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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 – 부활을 산 사람들 2 –

사도행전 8: 26 ~ 40

김지철 목사

2013.04.14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고 때로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나, 즉 자아라는 울타리,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 외에도 직장, 지역, 민족과 국가, 그리고 때로는 사상적이고 이념적인 울타리들도 있습니다. 이 울타리들은 곧 경계선이 됩니다.
‘경계’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구분되는 한계,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되는 한계들은 종교, 국가, 인종, 성별,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모든 삶에 존재합니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보호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을 보호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들어가려면 담장이나 문을 지나야 합니다. 열쇠를 가진 집주인이 문을 열어야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도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오면 경계선이 무너지고 나를 지키기 어렵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 나의 소중한 점을 보호하는 능력이 바로 이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이 높은 장벽이 되어 버리면, 우리 삶에 나쁜 점으로 작용합니다. 이웃과 단절되어 소통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경계 없이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나, 얼굴이 하얗거나, 누렇거나, 까맣거나 상관없이 함께 놉니다. 그냥 서로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랬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경계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계선을 가르치고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더 강한 경계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 강력하게 내 소유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경계를 허물고 이웃과 함께 삶을 소통하며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성장과 성숙의 사람이란, 내 경계와 남의 경계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통을 가지고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점차 잘못된 경계선들을 허물고 있습니다.

미국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은 나라처럼 보입니다. 빈부의 차이가 어느 나라보다 크고, 인종차별도 있습니다. 폭력과 마약 등 각종 문제들이 난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좋은 점은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을 향해 그 동안의 수많은 잘못된 경계선과 울타리들을 끊임없이 타파하는 능력이 미국 속에 있습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는 놀랍게도 유색인, 흑인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가 1963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했던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은 여전히 유명합니다. 그것은 미국 사회 속에 난무하고 있는 흑인 차별과 사회 불평등을 극복해 달라는 호소의 연설이었습니다. 얼굴색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는 미국 사회를 꿈꾸면서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 공존을 위한 연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난 그곳에 흑인 대통령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위대한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입니다.
2013년 우리 국민은 박근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킵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여성이 공직의 최고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극히 꺼리던 인식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여성이 운전하는 자동차만 봐도 남자들은 속으로 조롱했습니다. 하루에 처음 만나는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면 ‘재수없다’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남자도 여자도 모두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녀 차별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사고 전반의 변화입니다. 전극대적인 사고에서 근대주의와 현대주의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면서 인식의 장벽들을 끊어온 것입니다. 잘못된 경계선들과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렇듯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차별하는 권위주의,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권위주의, 얼굴색의 차이에 따른 경계선 등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차별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계선들을 극복해 나가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잘못된 울타리들을 잘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 해방의 역사 속에 부활의 산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 성령 충만한 교회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었던 모든 담장들을 해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곧 기독교 신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인 것이 기독교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벌써 2000년 전에 기독교 역사의 핵심, 즉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가 하나가 된다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7∼28)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었던 경계선과 울타리들을 넘어서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아라는 울타리, 가족, 지방 등의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선거 때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지방의 고유한 것들을 자랑하고 고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편향되고, 경계선처럼 되어버리는 것은 아직도 덜 성숙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학벌의 울타리가 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헤아리지 않는 잘못된 관습과 생각으로 수많은 경계선들을 너무 높이 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역적 차별성과 인종적 차별성을 극복하는 데에서부터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땅, 예수님이 부활하신 땅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집착하고, 그곳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비전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가지 않으니 강제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에 더 있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지역으로 나갔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 다음 세대인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있던 울타리를 과감하게 부수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5절과 8절 말씀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는 아주 추한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나 돼지처럼 여겨지는 불결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천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혐오하던 그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이미 예수님 때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그것도 남편 여럿을 거느리고 있는 그런 여자를 만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빌립이 그 때 예수님의 역사를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유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모든 잘못된 차별들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지역이나 종족의 차별성, 학력의 차별성, 문화와 전통의 차별성, 고정관념의 차별성 등에서 벗어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면 땅 끝까지 이르리라’는 것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땅 끝의 역사를 시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속에 사람을 차별하고,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접하는 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역적 차별의 극복은 빌립을 통해 민족차별에 대한 극복으로 더 확대가 됩니다. 빌립이 만난 사람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의 내시였습니다. 그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었지만, 유대인의 눈에는 별것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사도행전 8:27∼28)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었고, 게다가 내시, 즉 거세된 남성이었습니다. 고위 관리였지만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저 육체적인 결함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신명기 23장 1에서는,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며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에 참여할 수 없다고 아예 제거해 버렸습니다. 남성의 수치를 드러내는 기피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대 종교로 보았을 때 그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우리에게 어떤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보지 말라. 인간의 장애로 사람을 보지 말라.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보지 말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모든 것이 열리는 새로운 세계가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것을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이사야 56:3)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나오면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령이 임하시면서 새로운 역사로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성경은 빌립이 과감하게 나가서 내시가 읽고 있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고, 결국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까지 받게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도우실 때, 경계선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결정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존감이 더 커지셨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자존감이 커져야 됩니다. 자존감이 커진다는 것은 곧 마음이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면 옹졸해지기 시작합니다. 과도한 자기 방어의식으로 울타리를 더 높게 쌓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기 울타리를 높이 쌓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쌓아온 울타리와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경계선을 넘어 이웃을 향해 나가도 내 고유성과 독자성,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훼손되지는 않을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내 약점과 문제점이 노출되어서 상대방에게 조롱받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 그것은 내 힘과 노력, 내 결단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네 힘으로 하지 말고, 내가 네가 주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8:26)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8:29)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사도행전 8:39)

끊임없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경계선들을 뛰어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경계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령을 통한 믿음이란, 내 고유성을 더욱 명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고유성과 독자성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쌓아왔던 경계선을 열고, 다른 사람과 동역하며 하나님의 더 크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구제와 봉사, 섬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성도들의 역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허물기 쉽지 않은 어떤 울타리들이 있습니까? 가정 안에 어떤 울타리들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지, 교회와 직장, 이 사회에 어떤 울타리들이 우리의 가슴을 가로 막아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게 하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우리 교회가 열 분의 장로님들을 세우게 됩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자장로님도, 여자장로님도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40대 장로님도, 50대 장로님도, 60대 장로님도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르신들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젊은 세대들을 귀히 여기고 아끼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부활의 생명을 산다는 것은, 지난 주일 나누었던 스데반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오늘 말씀의 빌립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들을 과감히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예수님 때문에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귀한 사명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로 잘 이루어가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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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 26 ~ 40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대답하여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고 때로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나, 즉 자아라는 울타리,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 외에도 직장, 지역, 민족과 국가, 그리고 때로는 사상적이고 이념적인 울타리들도 있습니다. 이 울타리들은 곧 경계선이 됩니다.
‘경계’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구분되는 한계,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되는 한계들은 종교, 국가, 인종, 성별,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모든 삶에 존재합니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보호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을 보호하는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들어가려면 담장이나 문을 지나야 합니다. 열쇠를 가진 집주인이 문을 열어야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도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오면 경계선이 무너지고 나를 지키기 어렵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 나의 소중한 점을 보호하는 능력이 바로 이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이 경계선이 높은 장벽이 되어 버리면, 우리 삶에 나쁜 점으로 작용합니다. 이웃과 단절되어 소통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경계 없이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나, 얼굴이 하얗거나, 누렇거나, 까맣거나 상관없이 함께 놉니다. 그냥 서로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랬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차 경계를 만들어 갑니다. 부모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계선을 가르치고 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더 강한 경계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더 강력하게 내 소유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경계를 허물고 이웃과 함께 삶을 소통하며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성장과 성숙의 사람이란, 내 경계와 남의 경계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통을 가지고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점차 잘못된 경계선들을 허물고 있습니다.

미국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은 나라처럼 보입니다. 빈부의 차이가 어느 나라보다 크고, 인종차별도 있습니다. 폭력과 마약 등 각종 문제들이 난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좋은 점은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을 향해 그 동안의 수많은 잘못된 경계선과 울타리들을 끊임없이 타파하는 능력이 미국 속에 있습니다.
미국의 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는 놀랍게도 유색인, 흑인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가 1963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했던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은 여전히 유명합니다. 그것은 미국 사회 속에 난무하고 있는 흑인 차별과 사회 불평등을 극복해 달라는 호소의 연설이었습니다. 얼굴색 등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는 미국 사회를 꿈꾸면서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 공존을 위한 연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난 그곳에 흑인 대통령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위대한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입니다.
2013년 우리 국민은 박근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킵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여성이 공직의 최고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극히 꺼리던 인식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여성이 운전하는 자동차만 봐도 남자들은 속으로 조롱했습니다. 하루에 처음 만나는 차의 운전자가 여성이면 ‘재수없다’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야기를 남자도 여자도 모두 마음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녀 차별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사고 전반의 변화입니다. 전극대적인 사고에서 근대주의와 현대주의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넘어오면서 인식의 장벽들을 끊어온 것입니다. 잘못된 경계선들과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렇듯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차별하는 권위주의,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권위주의, 얼굴색의 차이에 따른 경계선 등을 끊임없이 극복해 나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차별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계선들을 극복해 나가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잘못된 울타리들을 잘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 해방의 역사 속에 부활의 산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 성령 충만한 교회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었던 모든 담장들을 해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곧 기독교 신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인 것이 기독교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벌써 2000년 전에 기독교 역사의 핵심, 즉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가 하나가 된다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7∼28)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었던 경계선과 울타리들을 넘어서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아라는 울타리, 가족, 지방 등의 울타리를 허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선거 때면,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지방의 고유한 것들을 자랑하고 고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편향되고, 경계선처럼 되어버리는 것은 아직도 덜 성숙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학벌의 울타리가 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헤아리지 않는 잘못된 관습과 생각으로 수많은 경계선들을 너무 높이 쌓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역적 차별성과 인종적 차별성을 극복하는 데에서부터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땅, 예수님이 부활하신 땅인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집착하고, 그곳에 안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비전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딱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가지 않으니 강제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루살렘에 더 있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지역으로 나갔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 다음 세대인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있던 울타리를 과감하게 부수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5절과 8절 말씀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는 아주 추한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나 돼지처럼 여겨지는 불결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천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혐오하던 그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이미 예수님 때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그것도 남편 여럿을 거느리고 있는 그런 여자를 만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빌립이 그 때 예수님의 역사를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유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모든 잘못된 차별들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지역이나 종족의 차별성, 학력의 차별성, 문화와 전통의 차별성, 고정관념의 차별성 등에서 벗어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면 땅 끝까지 이르리라’는 것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땅 끝의 역사를 시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속에 사람을 차별하고,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접하는 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역적 차별의 극복은 빌립을 통해 민족차별에 대한 극복으로 더 확대가 됩니다. 빌립이 만난 사람은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의 내시였습니다. 그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었지만, 유대인의 눈에는 별것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사도행전 8:27∼28)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었고, 게다가 내시, 즉 거세된 남성이었습니다. 고위 관리였지만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저 육체적인 결함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신명기 23장 1에서는,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며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에 참여할 수 없다고 아예 제거해 버렸습니다. 남성의 수치를 드러내는 기피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대 종교로 보았을 때 그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우리에게 어떤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보지 말라. 인간의 장애로 사람을 보지 말라. 남자와 여자로 사람을 보지 말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모든 것이 열리는 새로운 세계가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것을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이사야 56:3)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나오면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령이 임하시면서 새로운 역사로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성경은 빌립이 과감하게 나가서 내시가 읽고 있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고, 결국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례까지 받게 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도우실 때, 경계선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결정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존감이 더 커지셨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자존감이 커져야 됩니다. 자존감이 커진다는 것은 곧 마음이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면 옹졸해지기 시작합니다. 과도한 자기 방어의식으로 울타리를 더 높게 쌓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자기 울타리를 높이 쌓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쌓아온 울타리와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경계선을 넘어 이웃을 향해 나가도 내 고유성과 독자성,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훼손되지는 않을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내 약점과 문제점이 노출되어서 상대방에게 조롱받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 그것은 내 힘과 노력, 내 결단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네 힘으로 하지 말고, 내가 네가 주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도행전 8:26)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8:29)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사도행전 8:39)

끊임없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경계선들을 뛰어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경계 없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성령을 통한 믿음이란, 내 고유성을 더욱 명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 고유성과 독자성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쌓아왔던 경계선을 열고, 다른 사람과 동역하며 하나님의 더 크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구제와 봉사, 섬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성도들의 역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허물기 쉽지 않은 어떤 울타리들이 있습니까? 가정 안에 어떤 울타리들이 서로를 가로막고 있는지, 교회와 직장, 이 사회에 어떤 울타리들이 우리의 가슴을 가로 막아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게 하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우리 교회가 열 분의 장로님들을 세우게 됩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자장로님도, 여자장로님도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40대 장로님도, 50대 장로님도, 60대 장로님도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르신들을 존중하며 사랑하고, 젊은 세대들을 귀히 여기고 아끼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부활의 생명을 산다는 것은, 지난 주일 나누었던 스데반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오늘 말씀의 빌립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들을 과감히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합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예수님 때문에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귀한 사명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로 잘 이루어가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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