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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배인가? 참된 예배인가?

이사야 1: 10 ~ 18

김지철 목사

2010.10.31

왕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동안 국정감사를 잘한 국회의원들 몇 명에게 격려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국회의원들은 정말 대통령이 나에게 보낸 것인지 의아해했습니다. 한 비서관은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들려왔던 대답은 “나 대통령이오.” 였습니다. 이 비서관이 놀랐겠습니까? 안 놀랐겠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말문이 닫혔습니다. 그리고 아마 죄송하다고 한 후에 통화를 끊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통은 국회비서관이 대통령과 직접 전화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등에 식은땀이 맺어질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과거의 왕정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일국의 왕 앞에 백성이 서는 것은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생사여탈권이 왕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왕 앞에 바짝 조아립니다. 아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성경인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왕비조차도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왕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위해 왕 앞에서 이야기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면서 왕 앞에 나아갈 준비를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에스더의 고백이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비가 왕 앞에 나아갈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을 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만큼 왕의 권위와 권력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 일국의 왕 앞에 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 중의 왕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설레는 마음이 있습니까? 긴장이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러오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느낌 없이, 때로는 싫증을 내고, 때로는 습관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때 마치 통화를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아마 깜짝 놀라자빠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실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가 그랬습니다. 그는 늘 성전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하나님께서 거룩함 속에 임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죽음이구나!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신의 불의함과 거짓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누가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기 속에 있던 찌꺼기와 같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사야 6장 5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던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 피조물인지를 고백하면서 나의 실존이 죽는 것이 예배드림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브리서 12:29)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불태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앞에서는 남아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워 재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경건하다는 것은 침묵하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서 예배드렸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실존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경견한 예배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경건한 예배입니다.
마치 활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는 철과 같은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래야 찌꺼기가 사라집니다. 우리의 죄악들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부끄러웠던 것들, 얽매여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정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 죄악과 허상, 내 부끄러움과 속에 있는 어둠의 모든 찌꺼기들을 그대로 토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받고자 열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예배는 사이비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고백이 없는 예배는 거짓 예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두렵고 떨리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예배자 자신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거짓 예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이 드렸던 예배입니다. 그는 첫 인간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예배가 실패했다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자신이 1년 동안 지은 농사의 결실을 하나님께 정성껏 준비해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가 드린 예배의 내용과 형식은 다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제물과 가인’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가인을 받지 않고 가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과 예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네가 예물은 갖고 왔느냐? 네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네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이제 기도하느냐?” 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제물로 드려지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멋진 찬양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나는 제물로 드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예배, 인간이 인간됨을 깨닫지 못하는 예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우리가 죄인인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실 때마다 조심스러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에 인간을 접하는 순간에 인간이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방법을 생각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사법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런 경로를 통해서 제물을 드려라. 네 대신 네가 드리는 제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제사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사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제사법을 알려준 것은 너를 대신할 제물을 바치게 하기 위함이지, 나는 네 마음과 생각, 네 모든 것을 받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제물로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보혈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고 능력이 많아서, 내가 지식이 많고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누구도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에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두 번째 헛된 예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하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요한복음 4:22) 예배의 대상이 누군지 모르는 채 예배를 드리는 것, 예배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예배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는 예배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 뜻입니까? 제 생각입니까? 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는 이것을 물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된 예배자가 없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시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 예배자가 없고 거짓 예배자가 가득하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간을 내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리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이 없이 일꾼이 되면 교만해집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일했는지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있기보다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기도, 예배 없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2)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왔다고, 예배를 잘 드린다고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성전 마당만 이리저리 밟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15)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악을 행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그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다 씻어내어 부정과 악을 그치고 선과 정의를 행하며 고통 받는 이웃을 도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1517년 10월31일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 비텐베르크 95개 조항을 발표한 날 이기도 합니다. 꼭 493년 전 오늘의 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5가지 구호를 함께 외쳤습니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만)
Sola Christus(오직 그리스도로만)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그들의 마음은 한 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거룩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악을 행하면서도 너무 쉽게 용서받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의 행동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거짓과 불의를 행하면서도 습관적인 예배, 습관적인 헌금, 습관적인 구제행위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거짓 신앙과 거짓 예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선포였습니다.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룬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오늘날은 행동주의에서 믿음주의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다는 동전 하나를 자판기에 넣으면 생명과 구원이라고 하는 상품이 딱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믿음주의로 서서히 퇴락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너무 쉽게 믿음을 고백하고 너무 쉽게 용서를 받는 값싼 은혜로 우리의 신앙이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모든 변화와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다만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내 안에는 죄가 있는 것을 압니다. 주님만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만 나의 구주로 삼게 해주십시오.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이제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고백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참된 예배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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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 10 ~ 18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왕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그동안 국정감사를 잘한 국회의원들 몇 명에게 격려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국회의원들은 정말 대통령이 나에게 보낸 것인지 의아해했습니다. 한 비서관은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들려왔던 대답은 “나 대통령이오.” 였습니다. 이 비서관이 놀랐겠습니까? 안 놀랐겠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말문이 닫혔습니다. 그리고 아마 죄송하다고 한 후에 통화를 끊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통은 국회비서관이 대통령과 직접 전화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등에 식은땀이 맺어질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과거의 왕정시대에는 어떠했을까요? 일국의 왕 앞에 백성이 서는 것은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생사여탈권이 왕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은 왕 앞에 바짝 조아립니다. 아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성경인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왕비조차도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왕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위해 왕 앞에서 이야기해야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면서 왕 앞에 나아갈 준비를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에스더의 고백이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비가 왕 앞에 나아갈 때에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을 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만큼 왕의 권위와 권력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 일국의 왕 앞에 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왕 중의 왕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설레는 마음이 있습니까? 긴장이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러오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런 느낌 없이, 때로는 싫증을 내고, 때로는 습관적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때 마치 통화를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아마 깜짝 놀라자빠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실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가 그랬습니다. 그는 늘 성전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하나님께서 거룩함 속에 임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죽음이구나!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신의 불의함과 거짓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누가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기 속에 있던 찌꺼기와 같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사야 6장 5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 6:5)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던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존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 피조물인지를 고백하면서 나의 실존이 죽는 것이 예배드림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브리서 12:29)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불태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앞에서는 남아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불태워 재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경건하다는 것은 침묵하면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서 예배드렸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실존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경견한 예배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경건한 예배입니다.
마치 활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는 철과 같은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래야 찌꺼기가 사라집니다. 우리의 죄악들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부끄러웠던 것들, 얽매여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정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내 죄악과 허상, 내 부끄러움과 속에 있는 어둠의 모든 찌꺼기들을 그대로 토해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받고자 열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예배는 사이비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고백이 없는 예배는 거짓 예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두렵고 떨리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예배자 자신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거짓 예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인이 드렸던 예배입니다. 그는 첫 인간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예배가 실패했다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자신이 1년 동안 지은 농사의 결실을 하나님께 정성껏 준비해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가 드린 예배의 내용과 형식은 다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제물과 가인’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가인을 받지 않고 가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과 예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네가 예물은 갖고 왔느냐? 네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네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이제 기도하느냐?” 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제물로 드려지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리고, 멋진 찬양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나는 제물로 드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예배, 인간이 인간됨을 깨닫지 못하는 예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우리가 죄인인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실 때마다 조심스러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에 인간을 접하는 순간에 인간이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본 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방법을 생각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사법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런 경로를 통해서 제물을 드려라. 네 대신 네가 드리는 제물을 죽여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찾아오실 수 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제사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제사법만 잘 지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제사법을 알려준 것은 너를 대신할 제물을 바치게 하기 위함이지, 나는 네 마음과 생각, 네 모든 것을 받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제물로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보혈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특권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고 능력이 많아서, 내가 지식이 많고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누구도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에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두 번째 헛된 예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하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맞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요한복음 4:22) 예배의 대상이 누군지 모르는 채 예배를 드리는 것, 예배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23)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예배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는 예배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제 뜻입니까? 제 생각입니까? 제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입니까?’ 저는 이것을 물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된 예배자가 없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시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 예배자가 없고 거짓 예배자가 가득하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이사야 1: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간을 내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리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이 없이 일꾼이 되면 교만해집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일했는지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있기보다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기도, 예배 없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2)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왔다고, 예배를 잘 드린다고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성전 마당만 이리저리 밟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15)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악을 행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그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다 씻어내어 부정과 악을 그치고 선과 정의를 행하며 고통 받는 이웃을 도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1517년 10월31일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 비텐베르크 95개 조항을 발표한 날 이기도 합니다. 꼭 493년 전 오늘의 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5가지 구호를 함께 외쳤습니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만)
Sola Christus(오직 그리스도로만)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그들의 마음은 한 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거룩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이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악을 행하면서도 너무 쉽게 용서받는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의 행동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거짓과 불의를 행하면서도 습관적인 예배, 습관적인 헌금, 습관적인 구제행위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거짓 신앙과 거짓 예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선포였습니다.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룬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오늘날은 행동주의에서 믿음주의로 바뀌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는다는 동전 하나를 자판기에 넣으면 생명과 구원이라고 하는 상품이 딱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믿음주의로 서서히 퇴락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너무 쉽게 믿음을 고백하고 너무 쉽게 용서를 받는 값싼 은혜로 우리의 신앙이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모든 변화와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다만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거룩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내 안에는 죄가 있는 것을 압니다. 주님만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만 나의 구주로 삼게 해주십시오.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이제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고백에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참된 예배자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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