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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사랑의 신비

창세기 2: 18 ~ 25

김지철 목사

2018.03.11

결혼 생활이 쉬운 건 아닙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6년 혼인 건수는 총 281,600건이었습니다. 2015년보다 21,200건이 감소된 수치입니다. 또한 1974년 이후 가장 적은 수치입니다. 한편 2016년 이혼 건수는 총 107,300건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평균 혼인 지속 기간은 14.7년이었습니다. 20년 이상 혼인을 지속한 부부들도 황혼 이혼을 하는데, 무려 30.4%가 이에 해당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23%에 해당하는 이혼 연령은 결혼한 지 4년이 채 안 된 신혼부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통계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축복의 자리가 가정입니다. “서로 마음껏 사랑해라. 가정을 즐거운 놀이터로 삼고 축복의 자리로 만들어라.” 이렇게 play ground로 주신 가정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battle field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한 외신 단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운영하는 쓰레기 분리수거 인공지능 채팅 로봇이 있었습니다. 일본 주부들이 장난삼아 채팅 로봇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어떻게 버려야 해?” 그러자 채팅 로봇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판단력이 없어서 결혼하고, 인내력이 없어서 이혼하고, 기억력이 없어서 재혼한다는 말도 있지 않아? 인내심을 조금 가져보면 어떨까?” 우스갯소리지만 정말 판단력이 결여돼 결혼했습니까? 인내심이 모자라서 이혼한 것일까요? 기억력이 상실돼 재혼한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결혼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결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결혼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란 말일까요, 하지 말란 말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결혼해 봐라. 그러면 사랑의 기쁨을 알고 감사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래도 내게 주신 삶에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삶을 대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또한 결혼이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제공해 줍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일까? 결혼의 가부장 제도는 적합한 것일까?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정말 여자는 열등한 존재여서 남자에게 종속돼 살아야 하는가? 부부의 사랑이 흔들리면 계속 유지하기보다 이혼으로 끝내는 것이 나은 걸까?” 우리에게도 수많은 질문과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좋아하다’는 말을 한자어로 보면 ‘호(好)’자입니다. 여자 녀(女)와 아들 자(子)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 좋다는 것입니다. 아니, 문자적으로 보면 남자가 여자를 좇는 모습도 보입니다.
또한 ‘좋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며 하나님의 언어로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좋지 않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첫 인간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언짢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상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창세기 2:18 중)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인간이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은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있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남자에 이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계속해서 만들거나 여자만을 계속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각각 만드셔서 첫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세기 2:22)
말씀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매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즉 결혼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쉽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결혼이 전쟁보다 치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짝임을 확인할 때까지 세 번, 즉 자기 실존을 건 기도를 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때 한 번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 두 번 기도하고, 평생 짝으로 생각해도 좋을지 생각할 때 세 번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평생 동안 기도하면서 살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이자 서로를 돕는 배필입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짝을 지어 주실 때 몇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담 앞에 동물들을 대동시키십니다. 그러나 동물 가운데서 배필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동물은 아담의 관리 대상이자 보호 대상이지, 마주하며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담의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돕는 자’, ‘돕는 배필’이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helper입니다. 그런데 이 ‘돕는 자’라는 말 때문에 오랫동안 여성이 차별받으며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는 가부장적인 구조를 유지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예로 들며, 남자가 우선이고 여자가 그다음이라 주장하면서 사회적 차별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빈부의 차별, 인종적 차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래된 차별이 있다면 남녀 차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왜곡된 기독교 사상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인간의 잘못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상은 그런 게 아닌데, 가부장제를 찬성하는 이들이 성서를 왜곡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므로 남자가 우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여자는 돕는 자이므로 남자의 보조자일 뿐이라고, 심지어 여자가 먼저 타락했으므로 여성에 대한 남자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연대를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남자가 여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논리는 성경을 읽는 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오히려 열등에서 고등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발전된, 곧 진화된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창조하셨고, 식물에서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동물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나아가십니다. 사람 중에서는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이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마지막 창조물이요, 최고의 창조물입니다.
생물학적 분석에 의해서도 여성의 몸이 남성보다 섬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사람은 우스갯소리도 이런 말도 합니다. “남자보다 여자의 재료가 더 고급이다.” 남자는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갈빗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성분들은 동의가 잘 안 되시나요? 그렇기에 시간 순으로 사람의 우월을 파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자는 돕는 자이므로 남자의 보조자일 뿐이라는 사고 역시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돕는 자’라는 말 자체를 열등 개념으로 이해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전혀 열등한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의 도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도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즉 더 강한 자가 돕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여성을 약한 자로, 열등한 자로 몰아가는 건 그 자체가 비성경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만든 5부 찬양대 이름을 ‘에벤에셀(Ebenezer)’이라 지었습니다. ‘에벤(eben)’은 ‘돌’, ‘에셀(ezer)’은 ‘연합’, ‘도움’이란 뜻으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무엘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실감하면서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 지은 데서 기인합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상 7:12)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를 ‘돕는 자’로 세웠다 해서 보조자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마치 남자는 정규직 직원이고, 여자는 비정규직 직원인 것처럼 보는 잘못된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이 철폐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타락 이후 여성을 남성의 종속적 존재로 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려 합니다. 다만 명백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여성의 모든 종속성이 철폐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인들을 향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대 여성들은 비인격적 존재로 취급당했는데, 예수님은 여성들을 존중하시고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어받은 사도 바울도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인종적 차별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든 차별이 사라집니다. 이미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유대 탈무드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발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노예로 억압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로 만든 이유는 서로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부부가 함께하는 사랑의 놀이터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빼면 그 가정은 지옥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play ground가 아니라 battle field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우리의 가정을 사랑 공동체로 만들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 공동체를 사랑으로 풍성히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역이자 씨앗입니다.

사랑은 영어로 LOVE입니다. 이 단어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따서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먼저 세 번째 글자인 ‘V’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Value’ 하는 것입니다. 즉 가치 있게 대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되고, 부부관계도 존속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마음을 읽고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이 없으면 사랑이 시작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다음 ‘L’입니다. 이는 ‘Listen’의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묻습니다. 아내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연애할 땐 열심히 들었는데, 결혼하고 혹시 귀를 닫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내가 말하면 잔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내들에게도 묻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남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어떤 상처를 받고 살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처럼 사랑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듣는 마음입니다.
다음은 ‘O’, 곧 ‘Offer’입니다.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도 내고 시간도 내야 합니다. 아내에게 너무 인색한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인색하게 용돈을 주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서로에게 관대하게 허용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돈도 내고, 시간도 내고, 정성도 쏟아야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E’, 곧 ‘Embrace’입니다. 포옹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몸적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 보십시오. “당신은 내 소중한 아내야.”라고 말해 보십시오. 아내들 역시 남편 등을 두드리면서 “당신은 내 멋진 남편!”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은 안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가정이 놀이터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사랑의 출발역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사랑의 씨앗입니다. 결혼 후 더욱 사랑에 에너지를 쏟고, 관계를 보호하며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면서도 일체 되시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 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을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또한 결혼 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십시오. 무엇보다 우리 남편들이 솔선하십시오. 먼저 아내를 사랑하며 안아 주십시오. 아내들도 남편의 사랑에 응답해 주세요. 이를 통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의 놀이터가 되도록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 가정을 사랑의 놀이터로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사랑의 신비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의 복된 사람들, 그리고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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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 18 ~ 25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결혼 생활이 쉬운 건 아닙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6년 혼인 건수는 총 281,600건이었습니다. 2015년보다 21,200건이 감소된 수치입니다. 또한 1974년 이후 가장 적은 수치입니다. 한편 2016년 이혼 건수는 총 107,300건으로 보고되었습니다. 평균 혼인 지속 기간은 14.7년이었습니다. 20년 이상 혼인을 지속한 부부들도 황혼 이혼을 하는데, 무려 30.4%가 이에 해당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23%에 해당하는 이혼 연령은 결혼한 지 4년이 채 안 된 신혼부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통계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축복의 자리가 가정입니다. “서로 마음껏 사랑해라. 가정을 즐거운 놀이터로 삼고 축복의 자리로 만들어라.” 이렇게 play ground로 주신 가정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battle field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한 외신 단신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운영하는 쓰레기 분리수거 인공지능 채팅 로봇이 있었습니다. 일본 주부들이 장난삼아 채팅 로봇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어떻게 버려야 해?” 그러자 채팅 로봇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판단력이 없어서 결혼하고, 인내력이 없어서 이혼하고, 기억력이 없어서 재혼한다는 말도 있지 않아? 인내심을 조금 가져보면 어떨까?” 우스갯소리지만 정말 판단력이 결여돼 결혼했습니까? 인내심이 모자라서 이혼한 것일까요? 기억력이 상실돼 재혼한 것입니까?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결혼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결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결혼해라. 그러면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래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란 말일까요, 하지 말란 말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결혼해 봐라. 그러면 사랑의 기쁨을 알고 감사할 것이다. 결혼하지 마라. 그래도 내게 주신 삶에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삶을 대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또한 결혼이란 우리에게 많은 물음을 제공해 줍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일까? 결혼의 가부장 제도는 적합한 것일까?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정말 여자는 열등한 존재여서 남자에게 종속돼 살아야 하는가? 부부의 사랑이 흔들리면 계속 유지하기보다 이혼으로 끝내는 것이 나은 걸까?” 우리에게도 수많은 질문과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좋아하다’는 말을 한자어로 보면 ‘호(好)’자입니다. 여자 녀(女)와 아들 자(子)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 좋다는 것입니다. 아니, 문자적으로 보면 남자가 여자를 좇는 모습도 보입니다.
또한 ‘좋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며 하나님의 언어로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좋지 않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첫 인간이 혼자 있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언짢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상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창세기 2:18 중)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인간이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은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있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남자에 이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계속해서 만들거나 여자만을 계속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각각 만드셔서 첫 사랑의 공동체로 세우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세기 2:22)
말씀 가운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중매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즉 결혼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쉽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결혼이 전쟁보다 치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짝임을 확인할 때까지 세 번, 즉 자기 실존을 건 기도를 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때 한 번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 두 번 기도하고, 평생 짝으로 생각해도 좋을지 생각할 때 세 번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평생 동안 기도하면서 살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이자 서로를 돕는 배필입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짝을 지어 주실 때 몇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담 앞에 동물들을 대동시키십니다. 그러나 동물 가운데서 배필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동물은 아담의 관리 대상이자 보호 대상이지, 마주하며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담의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돕는 자’, ‘돕는 배필’이란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helper입니다. 그런데 이 ‘돕는 자’라는 말 때문에 오랫동안 여성이 차별받으며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는 가부장적인 구조를 유지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예로 들며, 남자가 우선이고 여자가 그다음이라 주장하면서 사회적 차별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빈부의 차별, 인종적 차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오래된 차별이 있다면 남녀 차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왜곡된 기독교 사상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인간의 잘못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상은 그런 게 아닌데, 가부장제를 찬성하는 이들이 성서를 왜곡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므로 남자가 우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여자는 돕는 자이므로 남자의 보조자일 뿐이라고, 심지어 여자가 먼저 타락했으므로 여성에 대한 남자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연대를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남자가 여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가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논리는 성경을 읽는 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오히려 열등에서 고등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발전된, 곧 진화된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창조하셨고, 식물에서 동물을 창조하셨으며, 동물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나아가십니다. 사람 중에서는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이후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마지막 창조물이요, 최고의 창조물입니다.
생물학적 분석에 의해서도 여성의 몸이 남성보다 섬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사람은 우스갯소리도 이런 말도 합니다. “남자보다 여자의 재료가 더 고급이다.” 남자는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갈빗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성분들은 동의가 잘 안 되시나요? 그렇기에 시간 순으로 사람의 우월을 파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자는 돕는 자이므로 남자의 보조자일 뿐이라는 사고 역시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돕는 자’라는 말 자체를 열등 개념으로 이해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전혀 열등한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인간의 도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도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21편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즉 더 강한 자가 돕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여성을 약한 자로, 열등한 자로 몰아가는 건 그 자체가 비성경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만든 5부 찬양대 이름을 ‘에벤에셀(Ebenezer)’이라 지었습니다. ‘에벤(eben)’은 ‘돌’, ‘에셀(ezer)’은 ‘연합’, ‘도움’이란 뜻으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무엘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실감하면서 기념비를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이름 지은 데서 기인합니다. 사무엘상 7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상 7:12)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를 ‘돕는 자’로 세웠다 해서 보조자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마치 남자는 정규직 직원이고, 여자는 비정규직 직원인 것처럼 보는 잘못된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이 철폐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타락 이후 여성을 남성의 종속적 존재로 보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려 합니다. 다만 명백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여성의 모든 종속성이 철폐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인들을 향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대 여성들은 비인격적 존재로 취급당했는데, 예수님은 여성들을 존중하시고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어받은 사도 바울도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인종적 차별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든 차별이 사라집니다. 이미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유대 탈무드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발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여자가 노예로 억압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의 갈빗대로 만든 이유는 서로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부부가 함께하는 사랑의 놀이터입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빼면 그 가정은 지옥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play ground가 아니라 battle field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우리의 가정을 사랑 공동체로 만들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 공동체를 사랑으로 풍성히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출발역이자 씨앗입니다.

사랑은 영어로 LOVE입니다. 이 단어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따서 사랑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먼저 세 번째 글자인 ‘V’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Value’ 하는 것입니다. 즉 가치 있게 대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되고, 부부관계도 존속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마음을 읽고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이 없으면 사랑이 시작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다음 ‘L’입니다. 이는 ‘Listen’의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묻습니다. 아내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연애할 땐 열심히 들었는데, 결혼하고 혹시 귀를 닫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내가 말하면 잔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아내들에게도 묻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남편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어떤 상처를 받고 살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처럼 사랑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듣는 마음입니다.
다음은 ‘O’, 곧 ‘Offer’입니다.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도 내고 시간도 내야 합니다. 아내에게 너무 인색한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인색하게 용돈을 주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서로에게 관대하게 허용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돈도 내고, 시간도 내고, 정성도 쏟아야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E’, 곧 ‘Embrace’입니다. 포옹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몸적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따뜻하게 안아 보십시오. “당신은 내 소중한 아내야.”라고 말해 보십시오. 아내들 역시 남편 등을 두드리면서 “당신은 내 멋진 남편!”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은 안아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가정이 놀이터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사랑의 출발역입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사랑의 씨앗입니다. 결혼 후 더욱 사랑에 에너지를 쏟고, 관계를 보호하며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시면서도 일체 되시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신 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을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또한 결혼 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십시오. 무엇보다 우리 남편들이 솔선하십시오. 먼저 아내를 사랑하며 안아 주십시오. 아내들도 남편의 사랑에 응답해 주세요. 이를 통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의 놀이터가 되도록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우리 가정을 사랑의 놀이터로 만들어 가는 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사랑의 신비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의 복된 사람들, 그리고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3월 1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결혼 : 사랑의 신비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0장, 29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2:18~25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1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급격히 늘어만 가는 황혼이혼과 신혼이혼으로 가정은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바로 가정입니다그런데 가정이 즐거운 놀이터(paly ground)가 아니라싸움터(battle ground)로 변해가는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설교의 요약

    최근 결혼은 판단력의 결여 때문이며이혼은 오래 참음이 부족해서 그리고 재혼은 기억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고 말합니다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결혼해 보라그러면 후회할 것이다결혼하지 말라그래도 후회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도대체 결혼은 무엇일까결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가부장 제도는 적합한가정말 남자는 여자보다 더 우월한 존재인가여자는 정말 열등한 존재이기에 남자에게 종속되어야 하는가부부의 사랑이 흔들리면 계속 유지보다 이혼으로 끝나는 것이 정상인가결혼과 사랑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물음을 갖게 됩니다.

    「호()」라는 한자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을 때에 좋다는 말입니다사실 좋다라는 말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좋지 않다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사용하셨습니다(2;18). 홀로 있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안쓰럽게 보시고여자를 만드셨습니다(2:22). 특별히 본문 22절에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고 오셨다고 합니다이 말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하나님께서 친히 중매쟁이 역할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결혼은 하나님의 사건이며섭리이고 선물임을 보여줍니다러시아 속담에 바다에 나갈 때는 1번 기도하고전쟁에 나갈 때는 2번 기도하고결혼할 때에는 3번 기도하라고 말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좋은 감정이 생길 때 기도하고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 기도하며결혼을 결정할 때에 기도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짝을 마련하실 때여성을 돕는 배필 돕는 자(helper)로 소개합니다그런데 지금까지 이 돕는 자라는 말은 여성의 차별성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그래서 ①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②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다③ 여자가 먼저 타락했다그래서 남자의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하지만 창조 순서를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1. 남자가 여자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창조되었지만창조는 더 발전되고 진화된 쪽으로 흐릅니다.

    2. ‘돕는 자는 열등의 개념이 아닙니다성경은 하나님을 돕는 자로 표현합니다(121:1).

        여자를 돕는 자로 세웠다는 의미는 보조자가 아니라함께 서로 돕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3.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적인 언급을 하는 구절입니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여성의 모든 종속성이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갖고 있는 차별성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두 사라지고 극복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갈빗대로 여인을 만드셨습니다남자의 갈빗대로 여인을 만든 것은 서로 가슴으로 사랑하도록 원하셨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할까요? Love라는 영어의 이니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L(Listen)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O(Offer) 나를 내어주는 것(헌신). V(Value and honor)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것E(Embrace) 포용하는 것(용납하는 것)입니다결혼은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역입니다결혼하면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결혼으로부터 사랑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기억해야할 것은 삼위일체야말로 사랑의 신비입니다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세우셨습니다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남편을 세우는 말아내로서 위로받고 격려가 되는 말들은 무엇입니까함께 나눠보십시오.

2. 사랑을 영어단어 「LOVE」로 구분할 때나에게 부족한 모습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신비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모습이 무엇인지 나누고남편과 가정을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우리에게 소중한 가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남편이 되게 하옵소서남편의 마음을 깨달아 알아주며 남편을 높여주는 지혜로운 아내로 살게 하옵소서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흘러넘치는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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