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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사람들

예레미야애가 3: 19 ~ 26

김지철 목사

2015.11.29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성탄절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사실 많은 어린이들이 성탄절 자체나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산타클로스에게 받는 선물 때문에 성탄절을 좋아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소원을 미리 물어보고 산타클로스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데, 이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다림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다림의 대상이 예수님보다 산타클로스가 너무 커져서 걱정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대림절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대림. 기다릴 대(待)에 임할 임(臨)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dventus’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대림절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성탄이 되기 바로 직전 4주 동안 예수님의 성육신 탄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앞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는 교회력의 절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반 역사는 1월 1일부터 시작되지만, 교회력은 기다림의 절기인 오늘부터 한 해가 시작됩니다. 한 해를 기다림으로 시작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에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소망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소망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이루어질 가망성이 사라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소망을 품기는 품었는데, 눈앞의 현실은 그 소망과 너무나 다릅니다. 현실을 보는 순간 절망하게 되고, 기다림은 진정한 기다림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통일왕국의 영광과 축복은 끝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져서 분쟁의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했고, 이어서 남유다가 멸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거대제국에 포로로 붙잡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도 잃었고 땅도 잃어버렸습니다. 믿고 신뢰하던 다윗의 영광, 솔로몬의 영광이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라는 약속,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계속 가져야 할 것인가?’ 깊이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은 이방 나라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어져 사는 자’라는 의미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불렀습니다. 깊은 좌절감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국의 불행과 자기 백성들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애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망과 절망과 탄식의 소리였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예레미야애가 3:19∼20)

그는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쓰디쓴 쓸개즙과도 같은 고난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낙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더 이상 어떤 출구도 없다는 절망감이 시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싶은데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다림의 끈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놓게 되면 지금까지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을 통해서 이 암담한 현실을 뚫고 나가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19절에서 탄식하지만, 이어지는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26)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탄식하지 말고 찬양하라고 그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애가서에는 절망과 소망, 탄식과 찬양과 같은 대조적인 말들이 서로 엉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절한 탄식이었습니다.

희망마저 포기한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시 중에,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시인 이상화는 그 시에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가슴을 치며 그 답답한 심정을 토해 냈습니다. 시대적인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슬픔과 탄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들’은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가슴 속에도 ‘빼앗긴 들’이 있습니다. 슬픔, 탄식, 실망, 절망은 마치 삶의 일부처럼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사람같이 보여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웃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들어가 보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탄식하고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들이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나 자신이 나를 실망시키는 것을 보면서, ‘네가 그것밖에 안 돼!’ 하고 스스로를 향해 질책한 적이 한두 번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실망시켜서 화를 낸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내 친구나 직장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요사이 20대, 30대 젊은이들은 예전 어른들의 젊은 시절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절망이 가득합니다. 언젠가 ‘삼포세대’라는 것이 등장하더니, 그 다음에는 ‘오포세대’, ‘칠포세대’가 나오고 최근에는 ‘구포세대’까지 나왔습니다. 도대체 뭘 포기하겠다는 것입니까. 삼포세대는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오포세대는 대인관계 즉 인간관계와 내 집을 포기한다는 것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칠포세대에 이르러서는 희망과 꿈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라볼 목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20대, 30대 2,800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조사에 참여한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오포세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그리고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것이 조사 대상자의 1/2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포기한 것은 결혼과 내 집 마련, 출산 순이었습니다. 희망과 꿈까지 포기한 사람은 25%였습니다. 다행이 75%는 아직 꿈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희망만은, 꿈과 비전만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포기가 만연한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행동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또 다른 방향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절하고 비참한 삶의 자리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 싶다고 바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겠다는 영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내 자리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내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용해되면서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신앙의 기쁨과 신앙의 역동성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신앙이 되기 위해선 위의 것, 즉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을 열어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 진리가 있다. 하나님께 위로와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 긍휼과 위로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전해도 세상 사람들은 시큰둥합니다. 생명, 진리, 위로, 평안, 긍휼, 은혜.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그런데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낮은 자리에 들어가기까지는,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소망을 품기를 거절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기대감이 없습니다. 아예 내게 절망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려 합니다. 그러자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여길 때, 내가 얼마나 슬프고 외롭고 아픈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기다림을 가질 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로 내 옆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뼈아픈 경험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편 40편 2절에는 다윗의 시가 나오는데, 그가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는지 그의 표현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편 40:2)

다윗은 숨이 탁탁 막히는, 더 이상 아무런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밑바닥 인생까지 내려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버러지의 인생처럼 낮아져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꺼내 주셨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앞절인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편 40:1)

자신이 여호와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은 연약하고 자신의 삶은 땅바닥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실존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그대로 노출시켰을 때,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소망 없던 자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아무리 낮아지고 비참해지더라도, 그 순간에도 기다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림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기다리다 지쳐서 소망을 잃고 절망하여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맙니다.
기다림을 저주로 만드는 것은 조급함입니다. 기다림이 조급함과 만나면, 기다림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기다릴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니 기다리는 것 자체가 삶을 지치게 만든다며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림을 잃으면, 누군가 내가 꿈꾸기 위한 공간과 시간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안해지고 불행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기계적인 반복일 뿐입니다. 반복 속에서 기쁨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자연스레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집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기다림을 잃어버리면 삶을 냉소적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 봐. 되지 않을 거야. 다 헛일이야.” 만족감이 사라지고, 늘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무미건조해집니다. 어떤 것도 시도할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낙심과 절망을 이기며 기다림을 계속 품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레미야애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예레미야애가 3:21)

기다림을 가지면서 불행과 슬픔, 탄식과 외로움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아 두고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이것들을 숙성시켜 나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으면서 그 알이 깨져 생명체로 나오기를 기다리듯 그랬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슬픔을 깨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절망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탄식이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소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어지는 22절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애가 3:22)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기다림을 놓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내가 호흡을 하는 한,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걸을 수 있는 한, 내 소망을 결코 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자하심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예레미야애가 3:25)

하나님은 기다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에게 선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영점 인생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여겨질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면서 다시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란 단순히 수동태적인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기다림이란, 우리 삶의 활력소입니다. 기다림이란, 에너지를 부여하는 원천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기다림을 품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매일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며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쓴 뿌리를 생명의 뿌리로 바꿔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이 시대에 아무리 많은 갈등과 미움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늘에는 영광이요 이 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화’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큰 절망과 탄식 속에 계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경험하시면서,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다시 고백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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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 19 ~ 26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다림의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성탄절을 무척 기다렸습니다. 사실 많은 어린이들이 성탄절 자체나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산타클로스에게 받는 선물 때문에 성탄절을 좋아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소원을 미리 물어보고 산타클로스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데, 이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다림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다림의 대상이 예수님보다 산타클로스가 너무 커져서 걱정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는 대림절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대림. 기다릴 대(待)에 임할 임(臨)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dventus’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대림절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성탄이 되기 바로 직전 4주 동안 예수님의 성육신 탄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앞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는 교회력의 절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반 역사는 1월 1일부터 시작되지만, 교회력은 기다림의 절기인 오늘부터 한 해가 시작됩니다. 한 해를 기다림으로 시작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에 소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소망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소망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이루어질 가망성이 사라질 때, 문제가 생깁니다. 소망을 품기는 품었는데, 눈앞의 현실은 그 소망과 너무나 다릅니다. 현실을 보는 순간 절망하게 되고, 기다림은 진정한 기다림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통일왕국의 영광과 축복은 끝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져서 분쟁의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했고, 이어서 남유다가 멸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거대제국에 포로로 붙잡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도 잃었고 땅도 잃어버렸습니다. 믿고 신뢰하던 다윗의 영광, 솔로몬의 영광이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라는 약속,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계속 가져야 할 것인가?’ 깊이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은 이방 나라들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흩어져 사는 자’라는 의미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불렀습니다. 깊은 좌절감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국의 불행과 자기 백성들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애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망과 절망과 탄식의 소리였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예레미야애가 3:19∼20)

그는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쓰디쓴 쓸개즙과도 같은 고난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낙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더 이상 어떤 출구도 없다는 절망감이 시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싶은데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다림의 끈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놓게 되면 지금까지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을 통해서 이 암담한 현실을 뚫고 나가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는 19절에서 탄식하지만, 이어지는 2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애가 3:26)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탄식하지 말고 찬양하라고 그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애가서에는 절망과 소망, 탄식과 찬양과 같은 대조적인 말들이 서로 엉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절한 탄식이었습니다.

희망마저 포기한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시 중에,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노래한 시가 있습니다. 시인 이상화는 그 시에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가슴을 치며 그 답답한 심정을 토해 냈습니다. 시대적인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슬픔과 탄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빼앗긴 들’은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가슴 속에도 ‘빼앗긴 들’이 있습니다. 슬픔, 탄식, 실망, 절망은 마치 삶의 일부처럼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나가는 사람같이 보여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여도, 웃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만 들어가 보면 낙심하고 절망하고 탄식하고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들이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나 자신이 나를 실망시키는 것을 보면서, ‘네가 그것밖에 안 돼!’ 하고 스스로를 향해 질책한 적이 한두 번입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실망시켜서 화를 낸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내 친구나 직장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요사이 20대, 30대 젊은이들은 예전 어른들의 젊은 시절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절망이 가득합니다. 언젠가 ‘삼포세대’라는 것이 등장하더니, 그 다음에는 ‘오포세대’, ‘칠포세대’가 나오고 최근에는 ‘구포세대’까지 나왔습니다. 도대체 뭘 포기하겠다는 것입니까. 삼포세대는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오포세대는 대인관계 즉 인간관계와 내 집을 포기한다는 것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칠포세대에 이르러서는 희망과 꿈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라볼 목포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20대, 30대 2,800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조사에 참여한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오포세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그리고 내 집 마련을 포기하는 것이 조사 대상자의 1/2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포기한 것은 결혼과 내 집 마련, 출산 순이었습니다. 희망과 꿈까지 포기한 사람은 25%였습니다. 다행이 75%는 아직 꿈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희망만은, 꿈과 비전만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두 가지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포기가 만연한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행동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또 다른 방향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절하고 비참한 삶의 자리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 싶다고 바라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겠다는 영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내 자리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내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용해되면서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신앙의 기쁨과 신앙의 역동성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신앙이 되기 위해선 위의 것, 즉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을 열어 수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 진리가 있다. 하나님께 위로와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 긍휼과 위로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전해도 세상 사람들은 시큰둥합니다. 생명, 진리, 위로, 평안, 긍휼, 은혜. 얼마나 좋은 말들입니까? 그런데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낮은 자리에 들어가기까지는,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릴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소망을 품기를 거절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기대감이 없습니다. 아예 내게 절망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려 합니다. 그러자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다고 여길 때, 내가 얼마나 슬프고 외롭고 아픈지,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기다림을 가질 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로 내 옆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인생의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뼈아픈 경험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편 40편 2절에는 다윗의 시가 나오는데, 그가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는지 그의 표현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편 40:2)

다윗은 숨이 탁탁 막히는, 더 이상 아무런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밑바닥 인생까지 내려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망가질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버러지의 인생처럼 낮아져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꺼내 주셨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앞절인 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편 40:1)

자신이 여호와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은 연약하고 자신의 삶은 땅바닥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실존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그대로 노출시켰을 때, 그곳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고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소망 없던 자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복된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아무리 낮아지고 비참해지더라도, 그 순간에도 기다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기다림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을 통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기다리다 지쳐서 소망을 잃고 절망하여 인생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맙니다.
기다림을 저주로 만드는 것은 조급함입니다. 기다림이 조급함과 만나면, 기다림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기다릴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니 기다리는 것 자체가 삶을 지치게 만든다며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림을 잃으면, 누군가 내가 꿈꾸기 위한 공간과 시간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불안해지고 불행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기계적인 반복일 뿐입니다. 반복 속에서 기쁨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자연스레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집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기다림을 잃어버리면 삶을 냉소적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 봐. 되지 않을 거야. 다 헛일이야.” 만족감이 사라지고, 늘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무미건조해집니다. 어떤 것도 시도할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낙심과 절망을 이기며 기다림을 계속 품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레미야애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예레미야애가 3:21)

기다림을 가지면서 불행과 슬픔, 탄식과 외로움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담아 두고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이것들을 숙성시켜 나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미 닭이 알을 품으면서 그 알이 깨져 생명체로 나오기를 기다리듯 그랬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슬픔을 깨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절망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탄식이 있습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소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어지는 22절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애가 3:22)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기다림을 놓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내 심장이 뛰고 있는 한, 내가 호흡을 하는 한,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걸을 수 있는 한, 내 소망을 결코 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자하심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예레미야애가 3:25)

하나님은 기다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에게 선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영점 인생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여겨질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면서 다시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란 단순히 수동태적인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기다림이란, 우리 삶의 활력소입니다. 기다림이란, 에너지를 부여하는 원천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기다림을 품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는 매일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며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내 속에 있는 쓴 뿌리를 생명의 뿌리로 바꿔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이 시대에 아무리 많은 갈등과 미움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늘에는 영광이요 이 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평화’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더 큰 절망과 탄식 속에 계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만큼 고난을 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경험하시면서, 나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다시 고백하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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