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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온통 꾸중하고 책망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주 혹독한 야단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오늘 본문 중 16절 말씀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6)
침을 뱉듯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입에 넣었는데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경고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9)
아직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면, 그때 우리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마저 놓치고 맙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품으시며,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제 열심을 내라!”
미지근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미온적이라는 뜻입니다. 열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 내키지 않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믿기는 하는데 신앙의 즐거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삶의 자랑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그저 습관처럼 주일날 교회에 나가고 예배드리며, 아무 감동도 없이 예배당을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회개하고 가슴에 열심을 품으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지적하십니다. “네 속에 어느 순간부터 열정이 사라졌구나. 네 가슴이 뜨겁지 않구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봤느냐? 마음에 열정도 없고, 신앙의 활력도 다 잃어버렸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과 열정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열심과 열정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무관심’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관심에 이르기 전의 상태도 있습니다. 싫증을 내는 상태입니다.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들, 가정을 꾸린 부부도 어느 날부터 사랑이 식어갑니다.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싫증’입니다. 서로를 귀찮아하고 지루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하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사랑의 열정을 가지며 서로를 귀히 여겼는지 먼 추억 이야기로 끝내 버리고 맙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열정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호기심도 사라지고 배우는 기쁨도 사라집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은 선생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선생은 외면당하게 됩니다. 공무원이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복지부동 상태가 됩니다. 그저 자리 지키기만 급급한 상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가슴 속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분께 기도를 하는데도 다른 사람의 시선과 칭찬에만 연연합니다. 또한 봉사를 할 때도 사랑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합니다. 그러면서 큰소리칩니다.
만약 목회자가 목회의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목사가 말씀을 증언하는 열정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취미 생활에 매몰되고 맙니다. 교회 정치에 들어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에만 천착합니다. 또 장로와 권사가 믿음의 열정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기 전에는 그토록 겸손했는데, 어느 순간 목이 뻣뻣해지고 교만하며 오만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열정의 종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네 몸과 마음과 정성, 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는 열정과 열심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도시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15~16km 떨어진 골로새라는 도시에서 차갑고 시원한 물을 끌어들였습니다. 15km 떨어진 곳에서 끌어들인 이 물이 ‘루커스’라는 평야를 거쳐 오다보면, 시원한 물이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북쪽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는 뜨거운 광천수 온천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뜨거운 물도 산지와 수로를 통해 10km 정도 흘러오다보면, 뜨겁던 물이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은 당대의 정황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실 때, 이와 같은 정황을 사용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요한계시록 3:15)
신앙의 열정을 잃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미지근한 신앙 상태가 되었을까요? 몇 가지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것, 이는 축복입니다.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 더 풍성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열정 있는 삶을 산다면, 그야말로 축복의 인생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보다 아들이, 선배보다 후배가, 스승보다 제자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전승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야곱의 신앙도 전승됩니다. 더욱이 전승될 때마다 더 풍성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가끔 우리 어머니들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그래도 잘했는데요. 제 아들은 교회를 잘 안 나오려고 해요. 제 딸들이 어떻게 신앙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를 모태신앙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자궁에 생명을 잉태하면서 배를 쓰다듬으며 기도합니다. “이 생명을 주님께서 보호해 주세요. 이 생명 거룩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인물이 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지만, 어느 순간 영적 투쟁이 일어납니다. 갈등도 벌어집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그대로 받을 것인지, 나만의 신앙을 만들 것인지 씨름할 때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모태신앙인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을 종종 아무것도 못하는 ‘못해 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라.” 그러면 “기도 못해.” “전도하라” 그러면 “전도 못해.” “봉사 좀 하자” 그러면 “아, 주일에 예배만 가면 되잖아. 그거 못해.” “우리 선교 좀 가자.” 그러면 “아, 선교 너희들이나 가. 나 못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께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기초가 잘 다져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사라지기 쉬울까요? 설렘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거룩한 분 앞에 설 때 두렵고 떨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위험성이 생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성숙해지지 않으면, 또 설렘을 잃으면, 시작은 뜨거우나 어느 순간 미지근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렇게 미지근해지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관련돼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의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에만 연연하는 상태란 어제의 신앙에 멈추어 설 때를 말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닫혀져 있습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옛것이 더 좋다고 거기에만 붙잡혀 있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기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어제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제가 쌓여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오늘과 내일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매일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이가 들어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내 육체가 점점 후패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과 내 영혼은 날로 새롭다.” 누구와 함께 새로워지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 매일매일 새로워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세 번째로, 미지근하게 되는 건 우리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품, 결단력 없는 성품을 가지면 신앙인조차 미지근한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생각을 모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결단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이 있다면, 하나로 집중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단순화시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화시키는 종교입니다. 누구를 향해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단순화시킵니다. 무언가 해결이 잘 안 되면, 걱정이 자꾸 쌓이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생기면, 다시 누구를 봐야 할까요?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대했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세워 가셨는지를 기억하며,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성숙을 지향해야 합니다.
자기방어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며 방어막을 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체면에 목숨을 겁니다. 때로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영적으로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만족에 머무르면 영적인 목마름이 사라지게 됩니다. 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 내용입니다. 17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3:17)
“네가 부요하냐? 스스로 부족한 게 없다고 여기느냐? 네가 자기만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구나. 기다림이 사라졌구나. 간절한 소원도 없구나. 내가 볼 때 너는 가련하고, 앞도 못 보고, 벌거벗었구나. 나는 네 본모습을 아는데 너는 너 자신을 모르고 있구나.”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질책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신앙이 나태해졌다. 게을러졌구나.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신앙이구나. 그래서 신앙의 위기에 놓여 있구나. 그럼에도 아직도 위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구나. 네 모습을 보니 구토가 난다. 너를 토해내겠다. 이제 택하라. 활력을 주는 샘물이 되겠느냐? 뜨거운 온천물이 되겠느냐? 아니면 미지근한 물로 아무도 쓸 수 없는 물이 되겠느냐?”
이와 함께 예수님은 해결책을 주십니다. “다시 시작하자. 나하고 다시 시작하자. 네가 나를 주님으로 모셨느냐? 나는 네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래서 주님이 20절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네 문 밖에 서 있다. 내가 지금 네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근데 네가 열지 않고 있구나. 누구라도 좋다. 먼저 열어라. 그러면 내가 네게 들어갈 것이다. 나는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은 게 우리의 자랑이지만, 그것만 자랑하면 안 됩니다. 교회 직분을 맡은 것이 우리의 자랑이지만, 그것만 자랑하면 별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 믿는 것이 내 인생의 자랑인가? 오늘도 성령님이 주시는 감사와 감격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합시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작년에 500주년을 맞이했고, 올해 501주년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였습니다. 거기에는 시대 비판이 있습니다. 교회 비판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새로워져야 되고,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여겨야 하며, 우리가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변화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한편 루터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지닌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거룩한 자, 영적인 자가 세속자보다 더 세속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글입니다.
“온 세상이 사제들, 주교들, 추기경들과 성직계급으로 가득하구나. 이들 가운데 아무도 설교하지 않는다.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아무 의미도 없이 입술만 가지고 중얼거리며 미사를 집행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기계적으로 기도를 하지만, 성례 의무를 충분히 이행한다고 믿는다.”
신앙의 외양은 있지만 내용이 없어진 모습, 형식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 담을 것이 비어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찬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모습은 어떠냐? 너희의 신앙은 어떠냐? 너의 영적 상태는 도대체 어떠냐? 너희가 신앙을 시작할 때 가슴이 뜨겁지 않았더냐? 네가 말씀을 읽을 때 네 영혼이 기쁨으로 뛰놀지 않았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좋아서 찬양하지 않았냐? 네 출발은 분명히 기쁨과 감사였는데, 왜 지금은 불평하고 불만하며 싫증내고 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느냐?”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이 신앙은 믿어도 믿어도 더 믿을 수밖에 없고, 사랑해도 사랑해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신앙입니다. 또한 찬양하고 찬양해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차든지 뜨겁든지,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자유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21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자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너희의 신앙이 다시 뜨거워지든지 다시 차지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면, 마지막 날 너를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열심과 열정이 있었던 분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으로 이 일을 이루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기까지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땅에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성령님도 열심으로, 열정으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도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도 신앙의 열정이 있었던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우리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갖고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과 함께 걸어 나가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 14 ~ 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원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온통 꾸중하고 책망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주 혹독한 야단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훈계하십니다. 오늘 본문 중 16절 말씀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16)
침을 뱉듯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입에 넣었는데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경고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9)
아직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다면, 그때 우리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회개할 기회마저 놓치고 맙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품으시며, 자녀가 잘못하면 징계도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제 열심을 내라!”
미지근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미온적이라는 뜻입니다. 열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 내키지 않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믿기는 하는데 신앙의 즐거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삶의 자랑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그저 습관처럼 주일날 교회에 나가고 예배드리며, 아무 감동도 없이 예배당을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회개하고 가슴에 열심을 품으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지적하십니다. “네 속에 어느 순간부터 열정이 사라졌구나. 네 가슴이 뜨겁지 않구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봤느냐? 마음에 열정도 없고, 신앙의 활력도 다 잃어버렸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열심과 열정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열심과 열정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무관심’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관심에 이르기 전의 상태도 있습니다. 싫증을 내는 상태입니다.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던 연인들, 가정을 꾸린 부부도 어느 날부터 사랑이 식어갑니다. 그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싫증’입니다. 서로를 귀찮아하고 지루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짜증을 내기 시작하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사랑의 열정을 가지며 서로를 귀히 여겼는지 먼 추억 이야기로 끝내 버리고 맙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열정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호기심도 사라지고 배우는 기쁨도 사라집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은 선생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선생은 외면당하게 됩니다. 공무원이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복지부동 상태가 됩니다. 그저 자리 지키기만 급급한 상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가슴 속 두려움과 떨림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분께 기도를 하는데도 다른 사람의 시선과 칭찬에만 연연합니다. 또한 봉사를 할 때도 사랑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합니다. 그러면서 큰소리칩니다.
만약 목회자가 목회의 열정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목사가 말씀을 증언하는 열정을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취미 생활에 매몰되고 맙니다. 교회 정치에 들어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에만 천착합니다. 또 장로와 권사가 믿음의 열정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기 전에는 그토록 겸손했는데, 어느 순간 목이 뻣뻣해지고 교만하며 오만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열정의 종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네 몸과 마음과 정성, 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는 열정과 열심이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한 도시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15~16km 떨어진 골로새라는 도시에서 차갑고 시원한 물을 끌어들였습니다. 15km 떨어진 곳에서 끌어들인 이 물이 ‘루커스’라는 평야를 거쳐 오다보면, 시원한 물이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북쪽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는 뜨거운 광천수 온천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뜨거운 물도 산지와 수로를 통해 10km 정도 흘러오다보면, 뜨겁던 물이 미지근한 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같은 당대의 정황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실 때, 이와 같은 정황을 사용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요한계시록 3:15)
신앙의 열정을 잃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미지근한 신앙 상태가 되었을까요? 몇 가지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는 것, 이는 축복입니다.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 더 풍성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더 열정 있는 삶을 산다면, 그야말로 축복의 인생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보다 아들이, 선배보다 후배가, 스승보다 제자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전승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이삭의 신앙, 야곱의 신앙도 전승됩니다. 더욱이 전승될 때마다 더 풍성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가끔 우리 어머니들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그래도 잘했는데요. 제 아들은 교회를 잘 안 나오려고 해요. 제 딸들이 어떻게 신앙을 이어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를 모태신앙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자궁에 생명을 잉태하면서 배를 쓰다듬으며 기도합니다. “이 생명을 주님께서 보호해 주세요. 이 생명 거룩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인물이 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났지만, 어느 순간 영적 투쟁이 일어납니다. 갈등도 벌어집니다. 어머니의 신앙을 그대로 받을 것인지, 나만의 신앙을 만들 것인지 씨름할 때가 찾아옵니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모태신앙인이 가질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을 종종 아무것도 못하는 ‘못해 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하라.” 그러면 “기도 못해.” “전도하라” 그러면 “전도 못해.” “봉사 좀 하자” 그러면 “아, 주일에 예배만 가면 되잖아. 그거 못해.” “우리 선교 좀 가자.” 그러면 “아, 선교 너희들이나 가. 나 못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께는 장점이 있습니다. 신앙의 기초가 잘 다져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사라지기 쉬울까요? 설렘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거룩한 분 앞에 설 때 두렵고 떨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 탓을 하는 위험성이 생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성숙해지지 않으면, 또 설렘을 잃으면, 시작은 뜨거우나 어느 순간 미지근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렇게 미지근해지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관련돼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의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에만 연연하는 상태란 어제의 신앙에 멈추어 설 때를 말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닫혀져 있습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옛것이 더 좋다고 거기에만 붙잡혀 있으려고 합니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기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어제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제가 쌓여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오늘과 내일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매일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이가 들어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내 육체가 점점 후패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과 내 영혼은 날로 새롭다.” 누구와 함께 새로워지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 매일매일 새로워진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세 번째로, 미지근하게 되는 건 우리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품, 결단력 없는 성품을 가지면 신앙인조차 미지근한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생각을 모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결단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이 있다면, 하나로 집중하는 훈련도 해야 합니다. 단순화시켜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화시키는 종교입니다. 누구를 향해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단순화시킵니다. 무언가 해결이 잘 안 되면, 걱정이 자꾸 쌓이면, 어떻게 할지 고민이 생기면, 다시 누구를 봐야 할까요? 예수님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대했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세워 가셨는지를 기억하며,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성숙을 지향해야 합니다.
자기방어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며 방어막을 폅니다. 이런 사람들은 체면에 목숨을 겁니다. 때로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영적으로도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만족에 머무르면 영적인 목마름이 사라지게 됩니다. 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 내용입니다. 17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3:17)
“네가 부요하냐? 스스로 부족한 게 없다고 여기느냐? 네가 자기만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구나. 기다림이 사라졌구나. 간절한 소원도 없구나. 내가 볼 때 너는 가련하고, 앞도 못 보고, 벌거벗었구나. 나는 네 본모습을 아는데 너는 너 자신을 모르고 있구나.”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질책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 신앙이 나태해졌다. 게을러졌구나.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신앙이구나. 그래서 신앙의 위기에 놓여 있구나. 그럼에도 아직도 위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구나. 네 모습을 보니 구토가 난다. 너를 토해내겠다. 이제 택하라. 활력을 주는 샘물이 되겠느냐? 뜨거운 온천물이 되겠느냐? 아니면 미지근한 물로 아무도 쓸 수 없는 물이 되겠느냐?”
이와 함께 예수님은 해결책을 주십니다. “다시 시작하자. 나하고 다시 시작하자. 네가 나를 주님으로 모셨느냐? 나는 네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그래서 주님이 20절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네 문 밖에 서 있다. 내가 지금 네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근데 네가 열지 않고 있구나. 누구라도 좋다. 먼저 열어라. 그러면 내가 네게 들어갈 것이다. 나는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을 것이다. 나는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은 게 우리의 자랑이지만, 그것만 자랑하면 안 됩니다. 교회 직분을 맡은 것이 우리의 자랑이지만, 그것만 자랑하면 별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 믿는 것이 내 인생의 자랑인가? 오늘도 성령님이 주시는 감사와 감격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라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합시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작년에 500주년을 맞이했고, 올해 501주년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였습니다. 거기에는 시대 비판이 있습니다. 교회 비판도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새로워져야 되고,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여겨야 하며, 우리가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변화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한편 루터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지닌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거룩한 자, 영적인 자가 세속자보다 더 세속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글입니다.
“온 세상이 사제들, 주교들, 추기경들과 성직계급으로 가득하구나. 이들 가운데 아무도 설교하지 않는다. 미리 주어진 기도문을 아무 의미도 없이 입술만 가지고 중얼거리며 미사를 집행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기계적으로 기도를 하지만, 성례 의무를 충분히 이행한다고 믿는다.”
신앙의 외양은 있지만 내용이 없어진 모습, 형식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 담을 것이 비어 있고, 쓰레기로 가득 찬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모습은 어떠냐? 너희의 신앙은 어떠냐? 너의 영적 상태는 도대체 어떠냐? 너희가 신앙을 시작할 때 가슴이 뜨겁지 않았더냐? 네가 말씀을 읽을 때 네 영혼이 기쁨으로 뛰놀지 않았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좋아서 찬양하지 않았냐? 네 출발은 분명히 기쁨과 감사였는데, 왜 지금은 불평하고 불만하며 싫증내고 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느냐?”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이 신앙은 믿어도 믿어도 더 믿을 수밖에 없고, 사랑해도 사랑해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신앙입니다. 또한 찬양하고 찬양해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차든지 뜨겁든지,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의 자유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21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자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너희의 신앙이 다시 뜨거워지든지 다시 차지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면, 마지막 날 너를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 이렇게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열심과 열정이 있었던 분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으로 이 일을 이루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기까지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 땅에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성령님도 열심으로, 열정으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도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도 신앙의 열정이 있었던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우리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갖고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과 함께 걸어 나가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첨부파일 : [20181028] 2018년 10월 28일 주일말씀 구역(가정)예배 교안.hwp
2018년 10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7), “차든지 뜨겁든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8장, 3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계 3:14~2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7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아 교회의 잘못 – 미지근한 신앙(16, 19절)에 관하여 책망하십니다. ‘미지근하다’는 ‘미온적이다. 열의가 없다. 냉담하다. 결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즐거움이 없을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을 때, 미지근한 신앙을 보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미지근한 신앙을 벗어날 수 있을까?
설교의 요약
미지근한 신앙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네가 회개하고 네가 열심을 내라(19절)”고 말씀하십니다. 열심과 열정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무관심에 이르기 전의 상태인 ‘싫증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열정의 종교입니다. 믿음이란 내 생명, 시간, 정성을 다 쏟는 신앙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물이 잘 공급되지 않아 ‘골로새’라는 도시(15km)에서 차갑고 깨끗한 물을 그리고 북쪽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10km)에서는 뜨거운 온천물을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고원과 수로를 거쳐서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다보면 결국 미지근한 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런 당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15절). 그런데 왜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이처럼 미지근한 물 같은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1. 익숙함과 설레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신앙의 모습으로 거룩한 분 앞에서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내 잘못 보다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남의 탓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작은 뜨겁거나 차가웠지만 어느 순간에 미진근해지기 마련입니다. 2. 이렇게 미지근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과거 지향적으로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의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혀 멈추어 설 때, 변화를 싫어합니다. 옛 것이 더 좋다고 거기에만 붙잡히려고 합니다. 3. 우리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품, 결단력이 모자라는 성품을 가지면 이상하게도 신앙조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결단하는 훈련을 가져야 하며, 너무 많은 생각이 있으면 단순화 시켜야만 합니다(17절).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 다시 들어와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20절).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 내 마음에 기쁨이 있는가? 하나님 믿는 것이 내 인생의 자랑인가?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내 영혼의 감사, 감격이 나를 붙들고 있는가?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너희들의 모습은 어떠하냐? 너희들의 신앙은 어떠하냐? 너희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냐?”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열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뜨겁든지 차갑든지 우리의 신앙을 회복해야 우리 영혼의 자유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도 열심과 열정으로 일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 종교개혁자들인 마틴 루터와 장 칼뱅, 한국교회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도 신앙의 열정이 있었던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분들의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갖고, 주님과 함께 열어나가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오늘 나의 신앙은 뜨거운 신앙의 모습입니까? 차가운 신앙의 모습입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왜 미지근한 신앙의 모습을 유지하려 했을까요? 함께 나눠보세요.
3.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뜨겁든지 차갑든지 아니하고, 미지근한 상태 속에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말씀으로 돌아서게 하시고 예수님 믿는 것, 하나님 믿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