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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5),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

요한계시록 3: 1 ~ 6

김지철 목사

2018.10.14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비슷하지만 가짜인 것을 소위 ‘짝퉁’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사이비’, ‘위조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품과 비슷해 구별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품보다 모조품이 더 진짜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실체가 드러납니다. 누구 앞에서 드러날까요? 전문가 혹은 그것을 만든 사람 앞에서입니다. 특히 직접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이 보면, 어떤 게 진짜고 가까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가짜를 더욱 진짜처럼 꾸밉니다. 때문에 가짜가 더 화려할 때가 있습니다. 겉모습만 억지로 꾸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 속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외모나 겉모양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친히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정품으로 칭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외적으로만 가꾸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짝퉁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중)

“네가 외모를 아무리 꾸며도 마음속에 다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결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사데 교회를 향해 주님이 바로 이런 내용으로 엄히 꾸짖고 계십니다. “네가 너를 알고 있다. 너의 겉모습이 화려하고 아주 괜찮아 보이지만, 네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다. 네가 드리는 예배도 엉터리다.” 이렇게 사데 교회를 꾸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사데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다섯 번째 교회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엄중한 책망을 받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너희는 죽은 자다.”라는 비유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식물인간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실상 의식 없는 사람처럼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3:1 중)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며 진단하고 감정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네 외모뿐만 아니라 네 마음도 알고, 네 생각도 알고, 네가 그동안 해온 모든 행위를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이면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 특히 시편을 쓴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다 아십니다. 제가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시편 139편 23절, 24절에서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는 간구와 고백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 일거수일투족, 내 마음, 내 속에 있는 잡다한 상념마저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이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내 부끄러움과 허물을 감추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내 모든 속마음마저도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신앙이자 예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이는 무슨 뜻일까요? 이름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데 교회는 굉장히 유명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제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도 사데 교회였을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도 많이 하고 선한 일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괜찮은 교회라는 소문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재정 규모도 탄탄했을 테고 인적 자원도 풍부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름 있는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보니 너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었다.”
우리에게는 분별의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물이나 사람은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괜찮았는데, 자세히 보면 아니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겉모습만이 아닌 속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학적인 분별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을 분별할 때 통전적인 시야를 갖게 하는 원리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데 교회를 향해 거대한 영적 무덤이라고 비판하시면서도, 화석화된 믿음만을 가지며 모양뿐인 신앙을 가진 교회라고 지적하시면서도, 그 교회를 다시 한 번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죽지는 말거라. 네가 죽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그 안에 생명의 기운, 생명의 씨앗이 있다. 그것을 붙잡아라. 그리고 다시 일어서라.” 너무 감사한 일 아닙니까? 2절 말씀을 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요한계시록 3:2 중)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생명을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다시 스스로를 일깨워서 일어나라고, 생명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으니 절망하지 말고, 생명을 붙잡으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3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3 중)

제일 앞부분에 ‘생각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았을 때, 네 마음이 기뻐 뛰놀지 않았느냐? 그것을 기억하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네 영혼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느냐? 그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날마다 찬양 부르며 기도하고 싶었던 적이 있지 않느냐? 바로 그때를 기억하라!”
이처럼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를 기억하지 못하면 모든 신앙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남은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이름은 살았는데 실상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죽음을 다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은 우리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입니다. 불확실성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시신을 만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온기는 사라지고 차디찹니다. 섬뜩한 생각마저 듭니다. 육체는 부패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그 사람과 더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 육체의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죄와 허물에는 살아 있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지 못하며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에베소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작은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으며 큰 잔치를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본 큰아들의 마음이 뒤틀립니다. “아버지, 저놈은 재산을 탕진한 놈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아들한테 잔치를 베풀어 줍니까?” 그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2)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몸은 함께하나 마음은 떠나 있는 죽은 자와 같다고 한편으로는 그 아들을 꾸중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이와 비슷한 꾸중을 하십니다. “네가 죽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죽었노라!” 사람들 앞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요한계시록 3:2 중)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을 보니,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기도도 잘하고, 찬양도 잘하는 것 같지만, 진정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예배드리며 경외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행위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모습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주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형식주의와 세속주의를 경계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요한계시록 3:4 중)

사데 교회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옷을 더럽히는 자‘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쁜 누룩을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더럽혀진다.” 마태복음 16장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6 중)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좋게 비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나쁘게 비유됩니다. 여기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악의, 불의를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외식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주의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율법의 본뜻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러한 것들이 습관화되고 익숙해지니 율법의 모양만 갖추면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법 논쟁에서 부딪히고, 정결예법에서 부딪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기’를 물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와 ‘진심’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만약 그 행위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가식이자 위선이요, 허례에 불과하다고 꼬집으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모습이 겉모습만 그럴 듯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월절이 가까워지면 무덤에 회칠을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무덤을 지나치다 무덤을 발견하지 못하고 접촉하게 되면 부정해지는 까닭입니다. 무덤에 회칠을 해서 무덤이 있음을 알리며, 동시에 깨끗하게 정돈해 주는 것입니다. 하얗게 회칠을 해서 눈에 잘 띄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 같다고 하십니다. 무덤 안은 썩은 시체와 뼈로 가득한데, 허옇게 회칠한 모습이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신앙의 행태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불법과 위선을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세속주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두개인은 당대 예루살렘의 귀족층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부와 권력을 얻었으며, 기득권 향유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지녔으나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땅에서 탐욕을 채우기 위함이냐? 그런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냐? 네 목표는 하나님이 아니라 부와 권력 획득이 아니냐?”
그런데 주님은 사두개인에게 던진 이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너에게 있던 순수한 신앙, 그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말씀을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했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드리며 동시에 기쁨과 감격이 넘쳐났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뜨거워지고, 찬양 부를 때 눈물 흘렸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혹시 그 신앙이 사라져 버렸느냐? 혹시 형식만 가지고 있느냐?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지는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잡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됩니다.

동시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럴지라도, 아직 네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있다. 그러니 그냥 죽지 말라. 다시 깨어나라. 다시 살아라. 하나님 앞에서 살라. 하나님이 너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런 비전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 이름을 시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입니까, 죽은 자들입니까? 우리가 이 시간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예배드릴 때 우리가 선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첫 번째이십니다.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첫 번째이십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되시는 분입니다. 혹시 주님보다 앞세웠던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최우선순위 되십니다.” 예배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의 첫 번째요, 제일 우선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에도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혹시 우리 안에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신앙의 형식주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합니다. 남을 쉽게 정죄하는 마음이나 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혹은 세속주의에 물들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다시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처음 마음과 처음 사랑을 다시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으니, 다시 주님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일어서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 삶에 흐트러진 것이 있다면, 다시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첫 번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의 딸이다. 사탄아, 네가 하나님의 자녀를 감히 넘볼 수가 없다. 내가 다시 일어선다. 내가 말씀으로,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겠다.” 그렇게 내 영혼을 향해서 선언해야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우리 삶에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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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 1 ~ 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비슷하지만 가짜인 것을 소위 ‘짝퉁’이라고 말합니다. 일종의 ‘사이비’, ‘위조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품과 비슷해 구별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품보다 모조품이 더 진짜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실체가 드러납니다. 누구 앞에서 드러날까요? 전문가 혹은 그것을 만든 사람 앞에서입니다. 특히 직접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이 보면, 어떤 게 진짜고 가까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가짜를 더욱 진짜처럼 꾸밉니다. 때문에 가짜가 더 화려할 때가 있습니다. 겉모습만 억지로 꾸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 속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외모나 겉모양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친히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정품으로 칭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외적으로만 가꾸려고 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짝퉁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중)

“네가 외모를 아무리 꾸며도 마음속에 다른 마음을 갖고 있으면 결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사데 교회를 향해 주님이 바로 이런 내용으로 엄히 꾸짖고 계십니다. “네가 너를 알고 있다. 너의 겉모습이 화려하고 아주 괜찮아 보이지만, 네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다. 네가 드리는 예배도 엉터리다.” 이렇게 사데 교회를 꾸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사데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다섯 번째 교회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엄중한 책망을 받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너희는 죽은 자다.”라는 비유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마치 식물인간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지만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실상 의식 없는 사람처럼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중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 3:1 중)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시며 진단하고 감정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안다. 네 외모뿐만 아니라 네 마음도 알고, 네 생각도 알고, 네가 그동안 해온 모든 행위를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이면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 특히 시편을 쓴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다 아십니다. 제가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시편 139편 23절, 24절에서는,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는 간구와 고백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 일거수일투족, 내 마음, 내 속에 있는 잡다한 상념마저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이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내 부끄러움과 허물을 감추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내 모든 속마음마저도 노출시킬 수 있습니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신앙이자 예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이는 무슨 뜻일까요? 이름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데 교회는 굉장히 유명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제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도 사데 교회였을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도 많이 하고 선한 일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괜찮은 교회라는 소문도 많이 났을 것입니다. 재정 규모도 탄탄했을 테고 인적 자원도 풍부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이름 있는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내가 보니 너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죽었다.”
우리에게는 분별의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물이나 사람은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괜찮았는데, 자세히 보면 아니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겉모습만이 아닌 속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학적인 분별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을 분별할 때 통전적인 시야를 갖게 하는 원리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데 교회를 향해 거대한 영적 무덤이라고 비판하시면서도, 화석화된 믿음만을 가지며 모양뿐인 신앙을 가진 교회라고 지적하시면서도, 그 교회를 다시 한 번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죽지는 말거라. 네가 죽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그 안에 생명의 기운, 생명의 씨앗이 있다. 그것을 붙잡아라. 그리고 다시 일어서라.” 너무 감사한 일 아닙니까? 2절 말씀을 이어서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요한계시록 3:2 중)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생명을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다시 스스로를 일깨워서 일어나라고, 생명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으니 절망하지 말고, 생명을 붙잡으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3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3 중)

제일 앞부분에 ‘생각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았을 때, 네 마음이 기뻐 뛰놀지 않았느냐? 그것을 기억하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네 영혼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느냐? 그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날마다 찬양 부르며 기도하고 싶었던 적이 있지 않느냐? 바로 그때를 기억하라!”
이처럼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이를 기억하지 못하면 모든 신앙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남은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이름은 살았는데 실상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죽음을 다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은 우리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입니다. 불확실성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한번 죽으면 다시는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시신을 만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온기는 사라지고 차디찹니다. 섬뜩한 생각마저 듭니다. 육체는 부패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그 사람과 더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떠나보내야 합니다. 이 육체의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죄와 허물에는 살아 있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지 못하며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에베소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작은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으며 큰 잔치를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본 큰아들의 마음이 뒤틀립니다. “아버지, 저놈은 재산을 탕진한 놈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아들한테 잔치를 베풀어 줍니까?” 그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32)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몸은 함께하나 마음은 떠나 있는 죽은 자와 같다고 한편으로는 그 아들을 꾸중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이와 비슷한 꾸중을 하십니다. “네가 죽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죽었노라!” 사람들 앞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요한계시록 3:2 중)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을 보니, 그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고, 기도도 잘하고, 찬양도 잘하는 것 같지만, 진정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예배드리며 경외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행위는 많이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모습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려고 애쓰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주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형식주의와 세속주의를 경계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요한계시록 3:4 중)

사데 교회 가운데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옷을 더럽히는 자‘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쁜 누룩을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더럽혀진다.” 마태복음 16장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6 중)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좋게 비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나쁘게 비유됩니다. 여기서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심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악의, 불의를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외식주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주의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습니다. 율법의 본뜻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러한 것들이 습관화되고 익숙해지니 율법의 모양만 갖추면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법 논쟁에서 부딪히고, 정결예법에서 부딪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기’를 물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와 ‘진심’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만약 그 행위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가식이자 위선이요, 허례에 불과하다고 꼬집으신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적 모습이 겉모습만 그럴 듯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월절이 가까워지면 무덤에 회칠을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무덤을 지나치다 무덤을 발견하지 못하고 접촉하게 되면 부정해지는 까닭입니다. 무덤에 회칠을 해서 무덤이 있음을 알리며, 동시에 깨끗하게 정돈해 주는 것입니다. 하얗게 회칠을 해서 눈에 잘 띄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 같다고 하십니다. 무덤 안은 썩은 시체와 뼈로 가득한데, 허옇게 회칠한 모습이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신앙의 행태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불법과 위선을 고발하시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사두개인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세속주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사두개인은 당대 예루살렘의 귀족층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부와 권력을 얻었으며, 기득권 향유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지녔으나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땅에서 탐욕을 채우기 위함이냐? 그런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냐? 네 목표는 하나님이 아니라 부와 권력 획득이 아니냐?”
그런데 주님은 사두개인에게 던진 이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너에게 있던 순수한 신앙, 그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말씀을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했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드리며 동시에 기쁨과 감격이 넘쳐났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뜨거워지고, 찬양 부를 때 눈물 흘렸던 그 신앙을 지금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혹시 그 신앙이 사라져 버렸느냐? 혹시 형식만 가지고 있느냐?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지는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잡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됩니다.

동시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럴지라도, 아직 네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있다. 그러니 그냥 죽지 말라. 다시 깨어나라. 다시 살아라. 하나님 앞에서 살라. 하나님이 너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런 비전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그 이름을 시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입니까, 죽은 자들입니까? 우리가 이 시간 예배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예배드릴 때 우리가 선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첫 번째이십니다.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첫 번째이십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인생의 첫 번째 되시는 분입니다. 혹시 주님보다 앞세웠던 것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을 내려놓겠습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최우선순위 되십니다.” 예배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의 첫 번째요, 제일 우선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있을 때, 우리의 신앙에도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혹시 우리 안에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신앙의 형식주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합니다. 남을 쉽게 정죄하는 마음이나 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혹은 세속주의에 물들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다시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처음 마음과 처음 사랑을 다시 기억하길 원하십니다.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으니, 다시 주님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일어서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 삶에 흐트러진 것이 있다면, 다시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첫 번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내가 하나님의 딸이다. 사탄아, 네가 하나님의 자녀를 감히 넘볼 수가 없다. 내가 다시 일어선다. 내가 말씀으로,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겠다.” 그렇게 내 영혼을 향해서 선언해야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우리 삶에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첨부파일 : [20181014] 2018년 10월 14일 주일말씀 구역(가정)예배 교안.hwp

2018년 10월 1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5),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0장, 29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계 3: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1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짝퉁위조품모조품은 진짜처럼 보이지만결국 전문가 – 그것을 만든 사람 앞에서 결국 실체가 드러납니다사람은 어떻습니까우리는 사람의 외모에 속을 수 있지만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신앙예배가 짝퉁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설교의 요약

    사데 교회는 계시록의 7교회 중에 5번째 교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말씀하십니다(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아십니다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십니다(139:23). 그러므로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사람들에게는 나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감추었지만하나님 앞에 설 때에 내 속 마음까지도 숨김없이 보여드려야 합니다사데 교회는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영적으로는 죽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영적으로 죽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음을 의미합니다(탕자의 비유15:32).

    신앙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때로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찬양하고기도합니다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내 자신을 위해서 수고했을지 모르지만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선을 행하고 구제를 행하고 있는 지 스스로 질문해야만 합니다그런데 본문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그 중의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으로 그 모든 일을 감당하였지만나머지는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더러워진 옷을 입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주의와 외식주의그리고 사두개인의 누룩은 세속주의를 의미합니다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외식을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셨습니다이는 위선과 불법을 가리는 행위입니다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의 귀족제사장들입니다그들은 정치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부와 권력을 얻었습니다신앙을 가진 철저한 현실주의자들기회주의자들입니다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 땅에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고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신앙의 회복을 요구하십니다그래서 다시 깨라다시 살라육체적인 삶뿐만 아니라영적인 삶까지도 생명력 있은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들은 죽은 자입니까살아 있는 사람입니까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첫 번째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입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내 속에 신앙의 형식주의를 깨뜨리고내가 자랑하는 세속적인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예수님께서 죽지 말라죽지 말라다시 살라하나님 앞에서!라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 사랑하는 것하나님이 내 인생의 첫 번째임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나의 신앙의 열매는 진품입니까모조품입니까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하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는 말씀은  오늘 나에게 책망과 경고의 말씀입니까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까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3. 죽지 않고생명력이 넘치는 살아있는 신앙의 모습은 무엇일까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신앙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고 축복하며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예수님이 내 인생의 첫 번째요하나님 사랑이 내 인생의 첫 번째인 것을 고백합니다.

 다시금 생명이 불꽃을 새롭게 우리가 불 피우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다시 일어서게 하시며다시 깨우게 하시고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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