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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 교회에는 두 여성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계시록에 나오는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세기 중엽 두아디라는 염색업이 발전한 산업도시였습니다. 현재의 터키 지역입니다. 돈과 물질의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물질적 욕망과 더불어 육체적인 쾌락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영적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더욱이 이런 현상들이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를 생각하면, 두 여성이 떠오릅니다. 한명은 영적으로 플러스 충전을 해 주는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라는 여성이고, 또 한명은 마이너스 방전을 하는, 즉 영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이란 여인입니다.
먼저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여성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방문해 복음을 증거할 때입니다. 그때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를 만납니다. 자색 옷이라는 건 문벌 좋은 사람들이 입는 고급 옷입니다. 한편 바울을 만난 루디아는 복음으로 인해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바울을 집으로 초대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으며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기 집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예배 공동체 장소로 제공합니다. 그렇게 빌립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루디아라는 여성은 두아디라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또 전하며 축복하는 귀한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루디아 같은 훌륭한 목회자와 선교사들, 신실한 성도님들의 믿음을 통해 하늘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훌륭한 권사님들과 여전도회 회원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기도의 어머니들이자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봉사와 섬김에 앞장선 주님의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권사님들은 성도들의 기쁨과 아픔에 동참하며 격려와 위로를 전하시는 분들입니다. 플러스 에너지의 원천처럼 우리 교회를 뒷받침하고 계시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루디아 같은 선한 여성과 달리, 또 다른 여성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세벨’과 같은 여성입니다. 이세벨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데, 구약에 등장하는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의 왕비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며 시돈 왕의 딸로, 자기 민족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유대 땅에 들여왔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했으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육성해 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일컬었던 엘리아를 죽이려고 작정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거짓된 우상에 대한 집념이 집요했던 인물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그녀와 이름이 같은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어제와 오늘, 내일의 모든 죄가 용서 받으니까 예수 믿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네 육체가 욕망하면 쾌락을 즐기라.”라고도 전했습니다. 당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과도 아주 흡사합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말고 못된 짓과 부정한 짓을 해도 이미 용서 받았으니, 네 육체의 욕망대로 마음껏 행하라.”고 하며 육체적인 간음을 행하는 것을 허용했고, 거짓 우상을 섬겨도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괜찮다고 하며, 잘못된 거짓 교설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칭찬과 더불어 책망을 하십니다.
이처럼 한 여인은 타인을 살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또 다른 여성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죄악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에 등장하는 여인은 후자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8~19절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요한계시록 2:18~19 중)
아주 놀라운 칭찬입니다. 갈수록 더 좋아졌다는 뜻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결과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가 그들이 가진 신앙적 잣대로 잘못된 거짓 선지자를 규명해 내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는 그 내용이 반대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니 너의 사랑이 참으로 풍성하구나. 이웃을 위해 봉사도 많이 하고 인내도 크구나. 그런데 분별력을 잃었구나. 거짓된 선지자를 분별하고 그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잃었구나.” 이렇게 엄중한 책망을 듣습니다. 즉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 없이 정의만 살아 있는 것,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정의 없이 사랑만 풍성한 것, 그것도 큰 잘못이다.”
이로써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던 칭찬을 다음과 같이 바꾸십니다. 그 말씀이 “그러나”라는 접속사, 곧 역전의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역전의 접속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결정적으로 책망 받을 사안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예수 한 번 믿으면 다 용서 됐으니까 네 육체의 탐욕대로, 욕망대로, 네 끌리는 대로, 본능대로 다 해도 괜찮다.”라는 방식은 잘못된 교리라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바꿔라!” 모든 영적 위기, 신앙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21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1)
두아디라 교회에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회개할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회개할 제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회개를 거절하는 것, 이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명확합니다.
교회란 어떤 공동체입니까?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란 거룩을 열망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자기 갱신, 자기 변형, 자기 회개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의 자리에 들어서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하겠다. 내가 너희들을 내버리겠다. 너희들의 자녀를 죽음에로 내몰겠다.”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시며,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회개하지 않는다면 행위대로 갚아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로써 나타난 예수님의 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죄악에 갇힌 인간 실존, 그로 인해 형벌에 놓인 인간 실존을 예수님은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여러분, 회개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맞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회개가 필요한 것일까요? 맞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변화와 개혁의 시작입니다. 내 삶의 죄와 단절시키는 능력이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례 요한을 칭찬했습니까? 물론 그에게는 칭찬 받을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회개를,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분노했습니까?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왜 민중을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후회’가 아닌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안의 이기성과 탐욕, 죄악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회개하기가 힘든 것일까요? 왜 회개하길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회개하는 게 어려운 것입니까?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한다는 건, 내가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감추어진 약점을 노출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위험부담이 큽니다. 자기 삶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구겨진 인생이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이라 해도 회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놓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즐겼던 쾌락도 다 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이 물음을 회개하려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최고의 책이라고 알려진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순결을 주옵소서. 나에게 절제를 주옵소서. 하지만 지금은 마옵소서.”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언젠간 제가 회개하겠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놔두세요. 지금은 재밌잖아요. 육체적인 쾌락도 즐기잖아요. 제가 세상에서 지금 잘 나가잖아요. 그래도 제가 꽤 괜찮은 인물 같잖아요. 나중에 꼭 회개할게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마세요.”
이처럼 우리가 회개를 자꾸만 미루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왜 회개가 어렵습니까? 우리 마음에 본래적으로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을 유도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변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 기회를 유보하거나 거절합니다.
또 왜 우리가 회개하기가 어렵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질질 끌려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소위 착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탈출할 용기가 없어 주저하기만 합니다.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저지르고 맙니다. 혼자서 탄식하고 가슴 아파하지만, 삶의 방향을 돌이키지는 않습니다. 이는 회개가 아니라 후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후회는 자기 앞에서 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자기가 손해 본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며, 회개는 내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자기 연민에 불과하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회를 통해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회개하면 성령을 통한 진정한 개혁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일과를 보낸 후 저녁에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내가 품은 모든 못된 생각들, 미워하는 마음들, 분노, 시기, 질투 등을 하나님께 쏟아내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루하루 쌓아놓았던 것을 주일날 예배를 통해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좋은 방법입니다.
회개란 깨닫는 순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잘못했다면, 바로 그때 회개하면 됩니다. 내가 연약해졌을 때,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위기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를 고쳐주세요.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입니다. 깨닫는 그 순간, “하나님, 이 길로 가는 것이 내 욕심이면 멈춰 서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보이면, 제가 그 길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할 때 중요한 건, 회개를 슬립모드(sleep mode)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다 하시지요? 컴퓨터를 하다가 급하면 절전모드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1시간 후든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이럴 때가 많습니다. 잠시 멈출 뿐입니다. 그냥 슬립모드(sleep mode)로 잠깐 두었다가 다시 켜면, 이전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회개는 리셋(reset)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전원을 아웃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때로 잘 안 되면 하루에 한 끼를 금식해 보셔도 좋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리셋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해야 됩니다. 때로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로 방향을 맞추면 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하늘의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면 멈추겠습니다. 주께서 동행해 주옵소서.” 이렇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회개는 겸손한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자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어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회개하는 게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향해 새롭게 도전하고 성숙하려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신앙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물론 회개는 슬픔과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나면 주님과 함께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내 자존심을 지키느라 애쓰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나를 얽어맸던 이기심과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쁨을 누려야 참다운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이란 단순히 행복을 위해 갖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거룩해지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행복을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을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나아가 이 거룩함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진정한 행복 역시 이 거룩함 속에 있습니다. 행복을 먼저 추구하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거룩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미혹이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가야할 길은 회개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문학자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이 놀라운 것을 우리가 추구할 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 18 ~ 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두 여성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계시록에 나오는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세기 중엽 두아디라는 염색업이 발전한 산업도시였습니다. 현재의 터키 지역입니다. 돈과 물질의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물질적 욕망과 더불어 육체적인 쾌락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수많은 영적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더욱이 이런 현상들이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를 생각하면, 두 여성이 떠오릅니다. 한명은 영적으로 플러스 충전을 해 주는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라는 여성이고, 또 한명은 마이너스 방전을 하는, 즉 영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이란 여인입니다.
먼저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여성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방문해 복음을 증거할 때입니다. 그때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를 만납니다. 자색 옷이라는 건 문벌 좋은 사람들이 입는 고급 옷입니다. 한편 바울을 만난 루디아는 복음으로 인해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바울을 집으로 초대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으며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은 자기 집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예배 공동체 장소로 제공합니다. 그렇게 빌립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루디아라는 여성은 두아디라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또 전하며 축복하는 귀한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루디아 같은 훌륭한 목회자와 선교사들, 신실한 성도님들의 믿음을 통해 하늘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훌륭한 권사님들과 여전도회 회원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기도의 어머니들이자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봉사와 섬김에 앞장선 주님의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권사님들은 성도들의 기쁨과 아픔에 동참하며 격려와 위로를 전하시는 분들입니다. 플러스 에너지의 원천처럼 우리 교회를 뒷받침하고 계시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루디아 같은 선한 여성과 달리, 또 다른 여성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세벨’과 같은 여성입니다. 이세벨은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데, 구약에 등장하는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의 왕비입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며 시돈 왕의 딸로, 자기 민족 신들인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유대 땅에 들여왔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했으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육성해 나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일컬었던 엘리아를 죽이려고 작정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거짓된 우상에 대한 집념이 집요했던 인물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그녀와 이름이 같은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어제와 오늘, 내일의 모든 죄가 용서 받으니까 예수 믿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네 육체가 욕망하면 쾌락을 즐기라.”라고도 전했습니다. 당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과도 아주 흡사합니다.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말고 못된 짓과 부정한 짓을 해도 이미 용서 받았으니, 네 육체의 욕망대로 마음껏 행하라.”고 하며 육체적인 간음을 행하는 것을 허용했고, 거짓 우상을 섬겨도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괜찮다고 하며, 잘못된 거짓 교설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칭찬과 더불어 책망을 하십니다.
이처럼 한 여인은 타인을 살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또 다른 여성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죄악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에 등장하는 여인은 후자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8~19절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요한계시록 2:18~19 중)
아주 놀라운 칭찬입니다. 갈수록 더 좋아졌다는 뜻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결과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가 그들이 가진 신앙적 잣대로 잘못된 거짓 선지자를 규명해 내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는 그 내용이 반대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니 너의 사랑이 참으로 풍성하구나. 이웃을 위해 봉사도 많이 하고 인내도 크구나. 그런데 분별력을 잃었구나. 거짓된 선지자를 분별하고 그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잃었구나.” 이렇게 엄중한 책망을 듣습니다. 즉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 없이 정의만 살아 있는 것,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정의 없이 사랑만 풍성한 것, 그것도 큰 잘못이다.”
이로써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던 칭찬을 다음과 같이 바꾸십니다. 그 말씀이 “그러나”라는 접속사, 곧 역전의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역전의 접속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결정적으로 책망 받을 사안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예수 한 번 믿으면 다 용서 됐으니까 네 육체의 탐욕대로, 욕망대로, 네 끌리는 대로, 본능대로 다 해도 괜찮다.”라는 방식은 잘못된 교리라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바꿔라!” 모든 영적 위기, 신앙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21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1)
두아디라 교회에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회개할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회개할 제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회개를 거절하는 것, 이에 대한 주님의 경고는 명확합니다.
교회란 어떤 공동체입니까?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란 거룩을 열망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자기 갱신, 자기 변형, 자기 회개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의 자리에 들어서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하겠다. 내가 너희들을 내버리겠다. 너희들의 자녀를 죽음에로 내몰겠다.”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시며,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회개하지 않는다면 행위대로 갚아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로써 나타난 예수님의 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죄악에 갇힌 인간 실존, 그로 인해 형벌에 놓인 인간 실존을 예수님은 매우 안타까워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여러분, 회개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맞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회개가 필요한 것일까요? 맞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변화와 개혁의 시작입니다. 내 삶의 죄와 단절시키는 능력이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례 요한을 칭찬했습니까? 물론 그에게는 칭찬 받을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회개를,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가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분노했습니까?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왜 민중을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후회’가 아닌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안의 이기성과 탐욕, 죄악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회개하기가 힘든 것일까요? 왜 회개하길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회개하는 게 어려운 것입니까?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한다는 건, 내가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감추어진 약점을 노출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위험부담이 큽니다. 자기 삶이 괜찮은 줄 알았는데, 구겨진 인생이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이라 해도 회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놓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즐겼던 쾌락도 다 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이 물음을 회개하려는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최고의 책이라고 알려진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순결을 주옵소서. 나에게 절제를 주옵소서. 하지만 지금은 마옵소서.”
여러분도 이런 기도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언젠간 제가 회개하겠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놔두세요. 지금은 재밌잖아요. 육체적인 쾌락도 즐기잖아요. 제가 세상에서 지금 잘 나가잖아요. 그래도 제가 꽤 괜찮은 인물 같잖아요. 나중에 꼭 회개할게요.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마세요.”
이처럼 우리가 회개를 자꾸만 미루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왜 회개가 어렵습니까? 우리 마음에 본래적으로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을 유도하는 사탄의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변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 기회를 유보하거나 거절합니다.
또 왜 우리가 회개하기가 어렵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질질 끌려갈 때가 많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소위 착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도 탈출할 용기가 없어 주저하기만 합니다.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저지르고 맙니다. 혼자서 탄식하고 가슴 아파하지만, 삶의 방향을 돌이키지는 않습니다. 이는 회개가 아니라 후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분,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후회는 자기 앞에서 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자기가 손해 본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며, 회개는 내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럽게 토로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자기 연민에 불과하지만,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갱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회를 통해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회개하면 성령을 통한 진정한 개혁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일과를 보낸 후 저녁에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내가 품은 모든 못된 생각들, 미워하는 마음들, 분노, 시기, 질투 등을 하나님께 쏟아내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루하루 쌓아놓았던 것을 주일날 예배를 통해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좋은 방법입니다.
회개란 깨닫는 순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잘못했다면, 바로 그때 회개하면 됩니다. 내가 연약해졌을 때,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위기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를 고쳐주세요.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입니다. 깨닫는 그 순간, “하나님, 이 길로 가는 것이 내 욕심이면 멈춰 서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보이면, 제가 그 길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할 때 중요한 건, 회개를 슬립모드(sleep mode)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다 하시지요? 컴퓨터를 하다가 급하면 절전모드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1시간 후든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이럴 때가 많습니다. 잠시 멈출 뿐입니다. 그냥 슬립모드(sleep mode)로 잠깐 두었다가 다시 켜면, 이전 그대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회개는 리셋(reset)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전원을 아웃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때로 잘 안 되면 하루에 한 끼를 금식해 보셔도 좋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리셋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해야 됩니다. 때로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께로 방향을 맞추면 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하늘의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면 멈추겠습니다. 주께서 동행해 주옵소서.” 이렇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회개는 겸손한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자가 회개할 수 있습니다. 어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회개하는 게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향해 새롭게 도전하고 성숙하려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신앙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물론 회개는 슬픔과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나면 주님과 함께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내 자존심을 지키느라 애쓰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나를 얽어맸던 이기심과 죄악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쁨을 누려야 참다운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신앙이란 단순히 행복을 위해 갖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거룩해지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행복을 위해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을 위해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나아가 이 거룩함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진정한 행복 역시 이 거룩함 속에 있습니다. 행복을 먼저 추구하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거룩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미혹이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가야할 길은 회개입니다. 행복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문학자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이 놀라운 것을 우리가 추구할 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9월 3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4), 지금 회개하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2장, 27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계 2:18~2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3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계시록의 4번째 교회 – 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염색공업이 발전된 공업과 산업도시였습니다. 돈과 물질의 여유가 생기면서 육체적인 쾌락과 영적으로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도 드러났습니다.
설교의 요약
두아디라에는 두 사랑의 여성(루디아, 이세벨)이 유명합니다. 1. 루디아(행 16장): 바울이 빌립보 지역을 방문했을 때, 자주색 옷감 장사인 루디아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가족들도 함께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예배 공동체의 장소로 제공함으로 빌립보와 두아디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2. 이세벨: 북 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 왕의 왕비로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을 육성하였으며, 엘리야를 죽이려고 작정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거짓 된 우상에 대한 진념이 집요했던 인물입니다. 이런 이름을 따서 두아디라 교회에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등장했습니다. 이 여인이 선지자라고 자처하며 두아디라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29절). 특별히 그들의 행위,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신앙의 자리에 들어섰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두아디라 교회는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엄중한 책망을 받았습니다(20절). 이런 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회개뿐입니다(21절). 교회란 단순히 마음과 육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거룩함을 열망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자기 갱신, 자기 변혁, 회개를 통해서 진정한 변화의 성숙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 역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선포하였던 세례요한을 칭찬하셨지만, 회개할 생각을 갖지 못한 바리새인들에게는 분노하셨습니다. 회개란 ‘나 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죄악이 있고, 우리 마음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후회와 회개는 비슷하지만, “후회는 자기 앞에서 그러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회개는 결코 잠깐 멈추는 것(sleep mode)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것(reset)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개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면 그저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정조준 하십시오. 회개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회개란 겸손한 자가 하는 것, 용기 있는 자가 하는 것, 새 창조를 향해 도전하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신앙인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행복하기 위하여 갖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함입니다. 교회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고 이 거룩함을 들고 세상을 행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자녀들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던 가장 큰 제목은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3.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21절).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참과 거짓, 선함과 악함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