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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는 본래 자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모습 가운데 내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생각해 보고,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장소를 뜻합니다. 오늘날 터키 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당시 소아시아의 도시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도 첫 번째 장로교회가 새문안교회이고, 첫 번째 감리교회가 정동교회인데, 이 역시 지명에서 교회 이름을 세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자유 도시였고, 종교적으로는 여신 아데미를 숭상하며 이방 신전을 세웠던 도시입니다. 도덕적으로 음란과 죄악이 관영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는 상관없이 지냈던 이 도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의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증언했으며,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의 수고로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교회에서 무려 3년 동안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들과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는 모습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과 주의 영광이 드러났던 교회, 초대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니라 (사도행전 19:11~12)
그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듣고 연구하는 데도 열심을 다했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9~10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더라 (사도행전 19:9~10 중)
부유와 방종의 도시였으나, 사치와 죄악이 관영한 타락한 도시였으나, 복음이 들어가면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또한 당시 그곳에서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도 나타났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 디모데가 열심을 다해 돌봤던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에게 엄중한 경고를 듣습니다. 오늘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핵심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기본과 근본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칭찬도 많이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요한계시록 2:2 중)
주님이 친히 인정하신 에베소 교회입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멋진 칭찬이 어디 있습니까? 이방 도시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신앙을 지키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초와 고난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수고하고 인내하며 복음을 증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던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이후에도 계속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2절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2)
당시 교회 공동체에 여러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못된 지도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영광을 취하며 야욕에 사로잡힌 거짓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거짓 지도자들을 분별하며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정통성과 전통, 복음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열정과 성실, 부지런함도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3)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며 부지런히 일한 교회라고 합니다.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하며,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정결한 교회, 용기 있는 교회, 부지런한 교회라는 인정을 받는 장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책망할 게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지적입니다. 수고하고 인내한 것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신앙의 정통을 지키려 애쓴 것도 칭찬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 따르면,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풍성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첫사랑을 다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니면 중‧고등학교 시절, 아니면 대학교 시절에 좋아한 첫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좋고, 보고나면 또 보고 싶고, 무언가 자꾸 주고 싶고, 자꾸 주어도 아깝지 않은 첫사랑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의 첫사랑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도 인격이십니다. 그 예수님과의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첫사랑의 감격, 그분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고백했던 그때의 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주님만 생각해도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내 속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며, 주님만 내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겠다는 그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바로 이 물음을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게 충성과 헌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신앙의 정통도 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밑바탕의 사랑을 잃어 버렸구나! 사랑 없는 헌신, 사랑 없는 기도, 사랑 없는 찬양, 사랑 없는 정통성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여러분, 사랑을 잃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형식은 있으나 내용은 잃은 사랑이 아닐까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감격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며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모습이 아닐까요?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사라진 마음이 아닐까요?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모습, 그런 모습이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의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그럴 듯한 게 사랑을 잃은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잃었구나. 망각하고 상실했구나. 그 사랑을 회복하라!”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회복할 방안도 알려 주십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5)
여기서 세 동사가 나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 ‘회개하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는 세 동사입니다. 그렇게 처음 사랑을 되찾으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장 낮아졌던 때, 눈물로 탄식했을 때, 내 연약함으로 몸서리쳤을 때,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그때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내 바닥이 언제였는지를 기억하고, 인생의 구덩이에 갇혔을 때가 언제였는지를 돌아보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내게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기억이 왜 중요할까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종살이 했던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광야에서도 먹이고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의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탕자가 언제 아버지께 돌아옵니까?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 내 몫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뛰어나가 그 아들을 맞이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큰 사랑을 다시 깨달으며 더욱 사랑하고 충성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그였지만, 자신을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접하며 그는 뜨거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고, 순교자가 되기까지 복음 전도자로 충성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복입니다. 직장에 처음 출근했던 그날을 기억하면, 직장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처음 마음을 회복하면 날마다 새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배우자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처음 사랑의 느낌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처음 사랑을 잊고, 또 잃기 때문에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며, 때로는 원망까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신앙의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어떤 노력과 헌신, 봉사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전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의는 누구와 어울립니까? 바로 사랑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걸맞은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정수요,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게 사랑이 없다면,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처음 사랑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봉사하는 분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지나쳐 독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신앙적 연륜이 있기 때문에 본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득권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신앙적 행위에 보상을 받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분들은 처음 사랑을 잃은 분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흔들리는 것입니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축복 받은 교회입니까? 얼마나 자랑이 많은 교회입니까? 또 얼마나 열정이 있는 교회입니까? 신앙을 지키려는 수고와 이웃을 향한 봉사도 수없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습관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도 잃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부터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목회자들이 그러한 행태를 일삼습니다. 이런 모습이 한국 교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 은혜의 감격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자랑, 나의 반석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다시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 1 ~ 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에베소 교회는 본래 자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모습 가운데 내 모습과 한국 교회의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생각해 보고,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며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장소를 뜻합니다. 오늘날 터키 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당시 소아시아의 도시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도 첫 번째 장로교회가 새문안교회이고, 첫 번째 감리교회가 정동교회인데, 이 역시 지명에서 교회 이름을 세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자유 도시였고, 종교적으로는 여신 아데미를 숭상하며 이방 신전을 세웠던 도시입니다. 도덕적으로 음란과 죄악이 관영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과는 상관없이 지냈던 이 도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의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증언했으며,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의 수고로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교회에서 무려 3년 동안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들과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는 모습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능력과 주의 영광이 드러났던 교회, 초대교회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난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니라 (사도행전 19:11~12)
그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듣고 연구하는 데도 열심을 다했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9~10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더라 (사도행전 19:9~10 중)
부유와 방종의 도시였으나, 사치와 죄악이 관영한 타락한 도시였으나, 복음이 들어가면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또한 당시 그곳에서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도 나타났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 디모데가 열심을 다해 돌봤던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에게 엄중한 경고를 듣습니다. 오늘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핵심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기본과 근본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칭찬도 많이 하셨습니다. 2절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요한계시록 2:2 중)
주님이 친히 인정하신 에베소 교회입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처럼 멋진 칭찬이 어디 있습니까? 이방 도시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신앙을 지키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초와 고난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수고하고 인내하며 복음을 증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했던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이후에도 계속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2절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2)
당시 교회 공동체에 여러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못된 지도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기 영광을 취하며 야욕에 사로잡힌 거짓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거짓 지도자들을 분별하며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정통성과 전통, 복음적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는 열정과 성실, 부지런함도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요한계시록 2:3)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며 부지런히 일한 교회라고 합니다.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원하며,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정결한 교회, 용기 있는 교회, 부지런한 교회라는 인정을 받는 장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책망할 게 있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지적입니다. 수고하고 인내한 것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신앙의 정통을 지키려 애쓴 것도 칭찬하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래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 따르면,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즉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풍성한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린 시절 첫사랑을 다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니면 중‧고등학교 시절, 아니면 대학교 시절에 좋아한 첫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만 봐도 좋고, 보고나면 또 보고 싶고, 무언가 자꾸 주고 싶고, 자꾸 주어도 아깝지 않은 첫사랑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의 첫사랑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도 인격이십니다. 그 예수님과의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첫사랑의 감격, 그분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고백했던 그때의 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주님만 생각해도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내 속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며, 주님만 내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겠다는 그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바로 이 물음을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게 충성과 헌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신앙의 정통도 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밑바탕의 사랑을 잃어 버렸구나! 사랑 없는 헌신, 사랑 없는 기도, 사랑 없는 찬양, 사랑 없는 정통성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여러분, 사랑을 잃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형식은 있으나 내용은 잃은 사랑이 아닐까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감격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며 불평하고 불만을 쏟아내는 모습이 아닐까요?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경외는 사라진 마음이 아닐까요?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모습, 그런 모습이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의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그럴 듯한 게 사랑을 잃은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잃었구나. 망각하고 상실했구나. 그 사랑을 회복하라!”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회복할 방안도 알려 주십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5)
여기서 세 동사가 나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 ‘회개하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는 세 동사입니다. 그렇게 처음 사랑을 되찾으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장 낮아졌던 때, 눈물로 탄식했을 때, 내 연약함으로 몸서리쳤을 때,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그때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내 바닥이 언제였는지를 기억하고, 인생의 구덩이에 갇혔을 때가 언제였는지를 돌아보며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내게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기억이 왜 중요할까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표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종살이 했던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광야에서도 먹이고 살리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그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의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탕자가 언제 아버지께 돌아옵니까?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 내 몫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뛰어나가 그 아들을 맞이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큰 사랑을 다시 깨달으며 더욱 사랑하고 충성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그였지만, 자신을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접하며 그는 뜨거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고, 순교자가 되기까지 복음 전도자로 충성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복입니다. 직장에 처음 출근했던 그날을 기억하면, 직장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처음 마음을 회복하면 날마다 새롭게 일할 수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배우자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처음 사랑의 느낌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처음 사랑을 잊고, 또 잃기 때문에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며, 때로는 원망까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신앙의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어떤 노력과 헌신, 봉사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전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의는 누구와 어울립니까? 바로 사랑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걸맞은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정수요,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내게 사랑이 없다면,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처음 사랑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봉사하는 분들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지나쳐 독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신앙적 연륜이 있기 때문에 본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득권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의 신앙적 행위에 보상을 받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분들은 처음 사랑을 잃은 분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흔들리는 것입니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축복 받은 교회입니까? 얼마나 자랑이 많은 교회입니까? 또 얼마나 열정이 있는 교회입니까? 신앙을 지키려는 수고와 이웃을 향한 봉사도 수없이 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교만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습관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도 잃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부터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목회자들이 그러한 행태를 일삼습니다. 이런 모습이 한국 교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 은혜의 감격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자랑, 나의 반석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다시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9월 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1), 첫 사랑을 회복하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8장, 29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계 2:1~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부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교회의 모습 속에 나의 모습이,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일까? 우리가 함께 생각하고, 회개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의 요약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큰 항구도시였으며, 정치적으로 로마의 자유도시, 종교적으로 여신 아데미 예배를 중심으로 한 이방신전의 도시, 도덕적으로 음란과 죄악이 가득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열심히 복음을 증거 했고, 아볼로의 수고로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바울도 3년 동안이나 복음을 증거 했고, 부와 방종의 도시이며 사치와 죄악이 관영한 타락한 도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증거 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4절).
물론 에베소 교회는 칭찬받을 선한 행위를 소유한 교회 – 1)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와 수고를 기억하시는 교회(고전15:10) 2) 정통신앙을 유지한 교회(2절) 3)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아는 교회(3절)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십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교회(엡1:5)가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을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나를 사로잡은 사랑, 주님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다 포기한 사랑, 하나님만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던 나의 신앙과 사랑이 아니던가?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금은 형식은 있는데, 내용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닐까? 조건 없는 사랑에서 조건을 수없이 붙이는 사랑은 아닐까? 하나님 경외가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자랑만 남아있는 사랑이 아닐까?
첫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처음 시작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3개의 동사 ? 생각하고 회개하여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생각해야할까요? 내가 가장 낮았던 때, 내가 눈물로 탄식했을 때, 나의 연약함으로 “어찌할꼬”라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간구할 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런 나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내게 죄 요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죄 용서 받은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셨던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에 내가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우리로 회개케 합니다. 신약의 탕자의 비유, 베드로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우리의 일과 행위와 수고보다 더 우선적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우리 신앙의 시작이요 동시에 신앙의 마지막입니다. 사랑 때문에 시작하는 우리의 행위와 수고가 되어야만 합니다. 곧 감사하는 행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신앙생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독단적일 때가 많습니다. 오래 믿는 사람은 신앙의 연륜이 묻어나지만, 기득권에 집착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처음 사랑을 다시 기억하고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향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때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나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가’에 관한 물음입니다. 어떤 조건이 어떤 교만한 모습이, 어떤 죄악이 나를 처음 사랑에 서는 것을 가로 막지는 않고 있는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기쁨, 나의 자랑이 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을 향한 나의 첫 사랑 혹은 교회를 향한 나의 첫 사랑을 생각하며 함께 나눠보세요.
2.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십니까?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눠보세요.
3.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없으면 헌신, 노력, 모든 봉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나는 사랑의 모습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잃지 않도록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이 나의 만족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요,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첫 사랑을 회복하며, 간직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