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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의 영, 섬김의 영? – 성령과 악령 13 –

마가복음 10: 42 ~ 45

김지철 목사

2017.09.10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습니다.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상대적으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사람을 갑, 열위에 있는 사람을 을이라 칭합니다. 이 권리 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갑이 자행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해 갑질이라고 합니다. 이는 힘 있는 자들이 소위 힘없는 자들에게 행하는 잘못된 행태를 꼬집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5년 잡코리아가 직장인 604명을 대상으로 ‘직장인의 갑질 행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갑질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중 88.6%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약 9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갑질을 행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33.3%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갑질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데, 갑질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갑질 행태는 개인 관계를 넘어 기업 관계와 사회 관계망 가운데서도 발생합니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상대로 갑질을 한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 곧 국제 관계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이라는 대국이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을 겁박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국제 권력의 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만 갑질을 당한 게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역시 약소국에게 갑질을 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페이크 뉴스로 남의 약점을 건드린 후 ‘아니면 말고 식’의 이슈를 퍼뜨리는 언론 매체들의 갑질 행태도 문제입니다.
갑질이란 권력이 있을 때 행해지는 삶의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갑질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돼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힘 있는 자가 선이고 권력을 가진 자가 선이라고 하는, 정치 현실적인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책에서 선과 악을 권력과 힘이라는 잣대로 판단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에로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드높여주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약함에서 생겨난 모든 것. 약한 자와 발육이 부진한 자는 멸망해야만 한다.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이 무엇인가? 모든 발육이 부진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동정이다.” 그래서 니체는 끊임없이 강한 자에 대한 동경을 글에 표출해 놓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초인을 기대하는 희망을 외친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런 말을 합니다. “항상 선하려고 애쓰는 자는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반드시 파멸하게 되어 있다.” 선만 끊임없이 추구하다보면, 이 세상의 거대한 악들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권력적인 사고에 젖어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갑질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권력의 속성의 꿰뚫어 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알면 알수록 ‘세상에 이런 분이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랍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신 예수님의 고귀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힘은 당신 자신을 위한 힘이 아니라 남을 위한 힘입니다. 이웃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시면서 진정한 권력의 길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권력, 다른 이를 치유하는 권력, 곧 생명의 권세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나의 제자들아, 너희의 길은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의 길과 같아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을까요? 사실 우리와 똑같습니다. 권력을 향한 야망과 욕망 때문입니다. 여러 기적과 능력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따르면 힘과 권세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요청도 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과 당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실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기대하는 길과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 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더해 주신 것입니다.
권력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 중 권력만큼 강력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매력만 가진 게 아니라 일종의 마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권력을 자주 이용합니다. 남을 지배하는 욕구와 수단으로 이 권력을 사용하게 합니다. 또한 권력은 자신을 높이는 수단이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도 소유물처럼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권력 추구의 모습을 경계하십니다. 권력의 속성, 권력자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속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중 4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가복음 10:42)

이방인의 집권자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권력을 가졌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는 특징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임의로 사람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힘을 가진 자의 뜻대로, 독선과 아집으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여기에 ‘권세를 부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는 남을 지배하려는 것, 소위 ‘갑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라. 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행해도 괜찮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 아부도 하고 눈치껏 비위도 맞춰라!” 이렇게 끊임없이 갑질 행태를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섬김’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십니다. 43~44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10:43~44)

이방인의 집권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권력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권력을 갖지 말라는 뜻인가?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인가? 리더십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약한 자 혹은 꼴찌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숨은 뜻이 있습니다. “네가 진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얼마나 낮은 자, 연약한 자의 아픔을 아는지 돌아보아라. 힘없는 자가 갖는 고통을 네가 알고 있느냐? 만약 그것을 모르면서 권력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 권력이 도리어 너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네가 높이 올라가려고 하느냐? 권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연약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라. 만약 그 아픔을 알지 못한다면 너의 권력이 너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확정하십니다. 삶의 양식을 다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고의 패턴을 바꿔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자의 행태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권력이란 남용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권력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쉽게 전락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서지 않으면, 권력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에 엄청난 해악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남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힘이 권력에 있습니다. 강제로 복종하게 하는 힘도 권력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토록 부정한 권력에 대해 경계하시며,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크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연약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권력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고…. 45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올바른 자아정체성이 있어야 진정한 섬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러한 섬김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는 파송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파송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자존감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힘없는 모습, 비천한 모습,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바로 그분에게서 파송 받으신 이가 자신이라는 파송의식이 예수님 안에 있었고, 그 자아정체성이 예수님의 섬김의 자세를 지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없이 남을 섬기려 한다면, 그것은 비굴한 복종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여기면서 남을 섬긴다면, 그 섬김은 강제 노역에 불과할 뿐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섬김을 행하고 싶다면, 먼저 내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내 삶의 동기와 내용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보냄 받은 자로서의 파송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섬김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동기는 권력을 향한 의지입니다. 때로는 돈이, 때로는 정치적 권위가 그들에게 권력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자아의식이 내 삶의 동기가 아닙니까?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자의식이 있어야 자녀를 잘 보살피고 가족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 역시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서 있어야 가정을 바르고 성숙하게 보살펴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의식, 자아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그런 점에서 섬김은 약자의 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덕입니다. 또한 섬김이란 나의 모든 권력을 내놓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진 권력, 힘, 능력의 방향을 전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면, 이제는 이웃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세우고 남을 높여주는 데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섬김의 길을 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아, 우리가 이분의 뒤를 따라야겠구나. 이분과 함께 길을 가고 싶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섬김에는 강요와 복종이 없습니다. 자유와 순종이 함께할 뿐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런 이들이 자기 생명을 걸었으며, 그 생명을 건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이란 내가 가진 권력과 권위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살리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떤 권력을 갖고 계십니까? 특정한 힘을 가진 사람만이 권력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권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나이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돈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지식의 권력, 외모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다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권력입니다. 생명의 권력입니다. 남을 돕고 치유하는 권력입니다. 지혜의 권력, 사랑의 권력입니다. 바로 이러한 섬김의 권력이 사람을 세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권력입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들의 모습은 섬김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가정에 헌신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존경 받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생명 공동체, 사랑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군림은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나 홀로 높임 받겠다는 모습이 군림입니다. 지금도 한반도의 절반은 악한 권력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권위가 아닙니다. 거짓된 권력일 뿐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조주의적인 권위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력은 최악의 권력입니다. 섬김은 없고 유아독존적인 군림만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특징 중에는 나르시시즘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만 알고 자아도취에 빠져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시험해 보려거든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 줘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물인지,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인물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권력이란 아주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굉장한 마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이 권력을 이용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력의 사유화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분이 되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죄인의 형틀에 매달리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지셨고, 우리를 살리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높여 주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나는 살고 너는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후 인간이 양심과 도덕을 통해 보다 진보된 형태의 ‘나도 살고 너도 살자’라는 구호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내가 죽겠다. 너는 살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섬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섬김의 길은 힘들고 고된 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사람을 살리는 길,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넉넉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권력을, 주님의 뜻 안에서 남을 섬기고 세우고 살리며 치유하는 데 사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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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 42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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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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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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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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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습니다.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상대적으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사람을 갑, 열위에 있는 사람을 을이라 칭합니다. 이 권리 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갑이 자행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해 갑질이라고 합니다. 이는 힘 있는 자들이 소위 힘없는 자들에게 행하는 잘못된 행태를 꼬집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5년 잡코리아가 직장인 604명을 대상으로 ‘직장인의 갑질 행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갑질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중 88.6%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약 9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갑질을 행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33.3%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갑질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데, 갑질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갑질 행태는 개인 관계를 넘어 기업 관계와 사회 관계망 가운데서도 발생합니다. 대기업이 하청업체를 상대로 갑질을 한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 곧 국제 관계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이라는 대국이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을 겁박하는 것 역시 전형적인 국제 권력의 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만 갑질을 당한 게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역시 약소국에게 갑질을 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페이크 뉴스로 남의 약점을 건드린 후 ‘아니면 말고 식’의 이슈를 퍼뜨리는 언론 매체들의 갑질 행태도 문제입니다.
갑질이란 권력이 있을 때 행해지는 삶의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갑질을 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돼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힘 있는 자가 선이고 권력을 가진 자가 선이라고 하는, 정치 현실적인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책에서 선과 악을 권력과 힘이라는 잣대로 판단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에로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드높여주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약함에서 생겨난 모든 것. 약한 자와 발육이 부진한 자는 멸망해야만 한다. 악덕보다 더 해로운 것이 무엇인가? 모든 발육이 부진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동정이다.” 그래서 니체는 끊임없이 강한 자에 대한 동경을 글에 표출해 놓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초인을 기대하는 희망을 외친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런 말을 합니다. “항상 선하려고 애쓰는 자는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반드시 파멸하게 되어 있다.” 선만 끊임없이 추구하다보면, 이 세상의 거대한 악들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권력적인 사고에 젖어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갑질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권력의 속성의 꿰뚫어 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알면 알수록 ‘세상에 이런 분이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랍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신 예수님의 고귀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힘은 당신 자신을 위한 힘이 아니라 남을 위한 힘입니다. 이웃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시면서 진정한 권력의 길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권력, 다른 이를 치유하는 권력, 곧 생명의 권세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셨습니다. “나의 제자들아, 너희의 길은 세상의 힘 있는 자들의 길과 같아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이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을까요? 사실 우리와 똑같습니다. 권력을 향한 야망과 욕망 때문입니다. 여러 기적과 능력을 발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을 따르면 힘과 권세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요청도 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10:37) 이에 예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과 당신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실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기대하는 길과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 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더해 주신 것입니다.
권력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 중 권력만큼 강력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은 매력만 가진 게 아니라 일종의 마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권력을 자주 이용합니다. 남을 지배하는 욕구와 수단으로 이 권력을 사용하게 합니다. 또한 권력은 자신을 높이는 수단이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돈도 벌 수 있고, 사람도 소유물처럼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향해 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권력 추구의 모습을 경계하십니다. 권력의 속성, 권력자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속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중 4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가복음 10:42)

이방인의 집권자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권력을 가졌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는 특징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임의로 사람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힘을 가진 자의 뜻대로, 독선과 아집으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여기에 ‘권세를 부린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는 남을 지배하려는 것, 소위 ‘갑질’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힘 있는 자들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라. 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행해도 괜찮다. 아랫사람들은 윗사람들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 아부도 하고 눈치껏 비위도 맞춰라!” 이렇게 끊임없이 갑질 행태를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섬김’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하십니다. 43~44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10:43~44)

이방인의 집권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권력 자체를 부인하는 듯한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권력을 갖지 말라는 뜻인가?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인가? 리더십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약한 자 혹은 꼴찌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숨은 뜻이 있습니다. “네가 진짜 지도자가 되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얼마나 낮은 자, 연약한 자의 아픔을 아는지 돌아보아라. 힘없는 자가 갖는 고통을 네가 알고 있느냐? 만약 그것을 모르면서 권력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 권력이 도리어 너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네가 높이 올라가려고 하느냐? 권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연약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라. 만약 그 아픔을 알지 못한다면 너의 권력이 너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며,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확정하십니다. 삶의 양식을 다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고의 패턴을 바꿔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자의 행태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권력이란 남용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권력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쉽게 전락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서지 않으면, 권력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공동체에 엄청난 해악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남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힘이 권력에 있습니다. 강제로 복종하게 하는 힘도 권력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토록 부정한 권력에 대해 경계하시며,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크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연약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권력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고…. 45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올바른 자아정체성이 있어야 진정한 섬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러한 섬김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는 파송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파송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 스스로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자존감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힘없는 모습, 비천한 모습, 가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며, 바로 그분에게서 파송 받으신 이가 자신이라는 파송의식이 예수님 안에 있었고, 그 자아정체성이 예수님의 섬김의 자세를 지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없이 남을 섬기려 한다면, 그것은 비굴한 복종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여기면서 남을 섬긴다면, 그 섬김은 강제 노역에 불과할 뿐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섬김을 행하고 싶다면, 먼저 내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내 삶의 동기와 내용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보냄 받은 자로서의 파송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섬김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동기는 권력을 향한 의지입니다. 때로는 돈이, 때로는 정치적 권위가 그들에게 권력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자아의식이 내 삶의 동기가 아닙니까?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자의식이 있어야 자녀를 잘 보살피고 가족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 역시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서 있어야 가정을 바르고 성숙하게 보살펴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의식, 자아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그런 점에서 섬김은 약자의 덕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도자의 덕입니다. 또한 섬김이란 나의 모든 권력을 내놓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진 권력, 힘, 능력의 방향을 전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자신만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면, 이제는 이웃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세우고 남을 높여주는 데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정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섬김의 길을 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분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아, 우리가 이분의 뒤를 따라야겠구나. 이분과 함께 길을 가고 싶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섬김에는 강요와 복종이 없습니다. 자유와 순종이 함께할 뿐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런 이들이 자기 생명을 걸었으며, 그 생명을 건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이란 내가 가진 권력과 권위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살리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떤 권력을 갖고 계십니까? 특정한 힘을 가진 사람만이 권력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권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나이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돈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지식의 권력, 외모의 권력을 지닌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다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권력입니다. 생명의 권력입니다. 남을 돕고 치유하는 권력입니다. 지혜의 권력, 사랑의 권력입니다. 바로 이러한 섬김의 권력이 사람을 세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권력입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들의 모습은 섬김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가정에 헌신합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존경 받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생명 공동체, 사랑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군림은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나 홀로 높임 받겠다는 모습이 군림입니다. 지금도 한반도의 절반은 악한 권력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권위가 아닙니다. 거짓된 권력일 뿐입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조주의적인 권위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권력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력은 최악의 권력입니다. 섬김은 없고 유아독존적인 군림만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특징 중에는 나르시시즘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만 알고 자아도취에 빠져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의 본래 인격을 시험해 보려거든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 줘 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물인지,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인물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권력이란 아주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굉장한 마성이 있습니다. 사탄이 이 권력을 이용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력의 사유화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분이 되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죄인의 형틀에 매달리셨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지셨고, 우리를 살리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높여 주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나는 살고 너는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후 인간이 양심과 도덕을 통해 보다 진보된 형태의 ‘나도 살고 너도 살자’라는 구호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내가 죽겠다. 너는 살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의 섬김을 통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섬김의 길은 힘들고 고된 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이 사람을 살리는 길,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넉넉함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권력을, 주님의 뜻 안에서 남을 섬기고 세우고 살리며 치유하는 데 사용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9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군림의 영, 섬김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5, 63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10:42-45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갑질’이란 말이 요즘 유행입니다. 설문에 의하면 직장생활에서 갑질을 당해 본 사람은 88%가 넘는데 갑질을 해 본 사람은 겨우 33%정도에 불과하다. 맞은 사람은 있는데, 때린 사람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대인과계 뿐 아니라, 기업 간 도급 관계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심지어는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의 밑에는 권력을 가진 자가 곧 선이라는 정치 현실적인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즉, 선이란 인간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에로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드높여 주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설교의 요약

늘 ‘갑질’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권력의 길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이유는 권력을 향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다른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길’과 ‘세상 권력의 길’은 대비됩니다.

권력의 길은 매력과 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남을 지배하기 위한 욕구로 이전됩니다. ‘임의로’,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립니다(42절). 위와 아래를 철저히 구분하고 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행해도 된다는 무례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반대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기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45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지도자가 되려 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첫째, 너희는 그들과 다르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사고의 패턴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존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는 것은 나에 대한 자존감이 없으면 비굴한 복종처럼 느끼게 됩니다. 강제로 하는 노역에 불과합니다. 셋째, 파송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왔다’라는 표현 속에서 예수님이 그의 삶의 동기와 내용을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자의식’적 선언이 드러나 있습니다.

섬김이란 이기적인 욕망의 방향을 뒤바꾸는 것입니다. 남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가진 권력을 다 내려놓는다는 뜻이 아니라, 내 권력을 사용하는 방향을 바꾸겠다는 선언입니다. 즉, 내가 가진 권력, 권위를 상대방을 존중하는데 사용합니다. 타자와의 공감의 자리를 확대하고 동일성을 만듭니다. 상대방이 존중받는 사람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권위는 자발적인 뒤따름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이의 권력, 돈의 권력, 외모의 권력, 지식의 권력.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진리의 권력입니다. 섬김이 권력입니다. 한반도에 절반은 아직도 악한 권력자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남을 숙청하고 죽이는 권력입니다. 섬김은 없고, 유아독존의 군림만 있습니다. 자아도취(Narcissism)j가 권력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란 매력을 넘어 마력이 있습니다. 마력을 넘어 강력한 무력적 힘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의 사유화를 거절하셨습니다. ‘나는 살고 너는 죽는다’가 아니라 ‘나는 죽고 너는 산다’를 보여주셨습니다. 남을 살리는 권력,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나누기

1. 나에게는 권력이 있습니까? 군림의 권력으로 얼룩졌던 경험을 나누고 회개합시다.

2. 섬김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었던 은혜의 경험을 나눕시다.

3. 군림의 권력으로 핍박받는 북한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길의 섬김을 가셔서 우리가 생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길을 따라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을 생명을 살리는 힘과 권력이 되도록 사용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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