지 않는 것, 그것이 거룩 아닙니까?”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오늘날의 사회 풍조와 맞물려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거룩함에 대항하고, 거룩함을 파괴시키고자 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모더니즘(Modernism)입니다. 이것은 이성과 합리를 존중하며 변하지 않는 가치관과 참진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조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가치관을 파괴하고 핵심적인 가치를 뒤집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므로 진정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순과 혼돈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등의 모든 현장에서 무질서와 혼란을 경험하는 이유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누어진 것일 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너희만 거룩하다 하지 말라. 너희만 진리를 갖고 있다 하지 말라. 너희만 특별한 존재라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종교마저 다원화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실까요? 진정 이 시대에는 ‘거룩함’이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요?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도 다니지만 거룩이라는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거룩이라는 표현은 부담이 돼.’ 거룩을 떠나서 예수를 믿고, 거룩을 떠나서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나는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함을 향해서 나아가라. 나는 지혜로우니 너희도 참된 지혜를 가져라. 내가 진리이니 너희도 진리 앞에 나오라” 하나님은 거룩함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거룩함이 무엇입니까? 거룩함의 경험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 애통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는 구별되는 분, 나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나는 아침안개처럼 어느 순간 사라질 제한적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 속에 거하시는 분임을 알 때 떨림이 생깁니다. 나는 매일 죄를 짓고, 내 속의 악과 탐욕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무능, 연약함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적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섰을 때, 그는 자기 실존의 연약함과 죄악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사야가 성전문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자기 존재의 미미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활기 넘치고 적극적인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고백했던 것은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였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은 도망가게 하고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2000년의 시간을 지나며 교회가 타락했던 적이 있었다면, 그 때는 분명 두렵고 떨림을 잊어버렸을 때였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부패해진 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잃고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타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떠는 영적 지도자들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갖는 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올려드리게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감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즉 거룩함에 들어가는 것은 이 두려움과 떨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마음은 곧 다른 것으로 이어집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강력하게 끌어당기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매우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넘어선 기쁨과 감격, 설렘과 새로움을 줍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두 번째 경험입니다.
모세는 도망가려 했지만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두려움으로 전율하며 모든 것을 다 그만두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세워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나를 떠나소서.” 이야기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예수님은 그를 붙잡으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거룩함은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매혹으로, 매력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부르신 예수님 안에 하늘의 보화들, 즉 비밀과 계시, 지혜 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거룩함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즉, 나와 이웃과 세계를 향한 꿈과 비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실존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고린도전서 1:1)
사도바울의 고백 속에는 우리나라 말로 ‘소명’과 ‘사명’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사도로 파송을 입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콜링(calling)과 샌딩(Sending)이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원하십니다.
소망교회는 대한민국 서울, 그 안에서도 강남 압구정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번영과 쾌락의 도시 한 가운데 놓여진 교회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한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는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부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존재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내가 네게 새로운 꿈과 사명을 허락해 주겠다. 이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라. 네가 서있는 그 자리, 너의 가정, 너의 직장, 이 사회와 역사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그 거룩함을 선포하라”
거룩함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특성입니다. 내가 아직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고, 내 성품이 온전히 순해지지 않았어도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식한다면,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의 품성, 예수 그리스도의 꿈,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가슴에 품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이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주님과 함께 매일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오늘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