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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가는 사람
성지답사를 통해 터키를 방문 했을 때 제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아팠습니다. 터키의 인구가 7천만 명인데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5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10,00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터키 지역은 성경에 나오는 갈라디아 지역으로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선교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다 훼손이 되어 기독교 신앙 유적지는 없고, 몇몇 남아있는 곳도 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으로 감격스러웠던 것은 서머나라는 곳에 가서 폴리캅이 순교당한 순교 교회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 삽입)이것은 폴리캅 순교 교회의 천정 벽화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에개해 중턱에 자리 잡은 대도시 이즈미르라는 도시의 옛 이름이 서머나로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도시입니다. 황제 숭배 도시에 폴리캅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초대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중세 이후에 세워졌고,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순교당한 것을 기념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주후 약 2세기 중엽, 폴리캅이 순교를 당할 때 나이는 86살이었습니다. 이 벽화는 불란서 화가였던 레이몽 빼래라는 사람이 그린 것으로 폴리캅이 묶여서 화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왼쪽에는 칼을 들고 달려오는 사람도 있고 그 옆에는 손이 묶인 채로 조용히 머리 숙인 사람도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머리를 숙인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순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리캅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그 다음 순교자는 땅을 바라보면서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 때 로마의 총독이 폴리캅을 향해서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부인해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해라.”
이 순간 폴리캅은 이렇게 말하며 화형을 당합니다. “내가 86년 동안 살면서 예수님을 섬겼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결코 잘못 대하신 적이나 나를 거부하신 적이 없다.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내가 저주할 수 있겠는가?”
적색 순교 ․ 녹색 순교 ․ 백색 순교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순교의 길을 가야하는 곳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의 길을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눈을 들어 살펴보면 북한 땅에서 신앙을 갖는 것은 순교의 길을 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한 사람만을 예찬하며 뒤따라 가야하는 독재국가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신앙 때문에 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사와 한 청년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수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인가, 아니면 의미 없는 헛된 죽음에 불과한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순교는 자기가 증언하는 것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는 것으로 학자들은 순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적색순교, 즉 붉은 색깔의 순교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녹색 순교가 있고, 세 번째는 백색 순교가 있다고 합니다. 적색순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피를 흘리며 죽는 순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생명을 바치는 순교가 적색순교입니다.
두 번째, 녹색 순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삶 전체가 고난과 고통의 길일지라도 한번 가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를 절제하고 금욕과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면서 자기 절제의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백색 순교는 일상적인 삶을 다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밥을 먹을 때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일을 하면서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모든 사람이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면서 자아를 죽이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백색 순교입니다.
순교의 삶을 살아갑니까? 순교의 삶을 포기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순교자의 길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색 순교, 녹색 순교, 백색 순교 중 어떤 순교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일 예배드리러 나올 때 마음속에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며 인생 전체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찬송을 부르며 필요하면 금식도 하고, 새벽기도도 나오고, 이웃봉사와 선교봉사도 해 볼 것이라는 순교를 결심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약해서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순교는 무슨 순교, 그냥 주일 예배나 잘 드리고 집에 가서 내 생활이나 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곤 합니다. 세상을 살 때 내 욕심과 야망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때로 스스로 그렇게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예수님이 주님이며 내가 종이라는 뜻입니다. 내 자아를 죽여 예수님이 내 인생 전체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 인생 전체를 드리고 싶은 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이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울은 하루하루를 살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바울에게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에게 왜 편안한 것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에게 왜 야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더 크기에 내 삶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더 크기에 자기 인생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면서 인생을 달려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당했으나 예수님께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성경 말씀에 서머나 교회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보면 7개의 교회가 등장하는데, 두개의 교회만 칭찬을 받았고 나머지 교회는 칭찬도 받았지만 아주 호되게 꾸중을 받았습니다. 그 중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마음속으로부터 고난의 길을 자원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궁핍의 길을 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교회는 환란과 핍박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귀한 생명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구나.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구나.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구나.”
세상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조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네가 환란을 당하고 궁핍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풍요로운 교회구나. 네 속에 생명과 지혜가 있고 풍성한 것이 있구나.”
어느 누가 고난 받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고난 받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편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캄캄한 골짜기에서 헤매는 것 보다 밝은 태양의 잔디밭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서운 추위에서 떨기보다는 따뜻한 거실에서 안락을 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고통과 고난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정상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일까요? 왜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의 밑바닥에 고난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 아직도 고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사탄 권세가 훼방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흔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가난의 고난, 질병의 고난, 정신적인 무의미성의 고난, 인간관계 때문에 생겨지는 아픔과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고난도 힘들지만 고난당할 때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를 때 많은 사람들은 더 흔들립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면서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아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외로워합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당했을 때 하나님이 너무 멀리계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에게는 관심을 이미 끈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실망하고 하나님께 항의하며 도전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기까지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십니다.
인생 최대의 고난을 받았던 욥이 있습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그에게 얼마나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저항하고 분노하며 도전합니다. 그러나 욥이 갖고 있던 의혹과 분노의 마음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켰습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몸은 아직도 질병이 있고 환경이 어둡고 침침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고난의 고통스러운 질문과 의심들에서 풀려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서게 된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핍박당하여 빈곤해진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요한계시록 2:9)
어릴 때 엄마가 나를 보면서 “너는 귀한 내 아들이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야.”라고 말하며 힘들고 어려울 때 껴안아주어 용기를 가졌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이 “너는 참 괜찮은 아이야. 너는 이 과목을 참 잘할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을 때 선생님의 칭찬과 인정 한마디에 인생의 용기를 갖고 새롭게 자기의 삶을 꾸려나갔던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때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조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우리를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풍성함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로 설 때 우리들은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을 향해 나갈 때는 늘 긴장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드리며 세상을 향해 나가는데 우리가 왜 긴장하게 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부정하라. 동시에 세상을 인정하고 세상에 나가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사랑과 파송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은 충돌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속을 떠나서 별도의 공간으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 역사 속에 기도원과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속과 단절해서 기독교인들끼리 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더 힘 있게 나가기 위해서 준비해라. 하나님으로 만족해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무장한 다음 세상을 향해서 나가라”고 한 것이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공동체이지 고독한 집단이나 이기적인 게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세상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인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의 첫 번째는 항상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 육체의 즐거움과 쾌락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돈과 재물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일까요? 명예와 권력은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을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과 재물을 많이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즐거워할 줄 아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가치관이 왜 부딪힐까요? 세상의 가치관은 그 자체에 모든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재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것,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예와 권력을 주신 이유이고,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즐겁게 살게 해주신 이유입니다. 다만 목표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을 갖지만, 때로 없어도 그 삶을 기쁘고 감사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몰라서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분별이 없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낮아지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거룩한 어리석음의 길을 갈 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기준이 되는 분별력은 어디에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이 온전하다, 지혜롭다, 올바르다는 판단은 세상의 학자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여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너에게 “빈곤하다, 억압받는다.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는 “너는 풍요로운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확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아프칸에서 목숨을 잃은 목사와 청년, 40일 동안 억류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곳에 갔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요청하는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자발적인 고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타인을 부유하게 만드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2천년 동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에는 누군가 수고하며 땀 흘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을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풍요를 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해주시며 풍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려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이제 우리 속에 있는 분노의 정치, 원한의 정치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부터 정치계, 경제계, 아니 교회 안에서 조차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와 원한의 인간관계, 정치 관계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은 거룩한 어리석음과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내가 누릴 특권을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연약해지는데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풍요를 택할 수 있었으나 나를 위해서 가난을 택했구나. 네가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나를 위해서 고난을 택했구나. 네가 풍요로운 자구나. 네가 진정한 자유자구나, 네가 축복을 받은 자구나.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을 뒤따라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고, 주위 사람들이 축복받는 길을 가도록 불러주셨음을 기억합니다. 서머나 교회처럼 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풍요로운 자다, 너는 지혜로운 자다, 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자다.”라고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2: 8 ~ 11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가는 사람
성지답사를 통해 터키를 방문 했을 때 제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아팠습니다. 터키의 인구가 7천만 명인데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5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10,00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터키 지역은 성경에 나오는 갈라디아 지역으로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선교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다 훼손이 되어 기독교 신앙 유적지는 없고, 몇몇 남아있는 곳도 제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으로 감격스러웠던 것은 서머나라는 곳에 가서 폴리캅이 순교당한 순교 교회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 삽입)이것은 폴리캅 순교 교회의 천정 벽화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에개해 중턱에 자리 잡은 대도시 이즈미르라는 도시의 옛 이름이 서머나로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도시입니다. 황제 숭배 도시에 폴리캅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초대에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중세 이후에 세워졌고,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순교당한 것을 기념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주후 약 2세기 중엽, 폴리캅이 순교를 당할 때 나이는 86살이었습니다. 이 벽화는 불란서 화가였던 레이몽 빼래라는 사람이 그린 것으로 폴리캅이 묶여서 화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왼쪽에는 칼을 들고 달려오는 사람도 있고 그 옆에는 손이 묶인 채로 조용히 머리 숙인 사람도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머리를 숙인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순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리캅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그 다음 순교자는 땅을 바라보면서 결심하고 있습니다. 이 때 로마의 총독이 폴리캅을 향해서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부인해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해라.”
이 순간 폴리캅은 이렇게 말하며 화형을 당합니다. “내가 86년 동안 살면서 예수님을 섬겼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결코 잘못 대하신 적이나 나를 거부하신 적이 없다.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내가 저주할 수 있겠는가?”
적색 순교 ․ 녹색 순교 ․ 백색 순교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순교의 길을 가야하는 곳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의 길을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우리의 눈을 들어 살펴보면 북한 땅에서 신앙을 갖는 것은 순교의 길을 가는 죽음의 길입니다. 한 사람만을 예찬하며 뒤따라 가야하는 독재국가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신앙 때문에 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사와 한 청년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수많은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교인가, 아니면 의미 없는 헛된 죽음에 불과한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순교는 자기가 증언하는 것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는 것으로 학자들은 순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적색순교, 즉 붉은 색깔의 순교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녹색 순교가 있고, 세 번째는 백색 순교가 있다고 합니다. 적색순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피를 흘리며 죽는 순교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생명을 바치는 순교가 적색순교입니다.
두 번째, 녹색 순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삶 전체가 고난과 고통의 길일지라도 한번 가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를 절제하고 금욕과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면서 자기 절제의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백색 순교는 일상적인 삶을 다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밥을 먹을 때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하면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일을 하면서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모든 사람이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으면서 자아를 죽이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백색 순교입니다.
순교의 삶을 살아갑니까? 순교의 삶을 포기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순교자의 길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적색 순교, 녹색 순교, 백색 순교 중 어떤 순교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일 예배드리러 나올 때 마음속에는 이제부터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공으로 삼으며 인생 전체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찬송을 부르며 필요하면 금식도 하고, 새벽기도도 나오고, 이웃봉사와 선교봉사도 해 볼 것이라는 순교를 결심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약해서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 순교는 무슨 순교, 그냥 주일 예배나 잘 드리고 집에 가서 내 생활이나 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곤 합니다. 세상을 살 때 내 욕심과 야망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때로 스스로 그렇게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예수님이 주님이며 내가 종이라는 뜻입니다. 내 자아를 죽여 예수님이 내 인생 전체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내 인생 전체를 드리고 싶은 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이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바울은 하루하루를 살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바울에게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에게 왜 편안한 것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바울에게 왜 야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더 크기에 내 삶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더 크기에 자기 인생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면서 인생을 달려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당했으나 예수님께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성경 말씀에 서머나 교회가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보면 7개의 교회가 등장하는데, 두개의 교회만 칭찬을 받았고 나머지 교회는 칭찬도 받았지만 아주 호되게 꾸중을 받았습니다. 그 중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마음속으로부터 고난의 길을 자원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궁핍의 길을 가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교회는 환란과 핍박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귀한 생명을 찾아갔습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비난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구나.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구나.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구나.”
세상 사람들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조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십니다. “네가 환란을 당하고 궁핍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풍요로운 교회구나. 네 속에 생명과 지혜가 있고 풍성한 것이 있구나.”
어느 누가 고난 받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고난 받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편안하고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캄캄한 골짜기에서 헤매는 것 보다 밝은 태양의 잔디밭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서운 추위에서 떨기보다는 따뜻한 거실에서 안락을 취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고통과 고난을 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정상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람들일까요? 왜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의 밑바닥에 고난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 아직도 고난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사탄 권세가 훼방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흔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가난의 고난, 질병의 고난, 정신적인 무의미성의 고난, 인간관계 때문에 생겨지는 아픔과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고난도 힘들지만 고난당할 때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모를 때 많은 사람들은 더 흔들립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면서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아무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외로워합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당했을 때 하나님이 너무 멀리계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에게는 관심을 이미 끈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실망하고 하나님께 항의하며 도전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기까지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십니다.
인생 최대의 고난을 받았던 욥이 있습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그에게 얼마나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저항하고 분노하며 도전합니다. 그러나 욥이 갖고 있던 의혹과 분노의 마음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지켰습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몸은 아직도 질병이 있고 환경이 어둡고 침침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고난의 고통스러운 질문과 의심들에서 풀려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서게 된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핍박당하여 빈곤해진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요한계시록 2:9)
어릴 때 엄마가 나를 보면서 “너는 귀한 내 아들이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야.”라고 말하며 힘들고 어려울 때 껴안아주어 용기를 가졌던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이 “너는 참 괜찮은 아이야. 너는 이 과목을 참 잘할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을 때 선생님의 칭찬과 인정 한마디에 인생의 용기를 갖고 새롭게 자기의 삶을 꾸려나갔던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때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조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 우리를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도 아시고 풍성함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로 설 때 우리들은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세상을 향해 나갈 때는 늘 긴장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드리며 세상을 향해 나가는데 우리가 왜 긴장하게 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부정하라. 동시에 세상을 인정하고 세상에 나가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사랑과 파송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세상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가치관은 충돌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속을 떠나서 별도의 공간으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 역사 속에 기도원과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속과 단절해서 기독교인들끼리 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더 힘 있게 나가기 위해서 준비해라. 하나님으로 만족해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무장한 다음 세상을 향해서 나가라”고 한 것이 수도원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공동체이지 고독한 집단이나 이기적인 게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세상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관과 신앙인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의 첫 번째는 항상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 육체의 즐거움과 쾌락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돈과 재물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일까요? 명예와 권력은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을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과 재물을 많이 갖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즐거워할 줄 아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가치관이 왜 부딪힐까요? 세상의 가치관은 그 자체에 모든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재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것,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예와 권력을 주신 이유이고,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즐겁게 살게 해주신 이유입니다. 다만 목표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을 갖지만, 때로 없어도 그 삶을 기쁘고 감사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몰라서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분별이 없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낮아지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거룩한 어리석음의 길을 갈 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기준이 되는 분별력은 어디에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이 온전하다, 지혜롭다, 올바르다는 판단은 세상의 학자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여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너에게 “빈곤하다, 억압받는다.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는 “너는 풍요로운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확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아프칸에서 목숨을 잃은 목사와 청년, 40일 동안 억류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곳에 갔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요청하는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자발적인 고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타인을 부유하게 만드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2천년 동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에는 누군가 수고하며 땀 흘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을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풍요를 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축복해주시며 풍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려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
이제 우리 속에 있는 분노의 정치, 원한의 정치를 끝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부터 정치계, 경제계, 아니 교회 안에서 조차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와 원한의 인간관계, 정치 관계를 종식시켜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은 거룩한 어리석음과 낮아지는데 있습니다.
내가 누릴 특권을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연약해지는데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풍요를 택할 수 있었으나 나를 위해서 가난을 택했구나. 네가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나를 위해서 고난을 택했구나. 네가 풍요로운 자구나. 네가 진정한 자유자구나, 네가 축복을 받은 자구나.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을 뒤따라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고, 주위 사람들이 축복받는 길을 가도록 불러주셨음을 기억합니다. 서머나 교회처럼 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는 풍요로운 자다, 너는 지혜로운 자다, 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자다.”라고 칭찬받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