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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사람들

로마서 5: 1 ~ 4

김지철 목사

2015.02.15

고난과 싸우는 것이 인생입니다.

‘몸과 중력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중력이란 지구 중심 방향으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중력과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것, 앉아있는 것이 바로 내 몸이 중력과의 싸움에서 잘 버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잠시 휴전을 위해 몸을 낮출 때가 있습니다. 누워있는 것입니다. 누워있는 것이 제일 편한 것은, 몸을 중력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누워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침이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병이 든 사람은 어떻습니까? 몸이 무겁게 느껴져 서 있는 것조차 괴롭습니다. 무릎연골이 상한 사람은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듭니다. 높은 산에 오를 때 숨이 차는 것은 우리의 몸이 중력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인기 스포츠로 부상한 스포츠 클라이밍(sports climbing)은 인공 절벽을 기어오르는 스포츠입니다. 손과 발끝으로만 모든 중력을 이겨내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겠습니까?
몸이 중력과 싸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고난이라는 중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몸이 중력이라는 힘에 저항할 줄 알아야 살아나듯이, 우리 삶도 고난이라는 중력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가야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려고 하면, 잘 살아보려고 하면, 어려운 사건들이 다가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시도하려고 하면, 보통 때는 없던 것 같았던 유혹이 오고 알게 모르게 고통이 뒤따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생명에 있습니다.

정신 심리학자 스캇 펙(Scott Peck)이 30년 전에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은, ‘산다는 것은 어렵다(Life is difficult.)’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삶이란 문제의 연속인 것을 자각하라고 요청합니다. 저자는 인생이 고난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용납하면, 오히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세속을 거스르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열심히 살려는 사람에게 거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던지면 물의 흐름과 속도에 따라 흘러 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송사리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삶의 고난에 거세게 도전하고 항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입니다. 만약 도전한다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될 대로 되라, 못 살겠다’하며 스스로 주저앉는다면, 죽은 인생입니다. 죽은 것에는 더 이상 고난이 없습니다. 힘든 것이 없습니다.
불교가 말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곳곳에 있습니다.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캇 펙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는 법을 배워야 죽음 앞에서 감사하며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습니까? 인생이 고난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고난은 극복해야 할 과제인 것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고난 때문에 무너지지 말고 그것에 도전하고 투쟁하며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으로부터 단순히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직면하고 그것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환난 속에서 즐거워하라고 가르칩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난 속에 있는 인간을 보며 고난 속에서도 두 가지 즐거움을 지니라고 부탁합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약속됩니다. 그것을 바라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2)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약속된 미래를 보면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어 두 번째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환난에 처한 현재 속에서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남을 학대하면서 좋아하는 새디스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조키스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불교도 고난의 깊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편안한 마음 상태를 지니라고 말합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부터 고난을 극복하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의 성숙은, 고난의 현장에서 자신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더 이상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무아지경 속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은 불교와 다릅니다. 기독교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면서 고난을 뚫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한 인도 철학자가 부처와 예수님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수하에 두 명의 궁정 화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그림을 잘 그렸기에 둘은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둘에게 ‘휴식’이라는 같은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려 오라고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 두 사람은 각자가 그린 그림을 왕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첫 번째 화가의 그림은 깊고 깊은 산 속 고요한 호수였습니다. 바람 하나 타지 않아 작은 물결도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호수였습니다. 두 번째 화가의 그림은 수십 미터나 되는 절벽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폭포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벽에 나무 하나가 있고, 휘어진 나뭇가지 위에는 작은 새 둥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울새 한 마리가 물에 젖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생동감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때려 부술 듯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철학자는, 부처는 전자에 해당하고 예수님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절에 가 보면 침묵 속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이 있습니다. 세상의 고난을 해탈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떻게 그려져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느끼며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면서, 그 고난을 넘어서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님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죽음인 동시에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교주의 비참한 죽음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그리며 그 아픔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까? 오직 기독교뿐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복음서의 절반가량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배반을 당했는지, 어떠한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십자가 길을 가셨는지, 그 고통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짖었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이라는 것이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올 때부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고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셔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비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왜 이처럼 고난의 삶을 사셨을까요? 고난에는 생명을 향한 신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갈등과 고통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부조리와 인간이 경험하는 많은 아픔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고난에서 탈출하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에 맞서고, 도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가르침은 환난 자체를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 그 자체를 기뻐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고난과 환난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보다 더 큰 것,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눈을 땅에만 두지 말고, 하늘을 향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현실의 걱정과 근심, 환난에만 신경을 쓰면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영혼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결국 삶의 반경을 축소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새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닫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선수가 있다면, 아마 김연아 선수일 것입니다.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지막에 빙글빙글 돌면서 마무리하는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어렸을 때, 팔로 코끼리 코를 만들어 다섯 바퀴, 열 바퀴 돌다가 목표를 향해 가는 게임을 해 본 적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이리저리 흔들리며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김연아는 저렇게 중심을 잘 잡을까요?
보통 훈련을 통해서 어지럼증을 극복하는데, 약 1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 훈련을 통해 뇌로 가는 어지럼증을 중간에서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발레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레에서 한 다리를 들고 회전하는 동작을 풰테(fouette)라고 하는데, 어지럽지 않기 위해 연습 과정에서부터 훈련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시선을 모으는 스포팅(spotting) 기법입니다. 무대에서 가장 먼 곳을 설정한 뒤 그곳에 보면서 도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을 보면 휙휙 돌아가는 모습만큼 본인도 어지러움을 느끼지만, 먼 곳을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멀미를 할 때도 비슷합니다. 가까운 데를 보지 말고 먼 곳을 보면, 멀미가 조금 가라앉습니다. 평소에 멀미를 안 하는 사람도 가까운 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면 수시로 변하는 모습에 어지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무엇입니까? 환난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이 무엇입니까? 내 주변에 쌓여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나를 빙글빙글 돌아가게 하는 주위 환경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작은 고통,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만 집착하면, 그것이 거대한 산처럼 다가와 스스로를 억누릅니다. 그때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고난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라봐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현실의 고난과 환난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얼마나 복잡다단합니까? 힘들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가르쳐 주는 것은, 그 길을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난과 걱정, 근심의 자리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먼 곳, 바로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먼 곳에 계실 뿐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내 마음 가운데에 계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깨닫게 됩니다. 나보다 더 큰 분, 나보다 더 고난을 받으신 분, 나보다 더 큰 아픔을 당하신 분, 바로 그 예수님이 내 주님인 것을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가장 큰 축복은, 사랑하는 존재 앞에 나가면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도 그것입니다. 스스로가 별것 아닌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딸로 부르셨습니다.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흙 한 줌에 불과한 하찮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은 믿음의 비밀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1/100도 아닐 것입니다. 그토록 큰 고난 속에서도 그의 영혼은 기뻐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상의 세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승리를 경험합시다.

나에게 고난과 아픔이 있습니까? 나를 억누르는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수많은 고난의 목록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그냥 이기는 것도 아니고,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그 사랑에 붙잡힙니다. 그것이, 나를 어지럽게 하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에너자이져(energizer)이며, 우리 삶에 동기를 불어 넣는 모티베이터(motivator)입니다. 바로 그분 앞에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고난보다, 내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일어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인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사랑을 붙잡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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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 1 ~ 4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난과 싸우는 것이 인생입니다.

‘몸과 중력과의 싸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중력이란 지구 중심 방향으로 지상의 모든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중력과 대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것, 앉아있는 것이 바로 내 몸이 중력과의 싸움에서 잘 버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잠시 휴전을 위해 몸을 낮출 때가 있습니다. 누워있는 것입니다. 누워있는 것이 제일 편한 것은, 몸을 중력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누워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침이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병이 든 사람은 어떻습니까? 몸이 무겁게 느껴져 서 있는 것조차 괴롭습니다. 무릎연골이 상한 사람은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듭니다. 높은 산에 오를 때 숨이 차는 것은 우리의 몸이 중력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인기 스포츠로 부상한 스포츠 클라이밍(sports climbing)은 인공 절벽을 기어오르는 스포츠입니다. 손과 발끝으로만 모든 중력을 이겨내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겠습니까?
몸이 중력과 싸우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고난이라는 중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몸이 중력이라는 힘에 저항할 줄 알아야 살아나듯이, 우리 삶도 고난이라는 중력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가야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려고 하면, 잘 살아보려고 하면, 어려운 사건들이 다가옵니다. 무언가 좋은 것을 시도하려고 하면, 보통 때는 없던 것 같았던 유혹이 오고 알게 모르게 고통이 뒤따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생명에 있습니다.

정신 심리학자 스캇 펙(Scott Peck)이 30년 전에 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책은, ‘산다는 것은 어렵다(Life is difficult.)’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삶이란 문제의 연속인 것을 자각하라고 요청합니다. 저자는 인생이 고난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용납하면, 오히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세속을 거스르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열심히 살려는 사람에게 거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나무 막대기 하나를 던지면 물의 흐름과 속도에 따라 흘러 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송사리 한 마리를 집어넣으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삶의 고난에 거세게 도전하고 항거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입니다. 만약 도전한다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될 대로 되라, 못 살겠다’하며 스스로 주저앉는다면, 죽은 인생입니다. 죽은 것에는 더 이상 고난이 없습니다. 힘든 것이 없습니다.
불교가 말하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곳곳에 있습니다.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래서 스캇 펙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새로 배워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는 법을 배워야 죽음 앞에서 감사하며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떻습니까? 인생이 고난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고난은 극복해야 할 과제인 것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고난 때문에 무너지지 말고 그것에 도전하고 투쟁하며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으로부터 단순히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직면하고 그것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도 바울은 환난 속에서 즐거워하라고 가르칩니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난 속에 있는 인간을 보며 고난 속에서도 두 가지 즐거움을 지니라고 부탁합니다. 그 두 가지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약속됩니다. 그것을 바라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2)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약속된 미래를 보면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어 두 번째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환난에 처한 현재 속에서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요? 남을 학대하면서 좋아하는 새디스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조키스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불교도 고난의 깊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편안한 마음 상태를 지니라고 말합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부터 고난을 극복하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의 성숙은, 고난의 현장에서 자신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더 이상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무아지경 속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응은 불교와 다릅니다. 기독교는 고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면서 고난을 뚫고 나가라고 말합니다.
한 인도 철학자가 부처와 예수님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수하에 두 명의 궁정 화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그림을 잘 그렸기에 둘은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둘에게 ‘휴식’이라는 같은 주제를 주고 그림을 그려 오라고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 두 사람은 각자가 그린 그림을 왕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첫 번째 화가의 그림은 깊고 깊은 산 속 고요한 호수였습니다. 바람 하나 타지 않아 작은 물결도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호수였습니다. 두 번째 화가의 그림은 수십 미터나 되는 절벽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폭포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벽에 나무 하나가 있고, 휘어진 나뭇가지 위에는 작은 새 둥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울새 한 마리가 물에 젖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생동감 없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때려 부술 듯 쏟아져 내리는 폭포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을 감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철학자는, 부처는 전자에 해당하고 예수님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절에 가 보면 침묵 속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이 있습니다. 세상의 고난을 해탈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떻게 그려져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슬픔, 괴로움을 느끼며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면서, 그 고난을 넘어서겠다는 몸부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님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죽음인 동시에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교주의 비참한 죽음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그리며 그 아픔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까? 오직 기독교뿐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복음서의 절반가량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배반을 당했는지, 어떠한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십자가 길을 가셨는지, 그 고통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짖었는지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이라는 것이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올 때부터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 고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셔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비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왜 이처럼 고난의 삶을 사셨을까요? 고난에는 생명을 향한 신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갈등과 고통 속에서 나타나는 삶의 부조리와 인간이 경험하는 많은 아픔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고난에서 탈출하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난에 맞서고, 도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가르침은 환난 자체를 즐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 그 자체를 기뻐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고난과 환난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고난보다 더 큰 것,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눈을 땅에만 두지 말고, 하늘을 향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현실의 걱정과 근심, 환난에만 신경을 쓰면 무엇을 잃어버립니까? 영혼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결국 삶의 반경을 축소시킬 뿐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새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닫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선수가 있다면, 아마 김연아 선수일 것입니다.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지막에 빙글빙글 돌면서 마무리하는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어렸을 때, 팔로 코끼리 코를 만들어 다섯 바퀴, 열 바퀴 돌다가 목표를 향해 가는 게임을 해 본 적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이리저리 흔들리며 넘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김연아는 저렇게 중심을 잘 잡을까요?
보통 훈련을 통해서 어지럼증을 극복하는데, 약 1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그 훈련을 통해 뇌로 가는 어지럼증을 중간에서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발레 무용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레에서 한 다리를 들고 회전하는 동작을 풰테(fouette)라고 하는데, 어지럽지 않기 위해 연습 과정에서부터 훈련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시선을 모으는 스포팅(spotting) 기법입니다. 무대에서 가장 먼 곳을 설정한 뒤 그곳에 보면서 도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을 보면 휙휙 돌아가는 모습만큼 본인도 어지러움을 느끼지만, 먼 곳을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멀미를 할 때도 비슷합니다. 가까운 데를 보지 말고 먼 곳을 보면, 멀미가 조금 가라앉습니다. 평소에 멀미를 안 하는 사람도 가까운 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면 수시로 변하는 모습에 어지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무엇입니까? 환난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이 무엇입니까? 내 주변에 쌓여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나를 빙글빙글 돌아가게 하는 주위 환경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작은 고통,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만 집착하면, 그것이 거대한 산처럼 다가와 스스로를 억누릅니다. 그때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고난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라봐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현실의 고난과 환난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얼마나 복잡다단합니까? 힘들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가르쳐 주는 것은, 그 길을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난과 걱정, 근심의 자리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먼 곳, 바로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먼 곳에 계실 뿐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내 마음 가운데에 계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서 깨닫게 됩니다. 나보다 더 큰 분, 나보다 더 고난을 받으신 분, 나보다 더 큰 아픔을 당하신 분, 바로 그 예수님이 내 주님인 것을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갖고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가장 큰 축복은, 사랑하는 존재 앞에 나가면 내가 소중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도 그것입니다. 스스로가 별것 아닌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아들로, 딸로 부르셨습니다.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흙 한 줌에 불과한 하찮은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깨달은 믿음의 비밀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1/100도 아닐 것입니다. 그토록 큰 고난 속에서도 그의 영혼은 기뻐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상의 세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승리를 경험합시다.

나에게 고난과 아픔이 있습니까? 나를 억누르는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수많은 고난의 목록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그냥 이기는 것도 아니고,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그 사랑에 붙잡힙니다. 그것이, 나를 어지럽게 하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에너자이져(energizer)이며, 우리 삶에 동기를 불어 넣는 모티베이터(motivator)입니다. 바로 그분 앞에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고난보다, 내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큰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일어서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인생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사랑을 붙잡고,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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