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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아담 – 로마서 강해 16 –

로마서 5: 16 ~ 19

김지철 목사

2015.09.27

오늘은 로마서 마지막부분입니다. 로마서 열 여섯번의 강해를 일단 여기서 멈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계속 할 것입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16장까지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8장, 9장에서 11장, 그다음에 12장에서 16장까지입니다. 1장에서 8장의 중요한 말씀이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그 중심 주제가 나오는 부분이 오늘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 아담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아담이라고 하는 두 인격체가 나오는 그런 말씀부분입니다. 이 중심주제는 인간론입니다. 옛 인간상을 대표하는 아담과 새로운 인간상을 대표하는 예수그리스도가 두 인격체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새 인간상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어떤분이셨는가 예수님이 무슨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변화 되는것인가 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은 종교이지 그것은 인문학의 영역이 아니다 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인문학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상, 인간의 가치, 인간의 삶의 표현세계를 다루는 영역이 인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만큼 인간의 본질, 인간의 가치,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저는 읽을때마다 늘 그런 자부심을 갖고 읽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해도 인간의 본질을 가장 꿰뚫고 있는 그 책이 바로 성경책이라는 것. 그래서 성경은 인문학중에 인문학의 근거가 되는 그런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여러분들 자랑하셔도 괜찮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에대한 이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가졌던 한결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이셨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하나님이셨다 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현대의 이 지성인을 대표하는 무실론적인 질문을 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철학자라고 하기 에는 선동적 혁명가인 마르크스, 강력한 초인을 세우려 했던 철학자 니체입니다. 프로이드는 종교는 자기소원을 지닌 환상이다. 그렇게 폄하했습니다. 신앙이란 내적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증에 의한 집단신경증증세를 보이는 것이라 그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하는 말을 하면서 착취당하는 인민에게 비판적 정신을 막는 것, 그리고 굶주린 대중을 입막음 하게 하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비판을 합니다. 이런 비판들은 당대에 있는 종교경험들을 통해 기독교 이 교회 현상들을 통해서 그들이 목격하고 경험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프리들???이신 니체는 초인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나약한 교훈을 가르쳐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종교 그렇게 그는 혹평합니다. 이들의 비판적인 질문은 현실종교, 당대 기독교라고 하는 이미 체제속에서 놓여져 있는 거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고 하는 인격체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그래서 두 가지에 집중을 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증거한 복음 예수님 그 자체가 기독교라고 하는 일종의 이 체제 지향적인 교회로 넘어가면서 교회 부패와 타락이 나타났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신적인 요소 이런 것들은 다 제거하고 인간적인 요소 예수님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끌어안으셨다라고 하는 이런 사랑과 협력과 배려에 대한 그런 쪽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늘 이 시간 나는 명절입니다. 갈 때도 많고 볼 것도 많고 그렇지만 우리가 왜 먼저 하나님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것일까요. 우리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누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진정한 인간적인요소를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범자이시고 우리의 스승이시고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들어가면 친구보다는 오히려 스승에 가깝다고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스승이라고 하기 에는 스승 이상의 모습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그런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인류역사에 말한 분이 도대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면서 살았던 사람도 없었다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행동은 아주 유니크한것입니다. 독특할 것 뿐만 아니라 유일무이하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던 출생 자체도 특이했습니다. 낮은자리, 천한자리, 구육간에서 동물의 똥,오줌 냄새가 나는 그런 자리속에서 인간취급을 하지 못한상태속에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비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란 당대의 정치적인 반란자에게 주는 로마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때론 혁명가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정복시키려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입니까. 당대의 주인 당대의 퀴리어스??라고 표현하는 로드라고 표현 할 수 있는 그 존재는 오직 로마황제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님은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선포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런 점 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아주 간결한 메시지였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들이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시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이제는 종결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이 도래 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황제고 해롯이 왕인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왕권을 갖고 다스리시는 새로운 나라가 도래했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갖고있었던 너의 삶의 가치관, 너의 습관, 너의 생각들, 네가 갖고 있는 네 허물들, 네 죄악들을 다 내려, 벗어 버리라는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렇게 선포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하신말씀입니다. 아니 예수님 그 자체가 복음이니까 그 복음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것입니다. 이 첫 메시지는 예수님보다 앞서 있었던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른점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미래로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금식이 필요했고 금식하면서 회개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다가오는 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임재해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잔치였습니다. 지금은 잔치 때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비유도 잔치비유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으니까 와서 먹고 마시고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누리라 그렇게 선언 하는 것 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의 정복을 예수님은 싫어하십니다. 미움과 분노와 강력한 권력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그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과 배려와 용납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영광이 이 땅에 있는 이 땅의 죄악과 허물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한 가지 이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천국가기 위해서.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 것 입니다. 예수는 믿으면서 제자훈련을 합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봉사합니까. 선교합니까. 전도합니까. 다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고 싶으셨던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너희들은 사탄의 종과 죄의 종이 되지 말라.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이 특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선포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랑스러운 것때문에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자랑스러운 것때문에 우리가 훈련도 받고 예수님의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인간상을 갖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치려하고 있습니다. 첫 인간이었던 아담적 인간과 둘째인간 궁극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 인간 이 예수그리스도와 이 양자 인격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죽음이 왔고 한 사람으로부터 심판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오고 한 사람으로부터 구원이 오고 은혜가 왔다라는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들어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아담적 인간의 모습도 들어있고 우리 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도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옛 모습 죄와 허물된 탐욕스러운 우리의 옛 모습은 아담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은혜를 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로마서 5장 12절에서 서문처럼 이렇게 앞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 한사람이란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이 죄의 역사가 시작이 됐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뒤집어 놓기 위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오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믿음의 역사, 은혜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예수그리스도를 비교하기 위해서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이 나오고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이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모습조차가 대비적입니다. 이 두 인격체의 유혹받는 장면에 현장은 어디일까요. 아담은 모든 것이 주어져있던 아름다운 동산 에덴동산이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풍성하고 누릴 것이 가득한 곳에서 유혹을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유혹을 받았던 그 자리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40일 동안에 금식을 하면서 이 유혹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이 두 유혹받는 자리가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유혹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아담의 마음을 뒤 흔든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너가 하나님처럼 될 거야. 라고 하는 피조물 인간에게 허영된 교만의 마음을 심어주면서 그를 뒤집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네가 모든 것을 통솔하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이 피조물 인간이 그렇게 원하고 열망하는 그런 창조주가 되기를 바라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이 아담이 인간의 허영 된 교만을 드러냈다고 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겸손을 보여준 것입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서 인간과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간음하는 식음속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이 사탄이 와서 그를 유혹 할 때에 네가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 하고 질문했을 때 그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그 속에 있는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하나님이 나를 너무 심한 명령을 해서 나를 가두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이렇게 추가를 했습니다. 먹지도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만지지까지 말라 그랬다고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그러나 그 속에는 아담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이 나를 막 통제하고 있어. 이 심한 명령이야 라고 하는 마음의 그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때 유혹의 시작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유혹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유혹을 받을때마다 신명기서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그대로 적용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셨던 마지막 말씀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은 4장 10절을 우리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됐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아 네가 지배하는 세계가 끝났다는겁니다. 사탄아 더 이상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배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이것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지말라. 하나님이 창조주인 것을 알아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수 있는 비밀을 얻게된다. 이 사실을 흔들리게 하지 말라 그렇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겟세만의 동산에서 그렇게 땀을 피 방울처럼 흘리는 처절한 기도를 한 이유도 하나님의 뜻에 마지막까지 순종하기 위한 예수님의 순종의 길 이셨습니다. 그 때에 이제 하나님께서 결과를 갖고 찾아오십니다. 아담은 나무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문을 합니다. 누가 도대체 이것을 먹으라고 했느냐 그랬더니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완약한 모습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창세기 3장 12절을 보면 그 내용이 기록이 돼 있는데,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읽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비겁성입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먹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이 여자가 지 혼자만 먹지 나에게 이 열매를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있게 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여자에게 그 모든책임을 전가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죄입니다. 두 번째 죄는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으라고 하신 여자, 하나님이 여자 안줬으면 내가 범죄하지 않았을텐데요. 하고 하나님께 그 모든책임을 전가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남성들 어떻습니까. 가정에 혹 문제가 있으십니까. 혹 자녀들의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호통치지 않으십니까. 당신 도대체 집에 있으면서 뭐하는거야. 여러분 왜 가장으로 남자들을 세우셨습니까. 지배하라는 뜻이 아니잖아요.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내 아내를 책임지고 내 자녀를 책임지고 내 가정을 책임지고 잘못한 것 있으면 나부터 돌아보는 것이 그것이 책임을 진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에요? 여러분 아내에게 책임을 빨리 전가하지 마세요. 그러면 아담의 비겁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우리는 조금 더 가다가 하나님에게까지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면 아담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잘못하고 나서 아내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이 모습이 아담적 인간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그 모습인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어 고통스럽게 죽게되었을 때 예수님의 입에서 토해낸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언어가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분이 인간이 아니시구나. 하나님이셨구나.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의 모습을 다 담당하신 하나님이셨구나. 여러분 누가복음 23장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없이 고통 당하시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나타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여러분 아담이 갖고 있었던, 핑계대고 있었던,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던, 그 모습과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이 모습이 얼마나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됩니까.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아담으로 인해서 거룩하고 신성한 노동이 형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 분이 일 하시면서 이웃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 승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17절에 이와 같이 말씀을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사람 통하여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여기보면 한 사람을 통해서 사망이 오고 한 사람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왔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담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벌어졌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과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 만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그 축복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믿는 것 얼마나 놀라운것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서 지향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인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나를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이 시대와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됐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어둠이 있고 우리 속에는 그늘이 있고 우리 속에는 이 미움과 분노가 우리를 끊임없이 뒤 엉켜들게 하고 있습니다. 한 가위 명절을 우리가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마 달이 가장 밝게 뜨는 보름달을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에 볼수 있을것입니다. 가장 달이 지금 지구와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것입니다. 정월대보름 우리가 보냈지만 그 때보다 크기가 14%더 커진답니다. 그리고 더 밝아진답니다. 그래서 해와 지구와 달이 일직선상에 있으면서 해의 빛을 온전히 달이 받아가지고 우리 지구에 지구촌에 보내는것입니다. 여러분 얼마전에 흥미있게 여러분들이 보신 드라마가 있을것입니다. 해를 품은 달 이라고 하는 이름도 아주 멋진 그런 드라마입니다. 여러분 해를 온전히 품으면 보름달이 됩니다. 근데 온전히 품지 못하면 이게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초생달로 그믐달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은혜의 빛입니다. 지혜의 빛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집어넣으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어둠의 그림자를 갖고있는 내 마음을 열으셔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달이 보름달이 되려고 하면 완전히 태양을 향해서 여는것처럼 발광채는 태양이에요. 달은 반사체일뿐이에요. 우리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 영원히 빛나게 될겁니다. 우리 영혼에 기쁨이 생길겁니다. 우리 영혼에 감사가 생길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믿는 이 자랑스러운 기쁨을 예수님이 왜 소중한 분인가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이 축복의 경험을 오늘도 경험하며 세상 향해 담대히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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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 16 ~ 19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오늘은 로마서 마지막부분입니다. 로마서 열 여섯번의 강해를 일단 여기서 멈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계속 할 것입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16장까지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8장, 9장에서 11장, 그다음에 12장에서 16장까지입니다. 1장에서 8장의 중요한 말씀이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그 중심 주제가 나오는 부분이 오늘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 아담과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아담이라고 하는 두 인격체가 나오는 그런 말씀부분입니다. 이 중심주제는 인간론입니다. 옛 인간상을 대표하는 아담과 새로운 인간상을 대표하는 예수그리스도가 두 인격체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새 인간상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이 어떤분이셨는가 예수님이 무슨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하셨는가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변화 되는것인가 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은 종교이지 그것은 인문학의 영역이 아니다 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인문학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인간의 사상, 인간의 가치, 인간의 삶의 표현세계를 다루는 영역이 인문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만큼 인간의 본질, 인간의 가치,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저는 읽을때마다 늘 그런 자부심을 갖고 읽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해도 인간의 본질을 가장 꿰뚫고 있는 그 책이 바로 성경책이라는 것. 그래서 성경은 인문학중에 인문학의 근거가 되는 그런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여러분들 자랑하셔도 괜찮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에대한 이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가졌던 한결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이셨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하나님이셨다 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현대의 이 지성인을 대표하는 무실론적인 질문을 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철학자라고 하기 에는 선동적 혁명가인 마르크스, 강력한 초인을 세우려 했던 철학자 니체입니다. 프로이드는 종교는 자기소원을 지닌 환상이다. 그렇게 폄하했습니다. 신앙이란 내적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증에 의한 집단신경증증세를 보이는 것이라 그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하는 말을 하면서 착취당하는 인민에게 비판적 정신을 막는 것, 그리고 굶주린 대중을 입막음 하게 하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비판을 합니다. 이런 비판들은 당대에 있는 종교경험들을 통해 기독교 이 교회 현상들을 통해서 그들이 목격하고 경험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프리들???이신 니체는 초인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나약한 교훈을 가르쳐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종교 그렇게 그는 혹평합니다. 이들의 비판적인 질문은 현실종교, 당대 기독교라고 하는 이미 체제속에서 놓여져 있는 거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라고 하는 인격체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비판은 그래서 두 가지에 집중을 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증거한 복음 예수님 그 자체가 기독교라고 하는 일종의 이 체제 지향적인 교회로 넘어가면서 교회 부패와 타락이 나타났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신적인 요소 이런 것들은 다 제거하고 인간적인 요소 예수님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끌어안으셨다라고 하는 이런 사랑과 협력과 배려에 대한 그런 쪽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늘 이 시간 나는 명절입니다. 갈 때도 많고 볼 것도 많고 그렇지만 우리가 왜 먼저 하나님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것일까요. 우리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누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인간적인 요소를 그대로 진정한 인간적인요소를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범자이시고 우리의 스승이시고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가까이 들어가면 친구보다는 오히려 스승에 가깝다고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스승이라고 하기 에는 스승 이상의 모습이 그분에게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그런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인류역사에 말한 분이 도대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동하면서 살았던 사람도 없었다는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행동은 아주 유니크한것입니다. 독특할 것 뿐만 아니라 유일무이하다 그렇게 우리가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던 출생 자체도 특이했습니다. 낮은자리, 천한자리, 구육간에서 동물의 똥,오줌 냄새가 나는 그런 자리속에서 인간취급을 하지 못한상태속에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비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란 당대의 정치적인 반란자에게 주는 로마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때론 혁명가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정복시키려 하시는 그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입니까. 당대의 주인 당대의 퀴리어스??라고 표현하는 로드라고 표현 할 수 있는 그 존재는 오직 로마황제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님은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님으로 선포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런 점 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아주 간결한 메시지였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너희들이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시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이제는 종결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간이 도래 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황제고 해롯이 왕인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왕권을 갖고 다스리시는 새로운 나라가 도래했다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갖고있었던 너의 삶의 가치관, 너의 습관, 너의 생각들, 네가 갖고 있는 네 허물들, 네 죄악들을 다 내려, 벗어 버리라는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렇게 선포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하신말씀입니다. 아니 예수님 그 자체가 복음이니까 그 복음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것입니다. 이 첫 메시지는 예수님보다 앞서 있었던 세례요한의 메시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른점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미래로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금식이 필요했고 금식하면서 회개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다가오는 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임재해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잔치였습니다. 지금은 잔치 때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비유도 잔치비유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으니까 와서 먹고 마시고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누리라 그렇게 선언 하는 것 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의 정복을 예수님은 싫어하십니다. 미움과 분노와 강력한 권력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그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과 배려와 용납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졌다는 선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영광이 이 땅에 있는 이 땅의 죄악과 허물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한 가지 이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천국가기 위해서.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 것 입니다. 예수는 믿으면서 제자훈련을 합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봉사합니까. 선교합니까. 전도합니까. 다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고 싶으셨던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너희들은 사탄의 종과 죄의 종이 되지 말라.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이 특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선포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 것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자랑스러운 것때문에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자랑스러운 것때문에 우리가 훈련도 받고 예수님의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인간상을 갖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치려하고 있습니다. 첫 인간이었던 아담적 인간과 둘째인간 궁극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마지막 이 인간 이 예수그리스도와 이 양자 인격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죽음이 왔고 한 사람으로부터 심판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오고 한 사람으로부터 구원이 오고 은혜가 왔다라는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들어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아담적 인간의 모습도 들어있고 우리 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도 들어있습니다. 우리의 옛 모습 죄와 허물된 탐욕스러운 우리의 옛 모습은 아담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은혜를 안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로마서 5장 12절에서 서문처럼 이렇게 앞부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 한사람이란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이 죄의 역사가 시작이 됐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뒤집어 놓기 위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오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믿음의 역사, 은혜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예수그리스도를 비교하기 위해서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이 나오고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이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모습조차가 대비적입니다. 이 두 인격체의 유혹받는 장면에 현장은 어디일까요. 아담은 모든 것이 주어져있던 아름다운 동산 에덴동산이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풍성하고 누릴 것이 가득한 곳에서 유혹을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유혹을 받았던 그 자리는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40일 동안에 금식을 하면서 이 유혹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이 두 유혹받는 자리가 아주 극단적으로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유혹의 내용은 뭐였습니까. 아담의 마음을 뒤 흔든 것은 한가지였습니다. 너가 하나님처럼 될 거야. 라고 하는 피조물 인간에게 허영된 교만의 마음을 심어주면서 그를 뒤집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네가 모든 것을 통솔하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이 피조물 인간이 그렇게 원하고 열망하는 그런 창조주가 되기를 바라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이 아담이 인간의 허영 된 교만을 드러냈다고 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겸손을 보여준 것입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서 인간과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간음하는 식음속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이 사탄이 와서 그를 유혹 할 때에 네가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 하고 질문했을 때 그는 이 질문을 받자마자 그 속에 있는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하나님이 나를 너무 심한 명령을 해서 나를 가두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는 이렇게 추가를 했습니다. 먹지도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만지지까지 말라 그랬다고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적이 없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을. 그러나 그 속에는 아담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이 나를 막 통제하고 있어. 이 심한 명령이야 라고 하는 마음의 그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때 유혹의 시작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유혹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유혹을 받을때마다 신명기서를 인용하면서 말씀을 그대로 적용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셨던 마지막 말씀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은 4장 10절을 우리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됐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아 네가 지배하는 세계가 끝났다는겁니다. 사탄아 더 이상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배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다. 이것을 뒤집어 놓으려고 하지말라. 하나님이 창조주인 것을 알아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수 있는 비밀을 얻게된다. 이 사실을 흔들리게 하지 말라 그렇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겟세만의 동산에서 그렇게 땀을 피 방울처럼 흘리는 처절한 기도를 한 이유도 하나님의 뜻에 마지막까지 순종하기 위한 예수님의 순종의 길 이셨습니다. 그 때에 이제 하나님께서 결과를 갖고 찾아오십니다. 아담은 나무뒤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문을 합니다. 누가 도대체 이것을 먹으라고 했느냐 그랬더니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완약한 모습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창세기 3장 12절을 보면 그 내용이 기록이 돼 있는데,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읽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의 비겁성입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먹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이 여자가 지 혼자만 먹지 나에게 이 열매를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있게 한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여자에게 그 모든책임을 전가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죄입니다. 두 번째 죄는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으라고 하신 여자, 하나님이 여자 안줬으면 내가 범죄하지 않았을텐데요. 하고 하나님께 그 모든책임을 전가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남성들 어떻습니까. 가정에 혹 문제가 있으십니까. 혹 자녀들의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호통치지 않으십니까. 당신 도대체 집에 있으면서 뭐하는거야. 여러분 왜 가장으로 남자들을 세우셨습니까. 지배하라는 뜻이 아니잖아요.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내 아내를 책임지고 내 자녀를 책임지고 내 가정을 책임지고 잘못한 것 있으면 나부터 돌아보는 것이 그것이 책임을 진 사람들의 이야기 아니에요? 여러분 아내에게 책임을 빨리 전가하지 마세요. 그러면 아담의 비겁한 모습이 바로 내 모습으로 다가 옵니다. 우리는 조금 더 가다가 하나님에게까지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면 아담이 그랬습니다. 자기가 잘못하고 나서 아내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했던 이 모습이 아담적 인간이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그 모습인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어 고통스럽게 죽게되었을 때 예수님의 입에서 토해낸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언어가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분이 인간이 아니시구나. 하나님이셨구나.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의 모습을 다 담당하신 하나님이셨구나. 여러분 누가복음 23장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없이 고통 당하시고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나타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여러분 아담이 갖고 있었던, 핑계대고 있었던,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던, 그 모습과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이 모습이 얼마나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됩니까.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아담으로 인해서 거룩하고 신성한 노동이 형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 분이 일 하시면서 이웃을 살리고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 승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17절에 이와 같이 말씀을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사람 통하여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여기보면 한 사람을 통해서 사망이 오고 한 사람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왔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담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벌어졌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과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 만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그 축복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믿는 것 얼마나 놀라운것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서 지향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인간을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나를 알고 예수그리스도통해서 이 시대와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됐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어둠이 있고 우리 속에는 그늘이 있고 우리 속에는 이 미움과 분노가 우리를 끊임없이 뒤 엉켜들게 하고 있습니다. 한 가위 명절을 우리가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마 달이 가장 밝게 뜨는 보름달을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에 볼수 있을것입니다. 가장 달이 지금 지구와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것입니다. 정월대보름 우리가 보냈지만 그 때보다 크기가 14%더 커진답니다. 그리고 더 밝아진답니다. 그래서 해와 지구와 달이 일직선상에 있으면서 해의 빛을 온전히 달이 받아가지고 우리 지구에 지구촌에 보내는것입니다. 여러분 얼마전에 흥미있게 여러분들이 보신 드라마가 있을것입니다. 해를 품은 달 이라고 하는 이름도 아주 멋진 그런 드라마입니다. 여러분 해를 온전히 품으면 보름달이 됩니다. 근데 온전히 품지 못하면 이게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초생달로 그믐달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은혜의 빛입니다. 지혜의 빛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집어넣으셔도 좋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어둠의 그림자를 갖고있는 내 마음을 열으셔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달이 보름달이 되려고 하면 완전히 태양을 향해서 여는것처럼 발광채는 태양이에요. 달은 반사체일뿐이에요. 우리 영원한 생명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 영원히 빛나게 될겁니다. 우리 영혼에 기쁨이 생길겁니다. 우리 영혼에 감사가 생길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믿는 이 자랑스러운 기쁨을 예수님이 왜 소중한 분인가 그 분을 통해서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이 축복의 경험을 오늘도 경험하며 세상 향해 담대히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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