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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의 사회 속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려면 내면의 힘이 솟아올라야 합니다. 내면적인 힘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 가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분노의 감정이 있을 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있을 때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내면의 힘을 느끼며 그것에 따라 움직입니다. 분노나 적대감도 강력한 에너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헤치는 결과를 가져다주고 때로는 인간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또 인간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서 건강을 해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헨리 나웬이 「긍휼」이라는 책에서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우리 안에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한다. 1960년대에 분노에 근거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회 활동가들은 곧 탈진하고 말았다. 신체적인 탈진과 정신적인 탈진이 함께 왔다.”
분노에 의해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업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분노가 하나의 강력한 에너지라면 또 하나의 강력한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분노 보다 더 큰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안에서 생명이 나타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속에 새 창조의 사건, 최후의 사건, 회복의 사건이 생겨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베풀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살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투쟁하는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삶 속에서 남을 이겨야 내가 살며 이기적인 분노를 가져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더 높이 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보물 창고를 만들 수 있겠는가, 치열한 생존 경쟁, 양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지는 인생이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것, 자발적인 헌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진정한 변화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핵심입니다.
지도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활력이 생깁니다.
최근 리더십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탁월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 대한 책이 여러 권 출판되었고, 드라마로 극화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가지고 있던 지도력의 탁월성이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보다 세종대왕이 백성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입니다. 21세기 컴퓨터 사용에 가장 적합한 글자, 소리글로 되어 누구나 쉽게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글자를 우리는 선물로 받았습니다. 서기 1436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반포의 뜻을 훈민정음 어지(御旨)라고 하여 임금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어 번역으로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세종대왕이 한글과 법령, 과학적인 도구들을 많이 만든 핵심적인 이유에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이처럼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봉사하는 확고한 원칙을 지녔던 지도자가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정의 가장이 긍휼한 마음을 품으면 가족 전체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가장이 잔인한 마음을 품으면 그 가정은 무너집니다. 한 공동체의 장이 긍휼한 마음을 품으면 공동체가 활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긍휼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줄까요? 긍휼은 헬라어로는 ‘몸의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긍휼이란 창자가 뒤틀리는 사랑의 아픔으로 강력한 내적 감정의 표현입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생명이 잉태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긍휼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자궁을 말하는 것으로 이 안에서 치유와 생명, 회복되는 용기가 주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선생한테 지도받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통분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들의 지도를 받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6)
지도자가 없어서 고통 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쫒아 내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씀을 들은 후 사람들이 주리고 날이 저물게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으니 이들이 길을 가다 기진하여 쓰러지게 되었다’ 라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앞 못 보는 소경을 불쌍히 여겨 그 눈을 친히 만지시고, 소외된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며 손을 뻗어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외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며 장사지내는 나인성 과부를 긍휼히 여길 때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뇌를 아십니다. 인간의 절망과 상실감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쉽게 상처받는지 아시고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없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였고 목사였던 토마스 왓슨 목사는 긍휼이 결여되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목회자를 악한 목회자라고 지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목회자는 자기 양들의 영혼에 동정심을 갖지 않는 목회자를 말한다. 그들은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위하여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양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양들의 재산을 찾는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때문에 설교한다. 그들은 영혼보다는 십일조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양에 대한 참다운 동정심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은 삯군이지 참 목회자가 아니다.”
이것은 긍휼히 없는 목회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면 누구나 삯군으로 전략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정에 긍휼이 사라지면 가정은 그냥 잠시 들리는 하숙집에 불과합니다. 직장에 참다운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사라지면 직장은 봉급이나 받는 장소가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백성은 국민이 아니라 방문객이나 외국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는 곳에는 치유의 역사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긍휼에 대해서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이 값싼 동정심을 발휘하거나 감성적으로 너무 쉽게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긍휼이 많은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가슴에 분노하는 정열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참된 긍휼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 받는 것입니다.
참된 긍휼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뱃속에서 열 달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는 또한 적당히 사는 사람, 긍휼을 행한다고 하면서 불법과 범죄를 쉽게 용납하는 모습을 긍휼을 가진 태도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긍휼은 진리와 함께 합니다. 더 높은 선, 더 높은 진리, 더 높은 사랑을 향해서 가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웃을 축복하며 중보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축복하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 짐승을 만들면서 축복하셨고, 인간을 만들면서 더욱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을 축복하세요. 내가 사는 집을 축복하세요. 내가 만지는 것을 축복하세요.내가 만나는 사람을 축복하세요.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축복하세요. 자동차운전을 하면서 앞차와 그 안에 탄 사람을 축복하세요. 내 뒤에 달려오는 차와 그 안에 탄 사람을 축복하세요. 전철과 버스를 탈 때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마음속으로 축복하세요. 축복하는 데서부터 긍휼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축복하면서 계속 마음이 가는 사람과 사건이 있을 때 중보기도를 하세요. 마음이 움직이면 기도를 시작하세요. 신문을 읽다가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위해서 기도하세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사건과 사고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세요. “하나님, 저 사람이 용기를 갖게 해주세요.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새롭게 시작하게 해주세요.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길게 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 마디, 한 문장으로만 기도하셔도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하면서 돈을 내세요. 돈이란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 이웃이 고통 받고 아파할 때 조그만 돈이라도 내놓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슬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분명 돈이나 재물이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을 표시하는 작은 방법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그마한 돈을 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긍휼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꼭 방문하십시오. 기름이 유출되어 오염된 태안반도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땀을 흘리고 봉사하며 수고하셨습니다. 서부요양센터와 그밖에 여러 곳에 가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슬픔을 당한 가정을 찾아가서 찬송 부르며 사랑을 베푸는 귀한 손길들도 있습니다. 해외까지 나가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껴안고 함께 안기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이제 우리는 손과 발과 몸으로 긍휼의 삶을 감당하면서 사랑으로 껴안고 함께 안기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의 손길을 받고 싶어 합니다. 시인 도종환이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라는 시집에서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라는 시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여자만 그렇게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도 누군가 나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고, 늙고 쇠잔해져 가는 사람들도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사랑받기를 갈구합니다.
우린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먼저 안아줘 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아주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베푸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고 부끄러운 우리가 용서받았고,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두려움을 당하셨고, 염려와 근심을 겪으셨습니다.우리 때문에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하셨고, 실패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맨 밑바닥 땅 끝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패배의 자리로, 부유함의 자리에서 가난함을 겪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영광에서 고난으로, 강력함에서 무력함으로, 생명에서 죽음의 자리로 우리를 안아주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잊혀진 곳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버려진 사람들을 향해서, 아직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은 사람들 향해서 찾아가 껴안고 사랑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고통의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우리를 통해서 긍휼을 이 땅에서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의 자궁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새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날 명절을 보내면서 가정되신 분들은 자녀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아이들의 손을 한 번 더 잡아 주시고 껴안아 주세요. 사랑하는 아내도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시고 며느리도 칭찬해주세요. 가장에게 긍휼한 마음이 있을 때 가족이 행복해집니다. 한 공동체의 장에게 긍휼한 마음이 있으면 공동체가 밝아집니다. 소망교회 교인이 세상에 나가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 이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축복이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긍휼의 축복으로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 받은 자, 사랑받는 자, 긍휼을 받은 자,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로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5: 7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경쟁의 사회 속에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려면 내면의 힘이 솟아올라야 합니다. 내면적인 힘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두 가지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분노의 감정이 있을 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있을 때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내면의 힘을 느끼며 그것에 따라 움직입니다. 분노나 적대감도 강력한 에너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헤치는 결과를 가져다주고 때로는 인간관계를 파괴시킵니다. 또 인간의 면역 체계를 약화시켜서 건강을 해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헨리 나웬이 「긍휼」이라는 책에서 분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우리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우리 안에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한다. 1960년대에 분노에 근거해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회 활동가들은 곧 탈진하고 말았다. 신체적인 탈진과 정신적인 탈진이 함께 왔다.”
분노에 의해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업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분노가 하나의 강력한 에너지라면 또 하나의 강력한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분노 보다 더 큰 에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그 안에서 생명이 나타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속에 새 창조의 사건, 최후의 사건, 회복의 사건이 생겨납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베풀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살벌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투쟁하는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삶 속에서 남을 이겨야 내가 살며 이기적인 분노를 가져야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더 높이 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보물 창고를 만들 수 있겠는가, 치열한 생존 경쟁, 양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지는 인생이 아닌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것, 자발적인 헌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진정한 변화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핵심입니다.
지도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활력이 생깁니다.
최근 리더십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탁월한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에 대한 책이 여러 권 출판되었고, 드라마로 극화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가지고 있던 지도력의 탁월성이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보다 세종대왕이 백성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입니다. 21세기 컴퓨터 사용에 가장 적합한 글자, 소리글로 되어 누구나 쉽게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글자를 우리는 선물로 받았습니다. 서기 1436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반포의 뜻을 훈민정음 어지(御旨)라고 하여 임금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어 번역으로 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세종대왕이 한글과 법령, 과학적인 도구들을 많이 만든 핵심적인 이유에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이처럼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봉사하는 확고한 원칙을 지녔던 지도자가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가정의 가장이 긍휼한 마음을 품으면 가족 전체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가장이 잔인한 마음을 품으면 그 가정은 무너집니다. 한 공동체의 장이 긍휼한 마음을 품으면 공동체가 활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긍휼의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긍휼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줄까요? 긍휼은 헬라어로는 ‘몸의 내장, 창자’를 뜻합니다. 긍휼이란 창자가 뒤틀리는 사랑의 아픔으로 강력한 내적 감정의 표현입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긍휼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생명이 잉태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긍휼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자궁을 말하는 것으로 이 안에서 치유와 생명, 회복되는 용기가 주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선생한테 지도받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통분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한편 이들의 지도를 받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6)
지도자가 없어서 고통 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복음을 증거 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쫒아 내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말씀을 들은 후 사람들이 주리고 날이 저물게 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으니 이들이 길을 가다 기진하여 쓰러지게 되었다’ 라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앞 못 보는 소경을 불쌍히 여겨 그 눈을 친히 만지시고, 소외된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며 손을 뻗어 잡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외아들을 붙들고 통곡하며 장사지내는 나인성 과부를 긍휼히 여길 때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뇌를 아십니다. 인간의 절망과 상실감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쉽게 상처받는지 아시고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과 치유의 역사가 없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였고 목사였던 토마스 왓슨 목사는 긍휼이 결여되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목회자를 악한 목회자라고 지칭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목회자는 자기 양들의 영혼에 동정심을 갖지 않는 목회자를 말한다. 그들은 양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위하여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양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양들의 재산을 찾는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때문에 설교한다. 그들은 영혼보다는 십일조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양에 대한 참다운 동정심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은 삯군이지 참 목회자가 아니다.”
이것은 긍휼히 없는 목회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면 누구나 삯군으로 전략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가정에 긍휼이 사라지면 가정은 그냥 잠시 들리는 하숙집에 불과합니다. 직장에 참다운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사라지면 직장은 봉급이나 받는 장소가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백성은 국민이 아니라 방문객이나 외국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는 곳에는 치유의 역사가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긍휼에 대해서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이 값싼 동정심을 발휘하거나 감성적으로 너무 쉽게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긍휼이 많은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가슴에 분노하는 정열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참된 긍휼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 받는 것입니다.
참된 긍휼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뱃속에서 열 달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는 또한 적당히 사는 사람, 긍휼을 행한다고 하면서 불법과 범죄를 쉽게 용납하는 모습을 긍휼을 가진 태도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긍휼은 진리와 함께 합니다. 더 높은 선, 더 높은 진리, 더 높은 사랑을 향해서 가는 것이 긍휼입니다.
이웃을 축복하며 중보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축복하는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 짐승을 만들면서 축복하셨고, 인간을 만들면서 더욱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을 축복하세요. 내가 사는 집을 축복하세요. 내가 만지는 것을 축복하세요.내가 만나는 사람을 축복하세요.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축복하세요. 자동차운전을 하면서 앞차와 그 안에 탄 사람을 축복하세요. 내 뒤에 달려오는 차와 그 안에 탄 사람을 축복하세요. 전철과 버스를 탈 때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마음속으로 축복하세요. 축복하는 데서부터 긍휼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축복하면서 계속 마음이 가는 사람과 사건이 있을 때 중보기도를 하세요. 마음이 움직이면 기도를 시작하세요. 신문을 읽다가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위해서 기도하세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사건과 사고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하세요. “하나님, 저 사람이 용기를 갖게 해주세요.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고 새롭게 시작하게 해주세요. 긍휼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땅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길게 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한 마디, 한 문장으로만 기도하셔도 됩니다.
세 번째, 기도하면서 돈을 내세요. 돈이란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 이웃이 고통 받고 아파할 때 조그만 돈이라도 내놓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슬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분명 돈이나 재물이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을 표시하는 작은 방법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그마한 돈을 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긍휼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꼭 방문하십시오. 기름이 유출되어 오염된 태안반도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땀을 흘리고 봉사하며 수고하셨습니다. 서부요양센터와 그밖에 여러 곳에 가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슬픔을 당한 가정을 찾아가서 찬송 부르며 사랑을 베푸는 귀한 손길들도 있습니다. 해외까지 나가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껴안고 함께 안기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이제 우리는 손과 발과 몸으로 긍휼의 삶을 감당하면서 사랑으로 껴안고 함께 안기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의 손길을 받고 싶어 합니다. 시인 도종환이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라는 시집에서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라는 시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주길 바랍니다.
편안하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여자만 그렇게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남자도 그렇습니다.
젊은 남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도 누군가 나를 안아주고
인정해 주길 바라고, 늙고 쇠잔해져 가는 사람들도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다 사랑받기를 갈구합니다.
우린 너무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먼저 안아줘 보세요.
나무든 사람이든 먼저 안아주면
그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아주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베푸세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고 부끄러운 우리가 용서받았고,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예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두려움을 당하셨고, 염려와 근심을 겪으셨습니다.우리 때문에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거부당하셨고, 실패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맨 밑바닥 땅 끝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승리의 자리에서 패배의 자리로, 부유함의 자리에서 가난함을 겪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영광에서 고난으로, 강력함에서 무력함으로, 생명에서 죽음의 자리로 우리를 안아주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잊혀진 곳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버려진 사람들을 향해서, 아직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은 사람들 향해서 찾아가 껴안고 사랑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고통의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우리를 통해서 긍휼을 이 땅에서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의 자궁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새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날 명절을 보내면서 가정되신 분들은 자녀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아이들의 손을 한 번 더 잡아 주시고 껴안아 주세요. 사랑하는 아내도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시고 며느리도 칭찬해주세요. 가장에게 긍휼한 마음이 있을 때 가족이 행복해집니다. 한 공동체의 장에게 긍휼한 마음이 있으면 공동체가 밝아집니다. 소망교회 교인이 세상에 나가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 이 사회가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축복이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긍휼의 축복으로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용서 받은 자, 사랑받는 자, 긍휼을 받은 자,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로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