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물음 9-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이란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모든 순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에 부치는 고통을 당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힘든 상황 속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 청교도 목사였던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강도가 들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점차 감사의 제목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내용들을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그가 적은 감사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전에 한 번도 강도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감사하다. 둘째, 비록 그들이 내 지갑을 가져가기는 했으나 목숨은 무사하니 감사하다. 셋째, 비록 그들이 내가 가진 것을 다 가져갔지만 그게 그다지 많은 돈이 아니었다는 것이 감사하다. 넷째, 내가 강도짓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강도를 당했다는 것이 감사하다.
도저히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린 분이 또 계십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올해가 손양원 목사님 탄생 110주년이고, 순교당한지 6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시다시피 손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을 잃는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아들의 장례식 끝부분에, 많은 회중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고백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눈물이 솟게 만듭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님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수십 년간 새벽마다 부르짖던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은혜의 언어입니다. 손목사님은 말로만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전체를 나병환자들의 고름 흐르는 몸을 껴안으면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그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 본문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병을 앓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사람의 삶은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단계를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 René)가 말한 방식대로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말을 통해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앓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의 첫 번째 삶의 단계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단계는,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불평과 원망이 존재 이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수없이 저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나병이 걸리기 전에도 핍박받고 괄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를 개나 돼지같은 불결한 짐승처럼 여겼습니다. 나와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병까지 걸리는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내 삶은 끝났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상을 향해서 불평하고 저주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2000년 전에 나병은 아주 나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천형, 극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철저히 사회와 단절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곁에 다가설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치며 자기의 부끄러움과 부정함을 선포해야했습니다. 그것도 침이 튀지 못하게 입술을 가린 채로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얼마나 자기의 처지를 통탄했을까요? ‘나는 버림 받은 존재다. 왜 내게 이런 천형이 주어진 걸까? 건강했다면 멋지게 살았을 텐데… 이제 나는 불평과 원망,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나병환자에게 두 번째 단계가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갑자기 그에게 한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기대와 소망이 생겼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가까운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는 그저 멀리서 예수님께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곁에 있었던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도 한 마음이었습니다. 질병과 고난 속에서는 지위고하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누가복음 17:13)
지금까지 소리 냈던 그 어떤 순간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을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 다른 사람을 가르치시듯 우리도 가르쳐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우리는 바닥인생입니다.’ 이런 마음을 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구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누가복음 17:14)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전폭적인 신뢰로 반응하였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나아가면서 자신들의 몸에 찐득찐득하게 붙어 있던 상처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분명 서로 놀라서 소리쳤을 것입니다. “네 얼굴이 정상적으로 바뀌고 있어! 네 손 좀 봐!”
구약의 열왕기하 5장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온 한 여종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사는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장군은 군대를 거느리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인을 시켜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일국의 장관인 그는 엘리사의 반응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 “내 고향에 이 요단강만한 강물이 없어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란 말인가?” 돌아가려고 하던 그 때, 옆에 있던 종이 장군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시어, 아니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부탁했어도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냥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왜 이걸 안하시려 합니까?” 나아만 장군은 아차 싶었습니다. ‘내게 믿음이 없구나. 신뢰함이 없구나.’ 그리고는 겸손히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었습니다. 결국 그는 깨끗하게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부분적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순종하기 보다는 자꾸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 내 문제를 그대로 아뢰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우리 속에 생명의 사건, 치유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는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황제에게서 감형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그 때의 감정을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무의미한 일들로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했는지, 어리석은 행동들, 잘못들, 게으르고 무기력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헤매고 있었는지, 내 삶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 내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또한 삶은 행복입니다. 매 순간은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젊어서 알았더라면..
그는 감사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축복과 선물로 주어진 삶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제 나병환자는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누가복음 17:15~16)
사마리아인이었던 그는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한 걸음에 예수님께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물론 나머지 유대인 아홉 명도 감사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은 몸이 치유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했지만, 그 큰 선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깝게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17)
치유 받은 사실만을 기뻐하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그 변화는 축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내용만 좋아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된 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나머지 아홉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몸이 고침 받은 것을 기뻐하고, 그 순간 이것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몸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며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축복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기쁨의 순간에 예수님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9)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첫 번째 단계인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머무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 번째 단계인,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에 감사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라는 고백이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 언제입니까? 남편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 언제입니까? 자녀들에게 “너희가 내 자식이어서 참으로 기쁘고 고맙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도대체 언제입니까? 여러분,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않으려면 내게 주신 삶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떠올리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노래 부르게 하시고, 우리 육체에 건강함 주시고, 기쁨이 가득한 생을 우리에게 펼쳐보이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 11 ~ 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이란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모든 순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힘에 부치는 고통을 당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힘든 상황 속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 청교도 목사였던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강도가 들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점차 감사의 제목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내용들을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그가 적은 감사의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전에 한 번도 강도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감사하다. 둘째, 비록 그들이 내 지갑을 가져가기는 했으나 목숨은 무사하니 감사하다. 셋째, 비록 그들이 내가 가진 것을 다 가져갔지만 그게 그다지 많은 돈이 아니었다는 것이 감사하다. 넷째, 내가 강도짓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강도를 당했다는 것이 감사하다.
도저히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린 분이 또 계십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올해가 손양원 목사님 탄생 110주년이고, 순교당한지 62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시다시피 손목사님은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을 잃는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아들의 장례식 끝부분에, 많은 회중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렸습니다. 그 고백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눈물이 솟게 만듭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님께서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내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수십 년간 새벽마다 부르짖던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은혜의 언어입니다. 손목사님은 말로만 감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전체를 나병환자들의 고름 흐르는 몸을 껴안으면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또한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그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늘 본문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병을 앓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사람의 삶은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단계를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 René)가 말한 방식대로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말을 통해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앓고 있었던 사마리아인의 첫 번째 삶의 단계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단계는,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불평과 원망이 존재 이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수없이 저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나병이 걸리기 전에도 핍박받고 괄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를 개나 돼지같은 불결한 짐승처럼 여겼습니다. 나와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병까지 걸리는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내 삶은 끝났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상을 향해서 불평하고 저주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2000년 전에 나병은 아주 나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천형, 극형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철저히 사회와 단절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곁에 다가설 수도 없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라고 외치며 자기의 부끄러움과 부정함을 선포해야했습니다. 그것도 침이 튀지 못하게 입술을 가린 채로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얼마나 자기의 처지를 통탄했을까요? ‘나는 버림 받은 존재다. 왜 내게 이런 천형이 주어진 걸까? 건강했다면 멋지게 살았을 텐데… 이제 나는 불평과 원망,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나병환자에게 두 번째 단계가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갑자기 그에게 한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기대와 소망이 생겼습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가까운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는 그저 멀리서 예수님께 부르짖을 뿐이었습니다. 곁에 있었던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도 한 마음이었습니다. 질병과 고난 속에서는 지위고하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누가복음 17:13)
지금까지 소리 냈던 그 어떤 순간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을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 다른 사람을 가르치시듯 우리도 가르쳐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우리는 바닥인생입니다.’ 이런 마음을 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구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누가복음 17:14)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전폭적인 신뢰로 반응하였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나아가면서 자신들의 몸에 찐득찐득하게 붙어 있던 상처들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분명 서로 놀라서 소리쳤을 것입니다. “네 얼굴이 정상적으로 바뀌고 있어! 네 손 좀 봐!”
구약의 열왕기하 5장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온 한 여종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사는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장군은 군대를 거느리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인을 시켜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할 뿐이었습니다. 일국의 장관인 그는 엘리사의 반응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 “내 고향에 이 요단강만한 강물이 없어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란 말인가?” 돌아가려고 하던 그 때, 옆에 있던 종이 장군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시어, 아니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부탁했어도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냥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왜 이걸 안하시려 합니까?” 나아만 장군은 아차 싶었습니다. ‘내게 믿음이 없구나. 신뢰함이 없구나.’ 그리고는 겸손히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었습니다. 결국 그는 깨끗하게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부분적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순종하기 보다는 자꾸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 내 문제를 그대로 아뢰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우리 속에 생명의 사건, 치유의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는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황제에게서 감형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그 때의 감정을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무의미한 일들로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했는지, 어리석은 행동들, 잘못들, 게으르고 무기력한 생활 속에서 얼마나 헤매고 있었는지, 내 삶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 내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낍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또한 삶은 행복입니다. 매 순간은 영원한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젊어서 알았더라면..
그는 감사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축복과 선물로 주어진 삶을 감사와 기쁨으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제 나병환자는 두 번째 단계에서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누가복음 17:15~16)
사마리아인이었던 그는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한 걸음에 예수님께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물론 나머지 유대인 아홉 명도 감사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은 몸이 치유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했지만, 그 큰 선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깝게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17:17)
치유 받은 사실만을 기뻐하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그 변화는 축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내용만 좋아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된 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나머지 아홉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몸이 고침 받은 것을 기뻐하고, 그 순간 이것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몸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며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축복은 좋아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부족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기쁨의 순간에 예수님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9)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육체적 질병이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첫 번째 단계인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머무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 번째 단계인,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에 감사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라는 고백이 날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아내에게 고맙다고 한 것이 언제입니까? 남편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 언제입니까? 자녀들에게 “너희가 내 자식이어서 참으로 기쁘고 고맙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도대체 언제입니까? 여러분,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않으려면 내게 주신 삶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떠올리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노래 부르게 하시고, 우리 육체에 건강함 주시고, 기쁨이 가득한 생을 우리에게 펼쳐보이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