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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영어로 KOREA라고 부릅니다. 종종 이 영어표기를 약자로 세자만 써서 KOR. 또는 COR.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자를 볼 때 마다 고린도교회가 생각나곤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나 고린도 후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1 Corinthians, 2 Corinthians라고 부르고, 독일어로는 I Korinterbrief, II Korinterbrief 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독일어로는 고린도교회라는 말을 KOR.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Korea와 똑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들을 읽을 때마다 한국 교회가 떠오릅니다. 이름만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실제 고린도교회에 있는 문제들이 한국 교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서신은 사도 바울이 썼던 편지 중에 가장 길게 쓴 편지로 그는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만 썼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편지까지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로 교회를 세우고 나서 늘 가슴을 졸였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바르게 설수 있는지 노심초사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바울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고린도교회는 엄청나게 분파를 형성했습니다. 바울이 처음 세웠기 때문에 바울파가 있었고, 베드로가 이곳에 잠시 들렸으므로 게바파가 있었습니다. 또한 후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와서 전도를 해서 아볼로파도 생겼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리스도파까지 생겼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 안에 분파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교회 주인은 자신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오해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교회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랑하며 분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한국 교회를 바라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수많은 분파와 분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 때문에 한국 교회가 성장했고, 한국 교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면 죄악이었고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내는 잘못이었음을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그들이 예수를 믿었으나, 믿기 이전의 세상에서 방탕하고 타락했던 삶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를 못한 것입니다. 한발로는 겨우 교회 문턱에 들어서긴 했으나 그들의 생각과 언어와 행위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타락과 문란이 아주 심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 안에까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위기에 봉착하고 성결함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갖고 고통 받았던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가 오늘날의 한국 교회 속에 다시 재연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세 번째 문제는 영적인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던 축복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된 은사가 자기 자랑으로 몰고 갔습니다. 서로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큰 것이라고 남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깨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자랑하고 교만해지는 잘못된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며 그 속에서 서로 자랑하는 교만의 길로 갔던 것이 고린도교회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로 바꿔서 표현한다면 학벌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했고, 지방색에 의해서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부와 가난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외치며 사랑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화합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습은 2천 년 전 고린도교회가 당면하고 고통 받았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경쟁이요, 치열한 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경쟁을 뚫은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고 풍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성공이 있고 위대한 업적이 나타난다고 칭찬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을 향한 치열한 경쟁은 인간을 발전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기준이 되면 그런 사회 집단은 인간성을 피폐하게 하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간을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성공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경쟁은 끊임없이 개인주의적 사고를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면 갈등과 다툼, 거짓과 술수가 난무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도 들어오면서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사도 바울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저주의 역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기쁨이 아니라 반대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이라고 왜 경쟁과 겨루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경쟁과 겨루기의 방향을 뒤바꾸라. 네가 똑똑하고 학식이 높은 명예로운 인물인가를 보여주려고 경쟁하지 말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경쟁을 하라.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경쟁을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남을 깎아 내리고 내가 올라가는 세속적인 경쟁이 아니라 남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세워주는 사랑의 경쟁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서로 남을 존중하며 귀히 여기고 협력하며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으면 노력합니다. 그때 사람의 수명도 연장한다고 합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인 브라운 박사가 심리과학(Psychology Science)에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을 돕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두 배나 높다고 합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 자기 야심을 위해서 남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열어놓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 섬기고 도와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는 통계를 5년간의 연구를 통해서 내놓았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유를 갖는 인생의 기쁨을 허락해 주므로 수명이 연장된다는 말을 합니다.
장수의 비결로 좋은 것을 많이 드십니까? 장수의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간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남을 돕고 사는 인생이 될 때 장수합니다. 장수하고 싶으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열려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연약할 때 찾아가서 위로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찾아가서 격려해보세요.
생명은 사랑과 더불어 커집니다. 생명의 역사는 사랑과 함께 만날 때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역사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뽐낼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죄악 가운데 죽어야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 사랑의 역사는 하나님의 품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5)
예수님은 이 땅에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질병 들린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과 치유와 평안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주신 예수님 때문에 죄 용서를 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한 지체는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반복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면서 믿음의 한사람, 한사람은 신앙의 공동체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그래서 누구든 무시하지 말고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함부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슴 아파하며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존중하며 함께 기뻐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교회 공동체란 경쟁 시스템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란 두려움이 아니라 친밀함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의’라는 속격은 소유와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아도 교회 정체성을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정체성은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규정하는 것입니다. 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이는 사람들이 이미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다릅니다. 때로 교회 안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교회 안에도 위선과 무지도 있고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인색함과 거짓과 불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완벽한 교회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한번 이상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나와서 환멸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에 대해서 그리고 성도들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신앙인의 성숙한 행동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며 죄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납니다.
교회는 다시 은혜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용서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의 말씀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1)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반항아, 술주정뱅이, 난봉꾼, 사기꾼, 거짓말쟁이, 싸움꾼, 바람둥이, 매춘부, 위선자, 중독자, 인생의 실패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고 신음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며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높이 세워 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셨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방향도 바꾸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처 난 어둠의 골짜기에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영광된 빛으로 마음을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악하고 허물 많은 시대의 낙오자이고 이기적인 욕심쟁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셨다면 다시 용서받은 마음으로 연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자를 다시 사랑으로 감싸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사람들을 함께 만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은혜에 감격하며 용서받은 기쁨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인 지체로서 서로 만나는 축복의 역사를 기쁨으로 고백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이런 팻말을 붙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완벽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꼭 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스로가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원하는 사람만 이곳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기 원하는 사람,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랑을 연습하기 원하는 사람, 그분에게 용서받은 기쁨으로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서로 세우고 존중하며 격려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몸 안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장기 하나가 손상되면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환자가 되기에 공동체 안의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소중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교회가 아픕니다.
교회가 아프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프면 하나님도 아픕니다.
거룩한 하나 됨의 공동체로 한걸음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공동체로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함께 나아갑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주님께서 불러주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다른 지체를 용서하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며 기쁨을 주셨듯이 사랑하는 지체들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영광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2: 20 ~ 27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대한민국을 영어로 KOREA라고 부릅니다. 종종 이 영어표기를 약자로 세자만 써서 KOR. 또는 COR.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자를 볼 때 마다 고린도교회가 생각나곤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나 고린도 후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1 Corinthians, 2 Corinthians라고 부르고, 독일어로는 I Korinterbrief, II Korinterbrief 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독일어로는 고린도교회라는 말을 KOR.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Korea와 똑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들을 읽을 때마다 한국 교회가 떠오릅니다. 이름만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실제 고린도교회에 있는 문제들이 한국 교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서신은 사도 바울이 썼던 편지 중에 가장 길게 쓴 편지로 그는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만 썼을 뿐 아니라 잃어버린 편지까지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로 교회를 세우고 나서 늘 가슴을 졸였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바르게 설수 있는지 노심초사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바울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고린도교회는 엄청나게 분파를 형성했습니다. 바울이 처음 세웠기 때문에 바울파가 있었고, 베드로가 이곳에 잠시 들렸으므로 게바파가 있었습니다. 또한 후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와서 전도를 해서 아볼로파도 생겼습니다. 거기에다가 그리스도파까지 생겼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교회 안에 분파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보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교회 주인은 자신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오해했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교회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랑하며 분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한국 교회를 바라봅니다. 한국 교회 안에 수많은 분파와 분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 때문에 한국 교회가 성장했고, 한국 교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면 죄악이었고 불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내는 잘못이었음을 우리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그들이 예수를 믿었으나, 믿기 이전의 세상에서 방탕하고 타락했던 삶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를 못한 것입니다. 한발로는 겨우 교회 문턱에 들어서긴 했으나 그들의 생각과 언어와 행위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성적인 타락과 문란이 아주 심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 안에까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이 위기에 봉착하고 성결함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갖고 고통 받았던 여러 가지 윤리적인 문제가 오늘날의 한국 교회 속에 다시 재연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세 번째 문제는 영적인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던 축복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된 은사가 자기 자랑으로 몰고 갔습니다. 서로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큰 것이라고 남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깨뜨려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자랑하고 교만해지는 잘못된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며 그 속에서 서로 자랑하는 교만의 길로 갔던 것이 고린도교회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로 바꿔서 표현한다면 학벌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했고, 지방색에 의해서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부와 가난에 의해서 사람을 차별대우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외치며 사랑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화합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습은 2천 년 전 고린도교회가 당면하고 고통 받았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교회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경쟁이요, 치열한 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경쟁을 뚫은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고 풍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성공이 있고 위대한 업적이 나타난다고 칭찬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을 향한 치열한 경쟁은 인간을 발전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기준이 되면 그런 사회 집단은 인간성을 피폐하게 하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인간을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성공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경쟁은 끊임없이 개인주의적 사고를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면 갈등과 다툼, 거짓과 술수가 난무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도 들어오면서 교회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사도 바울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 안에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저주의 역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기쁨이 아니라 반대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이라고 왜 경쟁과 겨루기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경쟁과 겨루기의 방향을 뒤바꾸라. 네가 똑똑하고 학식이 높은 명예로운 인물인가를 보여주려고 경쟁하지 말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경쟁을 하라.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경쟁을 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남을 깎아 내리고 내가 올라가는 세속적인 경쟁이 아니라 남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세워주는 사랑의 경쟁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서로 남을 존중하며 귀히 여기고 협력하며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으면 노력합니다. 그때 사람의 수명도 연장한다고 합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인 브라운 박사가 심리과학(Psychology Science)에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자기만 아끼고 남을 돕지 않는 사람은 남을 돕는 사람보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두 배나 높다고 합니다.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 자기 야심을 위해서 남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을 열어놓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 섬기고 도와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산다는 통계를 5년간의 연구를 통해서 내놓았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유를 갖는 인생의 기쁨을 허락해 주므로 수명이 연장된다는 말을 합니다.
장수의 비결로 좋은 것을 많이 드십니까? 장수의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인간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남을 돕고 사는 인생이 될 때 장수합니다. 장수하고 싶으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열려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연약할 때 찾아가서 위로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찾아가서 격려해보세요.
생명은 사랑과 더불어 커집니다. 생명의 역사는 사랑과 함께 만날 때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역사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뽐낼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죄악 가운데 죽어야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 사랑의 역사는 하나님의 품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5)
예수님은 이 땅에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질병 들린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과 치유와 평안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기에 우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주신 예수님 때문에 죄 용서를 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한 지체는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반복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면서 믿음의 한사람, 한사람은 신앙의 공동체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그래서 누구든 무시하지 말고 조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함부로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슴 아파하며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존중하며 함께 기뻐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교회 공동체란 경쟁 시스템이 아니라 협력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란 두려움이 아니라 친밀함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의’라는 속격은 소유와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이 많아도 교회 정체성을 규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정체성은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규정하는 것입니다. 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가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이는 사람들이 이미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다릅니다. 때로 교회 안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 들어와 보면 교회 안에도 위선과 무지도 있고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인색함과 거짓과 불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면 완벽한 교회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한번 이상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 나와서 환멸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에 대해서 그리고 성도들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신앙인의 성숙한 행동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며 죄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납니다.
교회는 다시 은혜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용서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시 사랑의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의 말씀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11)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반항아, 술주정뱅이, 난봉꾼, 사기꾼, 거짓말쟁이, 싸움꾼, 바람둥이, 매춘부, 위선자, 중독자, 인생의 실패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낙심하고 신음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며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딸로 높이 세워 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셨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방향도 바꾸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며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처 난 어둠의 골짜기에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영광된 빛으로 마음을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악하고 허물 많은 시대의 낙오자이고 이기적인 욕심쟁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셨다면 다시 용서받은 마음으로 연약하고 힘들고 어려운 자를 다시 사랑으로 감싸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서 사람들을 함께 만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은혜에 감격하며 용서받은 기쁨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인 지체로서 서로 만나는 축복의 역사를 기쁨으로 고백하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이런 팻말을 붙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완벽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꼭 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스로가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원하는 사람만 이곳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새롭게 되기 원하는 사람,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랑을 연습하기 원하는 사람, 그분에게 용서받은 기쁨으로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서로 세우고 존중하며 격려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몸 안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장기 하나가 손상되면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환자가 되기에 공동체 안의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소중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교회가 아픕니다.
교회가 아프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프면 하나님도 아픕니다.
거룩한 하나 됨의 공동체로 한걸음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공동체로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하면서 함께 나아갑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주님께서 불러주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듯이 다른 지체를 용서하게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며 기쁨을 주셨듯이 사랑하는 지체들을 존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영광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