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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 분별력 -하나님의 교회 6-

고린도전서 2: 12 ~ 16

김지철 목사

2012.10.21

분별력은 가치있는 삶을 위한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가오는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려고 하십니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국민을 섬길 준비를 하고 있는지, 어떤 국가관을 지니고 있는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국민들과 진심으로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우리는 묻게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이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대통령 후보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인기구호나 정책만을 외치는 모습으로 멈춰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더욱 필요한 것은 국민들입니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과 분별력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은 대통령 선거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분별력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소중한 시간에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 가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교회 중에 왜 소망교회입니까? 교회가 커서입니까? 예배가 경건하기 때문입니까? 말씀을 듣기 좋아서 입니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익명성 때문입니까? 개개인의 대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내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명칭이 교회라고 해서 다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말하면서 엉터리 주장을 펼치는 통일교, 영생교, 전도관, 신천지 등 수없이 많은 거짓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요즘은 교회 입구마다 ‘신천지는 교회출입을 금한다’라는 팻말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수가 많고 유혹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는 무엇보다 영적 분별력이 매우 필요한 시대입니다.
거짓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흔히 이단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비슷하나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특정 성경구절을 강조하며 그 구절을 자기들만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에 기록된 14만 4천명의 구원이 자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들만 구원받기 때문에 이 집단을 떠나면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둘째, 거짓예언을 쏟아냅니다. 재림의 시간과 장소를 예언하여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셋째, 교주를 구원자 메시아 또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신격화합니다. 외적으로도 화려하게 치장하여 사람들을 속입니다. 거짓 권위주의를 만들어 교주의 말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틀리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고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고 생명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단 집단은, 후에 분별력이 생긴 사람들이 탈퇴하려 할 때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감미로운 이야기로 유혹하던 처음 모습은 사라지고, 공갈과 협박으로 그들이 집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개신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회를 비방하며 그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자, 의사, 법률가, 금융 경제인 같은 지성인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단에 빠지는 것일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기독론을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신앙상태를 이야기해 드리리다.” 기독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론입니다.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독론, 예수님에 대한 확인이 곧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이 그저 위대한 성인인 공자, 석가모니와 같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와 도덕으로 멈춰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서 중보의 삶을 사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 그리고 죽은 후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자녀의 영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현장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이 시대가 특별히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거짓과 진실이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과 선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하에서 바울은 왜 분별력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4-15)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처럼 꾸민다는 것입니다. 의의 일꾼처럼 속이는 거짓 일꾼들과 거짓 영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과 악이 때로는 너무 유사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분별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신령한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이 말씀보다 커지면 위험합니다. 신비주의에 빠져들어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단지 세상의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으로 머물면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어, 굿을 하고 점을 치는 미신처럼 신앙이 변질될 위험이 많습니다.
천사든 환상이든 예언이든 또는 그 어떤 기적적인 경험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거짓된 환상이요, 미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내가 가진 축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종교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억압과 공포, 그리고 죄악에서부터 놓여나게 하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부터 신약의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한 때 기독교는 영적인 지도자들만이 자유를 가지고 성도들을 억압했던 어두움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의 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령은 자유의 영, 진리의 영, 평안의 영,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새 생명의 영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한편으로는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침, 능력 행함 등 많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들은 방언을 하면서 무아지경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그들은 무아지경 속에서 이미 부활을 경험했으며 더 이상 부활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무슨 소리냐? 부활이 없는 기독교 복음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것이다.” 영적 열광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늘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보다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분별을 위한 또 하나의 기준은 윤리성, 즉 도덕성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는 음란의 문제와 이기적인 탐욕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결코 하나님의 길이 아니며, 성령의 거룩한 영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겸손함의 영이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영입니다. 하나 되게 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고린도 교회가 올바른 분별력을 갖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생각하는 것에서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형통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생각하게 하고, 분별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영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영입니다.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10)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 감추어진 것까지도 성령은 통달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통달한다는 것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샅샅이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가 모든 것에 분별력을 자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네이버나 구글 검색 엔진을 이용해서 찾고 싶은 단어나 구절을 입력하면 그것과 관련된 정보들이 순식간에 모니터에 나타납니다. 성령은 마치 이런 검색도구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성령님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이 땅에 오시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단순한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사귀시고, 우리의 영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달려가듯이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체면 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조차 내가 예수 믿은 지가 몇 년이고, 내 나이가 몇인지, 이런 것들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앞에서 어린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까지 허락해 주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람이 가진 특권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성령을 받는 순간,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 (고린도전서 2:15)

여기서 신령한 자는 성령의 사람을 뜻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단할 자격이 있되,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오직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에 억압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자유함을 갖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치 성령의 노예처럼 억눌려서 나의 생각과 판단, 나의 뜻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21)

‘범사에 헤아려’라는 표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test everything”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분석하고, 판단해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 나온,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비판에 대해서 종종 억눌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눈에는 거대한 기둥과 같은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면서 소리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랑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닫고 판단하고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성령의 역사 속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주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 내가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 앞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물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도록, 예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도록, 예수님의 사랑이 내 사랑이 되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분별력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있는 우리에게 움츠러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 속에 그리스도 마음이 있음을 깨닫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성령의 분별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십시오. 그 당당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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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 12 ~ 16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분별력은 가치있는 삶을 위한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가오는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려고 하십니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국민을 섬길 준비를 하고 있는지, 어떤 국가관을 지니고 있는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지, 국민들과 진심으로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우리는 묻게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이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대통령 후보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인기구호나 정책만을 외치는 모습으로 멈춰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더욱 필요한 것은 국민들입니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과 분별력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은 대통령 선거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분별력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소중한 시간에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 가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교회 중에 왜 소망교회입니까? 교회가 커서입니까? 예배가 경건하기 때문입니까? 말씀을 듣기 좋아서 입니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익명성 때문입니까? 개개인의 대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내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명칭이 교회라고 해서 다 기독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라고 말하면서 엉터리 주장을 펼치는 통일교, 영생교, 전도관, 신천지 등 수없이 많은 거짓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요즘은 교회 입구마다 ‘신천지는 교회출입을 금한다’라는 팻말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수가 많고 유혹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는 무엇보다 영적 분별력이 매우 필요한 시대입니다.
거짓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흔히 이단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비슷하나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특정 성경구절을 강조하며 그 구절을 자기들만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에 기록된 14만 4천명의 구원이 자신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들만 구원받기 때문에 이 집단을 떠나면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둘째, 거짓예언을 쏟아냅니다. 재림의 시간과 장소를 예언하여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셋째, 교주를 구원자 메시아 또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신격화합니다. 외적으로도 화려하게 치장하여 사람들을 속입니다. 거짓 권위주의를 만들어 교주의 말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틀리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고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고 생명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단 집단은, 후에 분별력이 생긴 사람들이 탈퇴하려 할 때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감미로운 이야기로 유혹하던 처음 모습은 사라지고, 공갈과 협박으로 그들이 집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이들은 새로운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개신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교회를 비방하며 그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자, 의사, 법률가, 금융 경제인 같은 지성인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이단에 빠지는 것일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기독론을 말하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의 신앙상태를 이야기해 드리리다.” 기독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론입니다.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독론, 예수님에 대한 확인이 곧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이 그저 위대한 성인인 공자, 석가모니와 같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의 윤리와 도덕으로 멈춰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서 중보의 삶을 사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 그리고 죽은 후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없는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자녀의 영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현장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의 분별력입니다.
이 시대가 특별히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거짓과 진실이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과 선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 이하에서 바울은 왜 분별력이 필요한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4-15)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처럼 꾸민다는 것입니다. 의의 일꾼처럼 속이는 거짓 일꾼들과 거짓 영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과 악이 때로는 너무 유사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분별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신령한 은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것이 말씀보다 커지면 위험합니다. 신비주의에 빠져들어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단지 세상의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으로 머물면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어, 굿을 하고 점을 치는 미신처럼 신앙이 변질될 위험이 많습니다.
천사든 환상이든 예언이든 또는 그 어떤 기적적인 경험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거짓된 환상이요, 미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합니다. 내가 가진 축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종교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억압과 공포, 그리고 죄악에서부터 놓여나게 하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약부터 신약의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한 때 기독교는 영적인 지도자들만이 자유를 가지고 성도들을 억압했던 어두움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의 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령은 자유의 영, 진리의 영, 평안의 영,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새 생명의 영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한편으로는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방언, 통역, 예언, 병 고침, 능력 행함 등 많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들은 방언을 하면서 무아지경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그들은 무아지경 속에서 이미 부활을 경험했으며 더 이상 부활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 사도바울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무슨 소리냐? 부활이 없는 기독교 복음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것이다.” 영적 열광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늘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보다 은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분별을 위한 또 하나의 기준은 윤리성, 즉 도덕성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는 음란의 문제와 이기적인 탐욕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결코 하나님의 길이 아니며, 성령의 거룩한 영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겸손함의 영이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영입니다. 하나 되게 하는 일치의 영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고린도 교회가 올바른 분별력을 갖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생각하는 것에서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형통하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생각하게 하고, 분별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영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영입니다.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10)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 감추어진 것까지도 성령은 통달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통달한다는 것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샅샅이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가 모든 것에 분별력을 자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네이버나 구글 검색 엔진을 이용해서 찾고 싶은 단어나 구절을 입력하면 그것과 관련된 정보들이 순식간에 모니터에 나타납니다. 성령은 마치 이런 검색도구와도 같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성령님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이 땅에 오시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단순한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주장하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사귀시고, 우리의 영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달려가듯이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체면 차리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조차 내가 예수 믿은 지가 몇 년이고, 내 나이가 몇인지, 이런 것들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 앞에서 어린 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별력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까지 허락해 주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람이 가진 특권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성령을 받는 순간, 그리스도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 (고린도전서 2:15)

여기서 신령한 자는 성령의 사람을 뜻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단할 자격이 있되,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오직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에 억압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자유함을 갖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마치 성령의 노예처럼 억눌려서 나의 생각과 판단, 나의 뜻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21)

‘범사에 헤아려’라는 표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test everything”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을 분석하고, 판단해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 나온,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비판에 대해서 종종 억눌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눈에는 거대한 기둥과 같은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면서 소리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랑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닫고 판단하고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성령의 역사 속에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기 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주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 내가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 앞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물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도록, 예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도록, 예수님의 사랑이 내 사랑이 되도록 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분별력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있는 우리에게 움츠러들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 속에 그리스도 마음이 있음을 깨닫고,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성령의 분별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십시오. 그 당당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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