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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은 ‘교회, 기도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기도는 권리일까요, 의무일까요? 권리라고 생각하면 기도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의무라고 생각하면 기도가 자꾸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성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제일 겁나는 게 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기도를 시킬 때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못한다고 거절하는데, 거절하는 그 마음도 참 힘들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아예 “내게 기도를 시키면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라고 반 협박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내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진다는 자체가 부담일 수 있습니다. 내 기도 내용을 듣고 혹시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까 봐, 창피를 당할까 봐 겁이 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 누군가 기도를 시키면 ‘아, 다른 분이 좀 하시지….’ 하고 양보를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즐겁거나 권리라고 생각되기보다 힘겨운 의무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물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복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신앙의 스승을 통해 기도를 배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힘든 상황을 만나거나 곤고한 처지가 되면 저절로 기도가 되는 걸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기도가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싶다.’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엔 모범적인 스승의 모습이 선행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아, 우리도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기도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기도하면 어린 딸이 옆으로 와서 두 손을 모으고 쫑알대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빠가 찬양을 하면 아들이 입술을 봉긋하며 소리 내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스승이 누구입니까? 바로 어릴 때부터 함께하는 부모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습니다. 나쁜 버릇도 닮고 좋은 태도도 닮습니다. 자녀들이 내 말투를 닮아가고 내 표정, 손짓, 발짓, 행동도 닮아가는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는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면서 자녀들에겐 “너희들은 공부 잘하고 하나님께 기도도 열심히 해라.”라고 한다면, 과연 자녀들이 잘 들을까요? 나는 함부로 배우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다투면서 자녀들에겐 “너희들은 평화롭고 사이좋게 살아라.”라고 한다면, 자녀들이 그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 자녀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정확히 맞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생을 배우는 첫 스승이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입니다. 오늘 말씀 중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누가복음 11:1)
말씀에 보면, 제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한 스승이 두 분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또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배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되는 거야.”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독백으로 멈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로하는 주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넋두리로 끝나버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입속에서 맴도는 메아리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바로 배우려는 사람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누구에게 기도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누가복음 11:2 중)
이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려고 합니다. “기도를 배우겠다고? 그러면 이렇게 해라. 이런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라. 이렇게 내가 하는 대로 기도해 보거라.”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영성은 ‘예배’와 ‘기도’의 영성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많은 것을 자랑할 수 있지만, 무엇이 우리 소망교회를 이끌어가고,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의 기초를 세워 가는지 여기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예배하는 영성’과 ‘기도하는 영성’입니다.
저는 주일마다 놀라곤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 골목길이 얼마나 좁습니까? 차 한 대만 지나가도 옆길로 걸어가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주위를 뺑뺑 돈 적도 여러 번일 것입니다. 소망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마다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토로하십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골목길을 따라 예배당으로 나아오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로변에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일이면 밀물처럼 성도님들이 예배당으로 오시고, 썰물처럼 빠졌다가 또다시 밀물처럼 다음 예배를 위해 나아오십니다.
이처럼 소망교회의 영성은 예배하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고민하는 영성입니다. 또 ‘우리 영혼이 이 예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갈까’ 생각하는 영성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망교회가 갖고 있는 예배의 모습이자 예배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영성은 ‘새벽 기도의 영성’입니다. 바쁜 분일수록 새벽 기도에 나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감탄하게 됩니다. 새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모습이 참으로 고맙고 기쁩니다. 새벽이란 하루의 시작입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지 묻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며 어둠을 깨우는 믿음의 사람들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뿌듯합니까? 새벽 기도에 나와 보면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아, 새벽을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믿음의 친구들, 동지들이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또, 새벽 기도엔 중보하는 믿음의 친구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중보자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격려와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 기도의 영성이 소망교회의 영성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 엎드리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새벽 기도에 참여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집이 먼 분들은 댁에서 인터넷 예배로 말씀을 들으며 참여해도 좋을 것입니다. 방법이 어떻든 중요한 건, 소망교회 성도로서 새벽 기도 영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놀랍게도 이 짧은 기도 속에는 우리의 기도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마태복음 본문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태복음 6:9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며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이 호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친근성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우리 밖에 계시며 세계를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이는 초월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나는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계신 즉,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과 다릅니다.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은 절대 타자이십니다. 인간이 감히 넘나들 수 없는 간격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동료나 우리보다 못한 이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나는 피조물이라는 자각이 우리 기도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또 ‘친구’가 되어서 우리 곁에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항상 곁에서 자식을 보살펴 주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용기가 생겼던 것처럼 하나님을 그런 아버지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선 체면치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어막을 쌓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가 넘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아빠!” 하고 달려가 하나님 품에 안기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입니다.
…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중)
하나님이 계신 나라, 곧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빠!” 하고 달려 나가 그분 품에 안겨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서 하나 더 추가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릅니다. 비록 우리의 얼굴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나이와 성별이 다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공동체요 믿음의 형제, 자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생기며,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와 자매, 가족 공동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믿음의 공동체이자 가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다고. 그 말씀이 누가복음 1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자녀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게 부모의 심정인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떻겠냐고 하십니다.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영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그 성령으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길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그것도 탄식하며 우리를 중보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최고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기도하는 자는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 역시 기도하게 됩니다. 때문에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입을 열어 기도를 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된다면 새벽 기도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함께하는 기도에 동참하면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내 기도 소리를 내가 들어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의 특권을 주셨구나.’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도 기뻐 뛰놀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라.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근심하게 하라.” 지금 걱정되는 일이 있거나 근심하고 있다면, 혼자 붙들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대신 하나님께서 근심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숨 쉬지 않고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기도하지 않는다는 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외로울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쉴 틈이 없을 때도 기도만큼은 꼭 하셨습니다. 감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늘 묻고 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인생을 열어가셨습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아뢰십시오. 내가 누추하든 교만하든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심을 경험하면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뻐하면서 기도로 삶을 열어가는 주님의 복 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1: 1 ~ 4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은 ‘교회, 기도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기도는 권리일까요, 의무일까요? 권리라고 생각하면 기도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또, 의무라고 생각하면 기도가 자꾸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성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제일 겁나는 게 있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기도를 시킬 때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못한다고 거절하는데, 거절하는 그 마음도 참 힘들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아예 “내게 기도를 시키면 모임에 나오지 않겠다.”라고 반 협박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내 기도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진다는 자체가 부담일 수 있습니다. 내 기도 내용을 듣고 혹시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까 봐, 창피를 당할까 봐 겁이 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 누군가 기도를 시키면 ‘아, 다른 분이 좀 하시지….’ 하고 양보를 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즐겁거나 권리라고 생각되기보다 힘겨운 의무처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선물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복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신앙의 스승을 통해 기도를 배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힘든 상황을 만나거나 곤고한 처지가 되면 저절로 기도가 되는 걸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기도가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싶다.’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엔 모범적인 스승의 모습이 선행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아, 우리도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기도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기도하면 어린 딸이 옆으로 와서 두 손을 모으고 쫑알대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빠가 찬양을 하면 아들이 입술을 봉긋하며 소리 내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스승이 누구입니까? 바로 어릴 때부터 함께하는 부모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습니다. 나쁜 버릇도 닮고 좋은 태도도 닮습니다. 자녀들이 내 말투를 닮아가고 내 표정, 손짓, 발짓, 행동도 닮아가는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는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하면서 자녀들에겐 “너희들은 공부 잘하고 하나님께 기도도 열심히 해라.”라고 한다면, 과연 자녀들이 잘 들을까요? 나는 함부로 배우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다투면서 자녀들에겐 “너희들은 평화롭고 사이좋게 살아라.”라고 한다면, 자녀들이 그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 자녀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정확히 맞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생을 배우는 첫 스승이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입니다. 오늘 말씀 중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누가복음 11:1)
말씀에 보면, 제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한 스승이 두 분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또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배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되는 거야.”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가 독백으로 멈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로하는 주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넋두리로 끝나버릴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입속에서 맴도는 메아리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바로 배우려는 사람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누구에게 기도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누가복음 11:2 중)
이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려고 합니다. “기도를 배우겠다고? 그러면 이렇게 해라. 이런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라. 이렇게 내가 하는 대로 기도해 보거라.”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영성은 ‘예배’와 ‘기도’의 영성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의 영성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많은 것을 자랑할 수 있지만, 무엇이 우리 소망교회를 이끌어가고,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의 기초를 세워 가는지 여기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예배하는 영성’과 ‘기도하는 영성’입니다.
저는 주일마다 놀라곤 합니다. 우리 교회 주변 골목길이 얼마나 좁습니까? 차 한 대만 지나가도 옆길로 걸어가기가 보통 불편한 게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주위를 뺑뺑 돈 적도 여러 번일 것입니다. 소망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마다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토로하십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골목길을 따라 예배당으로 나아오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로변에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일이면 밀물처럼 성도님들이 예배당으로 오시고, 썰물처럼 빠졌다가 또다시 밀물처럼 다음 예배를 위해 나아오십니다.
이처럼 소망교회의 영성은 예배하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고민하는 영성입니다. 또 ‘우리 영혼이 이 예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갈까’ 생각하는 영성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망교회가 갖고 있는 예배의 모습이자 예배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영성은 ‘새벽 기도의 영성’입니다. 바쁜 분일수록 새벽 기도에 나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감탄하게 됩니다. 새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모습이 참으로 고맙고 기쁩니다. 새벽이란 하루의 시작입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지 묻고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며 어둠을 깨우는 믿음의 사람들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뿌듯합니까? 새벽 기도에 나와 보면 새로이 깨닫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아, 새벽을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믿음의 친구들, 동지들이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또, 새벽 기도엔 중보하는 믿음의 친구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중보자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격려와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 기도의 영성이 소망교회의 영성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새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 엎드리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새벽 기도에 참여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집이 먼 분들은 댁에서 인터넷 예배로 말씀을 들으며 참여해도 좋을 것입니다. 방법이 어떻든 중요한 건, 소망교회 성도로서 새벽 기도 영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놀랍게도 이 짧은 기도 속에는 우리의 기도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마태복음 본문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태복음 6:9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며 기도하셨고, 우리에게도 이 호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친근성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우리 밖에 계시며 세계를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이는 초월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나는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계신 즉,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과 다릅니다.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은 절대 타자이십니다. 인간이 감히 넘나들 수 없는 간격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동료나 우리보다 못한 이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나는 피조물이라는 자각이 우리 기도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또 ‘친구’가 되어서 우리 곁에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항상 곁에서 자식을 보살펴 주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용기가 생겼던 것처럼 하나님을 그런 아버지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선 체면치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어막을 쌓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가 넘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아빠!” 하고 달려가 하나님 품에 안기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입니다.
…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중)
하나님이 계신 나라, 곧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빠!” 하고 달려 나가 그분 품에 안겨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서 하나 더 추가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릅니다. 비록 우리의 얼굴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나이와 성별이 다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공동체요 믿음의 형제, 자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생기며,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형제와 자매, 가족 공동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50)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믿음의 공동체이자 가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다고. 그 말씀이 누가복음 1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자녀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게 부모의 심정인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떻겠냐고 하십니다.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합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영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그 성령으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길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그것도 탄식하며 우리를 중보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최고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비전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기도하는 자는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 역시 기도하게 됩니다. 때문에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입을 열어 기도를 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된다면 새벽 기도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함께하는 기도에 동참하면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내 기도 소리를 내가 들어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기도의 특권을 주셨구나.’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도 기뻐 뛰놀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라.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근심하게 하라.” 지금 걱정되는 일이 있거나 근심하고 있다면, 혼자 붙들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대신 하나님께서 근심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숨 쉬지 않고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기도하지 않는다는 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외로울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쉴 틈이 없을 때도 기도만큼은 꼭 하셨습니다. 감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늘 묻고 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도 기도하시면서 당신의 인생을 열어가셨습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아뢰십시오. 내가 누추하든 교만하든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심을 경험하면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뻐하면서 기도로 삶을 열어가는 주님의 복 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3월 1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 기도의 공동체”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39, 36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 11:1-4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기도는 권리일까요, 아니면 의무일까요? 기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내게 주어진 즐거운 권리라는 생각보다는 힘겨운 의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로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설교의 요약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녀들이 닮아갑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닯아 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눅11:1) 제자들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문을 보고, 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배우기를 열망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 독백이 됩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이 됩니다. 넋두리로, 자기 입속에 맴도는 메아리로 끝나게 됩니다. 배우려는 마음, 곧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2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마 6:9)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초월성과 친근성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늘에 계신’은 초월성의 표지입니다. 나는 땅에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입니다. 우리 인간과는 다른, 질적으로 차별이 있습니다.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초월성입니다.
‘아버지’는 친근성의 표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분입니다. 친숙한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스럽고 인자함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아이처럼 ‘아빠, 아버지’ 부르며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체면 차리지 말고, 방어막을 쓰지 말고, 아버지 품에 안기라고 요청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존재라는, 즉 믿음의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믿음의 친구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성령입니다.(13절) 선물로 주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기도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주시고, 성령을 받은 자는 또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배움은 입을 열어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모범이 되는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벽 미명에, 분주한 삶 속에서, 비통함과 슬픔 속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루터는 “기도하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근심하게 하라. 기도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숨 쉬지 않고 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아버지 되심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붙잡고 인생을 열어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소망교회의 영성은 예배의 영성과 새벽기도의 영성입니다. 예배와 새벽기도를 통해 누렸던 은혜 를 서로에게 간증해봅시다.
2. 기도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지, 또한 기도를 배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을 나눠봅시다.
3. 지금의 기도생활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삶을 위한 자신의 결단을 이야기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기도를 가르쳐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함으로 삶의 길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