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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기다림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그렇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어머니를 기다려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청년의 때에 애인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기다림 속에는 신뢰와 기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기다림을 통해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끊이지 않는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요? 아브라함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시간을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백성을 위해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마흔 살에 왕궁생활을 떠나서 황량한 광야생활로 들어갔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아무런 사건도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렸습니다. 팔십 세가 되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나서도 그는 가나안 땅까지 이르기까지 4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끝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기다림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이라는 거대제국의 총리가 될 때까지 요셉은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지난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다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군대에서 보낸 3년, 혹은 2년의 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듣고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제가 요셉처럼 13년을 기다리고 총리가 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깟 13년 못 기다리겠습니까? 그 정도의 기다림은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맞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3년 후에 내가 총리와 같은 자리에 오를 것이 명백하다면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요셉은 13년이라는 시간을 작정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13년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아침안개처럼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요셉은 저절로 기다림의 달인이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붙잡혀 들어온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줄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제 기다림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흘 뒤에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서 복권이 되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0장 14~15절 말씀에 요셉의 그런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창세기 40:14~15)
요셉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누구에게든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그 음침한 감옥에서 빨리 나오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답답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누군가 나를 모함하고, 내 처지가 완전히 망가져서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육체적으로 내가 누리던 자유를 빼앗기고, 질병에 걸리고, 척박한 감옥과 같은 억눌림 속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답답해합니다. 시편 105편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요셉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요셉)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편 105:18)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자리로 요셉을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요셉을 다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잊혀진 존재였던 요셉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반복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뢰가 어떻게 생깁니까? 한번 만나니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두 번째 만나보니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1년을 만나도 한결같습니다. 아니 10년을 만났는데도 그의 모습이 한결같습니다. 그 때 우리는 ‘아, 이 사람은 내가 믿을만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간수장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바로왕에게까지 신뢰를 받았습니다. 물론 요셉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와 처지가 비슷한 노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못된 죄수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이 만난 사람들은 요셉보다 훨씬 더 신분이 높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이 애를 써서 그런 사람들을 골라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권력지향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면 그는 금방 신뢰를 잃고 내동댕이쳐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계산적입니까?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은 이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 도움이 될까, 이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 나빠질까를 계산합니다. 그러면서 나보다 더 신분이 높은 사람만을 찾아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금방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신실하게 나를 만나는지, 거짓 모습으로 나를 만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신실한 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 인생이 잊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내게 가정총무를 맡기면서 나의 모든 것을 신임했던 보디발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꿈을 해석해준 술 맡은 관원장으로부터 잊혀졌구나! 나는 버려진 존재이구나!” 하지만 요셉은 그런 위기 속에서도 계속 기다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사람들이 요셉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부탁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서 나가 복권된 뒤 이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창세기 41:9)
술 맡은 관원장이 죄를 기억했다는 것은 요셉을 기억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바로가 꾼 꿈을 듣고 나서야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변함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꿀 때까지, 바로를 만나게 될 때까지 2년의 세월을 아무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드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27편 14절을 통해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만약 요셉이 기다리지 않고 ‘내 인생은 이게 무슨 팔자냐. 내 인생은 되는 게 아무것도 없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말하며 자기 인생을 일찍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흔드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을 위해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란 인물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은 바로왕의 옆에서 시중드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들이 급전직하합니다. 국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들을 불안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에 관한 꿈을 꾸고도 그 꿈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0장 6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창세기 40:6)
두 사람에게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심의 빛 가운데 요셉이 등장할 중요한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셉을 축복의 통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무엇일까요?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고통 받는 자에게 용기가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비단 술 맡은 관원장뿐만 아니라 거대제국인 애굽의 왕, 바로에게까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바로왕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바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일강가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등장했는데 갑자기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서 이 살진 암소들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또한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등장했는데 그 후에 갑자기 가늘고 마른 이삭이 등장해서 그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이 꿈이 바로에겐 길조가 아닌 흉조로 여겨졌습니다. 바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애굽의 1인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애굽이라는 거대제국도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권력자 중의 권력자인 바로에게 근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요? 내 인생이 잘나가기만 했다면,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터전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능력으로 내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술 맡은 관원장의 삶을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인 바로의 마음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가 자신의 삶, 실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셨습니다. 고뇌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의 이러한 모습이 본문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그(바로)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세기 41:8)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바로가 번민하여 고뇌했다는 것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할까? 내 실존이 무엇일까? 이 애굽이라고 하는 거대제국이 어떻게 될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고민은 우리의 삶에 축복입니다. 우리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내가 속한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능력을 요청하게 됩니다. 나의 곁에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바로에게는 요셉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이 제일 잘 하는 것,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이었습니다. 꿈을 꾸는 것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그것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세기 41:16)
“바로여,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창세기 41장 2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세기 41:25)
이것은 요셉의 확신입니다. 요셉의 믿음입니다. 요셉의 담대함입니다. 지금까지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최고 권력자인 바로왕 앞에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바로왕이여, 당신보다 더 큰 왕이 있습니다. 당신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당신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신의 왕궁은 하루아침에 무력하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주인이 있으며, 이 세계를 다스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바로왕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갖고 기다렸던 요셉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창세기 41:14)
요셉이 지하 감옥, 그 열악한 삶에 자리에서 나와 당대 최고의 제국,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굽제국의 총리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요셉을 보며 몇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사람의 복을 쌓으셔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많은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도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도우셔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맞아, 맞아 저 친구 참 고마운 친구지”하며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왜 나에게는 인복이 없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내가 내 이웃에게 어떤 인복으로 다가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신실해야 합니다. 요셉은 기다리는 사람이었기에 성실했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실한 것은 겉으로는 괜찮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늘 남의 눈치만 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남이 말하는 것에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하지만 정말 멋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던 보지 않던 내 존재 때문에, 내가 가진 가치관 때문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노예였지만 노예같이 살지 않았고,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죄수처럼 살지 않고,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가치관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갈 때, 사람들이 요셉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봄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세워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은 ‘나는 꿈을 가진 자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나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나답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모습처럼 살아야 됩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Be myself!”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권면한다면 “Be yourself!”입니다. 나답게 살고, 너답게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평생을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성취의 자리를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내게 주신 이 삶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며 뚜벅뚜벅 오늘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선포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41: 9 ~ 25
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17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
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
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
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
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신앙이란 기다림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그렇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어머니를 기다려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청년의 때에 애인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기다림 속에는 신뢰와 기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기다림을 통해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끊이지 않는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까요? 아브라함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 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이라는 시간을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왜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백성을 위해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마흔 살에 왕궁생활을 떠나서 황량한 광야생활로 들어갔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아무런 사건도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렸습니다. 팔십 세가 되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나서도 그는 가나안 땅까지 이르기까지 4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끝을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기다림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으로 팔려가서 애굽이라는 거대제국의 총리가 될 때까지 요셉은 13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지난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다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군대에서 보낸 3년, 혹은 2년의 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요셉에 대한 설교를 듣고 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제가 요셉처럼 13년을 기다리고 총리가 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깟 13년 못 기다리겠습니까? 그 정도의 기다림은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맞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3년 후에 내가 총리와 같은 자리에 오를 것이 명백하다면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요셉은 13년이라는 시간을 작정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13년이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아침안개처럼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요셉은 저절로 기다림의 달인이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붙잡혀 들어온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줄때만 하더라도 그는 이제 기다림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흘 뒤에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서 복권이 되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40장 14~15절 말씀에 요셉의 그런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창세기 40:14~15)
요셉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억울함을 누구에게든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그 음침한 감옥에서 빨리 나오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답답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누군가 나를 모함하고, 내 처지가 완전히 망가져서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육체적으로 내가 누리던 자유를 빼앗기고, 질병에 걸리고, 척박한 감옥과 같은 억눌림 속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답답해합니다. 시편 105편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요셉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요셉)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편 105:18)
여러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자리로 요셉을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요셉을 다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잊혀진 존재였던 요셉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반복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신뢰가 어떻게 생깁니까? 한번 만나니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두 번째 만나보니까 괜찮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1년을 만나도 한결같습니다. 아니 10년을 만났는데도 그의 모습이 한결같습니다. 그 때 우리는 ‘아, 이 사람은 내가 믿을만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간수장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바로왕에게까지 신뢰를 받았습니다. 물론 요셉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와 처지가 비슷한 노예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못된 죄수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이 만난 사람들은 요셉보다 훨씬 더 신분이 높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이 애를 써서 그런 사람들을 골라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권력지향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면 그는 금방 신뢰를 잃고 내동댕이쳐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계산적입니까? 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은 이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 도움이 될까, 이 사람을 만나면 무엇이 나빠질까를 계산합니다. 그러면서 나보다 더 신분이 높은 사람만을 찾아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금방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신실하게 나를 만나는지, 거짓 모습으로 나를 만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신실한 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 인생이 잊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내게 가정총무를 맡기면서 나의 모든 것을 신임했던 보디발로부터 내가 잊혀졌구나! 꿈을 해석해준 술 맡은 관원장으로부터 잊혀졌구나! 나는 버려진 존재이구나!” 하지만 요셉은 그런 위기 속에서도 계속 기다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사람들이 요셉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부탁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서 나가 복권된 뒤 이미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자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에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창세기 41:9)
술 맡은 관원장이 죄를 기억했다는 것은 요셉을 기억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바로가 꾼 꿈을 듣고 나서야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요셉은 변함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무려 2년 동안이나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가 꿈을 꿀 때까지, 바로를 만나게 될 때까지 2년의 세월을 아무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드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27편 14절을 통해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편 27:14)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만약 요셉이 기다리지 않고 ‘내 인생은 이게 무슨 팔자냐. 내 인생은 되는 게 아무것도 없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고 말하며 자기 인생을 일찍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의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흔드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요셉을 위해 하나님은 또 다른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란 인물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은 바로왕의 옆에서 시중드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들이 급전직하합니다. 국사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들을 불안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에 관한 꿈을 꾸고도 그 꿈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0장 6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창세기 40:6)
두 사람에게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심의 빛 가운데 요셉이 등장할 중요한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셉을 축복의 통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무엇일까요?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고통 받는 자에게 용기가 주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비단 술 맡은 관원장뿐만 아니라 거대제국인 애굽의 왕, 바로에게까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위해 바로왕의 삶의 자리까지 흔들어놓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바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꾼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일강가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등장했는데 갑자기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서 이 살진 암소들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또한 줄기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등장했는데 그 후에 갑자기 가늘고 마른 이삭이 등장해서 그것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이 꿈이 바로에겐 길조가 아닌 흉조로 여겨졌습니다. 바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애굽의 1인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꿈을 통해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애굽이라는 거대제국도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권력자 중의 권력자인 바로에게 근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요? 내 인생이 잘나가기만 했다면,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터전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능력으로 내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요셉이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술 맡은 관원장의 삶을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최고 권력자인 바로의 마음도 흔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가 자신의 삶, 실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셨습니다. 고뇌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의 이러한 모습이 본문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그(바로)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창세기 41:8)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바로가 번민하여 고뇌했다는 것입니다. ‘이 삶을 어떻게 할까? 내 실존이 무엇일까? 이 애굽이라고 하는 거대제국이 어떻게 될까’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고민은 우리의 삶에 축복입니다. 우리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내가 속한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능력을 요청하게 됩니다. 나의 곁에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바로에게는 요셉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이 제일 잘 하는 것,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꿈이었습니다. 꿈을 꾸는 것과 꿈을 해석하는 능력,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그것을 보여줄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세기 41:16)
“바로여,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창세기 41장 2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세기 41:25)
이것은 요셉의 확신입니다. 요셉의 믿음입니다. 요셉의 담대함입니다. 지금까지 감옥에 있었으면서도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최고 권력자인 바로왕 앞에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바로왕이여, 당신보다 더 큰 왕이 있습니다. 당신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당신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신의 왕궁은 하루아침에 무력하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주인이 있으며, 이 세계를 다스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이 계심을 바로왕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갖고 기다렸던 요셉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창세기 41:14)
요셉이 지하 감옥, 그 열악한 삶에 자리에서 나와 당대 최고의 제국,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굽제국의 총리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요셉을 보며 몇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사람의 복을 쌓으셔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특별히 많은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있을 때에도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도우셔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맞아, 맞아 저 친구 참 고마운 친구지”하며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왜 나에게는 인복이 없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내가 내 이웃에게 어떤 인복으로 다가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신실해야 합니다. 요셉은 기다리는 사람이었기에 성실했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실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실한 것은 겉으로는 괜찮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늘 남의 눈치만 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남이 말하는 것에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하지만 정말 멋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던 보지 않던 내 존재 때문에, 내가 가진 가치관 때문에 성실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노예였지만 노예같이 살지 않았고,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죄수처럼 살지 않고, 자유자로 살았습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가치관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갈 때, 사람들이 요셉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봄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세워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요셉은 ‘나는 꿈을 가진 자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나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나답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 모습처럼 살아야 됩니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면 “Be myself!”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권면한다면 “Be yourself!”입니다. 나답게 살고, 너답게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평생을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성취의 자리를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내게 주신 이 삶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며 뚜벅뚜벅 오늘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시옵소서.” 이렇게 선포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