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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쳐짐과 당겨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랑스럽고 거룩한 매력이 있는 분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냥 매력이 아니라 ‘거룩한 매력’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의미에서 매력을 말할 때는, 대부분 이러합니다. 겉모습에 대해서는 잘났다, 멋있다, 몸매가 예쁘다거나 내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포용력이 있다, 소통이 잘 된다, 유머가 있다, 배려심이 많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매력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매력’이라고 할 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매력’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물질에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밀쳐내는 힘, 척력(斥力)이고, 다른 하나는 끌어당기는 힘, 인력(引力)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 척력과 인력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눈에 잘 안 띄다가 미움이 생기면 밀어내고 배척하는 힘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만나기도 싫어지고 옆에 있는 것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끌어당기는 힘이 움직입니다. 보고 싶고, 만날수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함에도 이 두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죄, 불의, 거짓 등을 향해서는 척력이 작동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는 인력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 경우, 하나님 앞에 서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배척하시는 힘과 끌어당기시는 힘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섰던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앞에 마치 죽은 듯이 얼어붙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부끄러운 사람’은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는 배척하는 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는 힘을 경험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격할 때도 “화로다 내가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다가갈 수 없음을 경험하는 동시에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하시며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렸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시면서 “이제는 네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며 예수님께로 그를 초청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눈까지 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기를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밀쳐내는 힘, 즉 나를 내팽개치는 힘을 경험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잘것없는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예수님의 이 거룩한 매력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누가 아침에 나를 깨웠습니까? 누가 우리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인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초청하시는 매력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참 새롭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저렇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대하실 수 있었을까? 감히 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거룩함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음을 말씀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서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위대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의 척력과 인력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초청하기 때문에 내 안에 용기와 감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본래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매력을 지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은 구분되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도,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알 것 같으면서 가장 모르겠는 단어가 바로 이 ‘거룩’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백성, 거룩한 예배 등 신앙생활 곳곳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도대체 거룩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 명백한 것은 거룩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속성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거룩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이 말씀은 레위기뿐만 아니라 신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너희가 종 되었던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 나는 거룩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닮아서 거룩함에 이르라.”
하나님은 기존 세계관의 전복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은 무엇일까요? 백 가지도 넘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한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 (누가복음 10:21)
예수님이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뻐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애통하시고 걱정하시고 근심하셨다는 말씀은 종종 나오는데, 이렇게 ‘기뻐한다’는 표현은 거의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엄청난 기쁨으로 파안대소(破顔大笑)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엄청난 기쁨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러했고 제자들을 향해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기뻐하셨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누가복음 10:21)
여기에 나타난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지혜자와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곳곳에 파송하셨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고 질병이 치유되며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기쁨에 동참하시며 당신의 기쁨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감사의 이유를 살펴보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자들이 누구였을까요? 총명한 자들이 누구였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최고의 지식인이며 지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닫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뒤집기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가치관의 뒤집기, 세계관의 뒤집기,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전복을 통해 하나님은 기존의 질서를 바꾸시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뒤집기의 가치관에서 대비되는 단어는 ‘지혜로운 자들’과 ‘어린아이들’입니다. 당연히 알고 깨달아야 할 자가 무지하게 되고, 반대로 몰라도 될 것 같은 자는 알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가진 자, 자기 것을 자랑하는 자 편에 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다리는 자, 갖지 못한 자, 순전한 자들의 편에 서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자체가 엄청난 역전의 시대를 예고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이, 곧 거룩한 매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시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말씀하시기 전에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어린아이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지식, 돈, 권력으로 으스대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원한다면 누구라도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식이나 재물,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이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신을 뽐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진 것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팔복말씀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열린 마음을 갖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인식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내게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면 특권이 곧 사명입니다. 돈, 권력,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보시며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향과 우리의 방향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선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하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지 몰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토는 늘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향은 반대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높은 산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쳐서 시내와 강물과 바다로 흘러가십니다. 낮은 곳, 작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 신음하며 탄식하는 자들을 향해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어부, 세리, 병든 자, 어린이, 당시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환경과 여건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새로운 인간상으로 변화된 축복받은 자로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거룩한 매력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방향성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려고 하는 대신 내려갈 준비를 하면, 어느 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높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우리와는 다른 이러한 방향 전환이 예수님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누가복음 10:22)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부심과 자존감과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고도 바른 인식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을 내 삶에 받아들이십시오.
소망교회 성도님들, 뭔가 가진 것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돈, 명예, 권력, 달란트를 나만을 위해 사용하며 살려고 하십니까? 나만을 위해서는 결코 다 쓸 수 없습니다.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연약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매력’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면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3)
누구를 보는 눈입니까? 예수님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자, 이것을 깨달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를 끌어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매력 때문에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 내 남은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임받고 싶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을 삶으로 받아들이시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거룩한 매력을 선언하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0: 21 ~ 24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밀쳐짐과 당겨짐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님을 자랑스럽고 거룩한 매력이 있는 분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냥 매력이 아니라 ‘거룩한 매력’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의미에서 매력을 말할 때는, 대부분 이러합니다. 겉모습에 대해서는 잘났다, 멋있다, 몸매가 예쁘다거나 내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포용력이 있다, 소통이 잘 된다, 유머가 있다, 배려심이 많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매력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매력’이라고 할 때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매력’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물질에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밀쳐내는 힘, 척력(斥力)이고, 다른 하나는 끌어당기는 힘, 인력(引力)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 척력과 인력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눈에 잘 안 띄다가 미움이 생기면 밀어내고 배척하는 힘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만나기도 싫어지고 옆에 있는 것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끌어당기는 힘이 움직입니다. 보고 싶고, 만날수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함에도 이 두 가지 힘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죄, 불의, 거짓 등을 향해서는 척력이 작동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는 인력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물건이 아니라 사람인 경우, 하나님 앞에 서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합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배척하시는 힘과 끌어당기시는 힘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섰던 믿음의 선배들에게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앞에 마치 죽은 듯이 얼어붙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부끄러운 사람’은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는 배척하는 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는 힘을 경험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격할 때도 “화로다 내가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다가갈 수 없음을 경험하는 동시에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하시며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렸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시면서 “이제는 네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며 예수님께로 그를 초청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눈까지 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기를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밀쳐내는 힘, 즉 나를 내팽개치는 힘을 경험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잘것없는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예수님의 이 거룩한 매력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누가 아침에 나를 깨웠습니까? 누가 우리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인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초청하시는 매력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참 새롭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떻게 저렇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대하실 수 있었을까? 감히 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거룩함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음을 말씀을 통해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서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위대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의 척력과 인력을 동시에 경험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지만,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초청하기 때문에 내 안에 용기와 감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본래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매력을 지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은 구분되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도,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알 것 같으면서 가장 모르겠는 단어가 바로 이 ‘거룩’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백성, 거룩한 예배 등 신앙생활 곳곳에 거룩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도대체 거룩이 무엇일까요?
한 가지 명백한 것은 거룩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속성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거룩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이 말씀은 레위기뿐만 아니라 신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너희가 종 되었던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 나는 거룩한 존재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닮아서 거룩함에 이르라.”
하나님은 기존 세계관의 전복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은 무엇일까요? 백 가지도 넘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한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전반부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 (누가복음 10:21)
예수님이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뻐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애통하시고 걱정하시고 근심하셨다는 말씀은 종종 나오는데, 이렇게 ‘기뻐한다’는 표현은 거의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엄청난 기쁨으로 파안대소(破顔大笑)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엄청난 기쁨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러했고 제자들을 향해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기뻐하셨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누가복음 10:21)
여기에 나타난 ‘이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지혜자와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좋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곳곳에 파송하셨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고 질병이 치유되며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기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위의 말씀은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기쁨에 동참하시며 당신의 기쁨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감사의 이유를 살펴보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지혜자들이 누구였을까요? 총명한 자들이 누구였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최고의 지식인이며 지혜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닫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뒤집기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가치관의 뒤집기, 세계관의 뒤집기, 즉 세계관과 가치관의 전복을 통해 하나님은 기존의 질서를 바꾸시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뒤집기의 가치관에서 대비되는 단어는 ‘지혜로운 자들’과 ‘어린아이들’입니다. 당연히 알고 깨달아야 할 자가 무지하게 되고, 반대로 몰라도 될 것 같은 자는 알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가진 자, 자기 것을 자랑하는 자 편에 서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다리는 자, 갖지 못한 자, 순전한 자들의 편에 서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자체가 엄청난 역전의 시대를 예고하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이, 곧 거룩한 매력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시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말씀하시기 전에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어린아이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지식, 돈, 권력으로 으스대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원한다면 누구라도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가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식이나 재물,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에게 ‘화 있을 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이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신을 뽐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가진 것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팔복말씀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열린 마음을 갖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인식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내게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면 특권이 곧 사명입니다. 돈, 권력,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보시며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향과 우리의 방향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선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하면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지 몰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토는 늘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향은 반대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높은 산에서부터 골짜기를 거쳐서 시내와 강물과 바다로 흘러가십니다. 낮은 곳, 작고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 신음하며 탄식하는 자들을 향해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은 어부, 세리, 병든 자, 어린이, 당시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환경과 여건에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새로운 인간상으로 변화된 축복받은 자로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거룩한 매력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방향성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려고 하는 대신 내려갈 준비를 하면, 어느 날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높여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우리와는 다른 이러한 방향 전환이 예수님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누가복음 10:22)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부심과 자존감과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고도 바른 인식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낮은 자리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을 내 삶에 받아들이십시오.
소망교회 성도님들, 뭔가 가진 것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돈, 명예, 권력, 달란트를 나만을 위해 사용하며 살려고 하십니까? 나만을 위해서는 결코 다 쓸 수 없습니다.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의 연약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매력’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면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0:23)
누구를 보는 눈입니까? 예수님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자, 이것을 깨달은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를 끌어주시는 그분의 거룩한 매력 때문에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 내 남은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임받고 싶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을 삶으로 받아들이시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 거룩한 매력을 선언하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년 10월 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6, 31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 10:21-24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 대해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거룩한 매력을 가지신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인간의 매력이 아닌 거룩한 매력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설교의 요약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고 배척하는 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인력과 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앞에 두려워 멀어지는 모세를 다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자신이 배척되는 것을 경험한 이사야는 다시 불러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력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척력을 경험하지만, 불러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인력을 경험합니다. 사도바울도 다메섹 동산에서 이 척력과 인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척력을 경험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끌어당기는 인력을 경험합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에 이끌리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함을 느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불러주시고, 그 분 안에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도무지 그 앞에 설 수 없는 척력과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인력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거룩은 구별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매력을 지니셨다는 것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거룩’이란 단어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룩함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거룩함을 주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거룩함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레 11:45)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셨습니다. (눅10:21)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제자들이 기쁨으로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할 때,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기쁨 속에는 하나님의 뒤집기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지혜있는 자, 총명한 자에게는 가려졌고, 어린이들에게는 나타나셨음을 기뻐하십니다. 당연히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할 자는 무지해졌고, 몰라도 될 것 같은 자들은 알고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뒤집기를 예수님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향과 우리의 방향은 다릅니다. 인간인 우리는 높은 곳을 향해 나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반대 방향인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셨습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매력을 가지려면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계시를 갖고 계셨습니다. (눅 10:22) 그래서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내려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의 비밀, 지혜의 비밀을 가지고 있어야 내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매력이 없습니다. 거룩함의 매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매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심적인 거룩한 매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로 세상의 낮은 사람들을 향해 내려가셔서 그들을 향해 소중한 존재임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거룩한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칭찬받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누기
1. 믿음의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척력과 인력을 경험했던 간증을 나눠봅시다.
2.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은 무엇일지 함께 이야기해봅시다.
3. 예수님의 거룩한 매력처럼 내가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향해 달려갔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매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