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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생 배움의 열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교회, 배움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2015년 한 방송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설문 내용 중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10대부터 50대까지 가장 후회되는 일이 ‘공부 좀 할 걸….’이었습니다. 60대 남성들은 ‘돈 좀 모을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70대 남성들은 ‘아내 눈에 눈물 나게 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아마 젊은 시절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이 2~30년이 흐른 지금 가장 후회된다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도 10대부터 40대까지는 똑같았습니다. 남성들처럼 ‘공부 좀 할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50대 여성들은 ‘애들 교육에 신경 좀 더 쓸 걸….’ 하고 후회했고, 60대 여성들은 ‘애들에게 더 잘할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70대 여성들은 ‘좀 더 배우고 싶었는데….’라는 후회를 토로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많은 응답을 차지한 것이 바로 ‘공부 좀 더 할 걸….’이라는 배움에 대한 후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공부하라는 소리가 잔소리처럼 여겨졌는데, 자라고 나니 그 공부를 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장 후회되는 게 ‘공부 좀 더 할 걸….’이라는 마음입니까? 물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공부에 대한 후회가 있다면, 지금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책, 경험, 사람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공부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싶다면 다른 데 말고 서점을 가야 합니다.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삽니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사도 좋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사서 보는 것입니다. 그 책에 그림만 그려져 있어도 괜찮습니다. 사진만 찍혀 있다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저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펴서 보고 읽는 것입니다. 다 읽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제목만이라도 훑어보다 보면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시작됩니다. 요즘은 e-book도 있어서 모바일로도 책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험’을 통해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됩니다. 세수하고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는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경험 자체가 공부인 것입니다. 내가 밟는 땅이 공부의 장이며,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 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친구와 이웃, 모든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부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종종 여행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회나 음악회에 가 보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얼마 전, 구역 식구들에게 동숭동에서 하는 ‘더 북(The Book)’이라는 뮤지컬을 보시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뮤지컬을 보고 오신 분들이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헌신을 보며 감동하고 눈물을 쏟았다는 고백을 전해 주셨습니다. 저 또한 며칠 전,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새로운 감흥이 밀려왔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발걸음을 움직여 닿는 자리가 바로 배움의 자리입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보면, 내 모든 삶의 자리에서도 배울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을 통해 배우는 공부입니다. 친구, 멘토, 스승을 통해 우리는 배움을 얻습니다. 인생의 최고 복이 있다면 사람의 복 곧 인복이 아닙니까?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와 상사들, 가정에서 만나는 배우자와 형제자매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과 목사님들, 이러한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만남, 인간의 만남 자체가 공부인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며 우리는 배울 수 있고, 그 누군가의 한마디로 내 인생이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격이 동반되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더불어 배우는 배움이기에, 가장 강렬한 공부이자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배움이 가장 잘 이뤄지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책 중의 책인 성경책을 읽습니다.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토록 이 말씀을 붙들며 살았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창립40주년을 맞이하며 전교인이 함께하는 성경 필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에서 대학‧청년부, 각 구역에 이르기까지 온 성도들이 성경 필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획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정성껏 마음을 다해 성경 필사를 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새벽기도회 본문은 성경 순서대로 쭉 진행되고 있는데, 이 말씀 전체를 다 읽고 묵상하는 데 꼬박 6년이 걸립니다. 오랜 시간이지만, 이 말씀을 차근차근 읽어 나가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읽으라는 부탁을 반복적으로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 4~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4~7)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되는지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통은 언제나 말씀 묵상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왔습니다. 말씀 없는 신앙, 그것은 허구 신앙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신앙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움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인도해 내셨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며 가나안 땅에 이르는 출애굽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삶의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만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개인의 작고 소소한 삶 가운데도 역사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놀랍게도 시인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시편 3편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3:5)
여기 보면, 세 동사가 나옵니다. ‘눕다’, ‘자다’, ‘깨다’입니다. 어제 우리도 누워서 잠을 잤고 오늘 깨어 일어났습니다. 이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을 시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실존적인 경험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탁월한 신앙의 지혜입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우리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의 간증 아닙니까? 때로는 실수했고, 실패도 했으며, 눈물 흘리며 탄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감사 고백을 드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자 신앙생활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가장 결정적인 배움에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이자 멘토,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얻으며 삶의 깊은 지혜도 배웁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자랑이자 기쁨이 됩니다. 저 역시 예수님만 생각하면 ‘아! 내가 예수님을 믿은 게 정말 잘했다.’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의 스승이자 최고의 친구와 형제이신 예수님께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30절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9~30)
예수님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라는 건, 예수님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보고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배움은 인격적인 배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 그는 당대 석학이었습니다. 헬라 문화와 철학에 정통한 인물이었고, 히브리 신앙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수많은 지식이 오히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대반전 됩니다. ‘아,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네! 그분에게 진리가 있네!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바로 그분 안에 있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그분께 드렸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이 전도자 바울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9)
그는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배운 진리는 그동안의 지식과 달랐습니다. 지식의 진리, 이성의 진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마음으로 깨닫는 진리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운 생명의 진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움은 인격적이며 역동적인 배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공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데이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 자신의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게 와서 나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내 인격을 맛보고, 성품을 맛보고, 내가 전한 모든 말씀을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이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지 직접 와서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제적 진리를 뛰어넘습니다. 객관적 진리에 머물지 않고 삶의 진리로, 경험의 진리로, 자율성의 진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초청에 응해 그분께 나아가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생각과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지혜에 매순간 놀라고 ‘어떻게 이런 지혜자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쳐 주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명제를 단순히 말로만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을 통해 그 명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비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이 모든 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치신다면,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는 당신의 사역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그분의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참 생명인지를 직접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평안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치실 때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허락하시면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진리이시다’라는 명제를 알려 주실 때에도 상아탑에 갇힌 진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임마누엘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면서 그분이 참 진리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정하셔서 말씀 속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피부로 느끼며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배움은 너무나 역동적이고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진리를 배웁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평생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칠십이 되어도, 팔십이 되어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배운다.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이 뜨겁다.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 삶에 임마누엘로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그 말씀대로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또,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력이 좋아야 배우는 게 아닙니다. 계산 능력이 좋다고 해서 예수님의 배움에 능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륜이 쌓여야 예수님을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배움은 어린아이 때부터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자, 손녀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많은 학식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며 겸손히 서게 될 때, 비로소 참 진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배울 수 있는 주님의 교육의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며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새벽기도에 나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배우고, 성경 통독을 하면서 배우고, 내 삶의 현장에 들어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배웁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하는 내 삶의 모든 자리가 배움의 자리가 됩니다. 또, 그 배움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열린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입니다. 이 마음과 자세를 잃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평생 동안 생명의 진리를 배워 나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4: 8 ~ 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우리는 평생 배움의 열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교회, 배움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2015년 한 방송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설문 내용 중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10대부터 50대까지 가장 후회되는 일이 ‘공부 좀 할 걸….’이었습니다. 60대 남성들은 ‘돈 좀 모을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70대 남성들은 ‘아내 눈에 눈물 나게 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아마 젊은 시절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이 2~30년이 흐른 지금 가장 후회된다는 것 같습니다. 여성들도 10대부터 40대까지는 똑같았습니다. 남성들처럼 ‘공부 좀 할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50대 여성들은 ‘애들 교육에 신경 좀 더 쓸 걸….’ 하고 후회했고, 60대 여성들은 ‘애들에게 더 잘할 걸….’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70대 여성들은 ‘좀 더 배우고 싶었는데….’라는 후회를 토로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많은 응답을 차지한 것이 바로 ‘공부 좀 더 할 걸….’이라는 배움에 대한 후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공부하라는 소리가 잔소리처럼 여겨졌는데, 자라고 나니 그 공부를 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장 후회되는 게 ‘공부 좀 더 할 걸….’이라는 마음입니까? 물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공부에 대한 후회가 있다면, 지금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책, 경험, 사람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 공부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싶다면 다른 데 말고 서점을 가야 합니다.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삽니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사도 좋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사서 보는 것입니다. 그 책에 그림만 그려져 있어도 괜찮습니다. 사진만 찍혀 있다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저 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책을 펴서 보고 읽는 것입니다. 다 읽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제목만이라도 훑어보다 보면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시작됩니다. 요즘은 e-book도 있어서 모바일로도 책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경험’을 통해 하는 공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며 배우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의 배움은 시작됩니다. 세수하고 밥을 먹고 직장에 나가는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경험 자체가 공부인 것입니다. 내가 밟는 땅이 공부의 장이며,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공부의 대상이 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친구와 이웃, 모든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부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종종 여행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시회나 음악회에 가 보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얼마 전, 구역 식구들에게 동숭동에서 하는 ‘더 북(The Book)’이라는 뮤지컬을 보시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뮤지컬을 보고 오신 분들이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헌신을 보며 감동하고 눈물을 쏟았다는 고백을 전해 주셨습니다. 저 또한 며칠 전,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새로운 감흥이 밀려왔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발걸음을 움직여 닿는 자리가 바로 배움의 자리입니다. 조금만 눈을 뜨고 보면, 내 모든 삶의 자리에서도 배울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을 통해 배우는 공부입니다. 친구, 멘토, 스승을 통해 우리는 배움을 얻습니다. 인생의 최고 복이 있다면 사람의 복 곧 인복이 아닙니까?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와 상사들, 가정에서 만나는 배우자와 형제자매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과 목사님들, 이러한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만남, 인간의 만남 자체가 공부인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며 우리는 배울 수 있고, 그 누군가의 한마디로 내 인생이 변화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격이 동반되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인격과 더불어 배우는 배움이기에, 가장 강렬한 공부이자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배움이 가장 잘 이뤄지는 자리가 어디일까요?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책 중의 책인 성경책을 읽습니다.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토록 이 말씀을 붙들며 살았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창립40주년을 맞이하며 전교인이 함께하는 성경 필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에서 대학‧청년부, 각 구역에 이르기까지 온 성도들이 성경 필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획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정성껏 마음을 다해 성경 필사를 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말씀을 읽고 묵상합니다. 새벽기도회 본문은 성경 순서대로 쭉 진행되고 있는데, 이 말씀 전체를 다 읽고 묵상하는 데 꼬박 6년이 걸립니다. 오랜 시간이지만, 이 말씀을 차근차근 읽어 나가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읽으라는 부탁을 반복적으로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 4~7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4~7)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말씀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되는지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통은 언제나 말씀 묵상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왔습니다. 말씀 없는 신앙, 그것은 허구 신앙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신앙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움을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인도해 내셨습니다.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며 가나안 땅에 이르는 출애굽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삶의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만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개인의 작고 소소한 삶 가운데도 역사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놀랍게도 시인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시편 3편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3:5)
여기 보면, 세 동사가 나옵니다. ‘눕다’, ‘자다’, ‘깨다’입니다. 어제 우리도 누워서 잠을 잤고 오늘 깨어 일어났습니다. 이 일상적이고 평이한 삶을 시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실존적인 경험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탁월한 신앙의 지혜입니다. 삶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우리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의 간증 아닙니까? 때로는 실수했고, 실패도 했으며, 눈물 흘리며 탄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우리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감사 고백을 드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고백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자 신앙생활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가장 결정적인 배움에 도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친구이자 멘토,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얻으며 삶의 깊은 지혜도 배웁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자랑이자 기쁨이 됩니다. 저 역시 예수님만 생각하면 ‘아! 내가 예수님을 믿은 게 정말 잘했다.’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의 스승이자 최고의 친구와 형제이신 예수님께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30절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9~30)
예수님에게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라는 건, 예수님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보고 느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배움은 인격적인 배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 그는 당대 석학이었습니다. 헬라 문화와 철학에 정통한 인물이었고, 히브리 신앙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수많은 지식이 오히려 진리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대반전 됩니다. ‘아,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네! 그분에게 진리가 있네!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바로 그분 안에 있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그분께 드렸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이 전도자 바울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바울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9)
그는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배운 진리는 그동안의 지식과 달랐습니다. 지식의 진리, 이성의 진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고 마음으로 깨닫는 진리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운 생명의 진리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움은 인격적이며 역동적인 배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공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나 데이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 자신의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내게 와서 나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내 인격을 맛보고, 성품을 맛보고, 내가 전한 모든 말씀을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어떤 관점으로 이 시대와 역사를 바라보는지 직접 와서 경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명제적 진리를 뛰어넘습니다. 객관적 진리에 머물지 않고 삶의 진리로, 경험의 진리로, 자율성의 진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초청에 응해 그분께 나아가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생각과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지혜에 매순간 놀라고 ‘어떻게 이런 지혜자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쳐 주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명제를 단순히 말로만 가르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을 통해 그 명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비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이 모든 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치신다면,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는 당신의 사역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그분의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참 생명인지를 직접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평안이시다’라는 명제를 가르치실 때도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허락하시면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진리이시다’라는 명제를 알려 주실 때에도 상아탑에 갇힌 진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임마누엘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면서 그분이 참 진리 되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정하셔서 말씀 속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피부로 느끼며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배움은 너무나 역동적이고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진리를 배웁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평생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칠십이 되어도, 팔십이 되어도 “나는 예수님 때문에 배운다.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이 뜨겁다.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 삶에 임마누엘로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그 말씀대로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또,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력이 좋아야 배우는 게 아닙니다. 계산 능력이 좋다고 해서 예수님의 배움에 능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륜이 쌓여야 예수님을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배움은 어린아이 때부터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엄마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자, 손녀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많은 학식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며 겸손히 서게 될 때, 비로소 참 진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배울 수 있는 주님의 교육의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며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새벽기도에 나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배우고, 성경 통독을 하면서 배우고, 내 삶의 현장에 들어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배웁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하는 내 삶의 모든 자리가 배움의 자리가 됩니다. 또, 그 배움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열린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충만해지는 사람입니다. 이 마음과 자세를 잃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 평생 동안 생명의 진리를 배워 나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3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 배움의 공동체”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84, 43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빌 4:8-9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2015년 한 방송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1위가 무엇일지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각 연령대별로 나온 가장 많은 후회 중 하나가 공부를 덜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는 우리가 평생 책임져야 할 과제이면서 동시에 평생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세 가지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책을 손에 드는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며 새로운 것을 느낍니다. 전시회나 공연을 관람하며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좋은 친구, 멘토,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배우는 것, 그것이 최고의 배움이요 공부입니다.
설교의 요약
이 세 가지의 배움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책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마음에 새기는 것은 그것이 친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신6:4-5) 말씀 속에는 하나님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의 비밀도 다 들어있습니다. 최고의 공부입니다. 또한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경험, 즉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또한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큼 자기의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삶의 사건으로 인식한 백성도 없습니다. 가장 작은 순간도, 하찮은 것 같은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 경험이 새로운 삶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거대한 역사 경험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실존의 경험까지 포함합니다. 내 삶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며 깨닫게 되는 배움이 있습니다. 삶 속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간증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가장 결정적인 배움은 최고의 친구요, 멘토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마11:29) 신앙의 배움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얻게 되는 배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그는 지식으로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이 변화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9절) 바울이 배운 진리는 가슴으로 아는 진리, 마음으로 깨닫는 진리,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였습니다. 바울의 삶에 거대한 열정을 만들어 내었던 살아있는 진리, 그것은 곧,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배운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을 맛보고 경험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어떤 시간과 역사관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체험해 보라는 초청입니다.(마11:28)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 그것이 신앙의 배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을 예수님을 통해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안이시다.‘ 예수님 안에서 죄 용서의 기쁨,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것을 함께 체험하고 경험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을 통한 배움으로 삶의 길을 넓혀 가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책, 삶의 경험, 만남 등을 통해 배움을 얻게 된 좋은 기억이 있다면 서로 이야기해봅시다.
2.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배움으로 새롭게 변화된 자신의 삶의 간증을 나눠봅시다.
3. 신앙생활을 통한 배움을 위해 필요한 모습,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결단하고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배울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며 성숙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