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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의 영, 겸손의 영? – 성령과 악령 15 –

빌립보서 2: 3 ~ 5

김지철 목사

2017.09.24

지도자의 행보가 공동체의 건강을 좌우합니다.

조선시대에 인재등용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등용문은 과거제도였습니다. 과거시험으로 최종 33인의 인재가 선출됩니다. 그들은 다시 왕 앞에 나가 최종 시험을 치르는데, 그 최종 시험을 ‘책문’이라 일컬었습니다. 조선 1611년 광해군 3년, 별시문과 책문의 질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당시 긴급한 일을 잘 파악하는 데 있다. 만약 상황에 맞는 조치를 적절하게 취하지 못하면, 비록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차려 입고 밤늦게 저녁을 먹으며 부지런히 힘쓴다 해도, 끝내 위태로움과 패망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긴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이에 임숙영이라는 선비가 대답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님 곧 임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의 글입니다.

“임금이 처한 자리는 하늘이 준 자리이고, 다스리는 일은 하늘이 맡긴 직분입니다. 그래서 받들 것은 하늘의 명령이고, 부지런히 노력할 것은 하늘이 맡긴 일입니다. 하지만 기강은 날마다 문란해지고 풍속은 날마다 붕괴되며, 인류는 날마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선비의 기풍은 날마다 저속해져서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고 변괴도 연거푸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남쪽과 북쪽의 국경마다 위태로워 변방을 굳게 지켜야 할 형편입니다. 섬나라 오랑캐는 독기를 뿜어내며 틈을 엿보고 있으며, 북쪽 오랑캐는 흉악한 욕심을 드러내며 틈을 노리고 있으니, 오늘날의 근심스러운 형편이 이와 같습니다.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급하고, 절실하며,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죽기를 무릅쓰고 조심스럽게 삼가 대답합니다.”

일종의 훈계조가 담긴 대답입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사회 현실에 비추어 봐도 무리가 없는 지적입니다. 그는 임금님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고 언급하면서 광해군을 비판합니다. 이에 광해군이 진노해 “그 이름을 삭제하라. 질문의 요지를 벗어나는 대책을 말하는 자를 과거시험에서 선발하지 말라.”라며 엄포를 내렸다고 합니다.

교만을 알아보는 세 가지 표지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 곧 최고 지도자가 교만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역시 리더십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교만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존폐위기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교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교만에는 세 가지의 표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 받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본래 칭찬 받고 인정받는 건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려 갑절의 결실을 맺은 이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칭찬과 박수에 너무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삶의 모든 가치를 걸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도자들이 자화자찬에 빠지게 되면,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과거 모든 독재자들이 자화자찬과 포퓰리즘(populism)에 매몰돼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둘째, ‘남과 비교의식을 너무 많이 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 배우고 훈련 받는 것,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것은 축복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시기심과 질투심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연민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웃이 성공하면 심사가 뒤틀립니다. 반면 실패하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박수를 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방어기제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일종의 ‘셀프 디펜스 메커니즘(self defense mechanism)’이 너무 빠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어떻게 공격할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방이 무너지는 것보다 내가 먼저 무너지고 내 인격이 손상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목의 어머니입니다.

교만이란 인간의 죄악 중 최악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교만하면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교만은 결국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의 반대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자의 덕목 중 최고가 바로 이 겸손입니다. 물론 과거 봉건주의 시대에는 겸손이 지도자의 덕목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 남을 강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통치자의 최고 덕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환경만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겸손은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태도였습니다. 결코 겸손이 통치자나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모든 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겸손을 꼽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이런 말을 합니다. “겸손은 실로 모든 덕목의 어머니이다. 겸손은 온갖 배움과 성정과 과정을 낳는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겸손으로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며, 지금 확신 있게 행동할 힘을 얻는다.” 겸손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겸손하면 공동체가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는 리더십을 연구한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사도 바울이 겸손의 미덕을 설파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투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야망과 명예만을 탐하면서 허영의 길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오직 겸손의 방향으로, 곧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겸손’을 찾아보면,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오늘과 같은 시대에 과연 가능할까요? 오늘날 사회는 내가 얼마나 힘이 있고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풍조입니다. 일종의 권력형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겸손은 미덕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 도리어 나약하고 비열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종교도 겸손을 미덕이라고 쉽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은 겸손을 소중한 덕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겸손은 세상의 힘의 논리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겸손은 헛된 오만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렇다면, 왜 겸손이란 덕목이 그리스도인에게 소중할까요? 무엇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비우셨습니다.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죄인처럼 비천하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셨으며,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분이 겸손의 참다운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일수록,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정말로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바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겸손은 끊임없이 욕망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을 해방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의 사회 속에서는 더 큰 욕망, 더 큰 자리, 더 큰 지위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로 이러한 헛된 오만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겸손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힘을 가진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의 가장 무서운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힘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는 대통력직도 수행해 본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권력에 의해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혀 고생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힘을 가져본 그였기에, 오히려 너무 많은 힘을 가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힘을 가진 오만한 교수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는 대학시절을 영국에서 유학생으로 지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젊은 학생 곧 간디를 불쾌하게 여기던 교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교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옆자리로 다가가 함께 먹으려 했습니다. 그때 오만한 교수가 간디에게 이렇게 비꼬며 말합니다. “이보게,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경우는 없다네.” 누가 돼지입니까? 간디가 돼지고 자신이 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디는 그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아, 걱정 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새처럼 날아갈게요.”
또 어느 날, 이 오만한 교수가 다시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길을 걷고 있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다네. 한 자루를 보니 돈이 가득하고 다른 자루를 보니 지혜가 가득했다네. 자네 같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간디는 주저 없이 “아, 당연히 저는 돈 자루부터 택하겠어요.” 그러자 교수가 혀를 차면서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라고 답합니다. 이에 간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 그렇죠. 각각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자존감과 유머 감각이 있으면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굉장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랑, 신앙, 변화로 나아가는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겸손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지식의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중)

지식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지식 대신 다른 것을 대입할 수도 있습니다. 돈 역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너 얼마 있어? 내가 가진 것과 비교할 수 있어?”라며 덤빕니다. 세상의 명예와 지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 또한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왜입니까? 그것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상대방을 귀히 여깁니다. 다른 사람을 포용하게 합니다. 남에게 배려심도 보여줄 줄 압니다. 그래서 지식의 사람에서 지혜의 사람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까지 나아가야 지혜롭고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신념의 사람에서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신념도 지식과 똑같습니다. 교만에 이르는 첩경이 인간의 신념입니다. 신앙과 신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신념은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기초합니다. 신앙인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내가 맞고 옳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회개하고 자신을 조종하며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 변화가 가능한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나는 안 바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신념의 사람입니다. 아집과 독선으로 차 있습니다. 만약 자기주장에 거짓 이데올로기까지 덧붙이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꽉 막힌 신념의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념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드러낼까? 내 신념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교만의 길, 자기를 뽐내는 길, 자기 자랑의 길일 뿐입니다.
신앙의 사람과 신념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각각의 품성과 감성이 있습니다. 먼저 신념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감성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신념에 기초한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가 자존심입니다. 자신이 획득한 돈, 권력, 지식을 붙잡는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이 권력과 지식이 무너지고 돈이 사라지면, 그도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이 붙잡는 정서는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환경이나 여건에 상관없습니다. 자존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으면서 생기는 게 바로 자존감입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은 환경을 뛰어넘는 우리의 자아정체성입니다. 이 자존감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겸손의 사람들 곧 우리 신앙이 선배들의 삶을 숙고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좋은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늘 그 삶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겸손한 신앙인이 됩시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사람을 닮아가게 돼 있습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닮아가게 돼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숙고의 차원이 아니라 한 단계 더 위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은 참으로 놀라운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죽음으로 나아가셨으며, 다시 부활의 자리로 들어오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도 이웃을 위해 네 마음을 열고, 이웃을 존중하고 높이라. 그것이 사랑의 공동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이란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존중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존중하고 있습니까? 남편 되시는 분들은 아내를 귀히 여기며 존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남편입니다. 아내 분들도 남편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아내입니다. 자녀를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혹은 친구들을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혹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맙다고 말씀하십시오.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를 존중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얼굴이 겸손으로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의 영, 바로 이 아름다운 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 겸손의 영 안에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하나하나 열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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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 3 ~ 5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지도자의 행보가 공동체의 건강을 좌우합니다.

조선시대에 인재등용문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등용문은 과거제도였습니다. 과거시험으로 최종 33인의 인재가 선출됩니다. 그들은 다시 왕 앞에 나가 최종 시험을 치르는데, 그 최종 시험을 ‘책문’이라 일컬었습니다. 조선 1611년 광해군 3년, 별시문과 책문의 질문이 다음과 같습니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당시 긴급한 일을 잘 파악하는 데 있다. 만약 상황에 맞는 조치를 적절하게 취하지 못하면, 비록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차려 입고 밤늦게 저녁을 먹으며 부지런히 힘쓴다 해도, 끝내 위태로움과 패망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긴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이에 임숙영이라는 선비가 대답합니다. 결론적으로, 나라님 곧 임금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의 글입니다.

“임금이 처한 자리는 하늘이 준 자리이고, 다스리는 일은 하늘이 맡긴 직분입니다. 그래서 받들 것은 하늘의 명령이고, 부지런히 노력할 것은 하늘이 맡긴 일입니다. 하지만 기강은 날마다 문란해지고 풍속은 날마다 붕괴되며, 인류는 날마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선비의 기풍은 날마다 저속해져서 재앙과 이변이 자주 나타나고 변괴도 연거푸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남쪽과 북쪽의 국경마다 위태로워 변방을 굳게 지켜야 할 형편입니다. 섬나라 오랑캐는 독기를 뿜어내며 틈을 엿보고 있으며, 북쪽 오랑캐는 흉악한 욕심을 드러내며 틈을 노리고 있으니, 오늘날의 근심스러운 형편이 이와 같습니다.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급하고, 절실하며,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죽기를 무릅쓰고 조심스럽게 삼가 대답합니다.”

일종의 훈계조가 담긴 대답입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사회 현실에 비추어 봐도 무리가 없는 지적입니다. 그는 임금님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고 언급하면서 광해군을 비판합니다. 이에 광해군이 진노해 “그 이름을 삭제하라. 질문의 요지를 벗어나는 대책을 말하는 자를 과거시험에서 선발하지 말라.”라며 엄포를 내렸다고 합니다.

교만을 알아보는 세 가지 표지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 곧 최고 지도자가 교만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역시 리더십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교만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존폐위기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교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교만에는 세 가지의 표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 받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입니다. 본래 칭찬 받고 인정받는 건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려 갑절의 결실을 맺은 이들을 칭찬하셨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칭찬과 박수에 너무 연연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삶의 모든 가치를 걸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지도자들이 자화자찬에 빠지게 되면,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과거 모든 독재자들이 자화자찬과 포퓰리즘(populism)에 매몰돼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둘째, ‘남과 비교의식을 너무 많이 하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 배우고 훈련 받는 것,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것은 축복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시기심과 질투심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연민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웃이 성공하면 심사가 뒤틀립니다. 반면 실패하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박수를 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방어기제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일종의 ‘셀프 디펜스 메커니즘(self defense mechanism)’이 너무 빠르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어떻게 공격할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대방이 무너지는 것보다 내가 먼저 무너지고 내 인격이 손상 받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목의 어머니입니다.

교만이란 인간의 죄악 중 최악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교만하면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교만은 결국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의 반대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겸손’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자의 덕목 중 최고가 바로 이 겸손입니다. 물론 과거 봉건주의 시대에는 겸손이 지도자의 덕목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권력, 남을 강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통치자의 최고 덕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환경만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겸손은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태도였습니다. 결코 겸손이 통치자나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모든 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지도자의 최고 덕목으로 겸손을 꼽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이런 말을 합니다. “겸손은 실로 모든 덕목의 어머니이다. 겸손은 온갖 배움과 성정과 과정을 낳는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겸손으로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며, 지금 확신 있게 행동할 힘을 얻는다.” 겸손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겸손하면 공동체가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는 리더십을 연구한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사도 바울이 겸손의 미덕을 설파했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3)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투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야망과 명예만을 탐하면서 허영의 길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길로 가라고 합니다. 오직 겸손의 방향으로, 곧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서 ‘겸손’을 찾아보면,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오늘과 같은 시대에 과연 가능할까요? 오늘날 사회는 내가 얼마나 힘이 있고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풍조입니다. 일종의 권력형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겸손은 미덕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 도리어 나약하고 비열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종교도 겸손을 미덕이라고 쉽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은 겸손을 소중한 덕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겸손은 세상의 힘의 논리와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겸손은 헛된 오만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렇다면, 왜 겸손이란 덕목이 그리스도인에게 소중할까요? 무엇보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비우셨습니다.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죄인처럼 비천하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셨으며,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분이 겸손의 참다운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일수록,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정말로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바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겸손은 끊임없이 욕망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을 해방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의 사회 속에서는 더 큰 욕망, 더 큰 자리, 더 큰 지위를 향해 나아갑니다. 바로 이러한 헛된 오만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겸손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힘을 가진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지도자의 가장 무서운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힘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는 대통력직도 수행해 본 사람입니다. 또한 다른 권력에 의해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혀 고생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힘을 가져본 그였기에, 오히려 너무 많은 힘을 가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힘을 가진 오만한 교수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마하트마 간디에 관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는 대학시절을 영국에서 유학생으로 지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의 젊은 학생 곧 간디를 불쾌하게 여기던 교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간디가 대학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교수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옆자리로 다가가 함께 먹으려 했습니다. 그때 오만한 교수가 간디에게 이렇게 비꼬며 말합니다. “이보게,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돼지와 새가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경우는 없다네.” 누가 돼지입니까? 간디가 돼지고 자신이 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디는 그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아, 걱정 마세요. 교수님. 제가 다른 곳으로 새처럼 날아갈게요.”
또 어느 날, 이 오만한 교수가 다시 간디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길을 걷고 있다가 두 개의 자루를 발견했다네. 한 자루를 보니 돈이 가득하고 다른 자루를 보니 지혜가 가득했다네. 자네 같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간디는 주저 없이 “아, 당연히 저는 돈 자루부터 택하겠어요.” 그러자 교수가 혀를 차면서 “나라면 지혜를 택했을 거네.”라고 답합니다. 이에 간디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 그렇죠. 각각 자신이 부족한 것을 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자존감과 유머 감각이 있으면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간디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의 굉장한 표현일 것입니다.

사랑, 신앙, 변화로 나아가는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겸손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지식의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중)

지식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지식 대신 다른 것을 대입할 수도 있습니다. 돈 역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너 얼마 있어? 내가 가진 것과 비교할 수 있어?”라며 덤빕니다. 세상의 명예와 지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 또한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왜입니까? 그것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상대방을 귀히 여깁니다. 다른 사람을 포용하게 합니다. 남에게 배려심도 보여줄 줄 압니다. 그래서 지식의 사람에서 지혜의 사람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사랑의 사람으로까지 나아가야 지혜롭고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신념의 사람에서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신념도 지식과 똑같습니다. 교만에 이르는 첩경이 인간의 신념입니다. 신앙과 신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신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신념은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기초합니다. 신앙인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내가 맞고 옳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면, 회개하고 자신을 조종하며 수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즉 자기 변화가 가능한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나는 안 바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신념의 사람입니다. 아집과 독선으로 차 있습니다. 만약 자기주장에 거짓 이데올로기까지 덧붙이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꽉 막힌 신념의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념의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드러낼까? 내 신념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교만의 길, 자기를 뽐내는 길, 자기 자랑의 길일 뿐입니다.
신앙의 사람과 신념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각각의 품성과 감성이 있습니다. 먼저 신념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감성은 ‘자존심’입니다. 자기 신념에 기초한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가 자존심입니다. 자신이 획득한 돈, 권력, 지식을 붙잡는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이 권력과 지식이 무너지고 돈이 사라지면, 그도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이 붙잡는 정서는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환경이나 여건에 상관없습니다. 자존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는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으면서 생기는 게 바로 자존감입니다.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은 환경을 뛰어넘는 우리의 자아정체성입니다. 이 자존감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겸손의 사람들 곧 우리 신앙이 선배들의 삶을 숙고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좋은 본보기가 되는 모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늘 그 삶을 지향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겸손한 신앙인이 됩시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마태복음 11장 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사람을 닮아가게 돼 있습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를 닮아가게 돼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숙고의 차원이 아니라 한 단계 더 위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은 참으로 놀라운 덕목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죽음으로 나아가셨으며, 다시 부활의 자리로 들어오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도 이웃을 위해 네 마음을 열고, 이웃을 존중하고 높이라. 그것이 사랑의 공동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이란 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존중해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존중하고 있습니까? 남편 되시는 분들은 아내를 귀히 여기며 존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남편입니다. 아내 분들도 남편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아내입니다. 자녀를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혹은 친구들을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혹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맙다고 말씀하십시오.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를 존중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얼굴이 겸손으로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의 영, 바로 이 아름다운 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 겸손의 영 안에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하나하나 열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7년 9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만의 영, 겸손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3, 45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빌 2:3-5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조선시대, 광해군 3년, 별시를 응시한 임숙영이라는 한 선비는 지금 당장 가장 긴급한 나랏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는 내용의 답을 적어 올렸고, 이로 인해 광해군을 심히 진노하게 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교만하며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지금 리더십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지도자가 한 나라를 존폐위기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의 요약

교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교만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열심히 일한 종들에게 ‘칭찬’을 하셨습니다만, 문제는 칭찬과 박수에 너무 연연하면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과의 ‘비교의식’입니다. 비교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서는 배우고,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보면서는 긍휼히 여기는 것은 축복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시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셋째, 자기 ‘방어기재를 남발’하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조롱하는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나아가 어떻게 하면 공격할 것인지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방보다 나의 인격이 먼저 파괴됩니다(잠16:28).

과거 봉건시대에는 겸손이 결코 지도자의 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겸손을 리더십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스티븐코비는 “겸손은 모든 덕목의 어머니이다. 겸손은 온갖 배움과 성장과 과정을 낳는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겸손으로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며, 지금 확신 있게 행동할 힘을 얻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비워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범을 보셨습니다. 또한 바울도 “다툼과 허영으로 하자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라고 말하였습니다.

지도자일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필요한 덕목이 바로 겸손입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남아공의 만델라는 “오늘날 지도자의 가장 무서운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힘이 너무 많은 것이다”라고 겸손의 중요성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겸손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지식’의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고전8:1). 지식은 남과 비교하고 자기를 자랑하지만, 사랑은 남을 귀히 여기고 포용하게 합니다. 둘째, ‘신념’의 사람에서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념은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이 드러날까를 고민하게 하지만, 신앙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높일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즉, 자기 신념에 기초한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맺어진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셋째, 겸손한 사람의 삶을 숙고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숙고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빌2:5).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내 모습이 변합니다.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닮아갈 것입니다(마11:29).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것이기 보다는 상대방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첫 시작은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겸손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겸손을 닮길 원합니다. 이 겸손의 영을 가지시고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열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이기적 신념으로 얼룩졌던 교만의 흔적들을 나누고 회개합시다.

2. 사랑과 신앙의 사람으로 겸손을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덕목들을 나누고 함께 결단합시다.

3. 내 주위에 겸손의 삶으로 존경받는 사람을 찾아봅시다. 내가 닮아가고 싶은 사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을 소개하고, 함께 은혜를 나눕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식의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신념의 사람에서 신앙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겸손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나 사랑하며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겸손의 영으로 맡겨진 일을 바르게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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