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거룩한 불만족

빌립보서 3: 12 ~ 16

김지철 목사

2014.12.28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014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1년 참 빠르게 지나갔구나…’ 생각하며 한 해를 돌아보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감회를 느끼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감사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족한 존재구나 하는 깨달음,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이만큼 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로 힘들고 괴로웠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병치레로 병원에 들락날락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 씁쓸하고 쓸쓸했던 기억도 날 것입니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 마음이 아린 경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되돌아보면 이만큼의 건강함 주셨고, 또 이만큼의 삶의 복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였습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소망교회 담임목회자로 세우시고, 올해로 12년차가 된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소망교회에 와서 소중한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제게는 특권이자 큰 감사의 내용입니다. 또 강단에 오를 때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기에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세우셨습니까?’ 하는 것도 제게 벅차게 다가오는 감사입니다. 어떤 때는 몸이 좀 불편하고, 마음에 불평이 생기는 순간에도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예수님처럼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더냐.” 그러면 그냥 또 감사하게 될 뿐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생각과 함께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 년을 돌아보면, 아쉽고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때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그 사람에게 조금 더 너그러웠더라면, 조금 더 열심을 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더 있었더라면, 성도님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기도를 더 했더라면, 예수님의 마음을 더 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하고, 동시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아파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모습입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어떤 시가 떠올랐습니다. 저항시인이었던 박노해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쓴 것으로, ‘아직과 이미 사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문제가 많은 삶을 살고 있고, 그렇다고 ‘아직 아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많은 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 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이라는, 완성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한편으로는 절망하고 있지만, ‘이미’라는 미래의 성취를 끌어안으며 소망을 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불만족을 갖고 달려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닿지 않은, 사명과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의 모습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내가 나 된 바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이러한 말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 수동태로 다가옵니다. 내가 먼저 추구하고, 내가 먼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먼저 추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수동태와 더불어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그것은 과거형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울 앞에 다시 능동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힘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한 은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증거하는 사도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었고, 예기치 않았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갖고 다가오신 추적이었고, 은혜로운 공격이었으며, 은혜로운 침입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내가 준비해 놓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에 내가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수동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거저 준 선물, 공짜라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나를 향해서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죄인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만드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제 나는 은혜를 받았으니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 (빌립보서 3:12)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빌립보서 3:13)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내게 새로운 목표와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만났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하늘 위의 하늘, 삼층천이라 표현하는 그곳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마다 병치유의 능력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온전한 존재,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달려가야 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노년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의 이러한 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도상의 존재입니다. 길 위에 있는 존재, 길을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그네 된 존재입니다. 나그네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어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고, 내일을 위해서 계속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야 할 존재입니다.

나그네는 방랑인과 다릅니다. 가야 할 목표가 있으면 나그네이지만, 가야 할 목표가 없으면 방랑인이 되고 맙니다. 요즘 곳곳에서 사람들이 연말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하루 이틀, 때로는 일주일. 그런데 만약 돌아올 집이 없으면 어떨까요? 사실 여행이란 게 피곤합니다. 힘도 듭니다. 그러나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 즐거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야 할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겠습니까?
바울에게는 가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고, 인생을 끝마칠 때가 되어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신선하고, 아직도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의 실존은 바로 이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아직도 가야 할 거룩한 불만족, 즉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이 두 가지 축을 가슴으로, 변증법적인 긴장 가운데에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만 알고 거룩한 불만족이 없으면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게을러집니다. 삶의 모든 것을 그냥 하나님 앞에 통째로 맡긴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멈춰 서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아니라는 거룩한 불만족만 갖고 있다면, 영혼의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평안도 있으면서 달려갈 목표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감을 가지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힘 바 된 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는 역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빌립보 교인들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 (빌립보서 3:15)

빌립보 교인들은, ‘우리가 은사를 받았다.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제 성숙하고 온전한 자가 아닌가!’ 하면서 영적인 열광주의 속에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더 이상 추구할 것도 없다는 멈춤의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온전해지는 것’은 주님 앞에 계속해서 나가는 것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 믿은 지 30년, 50년 되었으니까… 교회 직분을 맡은 지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제 더 이상 가야할 곳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기독교 신앙은 멈춰 서게 되고, 그 다음에는 후퇴하게 되고, 때로는 부패하게 되고, 때로는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자만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자기를 존중할 줄 알면서 오만해지지 않는 것, 은혜 가운데서도 늘 거룩한 불만족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은혜로 기뻐하면서도 뛰어나갈 마음 속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자랑과 수치는 잊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은혜와 불만족이라는 변증법적 긴장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망각, 즉 잊는 것입니다. 무엇을 잊으라는 것일까요?

… 오직 한 일 즉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 (빌립보서 3:13)

나를 오만하게 만들었던 것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룬 찬란한 성공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달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묶여진 삶을 살지 말고,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미래를 향해서 개방된 인간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갖게 되는 위험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옛날에는 말이지…”, “내가 왕년에는 말이지…”, “내가 그땐 말이지…” 가끔은 자랑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왕년에’, ‘옛날에’를 반복하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과거를 그냥 내려놓으세요.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다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달려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을 살든, 한 달을 살든, 일주일을 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50이든, 70이든, 90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었던 것들은 모두 옛날일이라는 것을, 지금이 가장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나는 달려갈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랑스러웠던 것들에 대한 망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망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과거의 부정적인 것에 대한 망각입니다. 나를 부끄럽게 했던 것들, 나를 열등감으로 몰아갔던 것들, 나를 패배주의자로 낙인찍었던 것들, 나를 죄책감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도록 억눌렀던 어제의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을 훌훌 벗어버려야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추억이나 죄책감에 자기를 묶어두는 순간, 우리는 한 발자국도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 없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를 얽어맸던 것들이 무엇인지, 나를 화나게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나를 미움으로 내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훌훌 벗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다 잊었다. 그 자랑스럽던 일들, 열심히 했던 것들 모두 잊어버렸다.” 그렇게 지난 일을 잊고 보니, 나를 붙잡았던 그 예수님이 내 미래에, 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시면서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일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가르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도전하고 모험하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향해 달려가기로 결단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고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상이 이런 것들을 가르칩니까? 세상의 그 어떤 유명한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시간의 비밀, 인생의 비밀, 삶의 비밀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열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는, 내가 이만큼 온 것에 대해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하고 감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어제로 인생을 끝마친 사람이 있지만, 저에게는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이라는 생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아직도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호흡하고, 듣고, 보고, 말하며, 행동하는 축복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아직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군요. 내가 아직 기도할 수 있겠군요. 내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군요.”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임을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 것을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삶을 더 사랑하고 더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이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현장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품고 한 해 동안 나에게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2015년 한 해를 허락하시면, 오늘부터 내 삶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빌립보서 3: 12 ~ 16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014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1년 참 빠르게 지나갔구나…’ 생각하며 한 해를 돌아보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감회를 느끼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하는 감사와,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부족한 존재구나 하는 깨달음,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이만큼 온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로 힘들고 괴로웠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병치레로 병원에 들락날락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아 씁쓸하고 쓸쓸했던 기억도 날 것입니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 마음이 아린 경험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되돌아보면 이만큼의 건강함 주셨고, 또 이만큼의 삶의 복을 주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였습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소망교회 담임목회자로 세우시고, 올해로 12년차가 된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소망교회에 와서 소중한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제게는 특권이자 큰 감사의 내용입니다. 또 강단에 오를 때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기에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세우셨습니까?’ 하는 것도 제게 벅차게 다가오는 감사입니다. 어떤 때는 몸이 좀 불편하고, 마음에 불평이 생기는 순간에도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예수님처럼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더냐.” 그러면 그냥 또 감사하게 될 뿐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생각과 함께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일 년을 돌아보면, 아쉽고 만족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조금 더 부지런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때 다른 결정을 내렸더라면, 그 사람에게 조금 더 너그러웠더라면, 조금 더 열심을 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더 있었더라면, 성도님들을 더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기도를 더 했더라면, 예수님의 마음을 더 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하고, 동시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아파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모습입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어떤 시가 떠올랐습니다. 저항시인이었던 박노해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쓴 것으로, ‘아직과 이미 사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문제가 많은 삶을 살고 있고, 그렇다고 ‘아직 아니다’라고 말하기에는 많은 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아직과 이미 사이
– 박노해 –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 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이라는, 완성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한편으로는 절망하고 있지만, ‘이미’라는 미래의 성취를 끌어안으며 소망을 품는 모습인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불만족을 갖고 달려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닿지 않은, 사명과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삶의 모습을 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내가 나 된 바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이러한 말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 수동태로 다가옵니다. 내가 먼저 추구하고, 내가 먼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먼저 추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수동태와 더불어 능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2)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그것은 과거형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울 앞에 다시 능동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힘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하지 못한 은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증거하는 사도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었고, 예기치 않았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갖고 다가오신 추적이었고, 은혜로운 공격이었으며, 은혜로운 침입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내가 준비해 놓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에 내가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수동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거저 준 선물, 공짜라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나를 향해서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죄인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만드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제 나는 은혜를 받았으니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멈춰 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 (빌립보서 3:12)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 (빌립보서 3:13)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내게 새로운 목표와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만났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하늘 위의 하늘, 삼층천이라 표현하는 그곳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마다 병치유의 능력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온전한 존재,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달려가야 할 존재라고 말합니다. 노년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의 이러한 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도상의 존재입니다. 길 위에 있는 존재, 길을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그네 된 존재입니다. 나그네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어제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고, 내일을 위해서 계속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야 할 존재입니다.

나그네는 방랑인과 다릅니다. 가야 할 목표가 있으면 나그네이지만, 가야 할 목표가 없으면 방랑인이 되고 맙니다. 요즘 곳곳에서 사람들이 연말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하루 이틀, 때로는 일주일. 그런데 만약 돌아올 집이 없으면 어떨까요? 사실 여행이란 게 피곤합니다. 힘도 듭니다. 그러나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 즐거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야 할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겠습니까?
바울에게는 가야 할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고, 인생을 끝마칠 때가 되어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신선하고, 아직도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의 실존은 바로 이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아직도 가야 할 거룩한 불만족, 즉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이 두 가지 축을 가슴으로, 변증법적인 긴장 가운데에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만 알고 거룩한 불만족이 없으면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게을러집니다. 삶의 모든 것을 그냥 하나님 앞에 통째로 맡긴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멈춰 서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아니라는 거룩한 불만족만 갖고 있다면, 영혼의 평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평안도 있으면서 달려갈 목표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존감을 가지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에게 붙잡힘 바 된 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는 역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빌립보 교인들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 (빌립보서 3:15)

빌립보 교인들은, ‘우리가 은사를 받았다.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제 성숙하고 온전한 자가 아닌가!’ 하면서 영적인 열광주의 속에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더 이상 추구할 것도 없다는 멈춤의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온전해지는 것’은 주님 앞에 계속해서 나가는 것이라고 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 믿은 지 30년, 50년 되었으니까… 교회 직분을 맡은 지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까… 이제 더 이상 가야할 곳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 기독교 신앙은 멈춰 서게 되고, 그 다음에는 후퇴하게 되고, 때로는 부패하게 되고, 때로는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자만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자기를 존중할 줄 알면서 오만해지지 않는 것, 은혜 가운데서도 늘 거룩한 불만족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은혜로 기뻐하면서도 뛰어나갈 마음 속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자랑과 수치는 잊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은혜와 불만족이라는 변증법적 긴장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망각, 즉 잊는 것입니다. 무엇을 잊으라는 것일까요?

… 오직 한 일 즉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 (빌립보서 3:13)

나를 오만하게 만들었던 것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룬 찬란한 성공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달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묶여진 삶을 살지 말고,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미래를 향해서 개방된 인간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갖게 되는 위험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옛날에는 말이지…”, “내가 왕년에는 말이지…”, “내가 그땐 말이지…” 가끔은 자랑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왕년에’, ‘옛날에’를 반복하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과거를 그냥 내려놓으세요.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다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달려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 년을 살든, 한 달을 살든, 일주일을 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50이든, 70이든, 90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었던 것들은 모두 옛날일이라는 것을, 지금이 가장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앞으로도 나는 달려갈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랑스러웠던 것들에 대한 망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망각이 필요합니다. 바로 과거의 부정적인 것에 대한 망각입니다. 나를 부끄럽게 했던 것들, 나를 열등감으로 몰아갔던 것들, 나를 패배주의자로 낙인찍었던 것들, 나를 죄책감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도록 억눌렀던 어제의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을 훌훌 벗어버려야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추억이나 죄책감에 자기를 묶어두는 순간, 우리는 한 발자국도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 없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를 얽어맸던 것들이 무엇인지, 나를 화나게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나를 미움으로 내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내려놓으십시오. 훌훌 벗어버리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다 잊었다. 그 자랑스럽던 일들, 열심히 했던 것들 모두 잊어버렸다.” 그렇게 지난 일을 잊고 보니, 나를 붙잡았던 그 예수님이 내 미래에, 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의 하나님이시면서 오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일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가르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도전하고 모험하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향해 달려가기로 결단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고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상이 이런 것들을 가르칩니까? 세상의 그 어떤 유명한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시간의 비밀, 인생의 비밀, 삶의 비밀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을 열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는, 내가 이만큼 온 것에 대해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복하고 감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어제로 인생을 끝마친 사람이 있지만, 저에게는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오늘이라는 생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아직도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호흡하고, 듣고, 보고, 말하며, 행동하는 축복을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아직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군요. 내가 아직 기도할 수 있겠군요. 내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군요.”
우리는 모두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임을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 것을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삶을 더 사랑하고 더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이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현장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품고 한 해 동안 나에게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2015년 한 해를 허락하시면, 오늘부터 내 삶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