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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종교현장을 지나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뷔텐베르크 성당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95개조의 항목을 내걸게 됩니다. 거대한 권력기관이자 국가기관이 되어버린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95개조 항목을 통해 당시 로만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부패, 타락을 지적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성공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그 순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해졌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현장을 종교개혁자들은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큰 물음을 가지고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건 투쟁이었습니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개혁의 샛별’이라고 알려졌던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있었고, 체코에는 후스(Jan Hus)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루터, 프랑스에는 칼빈(Jean Calvin), 스위스에는 츠빙글리(Vlrich Zwingli)등 곳곳에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유럽사회에 큰 갈등과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피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복음의 진정성을 찾기 위한 이 투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대표적으로 세 가지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ura).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은혜로만(Sola Gracia).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의 선포입니다.
특별히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권위의 우선순위를 바꿔야한다는 혁명적 사고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말이 최고의 권위로 여겨지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것들보다 더 우선이라는 선포는, 거대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놀라운 도전이었으며, 목숨을 거는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권력 밑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했듯이 종교개혁의 자리에도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사고와 권위의 전환이라는 시대적인 변화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스른다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저항(Protest)’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저항자들의 출현은, 그래도 아직 기독교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와 정부의 핍박을 넘어서서 예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첫째, ‘오직 말씀으로만’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며 최고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 성경은 신부계급에게만 이해될 수 있었기에 당시 일반 성도들은 가르쳐 주는 대로 성경을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위클리프는 영어로, 마틴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칼빈은 라틴어로 쓴 ‘기독교강요’를 일반 성도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신부계급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성경을 성도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이 지향했던 성도들의 무력화, 무지화 정책에 전면으로 대항하는 행위였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우민화 정책에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축복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성경을 끊임없이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민중의 종교가 되도록 그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헌신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강조한 것은 오직 은혜(Sola Gracia)입니다. 가톨릭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선행하고 구제하는 것, 그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분명 좋은 일입니다. 단지 종교개혁자들은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가톨릭의 교리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시도를 원천차단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선행과 구제는 사제들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거대한 베드로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굉장한 건물입니다. 이 베드로 성당을 세우기 위해 당시 모든 성도들의 연보가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행해진 것이 바로 면죄부 판매입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금전이나 재물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죄를 면해준다는 뜻의 증서입니다. 교회의 건립 비용과 교회의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고자 성도들의 신앙심을 이용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수고와 업적을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행위들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분의 구속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음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전적으로 공짜입니다. 몇 번 선행하고, 몇 번 구제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짜면서 가장 값비싼 것이 바로 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심으로 얻어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예외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통로이며 믿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사제나 교황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대단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타파합니다. 믿음이 들어간 데에는 외모주의가 무너졌습니다. 학벌주의와 남녀의 성별주의가 무너졌습니다. 지역주의, 인종주의, 사회적 계급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이렇듯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노인이나 어린 아이,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 그 어떤 구분없이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은사를 경험한 고린도교회를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분명 복 받은 교회였습니다. 세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성공한 교회, 잘나가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성공’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를 뽐내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원위치와 본래 자리를 망각합니다. 처음 자리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남에게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합니다. 남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분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는데, 나는 게바에게 속했는데,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는데 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이카루스 파라독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아들 이카루스를 탈옥시키기 위해서 아들에게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아줍니다. 이 날개를 달고 이카루스가 하늘을 훨훨 날게 됩니다. 그런데 신이 난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게 됩니다. “얘야, 이 날개는 밀랍으로 붙였으니 태양 가까이로 가지 말아라.” 이카루스는 더 높이 날려는 욕심에 태양 가까이 다가갔다가 결국 밀랍이 녹아 날개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바다로 추락하여 죽게 됩니다..
자기 강점만 믿고 자만하다가는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잘났다고, 지혜롭다고, 남보다 낫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18)
지혜가 커지는 것 같으면, 처음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면 가장 낮았을 때, 가장 없었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지혜자가 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스티브 잡스에게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졸업식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기다림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연약하고 부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몰랐기에 불안해하면서 인생을 마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혜를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스티브 잡스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경영학들이 우리에게 겸손과 기다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인 세상을 향한 섬김을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런 귀한 개념들과 사고들을 성경 속에서 뽑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마태복음에 기록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지혜의 말씀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커졌다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아졌다고 안심하며 한국교회는 성공의 함정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마음에 교만과 허세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사람에게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례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린도전서 3:21~22)
누구라도 바울이나 게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결코 사람에게, 아니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메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만물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만물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이것은 곧 무엇에도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선물이니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가 바울에게, 게바에게, 아볼로에게 속해 있는 존재라 말하며 분파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도자에게 소속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러분이 내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속한 사람이다. 여러분이 게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게바나 아볼로나 나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신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입니다. 하이라키(Hierarchy) 구조, 즉 맨 밑에 성도가 있고 그 위에 신부계급이 있고, 가장 위에 그리스도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의 죄를 대신 풀기도 하고 묶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직접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는 중매자입니다. 말씀으로, 예배로, 기도와 찬양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성도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직접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 대화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본질을 꿰뚫어 바르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이 본질을 지키지 못하면, 마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종이나 노예처럼 날마다 겁을 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게바가 어디 있느냐? 바울이 어디 있느냐? 아볼로가 어디에 있느냐? 다 너희의 것이다. 너희는 누구의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오직 예수님 한분만 주님으로 모시고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자유하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기억납니다. “배가 물 한복판에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물이 배 안에 스며드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 세상 한복판에서 사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성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 헛된 지혜로움, 시기, 질투, 분노 등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의 자리, 복음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주님,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겠습니다. 오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게 주어진 자유를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겠습니다. 오직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3: 18 ~ 23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부패한 종교현장을 지나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뷔텐베르크 성당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95개조의 항목을 내걸게 됩니다. 거대한 권력기관이자 국가기관이 되어버린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95개조 항목을 통해 당시 로만 가톨릭 교회의 모순과 부패, 타락을 지적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성공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그 순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해졌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현장을 종교개혁자들은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큰 물음을 가지고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건 투쟁이었습니다.
루터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에는 ‘개혁의 샛별’이라고 알려졌던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있었고, 체코에는 후스(Jan Hus)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루터, 프랑스에는 칼빈(Jean Calvin), 스위스에는 츠빙글리(Vlrich Zwingli)등 곳곳에 종교개혁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유럽사회에 큰 갈등과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피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복음의 진정성을 찾기 위한 이 투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습니다. 개혁자들은 대표적으로 세 가지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ura). 다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은혜로만(Sola Gracia).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의 선포입니다.
특별히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권위의 우선순위를 바꿔야한다는 혁명적 사고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의 말이 최고의 권위로 여겨지던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것들보다 더 우선이라는 선포는, 거대한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놀라운 도전이었으며, 목숨을 거는 혁명과도 같았습니다.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권력 밑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했듯이 종교개혁의 자리에도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사고와 권위의 전환이라는 시대적인 변화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시대를 거스른다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저항(Protest)’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저항자들의 출현은, 그래도 아직 기독교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와 정부의 핍박을 넘어서서 예배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첫째, ‘오직 말씀으로만’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며 최고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 성경은 신부계급에게만 이해될 수 있었기에 당시 일반 성도들은 가르쳐 주는 대로 성경을 이해할 뿐이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위클리프는 영어로, 마틴 루터는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칼빈은 라틴어로 쓴 ‘기독교강요’를 일반 성도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신부계급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성경을 성도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이 지향했던 성도들의 무력화, 무지화 정책에 전면으로 대항하는 행위였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우민화 정책에 완강하게 저항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축복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성경을 끊임없이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민중의 종교가 되도록 그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헌신과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강조한 것은 오직 은혜(Sola Gracia)입니다. 가톨릭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선행하고 구제하는 것, 그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분명 좋은 일입니다. 단지 종교개혁자들은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가톨릭의 교리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들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시도를 원천차단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선행과 구제는 사제들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거대한 베드로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굉장한 건물입니다. 이 베드로 성당을 세우기 위해 당시 모든 성도들의 연보가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행해진 것이 바로 면죄부 판매입니다. 면죄부가 무엇입니까? 금전이나 재물을 봉헌한 사람들에게 죄를 면해준다는 뜻의 증서입니다. 교회의 건립 비용과 교회의 부족한 재정을 해결하고자 성도들의 신앙심을 이용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은혜는 인간의 수고와 업적을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행위들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분의 구속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주어졌음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전적으로 공짜입니다. 몇 번 선행하고, 몇 번 구제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짜면서 가장 값비싼 것이 바로 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심으로 얻어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예외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통로이며 믿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사제나 교황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대단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성을 타파합니다. 믿음이 들어간 데에는 외모주의가 무너졌습니다. 학벌주의와 남녀의 성별주의가 무너졌습니다. 지역주의, 인종주의, 사회적 계급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이렇듯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노인이나 어린 아이,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 그 어떤 구분없이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울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의 역사를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은사를 경험한 고린도교회를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분명 복 받은 교회였습니다. 세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성공한 교회, 잘나가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성공’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먼저 스스로를 뽐내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원위치와 본래 자리를 망각합니다. 처음 자리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남에게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합니다. 남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분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는데, 나는 게바에게 속했는데,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는데 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이카루스 파라독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아들 이카루스를 탈옥시키기 위해서 아들에게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아줍니다. 이 날개를 달고 이카루스가 하늘을 훨훨 날게 됩니다. 그런데 신이 난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게 됩니다. “얘야, 이 날개는 밀랍으로 붙였으니 태양 가까이로 가지 말아라.” 이카루스는 더 높이 날려는 욕심에 태양 가까이 다가갔다가 결국 밀랍이 녹아 날개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바다로 추락하여 죽게 됩니다..
자기 강점만 믿고 자만하다가는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스스로가 잘났다고, 지혜롭다고, 남보다 낫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18)
지혜가 커지는 것 같으면, 처음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면 가장 낮았을 때, 가장 없었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지혜자가 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던 스티브 잡스에게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졸업식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기다림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연약하고 부족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몰랐기에 불안해하면서 인생을 마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혜를 가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스티브 잡스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경영학들이 우리에게 겸손과 기다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인 세상을 향한 섬김을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런 귀한 개념들과 사고들을 성경 속에서 뽑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작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떠합니까? 마태복음에 기록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지혜의 말씀들을 놓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커졌다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많아졌다고 안심하며 한국교회는 성공의 함정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마음에 교만과 허세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사람에게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례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린도전서 3:21~22)
누구라도 바울이나 게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결코 사람에게, 아니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메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만물이 너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만물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이것은 곧 무엇에도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선물이니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가 바울에게, 게바에게, 아볼로에게 속해 있는 존재라 말하며 분파했습니다. 자신들이 지도자에게 소속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러분이 내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속한 사람이다. 여러분이 게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게바나 아볼로나 나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신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입니다. 하이라키(Hierarchy) 구조, 즉 맨 밑에 성도가 있고 그 위에 신부계급이 있고, 가장 위에 그리스도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의 죄를 대신 풀기도 하고 묶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와 성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직접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청하는 중매자입니다. 말씀으로, 예배로, 기도와 찬양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성도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직접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 대화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본질을 꿰뚫어 바르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축복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이 본질을 지키지 못하면, 마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종이나 노예처럼 날마다 겁을 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게바가 어디 있느냐? 바울이 어디 있느냐? 아볼로가 어디에 있느냐? 다 너희의 것이다. 너희는 누구의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오직 예수님 한분만 주님으로 모시고 모든 두려움에서부터 자유하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이 기억납니다. “배가 물 한복판에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물이 배 안에 스며드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 세상 한복판에서 사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세상성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오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 헛된 지혜로움, 시기, 질투, 분노 등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의 자리, 복음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주님,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겠습니다. 오직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게 주어진 자유를 이 땅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겠습니다. 오직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