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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서

잠언 16: 18 ~ 20

김지철 목사

2014.02.23

교만은 과도한 자기 자랑입니다.

다음주 수요일부터 ‘재의 수요일’ 수난절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7번에 걸쳐 ‘7가지의 죄악들’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잡아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교만하다고 하기에는 겸손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또 내가 겸손하다고 자부심을 갖기에는 끊임없는 교만이 속에서 불쑥불쑥 솟구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교만이라는 것은 과도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남과 비교해서 남을 누르며 자랑하는 속성이 교만입니다.
이런 비유는 어떻겠습니까? 하나의 촛불이 한낮의 태양 앞에서 뭐 뽐낼 것이 있겠습니까? 작은 물방울 하나가 태평양 바다 가운데서 내 물방울 좀 보라고 뻐길 수가 있겠습니까? 안개같이 사라질 인간, 수많은 존재 중에 하나. 바로 그런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자랑 좀 들어보세요!” 라며 우격다짐할 만하겠습니까? 이것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교만은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입고 제일 늦게 벗는 속옷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또 교만은 교만을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또 다른 교만한 사람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겸손을 좋아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교만은 자기 잘난 맛에 교만을 독점하려 하고,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도 자기를 높여주고 인정할 만한 사람만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타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 속에는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윈-윈(win-win)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갑니다.

이런 에피소드를 들어본 적 있으실 것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누렸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였던 엘버트 공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편을 신뢰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과 사소한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엘버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여왕은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누구요?” 여왕은 대답했습니다. “영국의 여왕이에요.”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습니다. 여왕은 다시 두드렸고 다시금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요?” “여왕인데요.”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문을 두드렸고 누구냐는 물음에 여왕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당신의 아내에요.” 그러자 문이 열렸습니다. 여왕의 권위로 내려누르는 것이 아닌, 아내로서 남편을 존중하며 다가올 때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하셨습니까? 아니면 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도 서로를 사랑해 만났다가도 교만 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부부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명령과 복종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교만하고 한 사람은 겸손해야 만나는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로 잘났다고,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고 다투면서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교만은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인간적인 교만은 그래도 눈에 잘 띕니다. 그래서 고칠 수는 있습니다. 더 무서운 교만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신앙과 결부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적인 주제가 아니라, 영적인 주제로 바뀝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할 때, 처음에는 하나님만 높여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어느 날 자기과시를 하게 되고, ‘나는 참 잘 믿는 것 같아.’ 라는 착각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책을 맡고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열심히 하다보면, ‘도대체 나만큼 열심을 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만큼 헌신 많이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라는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열심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 뭔가 해보겠다는 사람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갖게 되는 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끊임없이 우리를 붙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는 길과는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하십니다. 일부러 낮은 자리에 있는 비천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병 치유와 기적의 능력을 행하셨고,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마다 사람들의 자리에서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영적 교만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은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를 다 갖고 계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권세’라는 것, ‘힘’이라는 것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멍에로 이것을 붙들어 메지 않으면 어디로 튈는지 알지 못합니다.
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강한 것, 능력 있는 것, 막강한 것이 힘입니다. 이 힘은, 자기 팽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위험한 것입니다. 마치 빅뱅이 가진 폭발하는 힘처럼 힘을 가진 사람은 폭발력을 늘 인지하고 있습니다. 자기 절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이란 위험한 것입니다.
권력이 그렇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지 않습니까? 권력을 한 번 차지하면 얼마나 세도를 부리고 싶어 합니까? 정말로 좋은 정치 권력자나 정치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 놓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재물은 또 어떻습니까? 재물을 가지면 못 할 것이 없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얼마나 뽐내고 싶습니까? 괜찮은 부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금력이란 뭘까요? 막강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신 것은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라고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배운 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좋은 지식인을 만나기 어려운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이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눠 주기 위한 축복이지 않습니까?
명예,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예는 무엇과 같이 가야할까요? 멍에와 같이 가야합니다. 멍에를 져야 그 명예가 나를 위한 명예와 힘과 권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힘의 자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예수님은 교만한 분이셨을까요, 겸손한 분이셨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보기에 ‘겸손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천년 전으로 넘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대의 종교 지도자고, 당대의 돈 있고 힘 좀 있는 권력자였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듣기가 거북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과격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시에 습관화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삶을 뒤집어 놓는 혁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핵폭탄처럼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대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했던 많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예수님을 교만한 사람, 오만한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보았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나타난 두 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 시대를 향한 비판과 저항 정신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때로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백성을 목자 없는 양처럼 내버려두는 가짜 목자들, 가짜 지도자들이다!” 예수님은 아주 험하게 당시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면 이런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종종 나도 똑같은 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들아, 권력자들아!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재물과 권력으로 너희의 배만 부르게 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이 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가르치십니다. 본래 구약 율법은 613개의 조항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세부조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냐? 전심으로 사랑하냐? 생명을 걸고 사랑하냐? 하나님이 네 인생의 주인공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다가가고 있느냐?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 이웃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느냐?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 예수님께는 그 모든 구약을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안식일 법을 위반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도대체 법이 왜 있느냐?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 아니냐?”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상 중에 이 기독교 신앙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통 받는 자, 병들어서 신음하는 자를 고치시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안식을 주셨습니다. 쉼을 주셨습니다. 평강, 즉 샬롬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샬롬을 얻는 것이 안식일의 본분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얻습니까? 샬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과 그래서 내 인생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알고 다시 힘을 얻어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삶입니다.
한국 교회에 위기가 닥쳤다는 말, 한국 교회가 흔들린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대에, 아니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를 억누르고 당신 마음대로 조종하고 사용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쉼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얼마나 수고했는지, 아프고 힘들었는지 헤아리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초청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만과 하나님 안에서의 자부심을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1:17)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예배드리는 집을 어찌하여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냐고 야단을 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교만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하나님의 뜻 앞에 선 최대의 겸손한 자기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냥 조용한 사람, 얌전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순종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침묵할 때 침묵하고, 말할 때 말하고, 훈련받을 때 훈련받고, 행동할 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 아닙니까?
우리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서 16장 18절 말씀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여기서 넘어지는 교만, 패망의 선봉인 교만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안위한 태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마음, 탐욕만을 생각하는 교만함이 우리 속에서 나올 때, 이것을 때려 부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함을 때려 부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부심을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교만은 뛰어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만하지 않다고 해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다고 해서 당당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정체성을 가졌던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19년은 3.1절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리고 이번 토요일로 95주년을 맞이합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 백성이 하나님께 축복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천국 가겠다는 안이한 생각이 예수님을 믿는 것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지 관심 갖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 곧 우리의 자세이자 목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큼 멋진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그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을 두고 세상에서 어떤 때는 교만하다, 어떤 때는 겸손하다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것인가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목표이고, 우리 삶의 태도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 때로는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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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 18 ~ 20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교만은 과도한 자기 자랑입니다.

다음주 수요일부터 ‘재의 수요일’ 수난절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7번에 걸쳐 ‘7가지의 죄악들’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잡아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교만하다고 하기에는 겸손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또 내가 겸손하다고 자부심을 갖기에는 끊임없는 교만이 속에서 불쑥불쑥 솟구치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교만이라는 것은 과도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남과 비교해서 남을 누르며 자랑하는 속성이 교만입니다.
이런 비유는 어떻겠습니까? 하나의 촛불이 한낮의 태양 앞에서 뭐 뽐낼 것이 있겠습니까? 작은 물방울 하나가 태평양 바다 가운데서 내 물방울 좀 보라고 뻐길 수가 있겠습니까? 안개같이 사라질 인간, 수많은 존재 중에 하나. 바로 그런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자랑 좀 들어보세요!” 라며 우격다짐할 만하겠습니까? 이것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교만은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입고 제일 늦게 벗는 속옷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또 교만은 교만을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또 다른 교만한 사람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겸손을 좋아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교만은 자기 잘난 맛에 교만을 독점하려 하고,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도 자기를 높여주고 인정할 만한 사람만 만나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타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 속에는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윈-윈(win-win)의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갑니다.

이런 에피소드를 들어본 적 있으실 것입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누렸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였던 엘버트 공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편을 신뢰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과 사소한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엘버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여왕은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누구요?” 여왕은 대답했습니다. “영국의 여왕이에요.” 하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습니다. 여왕은 다시 두드렸고 다시금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요?” “여왕인데요.” 이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다시 문을 두드렸고 누구냐는 물음에 여왕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당신의 아내에요.” 그러자 문이 열렸습니다. 여왕의 권위로 내려누르는 것이 아닌, 아내로서 남편을 존중하며 다가올 때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혼하셨습니까? 아니면 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도 서로를 사랑해 만났다가도 교만 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부부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명령과 복종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교만하고 한 사람은 겸손해야 만나는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로 잘났다고,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고 다투면서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교만은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인간적인 교만은 그래도 눈에 잘 띕니다. 그래서 고칠 수는 있습니다. 더 무서운 교만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인간의 교만이 신앙과 결부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적인 주제가 아니라, 영적인 주제로 바뀝니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할 때, 처음에는 하나님만 높여지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어느 날 자기과시를 하게 되고, ‘나는 참 잘 믿는 것 같아.’ 라는 착각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직책을 맡고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열심히 하다보면, ‘도대체 나만큼 열심을 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만큼 헌신 많이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라는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열심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 뭔가 해보겠다는 사람들, 영적인 지도자들이 갖게 되는 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끊임없이 우리를 붙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는 길과는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하십니다. 일부러 낮은 자리에 있는 비천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병 치유와 기적의 능력을 행하셨고,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마다 사람들의 자리에서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영적 교만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은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늘의 권세, 땅의 권세를 다 갖고 계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권세’라는 것, ‘힘’이라는 것은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멍에로 이것을 붙들어 메지 않으면 어디로 튈는지 알지 못합니다.
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강한 것, 능력 있는 것, 막강한 것이 힘입니다. 이 힘은, 자기 팽창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위험한 것입니다. 마치 빅뱅이 가진 폭발하는 힘처럼 힘을 가진 사람은 폭발력을 늘 인지하고 있습니다. 자기 절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이란 위험한 것입니다.
권력이 그렇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지 않습니까? 권력을 한 번 차지하면 얼마나 세도를 부리고 싶어 합니까? 정말로 좋은 정치 권력자나 정치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 놓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재물은 또 어떻습니까? 재물을 가지면 못 할 것이 없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얼마나 뽐내고 싶습니까? 괜찮은 부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금력이란 뭘까요? 막강한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신 것은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라고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배운 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좋은 지식인을 만나기 어려운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이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눠 주기 위한 축복이지 않습니까?
명예,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예는 무엇과 같이 가야할까요? 멍에와 같이 가야합니다. 멍에를 져야 그 명예가 나를 위한 명예와 힘과 권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새로운 힘의 자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예수님은 교만한 분이셨을까요, 겸손한 분이셨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보기에 ‘겸손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천년 전으로 넘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당대의 종교 지도자고, 당대의 돈 있고 힘 좀 있는 권력자였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듣기가 거북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과격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시에 습관화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삶을 뒤집어 놓는 혁명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핵폭탄처럼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대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했던 많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예수님을 교만한 사람, 오만한 사람이라고 평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보았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나타난 두 가지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 시대를 향한 비판과 저항 정신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때로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백성을 목자 없는 양처럼 내버려두는 가짜 목자들, 가짜 지도자들이다!” 예수님은 아주 험하게 당시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면 이런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종종 나도 똑같은 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들아, 권력자들아!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재물과 권력으로 너희의 배만 부르게 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이 그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가르치십니다. 본래 구약 율법은 613개의 조항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세부조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냐? 전심으로 사랑하냐? 생명을 걸고 사랑하냐? 하나님이 네 인생의 주인공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다가가고 있느냐?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 이웃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느냐?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 예수님께는 그 모든 구약을 단순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안식일 법을 위반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냐? 도대체 법이 왜 있느냐?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 아니냐?”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최고의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상 중에 이 기독교 신앙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통 받는 자, 병들어서 신음하는 자를 고치시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안식을 주셨습니다. 쉼을 주셨습니다. 평강, 즉 샬롬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샬롬을 얻는 것이 안식일의 본분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얻습니까? 샬롬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을,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과 그래서 내 인생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알고 다시 힘을 얻어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삶입니다.
한국 교회에 위기가 닥쳤다는 말, 한국 교회가 흔들린다는 말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당대에, 아니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랍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은 우리를 억누르고 당신 마음대로 조종하고 사용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쉼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얼마나 수고했는지, 아프고 힘들었는지 헤아리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초청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만과 하나님 안에서의 자부심을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1:17)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예배드리는 집을 어찌하여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냐고 야단을 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교만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하나님의 뜻 앞에 선 최대의 겸손한 자기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냥 조용한 사람, 얌전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순종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침묵할 때 침묵하고, 말할 때 말하고, 훈련받을 때 훈련받고, 행동할 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 아닙니까?
우리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서 16장 18절 말씀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여기서 넘어지는 교만, 패망의 선봉인 교만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안위한 태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마음, 탐욕만을 생각하는 교만함이 우리 속에서 나올 때, 이것을 때려 부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함을 때려 부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부심을 무너뜨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교만은 뛰어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만하지 않다고 해서 움츠러드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다고 해서 당당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정체성을 가졌던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19년은 3.1절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리고 이번 토요일로 95주년을 맞이합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 백성이 하나님께 축복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천국 가겠다는 안이한 생각이 예수님을 믿는 것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지 관심 갖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 곧 우리의 자세이자 목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큼 멋진 분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그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을 두고 세상에서 어떤 때는 교만하다, 어떤 때는 겸손하다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것인가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목표이고, 우리 삶의 태도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 때로는 교만과 겸손의 경계선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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