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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말씀의 공동체!

마태복음 4: 1 ~ 4

김지철 목사

2017.01.29

신앙의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교회, 말씀의 공동체!’입니다.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합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의 의미와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라틴어 문구를 제시했습니다. 이 문구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아드(ad)는 전치사 to를 가리킵니다. 폰테스(fontes)는 fountains 또는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ad fantens는 ‘(back) to the fountains’,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이처럼 원천 및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사상이자 기치였습니다.
당시 로마교황청의 위압은 가히 모든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위기를 직감하던 당대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문주의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중심으로 모인 학자들이었는데, 아드 폰테스를 외치며 다시 그리스나 라틴의 고전 문서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읽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아드 폰테스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승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선포했습니다. 신앙의 근거와 원 자료는 바로 성경이라고 말입니다. 아드 폰테스라는 말은 라틴어 불가타 역인 시편 42편 1절에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1)

여기에 ‘시냇물을 찾기에’ 즉 ‘아드 폰테스 아쿠아룸(ad fontes aquarum)’이라는 말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역시 ‘내가 물의 근원을 찾아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드 폰테스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가 갖고 있던 제도와 직제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우선적인 관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신앙의 원천인 성경을 바르게 읽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첫 번째 과제라고 여겼습니다. 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참된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확신 아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도 세웠습니다.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문구를 제시하며, 그동안 가톨릭교회가 중시했던 교회 전승을 거부했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또 말씀에 나타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를 더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는 표제어를 내세우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개혁의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교회와 성경의 관계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세워진 피조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교회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종교개혁의 역사요, 한국 교회 신앙 성숙의 역사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국어로 미사를 드리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입니다. 그전까지 그들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자국어로 미사와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때 교황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날은 전 세계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리는 새로운 방법이 시작된 첫 날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체득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헬라어로 된 신약 그리고 신구약이 합해진 라틴어 성경을 어떻게 자국어로 번역할지 고민하고 또 고심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조항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발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먼저 시행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입니다. 이것이 지금 독일어 성경의 표준이 되고 있는 번역이기도 합니다. 이 번역 성경은 1522년에 첫 출판되었습니다. 당시 첫 판이 9월에 3,000부가 인쇄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2판이 나왔습니다. 루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총 10만 부 이상 인쇄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꽃이 온 유럽에 번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 성경의 역사는 어떨까요?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 서상륜, 백홍준과 더불어 협력하며 한국어 성경 누가복음을 처음으로 번역합니다. 이후 1885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당대 조선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말로 성경 전체가 번역된 것은 대한성서공회가 설립되면서부터입니다. 1896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로 대한성서공회가 설립되는데, 이후 1900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하면서 성경전서가 출간된 것입니다.
우리가 초창기 조선 땅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 와 제일 먼저 한 작업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덕분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써내려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 신앙은 처음부터 식자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 즉 한글을 알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취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었습니다. 당대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억압당하던 여성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은 복음 중의 복음, 기쁜 소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모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아우르는 신앙의 가치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읽고 있습니까? 새벽마다 내 손에 성경이 쥐어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 얼마만큼의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 교회에 톡톡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평소에 성경을 읽지 않아 그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이는데, 주일이 되면 먼지를 ‘톡톡’ 털어 성경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톡톡 신자라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성경을 안 읽다가 주일에만 한 번 성경을 보는 신자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는 교회 시설이 현대화되면서 스크린에 성경 구절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다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아예 가지고 오지 않거나 휴대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성경을 읽습니까? 언제 성경을 묵상합니까? 한 끼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금방 배가 고파집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릅니다. 이는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하루 한절이라도 읽지 않으면 내 영혼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느낍니까? 사실 우리 영혼은 이 갈증을 쉽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영혼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이란 걸 목격하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려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다만 영혼이 무뎌져 있기에 이런 영적 허기와 갈증을 즉각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다시 생각하게 되고 결단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신 이가 있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또 앞으로 나아갈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미리 광야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예수님의 40일 금식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마칠 즈음 마귀가 찾아옵니다. 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태복음 4:2)

무려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친구 중 몇이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해도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40일을 금식하면 보이는 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먼저 보일까요? 하나님이 먼저 보일까요? 저는 40일 금식은 못 하고 7일 금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 후 하루가 지나니까 보이는 게 먹을 것들입니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설렁탕이 자꾸만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설렁탕 국물이 눈앞에서 훌렁 거리는데, 금식이 끝날 때까지 이 현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7일 금식 후, 제가 제일 먼저 먹은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었습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주리셨을 때 마귀가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먹을 게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이렇게 시험을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현재 예수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마귀가 건드립니다. 배고프신 예수께 “네가 원하는 것이 빵 아니냐?”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유도합니다. 여기서는 떡덩이라고 돼 있는데, 사실 이것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원문을 보면 빵이라고 돼 있고,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밥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귀가 주리신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시험합니다. “인생의 첫 번째가 뭐냐? 먹는 것 아니냐? 마시는 것 아니냐? 배고플 때는 빵이 최고야. 지금 너에게도 꼭 필요하고, 민중도 그것을 환호할 걸? 네가 이 기적을 일으키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데도 무리가 없을 거야. 네 사역도 술술 풀릴 거야. 인생은 빵을 원해. 그러니 어서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 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에는 밥이 필요한 걸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밥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빵만으로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떡덩이를 먹는 것, 배가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르십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 사는 건 맞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인간다워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바로 서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참 인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물질을 원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질보다 더 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인간이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신앙도 자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록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도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의 뜻을 마음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사탄의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며 당당히 선포하십니다.
우리 신앙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목사가 되었다고 저절로 신앙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 직분을 맡았다고 신앙이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을 붙들어야 성숙됩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신앙은 어느 순간 자기 신념이 됩니다. 자기 확신으로 멈춰섭니다. 자기 이념, 오만, 편견, 오기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늘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의해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말씀 위에 서 있는지를 늘 확인하며 살아야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신앙, 그것은 참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여름과 겨울, 구약과 신약을 통독하는 성경통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전도회가 주관하고 있는데, 매년 수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말씀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참여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올해 소망교회 창립40주년을 맞이하면서 저희 목회자들도 함께 논의했습니다. 전교인이 참여하는 성경필사운동을 개최하자고 말입니다. 중・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과 청년들, 각 지구 별로 이 운동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원하는 공동체가 있으면 함께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교회 홈페이지에 성경필사란을 만들어 연이서 성경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만들려고 합니다. 올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동안 이 운동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읍시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성경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어 전해진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한 자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땀 흘려 필사한 사본이 이어지고 이어져 우리에게 이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써보는 것, 이를 통해 이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여러분께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과거 중・고등학생 시절에 어른들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니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도 많은데요.” 그때 이런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얘야, 그렇게 너무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덮어놓고 믿어보면 네가 내 나이가 되면 다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덮어놓고 믿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성경을 펴서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려면 읽어야 합니다. 어떻게 읽지도 않고 알 수가 있습니까? 또,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예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 속에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뜻인지,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이러한 모든 내용을 내가 직접 읽고 묵상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내 믿음이 커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말씀에 근거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그 말씀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십니다.
둘째, 영혼의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체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해 걷기 운동, 스트레칭, 수영, 등산 등의 운동을 합니다. 직접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기구로 운동을 하며 근육을 만들고 몸매를 가꾸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건강,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이 건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마음이 근육, 영혼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것을 견딜 만한 마음의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한마디 했다고 그것 때문에 잠 못 자고 우울해 하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도 이 근육이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와 시궁창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영혼의 근육이 있으면, 주님 앞에 모든 것을 토해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모든 상처와 아픔, 죄악을 토해 내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일어서리라.’ 이렇게 마음먹으며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의 근육을 가져야 우리 신앙생활이 쳇바퀴를 돌지 않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영적인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혼자 성경 읽기가 어렵다면, 새벽예배에 나오시면 됩니다. 새벽예배에 나오시는 게 어렵다면, 집에서 인터넷으로 영상예배에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는 게 어렵다면, 학교에 가면서 직장에 가면서 드라이브를 하면서 청취해도 좋습니다. 육체의 근육을 만드는 것처럼 영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하루 30분씩은 꼭 투자하리라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교회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신앙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말씀이 빠진 신앙 성장은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내게 주시는 은총을 경험해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내 손을 움직여 밥을 직접 입에 떠 넣어야 밥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숟가락을 입에까지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게으름뱅이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죽고 맙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닫아 놓지 마십시오. 펴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루 30분씩이라도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결심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시 펴서 말씀을 읽겠다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겠다고…. 이렇게 결단하면서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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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 1 ~ 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신앙의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교회, 말씀의 공동체!’입니다.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합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의 의미와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라틴어 문구를 제시했습니다. 이 문구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아드(ad)는 전치사 to를 가리킵니다. 폰테스(fontes)는 fountains 또는 sources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ad fantens는 ‘(back) to the fountains’,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이처럼 원천 및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사상이자 기치였습니다.
당시 로마교황청의 위압은 가히 모든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위기를 직감하던 당대 사람들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인문주의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중심으로 모인 학자들이었는데, 아드 폰테스를 외치며 다시 그리스나 라틴의 고전 문서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읽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도 아드 폰테스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전승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선포했습니다. 신앙의 근거와 원 자료는 바로 성경이라고 말입니다. 아드 폰테스라는 말은 라틴어 불가타 역인 시편 42편 1절에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편 42:1)

여기에 ‘시냇물을 찾기에’ 즉 ‘아드 폰테스 아쿠아룸(ad fontes aquarum)’이라는 말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역시 ‘내가 물의 근원을 찾아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드 폰테스는 종교개혁자들의 중요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가 갖고 있던 제도와 직제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우선적인 관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신앙의 원천인 성경을 바르게 읽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첫 번째 과제라고 여겼습니다. 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참된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확신 아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문구도 세웠습니다.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문구를 제시하며, 그동안 가톨릭교회가 중시했던 교회 전승을 거부했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또 말씀에 나타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를 더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는 표제어를 내세우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개혁의 목표를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교회와 성경의 관계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세워진 피조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교회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성경 번역의 역사는 종교개혁의 역사요, 한국 교회 신앙 성숙의 역사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자국어로 미사를 드리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입니다. 그전까지 그들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자국어로 미사와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그때 교황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날은 전 세계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리는 새로운 방법이 시작된 첫 날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체득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헬라어로 된 신약 그리고 신구약이 합해진 라틴어 성경을 어떻게 자국어로 번역할지 고민하고 또 고심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조항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발화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먼저 시행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일입니다. 이것이 지금 독일어 성경의 표준이 되고 있는 번역이기도 합니다. 이 번역 성경은 1522년에 첫 출판되었습니다. 당시 첫 판이 9월에 3,000부가 인쇄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2판이 나왔습니다. 루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총 10만 부 이상 인쇄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묵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종교개혁의 불꽃이 온 유럽에 번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한글 성경의 역사는 어떨까요? 1882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 서상륜, 백홍준과 더불어 협력하며 한국어 성경 누가복음을 처음으로 번역합니다. 이후 1885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당대 조선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들고 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말로 성경 전체가 번역된 것은 대한성서공회가 설립되면서부터입니다. 1896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로 대한성서공회가 설립되는데, 이후 1900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1911년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하면서 성경전서가 출간된 것입니다.
우리가 초창기 조선 땅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 와 제일 먼저 한 작업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덕분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써내려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신교 신앙은 처음부터 식자층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 즉 한글을 알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취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었습니다. 당대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억압당하던 여성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어린아이들에게 성경은 복음 중의 복음, 기쁜 소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모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아우르는 신앙의 가치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읽고 있습니까? 새벽마다 내 손에 성경이 쥐어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 얼마만큼의 성경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 교회에 톡톡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평소에 성경을 읽지 않아 그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이는데, 주일이 되면 먼지를 ‘톡톡’ 털어 성경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톡톡 신자라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성경을 안 읽다가 주일에만 한 번 성경을 보는 신자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는 교회 시설이 현대화되면서 스크린에 성경 구절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다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아예 가지고 오지 않거나 휴대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성경을 읽습니까? 언제 성경을 묵상합니까? 한 끼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금방 배가 고파집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릅니다. 이는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하루 한절이라도 읽지 않으면 내 영혼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느낍니까? 사실 우리 영혼은 이 갈증을 쉽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영혼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특히, 죽음이란 걸 목격하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려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다만 영혼이 무뎌져 있기에 이런 영적 허기와 갈증을 즉각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다시 생각하게 되고 결단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신 이가 있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도록, 또 앞으로 나아갈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미리 광야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광야에서 예수님의 40일 금식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마칠 즈음 마귀가 찾아옵니다. 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태복음 4:2)

무려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친구 중 몇이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해도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40일을 금식하면 보이는 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먼저 보일까요? 하나님이 먼저 보일까요? 저는 40일 금식은 못 하고 7일 금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 후 하루가 지나니까 보이는 게 먹을 것들입니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설렁탕이 자꾸만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설렁탕 국물이 눈앞에서 훌렁 거리는데, 금식이 끝날 때까지 이 현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7일 금식 후, 제가 제일 먼저 먹은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었습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주리셨을 때 마귀가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셨기에 먹을 게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이렇게 시험을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3)

현재 예수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마귀가 건드립니다. 배고프신 예수께 “네가 원하는 것이 빵 아니냐?”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유도합니다. 여기서는 떡덩이라고 돼 있는데, 사실 이것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원문을 보면 빵이라고 돼 있고,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밥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귀가 주리신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시험합니다. “인생의 첫 번째가 뭐냐? 먹는 것 아니냐? 마시는 것 아니냐? 배고플 때는 빵이 최고야. 지금 너에게도 꼭 필요하고, 민중도 그것을 환호할 걸? 네가 이 기적을 일으키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데도 무리가 없을 거야. 네 사역도 술술 풀릴 거야. 인생은 빵을 원해. 그러니 어서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 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에는 밥이 필요한 걸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려면 밥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빵만으로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떡덩이를 먹는 것, 배가 채워지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르십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 사는 건 맞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인간다워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바로 서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 참 인간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물질을 원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질보다 더 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인간이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신앙도 자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기록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도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의 뜻을 마음에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오늘처럼 사탄의 유혹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며 당당히 선포하십니다.
우리 신앙은 무엇에 근거합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목사가 되었다고 저절로 신앙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교회 직분을 맡았다고 신앙이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을 붙들어야 성숙됩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신앙은 어느 순간 자기 신념이 됩니다. 자기 확신으로 멈춰섭니다. 자기 이념, 오만, 편견, 오기로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늘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의해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말씀 위에 서 있는지를 늘 확인하며 살아야 우리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는 신앙, 그것은 참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여름과 겨울, 구약과 신약을 통독하는 성경통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전도회가 주관하고 있는데, 매년 수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말씀을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참여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올해 소망교회 창립40주년을 맞이하면서 저희 목회자들도 함께 논의했습니다. 전교인이 참여하는 성경필사운동을 개최하자고 말입니다. 중・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과 청년들, 각 지구 별로 이 운동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원하는 공동체가 있으면 함께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교회 홈페이지에 성경필사란을 만들어 연이서 성경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만들려고 합니다. 올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동안 이 운동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읍시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성경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어 전해진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한 자라도 틀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땀 흘려 필사한 사본이 이어지고 이어져 우리에게 이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써보는 것, 이를 통해 이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지녀야 할 성경에 대한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여러분께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과거 중・고등학생 시절에 어른들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니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도 많은데요.” 그때 이런 대답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얘야, 그렇게 너무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덮어놓고 믿어보면 네가 내 나이가 되면 다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덮어놓고 믿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성경을 펴서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려면 읽어야 합니다. 어떻게 읽지도 않고 알 수가 있습니까? 또,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예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성경 속에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슨 뜻인지,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이러한 모든 내용을 내가 직접 읽고 묵상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내 믿음이 커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말씀에 근거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그 말씀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십니다.
둘째, 영혼의 근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체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해 걷기 운동, 스트레칭, 수영, 등산 등의 운동을 합니다. 직접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기구로 운동을 하며 근육을 만들고 몸매를 가꾸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건강,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이 건강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마음이 근육, 영혼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것을 견딜 만한 마음의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한마디 했다고 그것 때문에 잠 못 자고 우울해 하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도 이 근육이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죄악의 구렁텅이와 시궁창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영혼의 근육이 있으면, 주님 앞에 모든 것을 토해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모든 상처와 아픔, 죄악을 토해 내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리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일어서리라.’ 이렇게 마음먹으며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의 근육을 가져야 우리 신앙생활이 쳇바퀴를 돌지 않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영적인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첫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혼자 성경 읽기가 어렵다면, 새벽예배에 나오시면 됩니다. 새벽예배에 나오시는 게 어렵다면, 집에서 인터넷으로 영상예배에 참여하셔도 좋습니다. 새벽 시간에 일어나는 게 어렵다면, 학교에 가면서 직장에 가면서 드라이브를 하면서 청취해도 좋습니다. 육체의 근육을 만드는 것처럼 영적인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하루 30분씩은 꼭 투자하리라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교회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신앙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말씀이 빠진 신앙 성장은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내게 주시는 은총을 경험해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내 손을 움직여 밥을 직접 입에 떠 넣어야 밥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숟가락을 입에까지 옮기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게으름뱅이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죽고 맙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닫아 놓지 마십시오. 펴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루 30분씩이라도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결심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시 펴서 말씀을 읽겠다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겠다고…. 이렇게 결단하면서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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