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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이사야 53: 1 ~ 6

김지철 목사

2017.04.09

기독교는 고난 받은 메시아를 선포합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주인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의 좋은 점이나 잘난 점을 말하는 게 인간의 습성인데, 고난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것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음을 선포합니다. 마치 별 볼 일 없는 존재처럼 살다 가신 주님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서의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서도 주님의 이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곱지도,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멋지고 훌륭하고 대단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하나님의 계시로 명명합니다. 하나님의 신비 속에 예수님의 수난, 메시아의 수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볼품만 없었던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멸시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늘 본문 중 3절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3)

메시아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도 그분께 귀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도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4절에서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죄악의 결과로 그분이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마저 버림받은 못된 인간이라 여긴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이사야가 자신의 죄책감도 함께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잘 모르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볼 때 그저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형식만 살피고 내용을 보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분을 보고 바른 판단을 한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10)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관심도 없었고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본 자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그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학벌은 어떤지, 특별한 인물인지 파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곤 별 게 없다고 판단하자 관심 밖의 대상으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평가를 할 때가 있습니다. 외모만으로, 느낌만으로 사람을 잘못 판단하고 편견을 가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는 첫인상이 얼마나 고정관념으로 작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첫인상 효과’ 혹은 ‘초두 효과’라고도 불리는데, 첫인상이 관계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주며 고정관념처럼 상대방을 결정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은 똑똑하고 근면하며 충동적이고 비판적이며 고집이 세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B라는 사람은 질투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며 비판적이고 충동적이며 근면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줬더니, 대부분 A에게 압도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성격 설명이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순서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앞부분의 설명을 듣곤 ‘아,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네!’ 혹은 ‘아, 이 사람은 별로네.’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A라는 사람은 앞부분에 똑똑하고 근면하다는 설명이 나왔으니 괜찮은 사람이라 단정한 것이고, B라는 사람은 앞부분에 질투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고 했으니 끝까지 듣지도 않고 못된 사람이라고 결정지은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외적인 몇 가지 잣대로 그를 평가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마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난 사람, 선한 것이 나지 않을 갈릴리 나사렛 사람, 어디서 누군가에게 율법을 배웠는지도 통 모를 사람, 안식일 법을 함부로 어기는 사람,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 수많은 사람을 선동하며 다니는 사람으로…. 특히 당대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택이 갈립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길이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비로소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부터 자신이 고난 받을 것이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8:31)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표는 같았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 땅에 세울지 고민하고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예수님의 반응과 제자들의 반응이 나뉩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뒤따르다 보면, 영광과 존귀 속에 하나님나라가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 있는 막강한 권위와 기적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새롭게 고치고 다스리고자 예수님을 뒤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있은 후부터 갑자기 예수님이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수난을 받아야 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하니, 베드로는 극구 반대하며 항변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꾸짖듯 예수님을 꾸중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그를 심하게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처럼 고난 앞에서 스승과 제자가 크게 격돌한 것을 성경이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합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 게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꼭 우리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피하고 싶습니다. 고난이 없는 길로 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고난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초보 신앙에 머물든지, 아니면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기로에 설 것입니다.
한번 돌이켜 봅시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시며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도 고쳐 주셨고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폭풍우 이는 바다도 잔잔케 하셨고, 불쌍한 이들에게 풍족한 양식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영광의 주님, 능력의 주님으로 예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고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이 수난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헤아리기도 어려웠습니다.
만약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 건 고난을 받는 거야. 우리 함께 예수님을 믿고 고난 받으러 가자.”라고 한다면, 우리를 따라 나설까요? “이 사람아, 당신 혼자 고난 받지 왜 나까지 끌어 들이려고 해! 당신이나 예수 잘 믿으시오. 난 안 믿겠소!”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직분도 받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분들은, 그 고난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지. 그런 준비를 해야지.” 하고 답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고난이 징계의 고난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난임을 알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기꺼이 자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통당하심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것인데, 그분이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잘못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새롭게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진리를 봅니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고난임을 압니다. 그 고난 속애 내 고난이 들어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 나의 십자가도 들어 있습니다. 내 죄악과 허물도 들어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고통과 죽음을 그분이 모두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사야의 예언을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자들도 깨닫게 됩니다. 그 예언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위한 고난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죽임이란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짐승의 피를 대신 드리는 길이었습니다. 본래 내 죄악의 값으로 내 피를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로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속의 전통을 예수님이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 양이 되셔서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매년 수많은 양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속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흠 없는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찔렸다’는 표현은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는 가시 면류관에 의해 찔림 당합니다. 양 손은 못으로 찔립니다. 옆구리는 로마 병정의 창에 찔립니다. 요한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라고 기록했습니다. 또, 마태도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26)라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못과 창에 찔리고 채찍질을 당하시며 고난의 길에 들어서신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그분이 대신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분이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대속의 고난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중)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속에 우리의 죄악과 허물, 불의와 교만, 모든 탐욕과 거짓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그 고난에 동참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사랑의 십자가임을 내 마음에서부터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내 죄악과 불의, 허물, 교만, 탄식, 절망, 나를 얽어매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사하심으로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죄의 종도 사탄의 노예도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응집돼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 모든 죄와 불의가 사라졌음을 고백하면서, 나 자신과 내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믿음이란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나의 뿌리 깊은 교만, 게으름, 이기적인 탐욕과 정욕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모두를 새벽 기도에 초청합니다. 일주일간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해 보는 것도 권합니다. 혹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금식해 보시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조금이나마 동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서 나를 억눌렀던 것, 나를 절망시키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게 했던 것들을 주님 앞에 다 토해 내시길 바랍니다. 내 속에 응어리진 것들, 상처 받은 것들, 나를 얽어맸던 모든 것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다시 살 것이다.” 그렇게 부활의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더 이상 죄에 억눌리거나 절망 속에 빠지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 같은 자마저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새롭게 경험하며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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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 1 ~ 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기독교는 고난 받은 메시아를 선포합니다.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의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을 묵상하는 주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주인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의 좋은 점이나 잘난 점을 말하는 게 인간의 습성인데, 고난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것도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음을 선포합니다. 마치 별 볼 일 없는 존재처럼 살다 가신 주님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서의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서도 주님의 이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곱지도,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멋지고 훌륭하고 대단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수차례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하나님의 계시로 명명합니다. 하나님의 신비 속에 예수님의 수난, 메시아의 수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볼품만 없었던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멸시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오늘 본문 중 3절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3)

메시아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도 그분께 귀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도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4절에서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죄악의 결과로 그분이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마저 버림받은 못된 인간이라 여긴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이사야가 자신의 죄책감도 함께 고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잘 모르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볼 때 그저 외모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형식만 살피고 내용을 보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분을 보고 바른 판단을 한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10)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세상에 오셨는데,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관심도 없었고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본 자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 그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학벌은 어떤지, 특별한 인물인지 파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곤 별 게 없다고 판단하자 관심 밖의 대상으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평가를 할 때가 있습니다. 외모만으로, 느낌만으로 사람을 잘못 판단하고 편견을 가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는 첫인상이 얼마나 고정관념으로 작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첫인상 효과’ 혹은 ‘초두 효과’라고도 불리는데, 첫인상이 관계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주며 고정관념처럼 상대방을 결정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은 똑똑하고 근면하며 충동적이고 비판적이며 고집이 세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B라는 사람은 질투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며 비판적이고 충동적이며 근면하고 똑똑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줬더니, 대부분 A에게 압도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성격 설명이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순서를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앞부분의 설명을 듣곤 ‘아,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네!’ 혹은 ‘아, 이 사람은 별로네.’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즉, A라는 사람은 앞부분에 똑똑하고 근면하다는 설명이 나왔으니 괜찮은 사람이라 단정한 것이고, B라는 사람은 앞부분에 질투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고 했으니 끝까지 듣지도 않고 못된 사람이라고 결정지은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외적인 몇 가지 잣대로 그를 평가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마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난 사람, 선한 것이 나지 않을 갈릴리 나사렛 사람, 어디서 누군가에게 율법을 배웠는지도 통 모를 사람, 안식일 법을 함부로 어기는 사람,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 수많은 사람을 선동하며 다니는 사람으로…. 특히 당대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 앞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선택이 갈립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길이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비로소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부터 자신이 고난 받을 것이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마가복음 8:31)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표는 같았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 땅에 세울지 고민하고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예수님의 반응과 제자들의 반응이 나뉩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뒤따르다 보면, 영광과 존귀 속에 하나님나라가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 있는 막강한 권위와 기적의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새롭게 고치고 다스리고자 예수님을 뒤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있은 후부터 갑자기 예수님이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는 수난을 받아야 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하니, 베드로는 극구 반대하며 항변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스승이 제자를 꾸짖듯 예수님을 꾸중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그를 심하게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처럼 고난 앞에서 스승과 제자가 크게 격돌한 것을 성경이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고난입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난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합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자처하는 게 제자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감당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꼭 우리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피하고 싶습니다. 고난이 없는 길로 가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고난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초보 신앙에 머물든지, 아니면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기로에 설 것입니다.
한번 돌이켜 봅시다.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시며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도 고쳐 주셨고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폭풍우 이는 바다도 잔잔케 하셨고, 불쌍한 이들에게 풍족한 양식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영광의 주님, 능력의 주님으로 예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고난을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이 수난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죽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헤아리기도 어려웠습니다.
만약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는 건 고난을 받는 거야. 우리 함께 예수님을 믿고 고난 받으러 가자.”라고 한다면, 우리를 따라 나설까요? “이 사람아, 당신 혼자 고난 받지 왜 나까지 끌어 들이려고 해! 당신이나 예수 잘 믿으시오. 난 안 믿겠소!”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직분도 받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분들은, 그 고난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그래.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지. 그런 준비를 해야지.” 하고 답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고난이 징계의 고난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난임을 알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기꺼이 자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통당하심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것인데, 그분이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고 잘못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새롭게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진리를 봅니다.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고난임을 압니다. 그 고난 속애 내 고난이 들어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 나의 십자가도 들어 있습니다. 내 죄악과 허물도 들어 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고통과 죽음을 그분이 모두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사야의 예언을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자들도 깨닫게 됩니다. 그 예언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위한 고난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죽임이란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짐승의 피를 대신 드리는 길이었습니다. 본래 내 죄악의 값으로 내 피를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로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속의 전통을 예수님이 친히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 양이 되셔서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매년 수많은 양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속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단번에 흠 없는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찔렸다’는 표현은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는 가시 면류관에 의해 찔림 당합니다. 양 손은 못으로 찔립니다. 옆구리는 로마 병정의 창에 찔립니다. 요한이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는데,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라고 기록했습니다. 또, 마태도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26)라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못과 창에 찔리고 채찍질을 당하시며 고난의 길에 들어서신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그분이 대신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분이 대신 채찍에 맞으셔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 대속의 고난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중)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그 속에 우리의 죄악과 허물, 불의와 교만, 모든 탐욕과 거짓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며, 그 고난에 동참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주신 사랑의 십자가임을 내 마음에서부터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내 죄악과 불의, 허물, 교만, 탄식, 절망, 나를 얽어매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사하심으로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죄의 종도 사탄의 노예도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내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응집돼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 모든 죄와 불의가 사라졌음을 고백하면서, 나 자신과 내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믿음이란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나의 뿌리 깊은 교만, 게으름, 이기적인 탐욕과 정욕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모두를 새벽 기도에 초청합니다. 일주일간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해 보는 것도 권합니다. 혹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금식해 보시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에 조금이나마 동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속에서 나를 억눌렀던 것, 나를 절망시키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하게 했던 것들을 주님 앞에 다 토해 내시길 바랍니다. 내 속에 응어리진 것들, 상처 받은 것들, 나를 얽어맸던 모든 것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다시 살 것이다.” 그렇게 부활의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더 이상 죄에 억눌리거나 절망 속에 빠지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 같은 자마저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새롭게 경험하며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4월 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배움의 공동체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145, 15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사 53:1-6 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다는 것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기독교 신앙은 자기 신앙의 주인이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아주 기이하지 않습니까보통은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의 잘난 점만을 말하는데 말입니다.(2)

설교의 요약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오히려 볼품없고사람들에 의해 조롱받고 멸시를 받습니다.(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사람들은 생각하기를얼마나 악하면 저런 형벌을 받을까 생각하게 됩니다그래서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은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우리는 사람을 외모와 느낌으로만 평가하기 쉽습니다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첫인상효과).

당대의 종교기득권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람갈릴리의 변두리 나사렛 사람어디에서 누구에게 율법을 배웠는지도 모르는 검증 안 된 사람그래서 안식일 법을 함부로 어기고죄인과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고사람들을 선동이나 하는 그런 사람으로 여겼습니다그래서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결국 십자가의 길로 가야함을 알고 계셨습니다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 앞에서 드디어 십자가 고난의 길을 말씀하십니다(8:31).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막강한 권력을 갖고 세상을 다스릴 나라로 여겼고예수님의 수난예고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해 항변하기까지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 신앙에로 들어섰는가를 가늠하는 잣대입니다초자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을 싫어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은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고난을 각오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갈 때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그 고난 속에 내 고난우리의 고난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구약의 양과 소 대신에 마지막 시대에 순전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대속합니다(5). 예수님께서 겪으신 채찍질과 십자가는 바로 우리 대신 지시는 형벌이었습니다.(53:5, 벧전2:24)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그래야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하나님과 상관없던 사탄의 노예며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누기

1. 고난주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느꼈던 은혜가 있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2. 이번 고난주간 동안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의 결단을 나눠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이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는 은혜 앞에서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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