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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린도전서 2: 1 ~ 5

김지철 목사

2014.10.26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박으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제 3년만 있으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은 당대 거대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사실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95개 조항 자체는 라틴어로 쓰여졌습니다. 라틴어란 당대 지식인들의 언어였습니다. 즉 처음에는 고위공직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학자 층의 엘리트들과 교회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문제제기는 교회비판이라는 휘발성이 강한 주제에 불꽃을 당기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곧 라틴어로 썼던 95개 조항은 당대의 독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개혁운동이 들풀에 불이 번지듯 독일과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건축물입니다. 당시 그것을 짓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로 하여금 면죄부를 파는 일을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설교자들은 매우 위험한 소리를 서슴없이 해댔습니다. 95개조 조항 중 면제부에 대한 비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7조입니다. ‘돈이 헌금함에서 쨍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해방된다고 꾸며대는 사람들은 인간의 허튼 소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71조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따른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는 말을 하는 자는 비난받고 저주받을 것이다.’ 72조입니다. ‘그러나 면죄부 설교자의 무절제하고 뻔뻔스러운 말에 맞서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듯 재물이 필요해서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교회의 거짓된 현상을 비판하며 나섰습니다. 죄의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돈과 권력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가톨릭교회의 후안무치함에 대해서 직접 비판과 비난을 가한 것입니다. 특히 86조에서 ‘오늘날 최고 부자들보다 더 부유한 교황은 가난한 신도의 돈이 아니라 넘치도록 많은 자신의 돈으로 베드로 성당을 신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직접적인 도전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오직 하나님에 근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루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루터를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사나운 멧돼지 한 마리가 날뛰고 있다.” 그를 짐승이라 표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루터를 종교적 이단으로 낙인찍기까지 합니다. 그때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교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통치된다.” 말하며 교황에게 저항합니다.
‘귀족에게 보낸 글’이라는 유명한 그의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성직자 계급이다. 왜냐하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사제, 주교, 교황에 임명된 것처럼 자랑해도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이러한 직분을 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말이다.” 그는 교황이 가진 위치와 종교 회의가 갖고 있는 모든 결정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결국 루터는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종교 청문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1521년 4월 17일에 열린 보름스 회의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황제와 대교주 앞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저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이 당신의 책인가?” 루터는 자신이 쓴 책이라고 시인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책들에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루터는 대답을 위해 하루 정도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건에 대해 루터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다음날인 4월 18일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황제와 교황의 대리자 앞에 담대히 서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 앞에서 용기 있게 말합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며 증언을 마칩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당대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교황이 이단 파문을 내려 화형에 처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루터도 보름스 회의에 가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말했습니다. “보름스 집들의 지붕에 있는 기왓장처럼 악마새끼들이 많아도 나는 갈 것이다.”
그렇게 그는 보름스 회의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한 말들 때문에 그의 모든 법적인 보호망은 사라지게 됩니다. 루터를 언제든지 죽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서 숨어 지내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 번역입니다.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당대의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기의 언어로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마틴 루터가 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직자들에게 독점되었던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아주 혁명적인 것입니다. 용기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리며 행했던 믿음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루터가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동조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회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500년 전에 말입니다.
루터 본인은 “내가 종교개혁을 한다.”는 말을 직접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따를 뿐이라고 말하며 살아갔을 때 그것이 종교개혁이 되었고, 결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가 선언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교황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라는 성경 속 본질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공감하며 신앙의 자리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변화와 개혁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귀한 일을 할 때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 속에 올바른 것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교회의 변화와 개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특별히 열심히 읽었던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 서신입니다. 그는 로마서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를 독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고린도서 속에서 바울이 가졌던 하나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 복음에 그는 그의 삶 전체를 걸어도 괜찮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시대에도 깨달음을 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갈등하고 있습니다. 분파하고 분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영적인 지도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게바가 있습니다. 아볼로가 있습니다. 바울이 있습니다. 당대 초대 교회에서 최고로 여겨지던 사도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걸고 갈등하며 분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성령의 은사는 듬뿍 받았지만 생각은 멈춰 있었습니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열광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메말라 있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만을 뽐내며 자랑하는 교만한 교회가 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보이는 지도자에 의해 삼삼오오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인은 나 바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치고, 충성하며 섬겼지만, 교회를 위해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를 위하여 죽었고 다시 부활하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영적 지도자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영적 지도자들 때문에 분파하고 갈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말재주를 보여주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수사적인 언어기법을 드러내느라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전서 2:4)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사람들이 설득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말씀을 듣고 감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말씀을 증거할 때마다 아멘, 아멘하며 감동받고 감격하며 눈물 흘릴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훌륭한 고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민에 빠지는 순간, 위험해진다는 것입니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설이 뛰어나고, 언어가 지성적이고 감성적이어야 좋은 설교라는 생각은, 설교를 잘하는 자로 스스로를 자랑하고 싶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꾸로 이야기합니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을 사용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내려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내 주님이시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자랑스럽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나의 아바아버지시구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이구나.’ 이런 자존감이 생기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사랑으로 내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잔잔해지고 하나님 사랑에 감복하게 되어 다시금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목표를 향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먼저 드러내기를 열망했습니다.
셋째,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3)

두렵고 떨림으로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것도 오랫동안 믿은 사람, 교회의 직분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두렵고 떨림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더 이상 가슴이 뛰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의 오기만 남아있고, 내 생각만으로 꽉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국민을 두려워하면서 정치를 하라고 말입니다. 이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고, 믿음의 공동체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마음들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는 것에서부터입니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두려움과 떨림이 더 풍성해야 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고통이고 문제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드셨습니까? 신앙의 연륜이 쌓이셨습니까? 점점 마음이 굳어집니까? 생각이 멈춰 있습니까? 아니면 더 부드럽고 넉넉해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몸은 딱딱해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롭고 부드럽고 넉넉해진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워지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고 부드러워지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의 문을 열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합해서 단 한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적 문제이고, 타락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진행했던 루터는 건강에 위협을 당했습니다. 점점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46편을 읽으며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이 말씀으로 힘을 얻은 그가 작곡하고 작사한 곡이 바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그는 이 곡의 가사처럼 방패와 병기 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다시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의 연약함에 대해 아파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다시 말씀 앞에 돌아오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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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 1 ~ 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박으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제 3년만 있으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은 당대 거대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사실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95개 조항 자체는 라틴어로 쓰여졌습니다. 라틴어란 당대 지식인들의 언어였습니다. 즉 처음에는 고위공직자들, 성직자들, 그리고 학자 층의 엘리트들과 교회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문제제기는 교회비판이라는 휘발성이 강한 주제에 불꽃을 당기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곧 라틴어로 썼던 95개 조항은 당대의 독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개혁운동이 들풀에 불이 번지듯 독일과 유럽 전체에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지금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건축물입니다. 당시 그것을 짓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로 하여금 면죄부를 파는 일을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설교자들은 매우 위험한 소리를 서슴없이 해댔습니다. 95개조 조항 중 면제부에 대한 비판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7조입니다. ‘돈이 헌금함에서 쨍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해방된다고 꾸며대는 사람들은 인간의 허튼 소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71조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에 따른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는 말을 하는 자는 비난받고 저주받을 것이다.’ 72조입니다. ‘그러나 면죄부 설교자의 무절제하고 뻔뻔스러운 말에 맞서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듯 재물이 필요해서 면죄부를 팔았던 가톨릭교회의 거짓된 현상을 비판하며 나섰습니다. 죄의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돈과 권력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가톨릭교회의 후안무치함에 대해서 직접 비판과 비난을 가한 것입니다. 특히 86조에서 ‘오늘날 최고 부자들보다 더 부유한 교황은 가난한 신도의 돈이 아니라 넘치도록 많은 자신의 돈으로 베드로 성당을 신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직접적인 도전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오직 하나님에 근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루터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루터를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주님의 포도밭에 사나운 멧돼지 한 마리가 날뛰고 있다.” 그를 짐승이라 표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루터를 종교적 이단으로 낙인찍기까지 합니다. 그때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교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통치된다.” 말하며 교황에게 저항합니다.
‘귀족에게 보낸 글’이라는 유명한 그의 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성직자 계급이다. 왜냐하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사제, 주교, 교황에 임명된 것처럼 자랑해도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이러한 직분을 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말이다.” 그는 교황이 가진 위치와 종교 회의가 갖고 있는 모든 결정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결국 루터는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종교 청문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1521년 4월 17일에 열린 보름스 회의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황제와 대교주 앞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저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이 당신의 책인가?” 루터는 자신이 쓴 책이라고 시인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책들에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루터는 대답을 위해 하루 정도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건에 대해 루터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다음날인 4월 18일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황제와 교황의 대리자 앞에 담대히 서게 됩니다. 그리고 황제 앞에서 용기 있게 말합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며 증언을 마칩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당대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교황이 이단 파문을 내려 화형에 처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루터도 보름스 회의에 가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말했습니다. “보름스 집들의 지붕에 있는 기왓장처럼 악마새끼들이 많아도 나는 갈 것이다.”
그렇게 그는 보름스 회의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한 말들 때문에 그의 모든 법적인 보호망은 사라지게 됩니다. 루터를 언제든지 죽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서 숨어 지내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 번역입니다.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당대의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기의 언어로 읽을 수 있는 축복을 마틴 루터가 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직자들에게 독점되었던 성경을 모든 사람이 읽고,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아주 혁명적인 것입니다. 용기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리며 행했던 믿음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루터가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이 동조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회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바로 500년 전에 말입니다.
루터 본인은 “내가 종교개혁을 한다.”는 말을 직접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평생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따를 뿐이라고 말하며 살아갔을 때 그것이 종교개혁이 되었고, 결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가 선언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교황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라는 성경 속 본질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공감하며 신앙의 자리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변화와 개혁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귀한 일을 할 때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 속에 올바른 것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때, 교회의 변화와 개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특별히 열심히 읽었던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 서신입니다. 그는 로마서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를 독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고린도서 속에서 바울이 가졌던 하나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 복음에 그는 그의 삶 전체를 걸어도 괜찮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시대에도 깨달음을 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갈등하고 있습니다. 분파하고 분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영적인 지도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게바가 있습니다. 아볼로가 있습니다. 바울이 있습니다. 당대 초대 교회에서 최고로 여겨지던 사도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걸고 갈등하며 분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 어떤 교회들보다 성령의 은사는 듬뿍 받았지만 생각은 멈춰 있었습니다.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열광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메말라 있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만을 뽐내며 자랑하는 교만한 교회가 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보이는 지도자에 의해 삼삼오오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교회의 머리, 교회의 주인은 나 바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례를 주고, 말씀을 가르치고, 충성하며 섬겼지만, 교회를 위해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를 위하여 죽었고 다시 부활하셨기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영적 지도자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영적 지도자들 때문에 분파하고 갈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둘째,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말재주를 보여주지 말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수사적인 언어기법을 드러내느라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전서 2:4)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사람들이 설득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말씀을 듣고 감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말씀을 증거할 때마다 아멘, 아멘하며 감동받고 감격하며 눈물 흘릴 수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훌륭한 고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민에 빠지는 순간, 위험해진다는 것입니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설이 뛰어나고, 언어가 지성적이고 감성적이어야 좋은 설교라는 생각은, 설교를 잘하는 자로 스스로를 자랑하고 싶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꾸로 이야기합니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을 사용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설교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내려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을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내 주님이시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자랑스럽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나의 아바아버지시구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이구나.’ 이런 자존감이 생기는 것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사랑으로 내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잔잔해지고 하나님 사랑에 감복하게 되어 다시금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목표를 향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먼저 드러내기를 열망했습니다.
셋째, 바울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가 있다고 말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3)

두렵고 떨림으로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 그것도 오랫동안 믿은 사람, 교회의 직분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두렵고 떨림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더 이상 가슴이 뛰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의 오기만 남아있고, 내 생각만으로 꽉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에게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국민을 두려워하면서 정치를 하라고 말입니다. 이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고, 믿음의 공동체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마음들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는 것에서부터입니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두려움과 떨림이 더 풍성해야 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고통이고 문제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드셨습니까? 신앙의 연륜이 쌓이셨습니까? 점점 마음이 굳어집니까? 생각이 멈춰 있습니까? 아니면 더 부드럽고 넉넉해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몸은 딱딱해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롭고 부드럽고 넉넉해진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워지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고 부드러워지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의 문을 열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합해서 단 한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적 문제이고, 타락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진행했던 루터는 건강에 위협을 당했습니다. 점점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46편을 읽으며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이 말씀으로 힘을 얻은 그가 작곡하고 작사한 곡이 바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그는 이 곡의 가사처럼 방패와 병기 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다시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의 연약함에 대해 아파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다시 말씀 앞에 돌아오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앞에 충성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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